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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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그 속에 꼬깃꼬깃 채워진 기억들은 처음엔 말랑했던 마음을 점차로 굳어져 버리게 만든다. 크고 작고, 얼마나 더 슬프고 힘들고 하는 것들은 속도의 차이일 뿐. 굳어진 마음을 부여잡고 억지로 미소를 띠며 오늘을 견디고 또 견디는 건 다 똑같다. 그렇게 굳어져 버린 마음은 마음으로 푼다. 누군가와 만나고 같은 처지로 위안을 받으며 때로는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시간을 채우고 마음은 말랑해지게 만드는 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게 상처라는 것은 슬프지만, 그것을 함께 견딜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마음으로 마음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경애(敬愛)의 마음>에는 유독 마음이 쓰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제목은 ‘경애’이지만 느닷없이 초반부터 ‘상수’가 먼저 등장하고, 상수는 상상력 넘치고 무모하고 또 정이 많은 인물이고, 그는 또 경애를 만나고 경애는 상수만큼이나 좋은 사람이고, 그들이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추억하는 많은 인물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오는 소설이다. 그중 가장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인물은 단연 경애와 상수인데, 둘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접점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마음이 포개어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경애와 상수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소중한 사람인 E를 잃었고, 소중한 사람을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채 마음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수많은 오늘을 버텨온 그들은 서로가 서로인지를 모른 채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연애 상담 페이지에서 인연을 이어나갔고, 일터에서 만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경애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다. 상수는  다소 유머스러울 정도로 무모하고 우직한 면이 있다.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만남에는 진심이 있어 잔잔하게 마음에 폭 잠긴다.

두 마음의 파동 이외에도, 소설은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쌓여 있다. 욕심 때문에 모두를 죽게 만든 화재사건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용서와 회개의 의미에 대하여, 부당함을 지적하면 또다시 부당함으로 일관하는 기업의 횡포에 대하여, 여성의 연대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그 모든 일들에서 절대로 폐기되지 말아야 하는 마음에 관하여.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은 말을 삼키고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위로받을 것이다. 소설 속 경애와 상수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이 했던 것처럼, 소설 속의 이야기와 내가 사는 현실의 접점을 찾아가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나는 항상 같은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여러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엄청나게 대단하고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사소한 기억과 만남과 한마디의 말들. 모두가 ‘마음’이 담긴 것이었다.




● 24쪽,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 92쪽,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 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며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 172쪽,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야채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 217쪽,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러니까 누워서 종일 음악만 듣다가 먼저 배고픈 사람이 일어나 라면을 끓였던 스무살 시절의 우리와, 한강에서 오리배를 보고 있던 지난 계절의 우리는 같은 사람이었을까. 각자 다른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렸던 그 밤의 우리가 같았을까. 어쩌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봉인되어 있던 것을 뜯어서 엉망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 305쪽,
지하상가를 지나다 노숙하는 여자와 아기를 보았을 때 경애가 무심코 했던 불행이라는 언급을 정정하던 E는 그때 겨우 열여덟의 소년이었다. 그런 깊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반복된 현실과의 충돌이 있었을까. 마치 운석이 수없이 충돌해 만들어진 달의 크리에이터처럼 일상의 어떤 일들이 E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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