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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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숨 작가는 『L의 운동화』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아직까지는 쉰한 분이 살아 계시지만 다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겠지요? 한 분, 한 분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한 분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단 한 분 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그리고 결국 단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할까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까, 잊지 못할, 너무도 오싹했던 '한 명'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잔혹한 역사를 '르포' 형식이 아닌 '소설'로 담는 것은 꽤 민감한 일이다. 소설이라는 틀 너머에 그보다 더 끔찍하고 적나라한 현실이 있고, 건드려야 할 것이 있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소설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알고 있는 진실을 허구의 바탕 속에 적당히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상상에는 한계선이 있다. 경험해보지 못한 끔찍한 일은 그 한계선까지의 거리가 매우 짧다. 경험해본 사람을 통해 보고 들은 것만을 상상하고, 더불어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위안부'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영상에서 본, 문신으로 가득한 할머니의 배를 떠올렸다. 너무도 아팠고, 끔찍했고, 죽여버리고, 죽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음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 뒤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12살 어린 소녀를 보고 하는 생각들을, 신발을 신을 때마다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이유를, 끝끝내 살아 돌아왔어도 자신이 어딜 다녀왔는지 말할 수 없던 상황들을 말이다. 『한 명』이라는 소설은 내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설명한다.

 "죽을 수가 없어. 내가 죽으면 말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237쪽)

 세월이 흘러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를 그리는 '소설의 현재'에는 '그녀'가 살고 있다. 위안소에서 한시도 제 몸뚱이가 아니었던 몸을 끌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참혹한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다. 제 몸뚱이가 아니었던 몸이, 이제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녀는 TV에서 (공식적인) '한 명'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녀는 증언을 어떻게 하는지도, 하고 싶지도 않으며, 그저 행복하게만 살고 싶어 조용히 삶을 지켜왔다. 그러나 "순덕, 향숙, 명숙 언니, 군자, 복자 언니, 탄실, 장실 언니, 영순, 미옥 언니……."와도 같은 '한 명'의 존재를 이제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때 불현듯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던 열세살 소녀의 이름을…….

 


 굳게 다물어졌던 입을 열고 버스에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지금 살아계신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생각했다. "모든 걸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했으면 오늘날까지 살지 못했으리라."(151쪽)라고 말하면서도,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죄다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현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본 정부와의 '불통'과 우리 정부의 괘씸한 처사에도 꿋꿋이 뜻을 표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눈물이 났다.

 이 책의 문장에는 수없이 많은 숫자가 붙어 있다. 이는 뒷페이지의 참고자료와 이어진다. 참고자료에는 작가가 참고한 책들과, 증언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것이 정말 현실이냐며, 치를 떨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숫자들이다. 이 숫자와, 기록과 기억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이 읽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8쪽,
검푸른 곰팡이가 만발한 담벼락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그녀는 한순간 발작적으로 숨을 토한다. 마흔일곱 명이라고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한 명밖에 안 남았을까 싶다.
꽃잎이 방사형으로 퍼진 꽃을 그리듯, 두 발을 번갈아가면서 조금씩 옆으로 옮긴다.
그녀가 발을 뗄 때마다 장판지가 슬쩍 들뜬다. 밀크캐러멜 색깔의 장판지는 뾰족한 것에 찍힌 자국, 뜨거운 것에 덴 자국, 밀려 주름진 자국, 날카로운 것에 긁힌 자국 등으로 지저분하다.
한 생을 등지듯, 그녀는 그렇게 창문에서 천천히 돌아선다.

88쪽,
소녀들은 자신들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 명수로 일요일인지 알았다. 그곳에는 달력도 없어서 소녀들은 날짜도, 요일도 몰랐다. 모든 날들은, 모르는 날들이었다. 모르는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들은 폭삭 늙었다.

90쪽,

이제 여기서 죽는가 보다 하면서도, 이런 데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면서도. 고향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실공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비단공장에 있었다고? 아니면 그냥 좋은 공장에.



132쪽,

"저기, 젊은 양반…… 20만 명 중에 2만 명이면…… 10분의 1이 맞지요?"
"20만 명 중에 2만 명이요?"
"20만 명 중에 2만 명이면……"
"20만 명은 뭐고, 2만 명은 뭐래요?
전기검침원이 대답은 않고 도리어 그렇게 물어서 그녀는 당황한다. 그녀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2만 명 뽑는데 20만명이 몰리기라도 했대요? 20만 명이면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하고 맞먹는 숫잔데……."
그녀는 괜히 물었다 싶어 입을 다문다.
"주먹은 왜 그렇게 꼭 쥐고 계세요?"
"다슬기들이 달아날가봐……."

​236쪽,
그녀는 티브이 받침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백지를 꺼낸다. 반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쓴 글자들이, 억눌려 있던 스프링처럼 앞다투어 튕겨 오른다.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문장에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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