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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람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모든 것은 사소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의심에, 또 다른 의심이 붙어 크게 불어나 드디어 '확신'이라는 것을 할 때까지 의심을 하는 자는 심각한 불안에 시달린다. 이 불안의 정체는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온다. 그런데 의심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의심을 받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가 겪는 상황과 경험들이 이상한 것일까? "이것은 자연스러운가? 그러한가?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강화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갈등하다가 기어코 비밀의 장막을 걷어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호수 바닥의 기다란 물건을 손으로 더듬거나 ( 「호수―다른 사람」), 참을 수 없는 악취의 그 방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
그러나 확인된 실체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 1인칭 화자의 서술을 통해 독자는 주인공의 긴장감을 머금은 채 숨 쉴 틈 없이 그의 발자취를 따른다. 주인공은 의심하는 것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 작가는 '왜', '어째서'에 집중하게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주인공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다. 이러한 장치는 표제작인 「괜찮은 사람」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운 좋게 그런 남자를 만났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주인공은 참 괜찮아 보이는 남자에게 새로운 면을 자꾸만 발견한다. 연이은 의심, 혹은 착각. "하필이면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내가 있었"고, 하필이면 차를 세운 곳이 피에 젖은 도축장이고, 하필이면 말다툼이 벌어질 때 실수로 그는 핸들을 꺾었다. '하필'이라는 말 건너엔 무엇이 있었길래.
'하필'이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여성폭력의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떠한 이유도 없이 "상대방이 원했기 때문에" 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보복이 두려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하필 그곳에 있어서, 하필 누구와 닮아서, 하필 늦은 시간에 밖에 나와 있어서, 하필 짧은 옷을 입어서……. 소설집 『괜찮은 사람』 속에 다뤄진 다양한 여성 폭력의 사례들은 여성들의 이유 모를 불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숨겨진 것도, 지나치게 드러낸 것도 아닌 작가의 쓰기 방식은 능수능란하다.
그 밖에도, 정당함이 무시되는 사회와 그것을 알면서도 온몸을 부딪히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 「당신을 닮은 노래」는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마지막에 배치된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이라는 소설은 폭력과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멀어지는 두 연인을 그린다. 마치 절정에 올랐다가 사르르 사그라진다. "끔찍한 일이죠. 사랑했던 사람이 불행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온다는 건.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행동한다는 것도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선명한 의도로 그려낸 소설들은 '강화길'의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게 한다.
호수에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강간을 당했다. 두들겨맞았다. 왜냐하면 상대가 원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원하지 않은 일을 당했다. (…) 그러나 자잘한 돌멩이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냈던 그 소리에 대해서만, 오직 그 이야기만 사람들의 입에 끈질기게 오르내렸다.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그랬어야지. 그래. 그랬어야지. 그러게 호수에 왜 갔느냐고? 왜 왔느냐고? (‘호수-다른사람‘中)
이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종의 제자리 걷기였다. 누구도 이 걷기가 끝나리라고 쉽게 낙관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는 걸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가장 힘들게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모두 힘들고, 그래서 모두의 마음은 함께 가난했다. 단지 나만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불안이었다. (‘괜찮은 사람‘中)
"정말로 가능성이 있는 사람 말이에요, 선생님." 엄마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의 말이 잘못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는 약간 억울했다. 그래서 더욱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을 닮은 노래‘中)
괜찮아 기채야. 지금도 가끔, 은영이 글자를 읽는 척했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무언가 느껴진다. 그걸로 충분하다. (‘눈사람‘中)
나는 잘못 기억하고 있었어요. 왜인 줄 아십니까? 그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네. 아니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요, 분노, 분노입니까? 그것이 다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었습니다. 파업했지요. 체포되었습니다. 단지 화가 나 있던 것뿐인데 당신들은 내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더군요. 혹시 분노와 용기는 같은 말입니까? 또 하나 못 알아든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 없는 것과, 대신할 것이 있는 것. 둘 다 같은 겁니까?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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