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살해자
윤재성 지음 / 들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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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로움을 없애고 싶었다." (17쪽)
 소설은 현대사회에 뿌리내린 '외로움'을 완벽히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런데 대체 이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디서 어디까지를 외로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외로움의 증세는 다양할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것, 사람들의 관계에 목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갈증을 느끼는 것…… 이런 가벼운 증세도 외로움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평소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않고, 오히려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추켜세워왔다. 하지만 종종 느끼는 가벼운 외로움이 진짜 '외로움'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든다. 내게 주어진 모든 소유물과 남아있는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나는 진정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무시무시한 상상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다뤄지는 외로움은 내가 상상하던 정도를 넘어선 무게를 갖고 있다. 이것이 '진짜' 외로움과 고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구들과 술 한 잔,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나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완전히 다른 외로움. 이미 닳고 닳아진, 묵직한 순간들이 돌처럼 얹힌 아주 지긋지긋한 외로움. 아마도 내가 전혀 겪어보지 않았을 지독한 외로움이 책을 온통 감싸고 있다.

 

 

 이런 외로움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 소설에 등장하는 '외로움 살해자'다. 살해자라는 이름 때문에 판타지나 스릴러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소설 속) 현대 사회에 새롭게 생겨난 '직업'이다. 엄청난 경쟁률로 뽑힌 그들은 외로움으로 고통받는 고객들과 시간을 보낸다. 회사에서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고객의 마음을 캐낸다. 외로움이 발생하고, 그것이 커지고,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된 지점들을 파악하고 위로한다. 성공률은 높은 편이다. 간혹 고객의 외로움에 전염되는 살해자가 있기는 해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로움 살해자'를 '카사노바' 혹은 '애인 대행' 서비스라고 힐난하기도 하지만, 고객들은 그들을 필요로 한다. 고객에게 그들은 썩은 동아줄이라 해도, 마지막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양날의 검이자, 고객에겐 구원인 '외로움 살해자'의 세계. 소설은 '우수 외살자'와 반송된 (한번 서비스를 신청했다가 실패한) '의뢰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외로움의 본질에 관해 추적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느끼는 외로움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어떤 경험에서, 어떤 경로로 그에게 찾아왔을까. 외로움은 '외로움 살해'라는 시스템으로 정말 소멸할 수 있을까. 손쓸 수 없는 외로움이란 존재할까. 건드리지 않아야 할 외로움도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수많은 질문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 자체가 외로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벼운 외로움일지라도, 그것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공허함이 밀려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거라며.

 

 

 찝찝하고 끈적이는 외로움을 책 속에서 온몸으로 겪고 나니, 조금은 피로하고 힘이 들었다. 그러나 외로움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낸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인 바람은 지독한 외로움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약간의 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소소한 것들 - 조금씩 모이면 '외로움'이라는 것을 짓누를 수 있는 - 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약간의 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171쪽,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지금을 버티기도 힘드니까. 끝을 떠올린 순간 연애나 사랑, 삶의 모든 의미는 허무하게 퇴색돼버려요. 그래서 저는 매일같이 생각을 지워서 현실을 살아갔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나의 존재마저 지워버릴 걸 알면서도."
미는 잠깐 말을 멈췄다. 필은 앞자리의 대리기사가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안경 낀 눈이 룸미러에 비치는 중이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요. 사랑의 유한성만큼 가혹한 게 또 있을까 하는. 그건 하루를 살기 위해 일 년 치 독약을 삼키는 짓이에요."
필은 외로움살해자로서 답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는 생물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 위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하지만 외로움은 영원해요. 죽음이란 완성에 이르기 전에는."



221쪽,
"보통은 1개월에서 2개월, 많게는 3개월, 서비스를 연장한다면 반년가량. 그 기간이 끝나면 우린 사라집니다. 고객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두세 달에 불과해요. 우리가 필사적으로 고객을 파악하고, 원인을 찾아내고, 외로움을 없애려드는 이유도 그겁니다. 그들이 전화를 걸어 온 순간부터 모래시계는 흘러내리기 때문에."



265쪽,
그는 주의 깊게 유도신문을 시도했다.
"죽는다는 뜻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데요."
"말 그대로예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 남겨질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심는 것."
미는 거기서 말을 잠시 멈췄다. 검은 동공은 허공에 멎었다. 그녀는 필을 보면서 필 뒤의 어떤 것을 함께 보는 중이었다.
"우리는 왜, 살아남지 않으면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290쪽
"그럼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지금이 2116년이고, 외로움살해자들이 최첨단 주사액과 미래형 권총으로 고독을 제거하는 줄 알았나요? 그런 것은 현실에 없습니다. 외로움 제거는 우물 청소나 다름없어요. 더 깊고 오래된 때일수록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오직 수작업으로만 이끼를 닦아내야 하는, 고여 있는 유독가스에 중독되지 않길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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