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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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좋아”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고작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좋아하는 작가’라 말하기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든다. 김애란은 내게 이런 기분으로 다가오는 작가였다. 연이어 단편집을 읽었고, 단편의 한 글귀를 입에서 오물오물 되뇌기도 했으나, 완전히 다 알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스무 살 즈음에 『침이 고인다』를 만났고, 중반 즈음에 『비행운』을 읽었다. 이후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 감동했다. 우연히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만나게 된 김애란의 소설은 함께 연결되어 나이 드는 동질감을 느끼게 했지만, 그의 ‘처음’을 알지 못해 허전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2005년에 첫 출간된 소설집이 십여 년을 지나 새 옷을 입고 나왔다. 순서가 바뀌고 작가의 말도 새롭게 적어 넣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반가운 기회로 김애란의 풋풋한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만나게 되었다. 작가의 초기작을 만나는 것은 늘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지만, 이번에는 빠져 있던 퍼즐 조각을 찾은 듯 유독 즐거운 기분이다.

이십 대에 들어서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나는 전혀 어른이 된 것 같진 않지만 그때와 현저히 달라진 존재를 느낀다. 그때는 내 생애 가장 우습고도 밝은 시기였다. 마음은 조금 부풀어 있고 살짝 열려 있었다. 겁이 나도, 살짝 열린 틈으로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기회, 내가 하고 싶은 상상 속에 잠깐이라도 발을 담가볼 수 있었다. 지금의 나이가 돼서야 볼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때의 나이에만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풋풋한 스물,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다시 또 한 번 나의 시간을 생각한다.

만나지 못했지만 늘 가슴 한편에 있는 동경의 대상을 생각한다.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 그리고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사랑의 인사>라는 단편들은 부재하는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는 면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소설이었다. 그 누군가는 종종 아버지의 존재로 비춰졌다.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을 이야기할 때 면 조절하기 힘든 감정을 적당한 온도로 전하고 있었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탁월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단편들이었다. 건조하면서도 섬짓한 분위기의 이 소설들이 유독 좋았다. 글을 쓰는 존재로서의 고뇌가 느껴졌던 <영원한 화자>, <종이 물고기>도 기억에 남는다.

소설 속에는 작가의 책을 좋아한 이유이기도 했던, 문장의 신선한 표현력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초기작의 산뜻하고 가벼운 느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첫’ 소설의 무거운 고뇌 또한 들어 있는 듯했다. 마치 뼈 있는 농담을 듣는 기분이라 할까. 물론 조금 더 매만져진 지금의 김애란이 나는 더 좋긴 하지만, 첫 소설의 매력을 느끼는 것도 재미난 경험이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39

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한다는 점에서 무레한 사람이다. 나는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내가 그동안 그것을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아도 끄덕이는 사람, 나는 불안한 수다쟁이, 나는 나의 이야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 나는 나의 각주들이다. - P127

"죄송합니다." 나는 그가 건네는 포장 만두를 받아들었다. 볼일이 끝난 뒤에도 내가 계속 꼼짝 않자, 청년은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뭔가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그런데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 어물쩍 한마디 내뱉고는 큐마트를 나왔다. "문자 왔어요." - P237

바람이 들고 날 때마다 모든 벽면이 바깥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올랐다 다시 원상태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럴 때면 다섯개의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이 일제히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더욱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 다니는 상상을 했다. 마치 자신이 물고기 지느러미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았고, 반대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기분도 느꼈다. 대체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알 수 없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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