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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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는 이상야릇한 힘이 있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콸콸 들이붓지만 않는다면야, 술은 적당한 이용가치가 있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노래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하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평소에 하지 못할 일들을 기꺼이 하게 만들기도,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부끄러움 없이 꺼내놓게도 한다.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술자리에서는 세상사 많은 희로애락이 펼쳐진다. 취기는 불안을 잠재우고,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게도 한다. 오직 술이 있어야만 허용될 것 같은 진실한 이야기가 바로 술자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 『안녕 주정뱅이』는 실제로 쓰디쓴 술을 삼키고 삼키면서 들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다. 첫 잔이 가장 독하고, 마지막 잔까지 비릿하다.

 소설은 예상치 못한 순간들과 비밀,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들을 담는다. ​목적지가 다른 두대의 자동차가 나란히 달리다 같은 휴게소에서 잠깐 들렀다 간 정도('층')의 우연들이 반복된다. 번갯불의 찰나 ('삼인행')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쌓여, 어떤 결과를 불러오고, 그 결과로 이들은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불안을 잊기 위해 사랑에 취하고, 여행길에 취하고, 분노에 기대기도 하며, 오히려 그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인생의 고통을 함께 견디는 「봄밤」의 수환과 영경은 얼마나 처절하고 아름다운가. 「이모」는 살아온 날들의 증오를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앓았을까. 이 격렬하고 치열한 이야기는 가슴을 세차게 흔든다. 나머지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카메라」와 「실내화 한 켤레」의 소설은 아무렇지 않은 날들을 그리는 것 같지만, 온통 불안으로 가득하다가 마지막이 돼서야 불안과 위험을 한 번에 터뜨려버린다. 당최 끝까지 안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됐지 않냐고. 뭘 더 바라겠냐고 ('봄밤')"

​ 그래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히' 살아있으려고 애쓴다. 비틀비틀 걸음을 온전히 하려 애를 쓰는 주정뱅이처럼 보일지언정, 어떻게든 자신의 일상을 안정시키려 노력한다. 그들에게 연민 어린 시선이 간다. 가장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술자리처럼, 다음날, 그다음 날까지 이들의 이야기에 관한 기억이 또렷하다.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소설을 썼을까.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겪어보았길래…….

 


 



25쪽, <봄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그러니까 1이 기준인 거네."
수환이 말했다.
"그렇지.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되지."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섹시할 때가 있어."
영경이 씩 웃었다.
"그래? 너무 간헐적이라 탈이지.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1이 될까?"

93쪽, <이모>

언제였을까. 그의 자취방에서 과도로 참외를 깎아 쪽을 내고 참외씨를 미세하게 바르며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았던 그 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 같던 그 봄날의 오후는, 그리고 …… 그녀는 현관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장갑 낀 양손을 번갈아 쥐었다 놓았다. 당장이라도 과도를 움켜쥐고 무엇을 찌를 듯이, 장갑 속의 언 손가락들을 바르르 떨게 만드는 이 붉고 어두컴컴한 증오는 무엇인가. 그걸 알 수 없어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었다 놓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쥐었다 놓았다.

134쪽, <카메라>

"내가 무능해서 그런지 몰라도,"

관희가 고개를 옆으로 늘어뜨렸다.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참 힘이 드는 일이에요, 문정씨."

76쪽, <실내화 한켤레>

그 만남이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239쪽, <층>

그는 아파트 정면 베란다에 서서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L자를 그리는 차도 너머에 있는 도서관 진입로와 어두운 나무들에 가려진 건물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초추의 양광, 돈데 보이 같은 것 말고, 안톤 슈나크나 띠시 이노오사 같은 것 말고, 이 밤 도서관에서, 까페에서, 연구실에서, 오래전 당신이 살던 이곳보다 훨씬 더 넓은 아파트 거실에서,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낯선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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