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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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이야기가 매력적인 건, 인생의 불확실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선택’의 순간들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선택의 순간들은 우리의 인생에서 수만 개, 아니 셀 수도 없는 무한의 갈림길을 마주치는 것과 같다. 어떠한 선택은 때론 행복과 엄청난 쾌감을, 어떠한 선택은 우리를 무너지게 만드는 좌절과 슬픔을 주기도 하는데, 이런 선택의 순간을 내 손으로 다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소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엄연히 말해서 이제껏 보아왔던 시간여행의 스토리와는 조금 다르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나쁜 부분을 ‘수정’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판타지를 담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찰리는 온갖 수치스러운 기억들과 트라우마를 안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최근엔 기대를 품고 간 동창회에서 첫사랑 남자에게 이용까지 당해 엄청난 망신을 당한 참이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말로는 뱉지 않아도 잠깐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차라리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결국, 더 이상 찌질이로 살고 싶지 않다며 과거를 바꿔주겠다는 사람을 찾아간 찰리는 자신의 지우고 싶은 기억들 몇 가지를 없애버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선택은 늘 다른 선택과, 다른 상황과 연계되어 있지 않은가. 찰리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온갖 호화로운 일상, 꿈에 그리던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져 기쁘면서도 어딘가 시원치 않은 구석들이 존재한다. 왜일까.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에게나 수치스러운 기억 하나쯤은 있으니까. 나쁜 과거는 불현듯 찾아와 기억의 주인을 괴롭힌다. 전혀 그것과 상관없는 생각을 하다가도 반짝 떠오를 때는 얼마나 야속한지. 부끄러운 기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기분 좋은 생각으로 나쁜 기억을 없애버리려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지워지지 않고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나 소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과거를 뼈저리게 후회하고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책임질 일은 책임지고, 만약 과거로 인해 무엇인가 틀어졌다 하더라도 다시 좋은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 결국 과거를 받아들이고, 현재와 미래를 더 잘 살아가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행복’이다.

 

소설의 구성과 주제는 다소 식상한 부분이 있지만, 꽤 많은 분량 안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그 전달 방식이 누구나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이 소설이 많은 사랑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의 장면이 바뀌는 듯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소설 속에선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가사까지 담겨,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은 이유를 알게 되었고, 새롭게 옷을 입고 재출간한 책이 이 책을 모르는 또 다른 사람에게 현재의 행복을 찾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

 

 


34쪽,
게오르크 아저씨가 팀에게서 동창회 주소록을 빼앗아 고이 접은 다음 편지 봉투에 넣어 나에게 전해주었다. 게오르크 아저씨는 지금 내 심정이 어떨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창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들 성공해서 탄탄대로를 달리든 말든 나만 가만 내버려두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왜 갑자기 이렇게 기분이 꿀꿀할까?

 

129쪽,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문득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마술이나 마법 따위는 믿지 않는다. 심지어 오늘의 운세도 믿지 않아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집어치웠다. 이런 생각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네에 앉아 있는 아이가 또다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다섯 살 때는 저렇게 귀여웠을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단지 내가 믿지 않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거라면?

 

138쪽,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의 인생은 수백만, 수천만 개의 다양한 가능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무한히 많은 숫자 조합이 가능한 숫자 자물쇠처럼 말이죠. 우리가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갔을 때와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지는 거죠. 출근을 단 5분만 늦게 했어도 우리의 남은 인생에 평생 영향을 미쳤을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372쪽,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내가 결국 입을 뗐다.
“뭔가가 빠진 느낌이에요.”
게오르크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아신다고요?”
아저씨는 조용히 웃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꽉 잡고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어떤 일들은 바로 우리 코앞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가 걸려 넘어져도 못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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