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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 안의 소녀 ㅣ 소설의 첫 만남 15
김초엽 지음, 근하 그림 / 창비 / 2019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김초엽이라는 신예 작가의 이름은 다른 책을 읽다가 알았다.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 한 작가 혹은 평론가가 인터뷰 중 요즘 주목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말했고,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을 콕 집어 언급했다. 이 언급이 아니었더라면, 늘 과학을 불친절하게 여기는 내가 그의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저 추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어려워하던 과학 소설과는 조금 다르게 가까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모두들 알아보는 것인지, 이제 부쩍 김초엽 작가의 이름이 종종 보이기 시작한다. 단편집을 읽기 전 소설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위한 얇은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원통 안의 소녀>는 공기와 날씨를 통제할 수 있는 미래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악화되는 대기오염의 위기 속에서 분진형 나노봇 ‘에어로이드’가 개발된다. 가정용 공기청정기 대용이었던 에어로이드는 점차 공공분사 시스템을 통해 대기와 날씨를 제어할 수 있는 용도로도 쓰이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깨끗한 환경 속에 살게 되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에어로이드를 위한 합성 물질인 ‘베타-프로니틴’에 대한 이상 면역 반응을 보였다. 주인공인 ‘지유’는 그중 하나였다. 온갖 집중 치료는 소용이 없었고 방독면 없이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다행히 열 살 무렵 ‘프로텍터’라 불리는 원통형 차량이 지유에게 제공되었다. 대가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원통 안의 소녀’를 알게 되었으나 그동안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기 중의 에어로이드 농도가 옅어지는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곤, 지유는 플라스틱 차량을 벗어나 걸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스피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연락이 되는 것일까.
늘 미세먼지 걱정에 시달리는 오염된 세계에서 소설 속 상상은 그리 먼 미래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공기가 깨끗해진다는 상상은 행복하지만 모두가 편리한 세상을 만끽할 때 어떤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고통을 느낄 수도 있었다. 사실 이렇게 깊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가정이었다.
과학의 편리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학 덕분에 너무도 빠르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을 생각하는 소설은 너무나 따뜻했다. 과학의 편리함 속에 ‘누군가의 소외’와 ‘불편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저자의 시선이 너무나 고맙고 안심이 되었다. 세상이 더욱더 빨라지고 편리해져도 이런 마음만 있다면 다행일 것 같다.
괜히 억울한 기분에 지유는 프로텍터의 안쪽 벽을 툭 쳤다. 이런 걸 타고 다니는 이상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다. 투명한 원통이라고는 해도 여기저기 달린 공기 정화용 장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야가 가려진다. 그런 점을 들어서 동정심에 호소해 보지 뭐. 설마 가난한 학생에게 다 물어내라고 하지는 않겠지. 못된 생각인가?
지유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동정이 싫다면서 결국엔 동정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 P33
‘아마 이제 노아를 만날 일은 없겠지. 우리는 그냥 나쁜 사고로 엮이게 된 사이니까.’ 지유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쓸쓸했다. 목소리만 알고 있는 상대에게 며칠 만에 정을 붙이다니. - P46
지유는 이 도시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은 에어로이드가 없는 도시를 상상했다. 그건 언제나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하고 멀리 있었다. 이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햇볕을 머금은, 물기 어린, 비가 온 다음 날이면 곳곳이 반짝이며 빛나는 …… 그러나 자유를 위해 설계되지 않은 도시. 평생을 이곳에 살았지만 지유는 여전히 이곳의 여행자였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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