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로마 작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이리로 변신한 폭군, 갈대가 된 요정, 백조가 된 소년 등 몸을 바꾸어 동물이나 식물이 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변신'이란 무엇인가? '몸을 바꾼다'는 뜻이다.
나무로 몸을 바꾼 처녀 이야기를 들어 보자.
그리스인들에게 나무는 무엇이었을까?
인간에게 나무는 무엇일까?
아폴론은 활의 신이자 올륌포스 최고의 명사수이기도 하다.
'신궁'이라는 말은 귀신처럼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고 보면 아폴론이야말로 신궁이라고 불러 줄 만하다.
그런데 활과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신이 또 있다.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다.
에로스는 '에로스와 프쉬케' 이야기에서는 청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제외하면 에로스는 늘 장난감처럼 조그만 활을 든 꼬마 신으로만 등장한다.
에로스는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명에 따라 신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화살을 쏘는데, 이 화살을 맞는 신이나 인간은 사랑의 병을 열병처럼 앓아야 한다. 이 에로스의 로마식 이름은 '쿠피도(Cupido)'이고, 영어식 이름은 '큐피드(Cupid)'다.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멋스럽게 '큐피드의 화살에 맞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 활의 신이자 올륌포스의 신궁인 아폴론의 눈에는 조그만 활을 들고 다니는 꼬마 신 에로스가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아폴론이 에로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이 건방진 꼬마야, 무사들이나 쓰는 무기가 너와 무슨 인연이 있느냐? 그런 무기는 나 같은 무사의 어깨에나 걸어야 어울린다. 내가 활을 얼마나 잘 쏘는지 아느냐? 나의 겨냥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과녁이 짐승이든 인간이든 100발 쏘아서 100발 다 명중시킬 수 있다. 소문 들었느냐? 얼마 전에도 나는 온 벌판 가득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독이 잔뜩 오른 왕뱀 퓌톤을 여러 개의 화살을 쏘아 죽였다. 너는 사랑의 불을 잘 지른다니까, 횃불 같은것으로 사랑의 불이나 지르고 다니는 게 좋겠다. 활은 너 같은 꼬마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나 같은 어른이나 얻는 명사수의 칭송은 너에게 당치 않으니, 분수를 알아서 처신하도록 하여라."
이 말을 들은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이렇게 응수했다.
" 아폴론 아저씨, 뭐든 명중시킬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아저씨 자신을 명중 시킬 수 있어요? 어림도 없잖아요? 하지만 저는 아저씨를 명중시킬 수도 있으니, 제가 한 수 위지요. 활 잘 쏜다고 거들먹거리시는데, 짐승과 신들 중 누가 더 높아요?"
" 그야 신들이 높지."
" 얼마나요?"
" 글쎄?"
" 저와 아저씨의 차이만큼 높지요."
" 너와 나는 누가 높은데?"
" 제가 높지요."
" 그렇다면 내가 짐승이라는 말이냐?"
" 물론이죠. 저더러 가서 불장난이나 하라고요? 아저씨나 가서 불장난 좀 해 보세요."
에로스는 이 말을 마치고는 하늘로 날아 올라 파르나쏘스 산 꼭대기의 울창한 숲에 살짝 내려섰다. 파르나쏘스 산 꼭대기에는 에로스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에로스는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에서 각기 쓰임새가 다른 화살 두 개를 뽑았다.
하나는 사랑을 목마르게 구하게 만드는, 말하자면 상사병에 걸리게 하는 화살, 또 하나는 상대를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하는, 말하자면 상대에게 혐오감이 일게 하는 화살이었다. 사랑을 목마르게 구하게 하는 화살은 금화살이었다. 이 금화살 끝에는 반짝거리는 예리한 촉이 물려 있었다. 그러나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만드는 화살 끝에는 납으로 된 뭉툭한 촉이 물려 있었다.
페네이오스 강가에는 다프네라는 강의 요정이 살고 있었다. 이 다프네는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이었다.다프네는 이성에게는 별 취미가 없는 처녀였다. 그래서 오로지 숲속을 돌아다니며 동무들과 놀거나 들짐승을 쫓아다니는 일에만 열중할 뿐 도무지 남성을 눈여겨보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어떤 신인지, 결혼의 신 휘메나이오스가 어떤 신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프테는 댕기 하나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척 묶고는 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사냥에 능한 처녀신 아르테미스와 겨루기라도 하듯 짐승을 잡는 일에만 마음을 썼다. 다프네에게는 구혼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다프네는 이들의 구혼을 마다하고 길도 없는 숲을 돌아다니면서 사냥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말하자면 다프네에게는 결혼이니 사랑이니 부부 생활이니 하는 것은 쥐뿔도 아니었다.
강의 신 페네이오스는 틈날 때마다 이 선머슴 같은 딸을 타일렀다.
" 얘야, 결혼해서 이 아비에게 사위 구경이라도 시켜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때로는 이런 말도 했다.
" 사냥 다니는 것은 네 권리지만 아비에게 외손주를 낳아 바치는 것은 네 의무니라."
그러나 다프네는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다프네는 결혼이라는 것을 무슨 못 할 짓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붉히면서 아버지의 목을 두 팔로 감싸안고 애원하듯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아버지, 영원히 처녀로 있게 해 주세요. 아르테미스 여신의 아버지 제우스 신은 벌써 옛날에 따님에게 이런 은전을 베풀었답니다."
딸이 어찌나 집요하게 굴었던지 아버지도 딸의 청에 못 이기는 척 마음을 그렇게 먹었다. 그러나 다프네의 아름다움은 다프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주지 않았다. 소원을 이루기에는 다프네가 너무 아름다웠다.
파르나쏘스 산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앞의 바위에 걸터앉은 꼬마 신 에로스는 먼저 금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에로스가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아 버리자 금화살은 아폴론의 어깨에 가서 꽂혔다. 이로써 이제 아폴론은 어떤 여성이 되었든, 처음 눈에 띄는 여성에게 홀딱 반해 상사병을 앓게 된 것이다.
에로스는 두 번째로 납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에로스가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아 버리자 납화살은 다프네의 어깨에 가서 꽂혔다. 이로써 이제 다프네는 어떤 남성이 되었든, 처음 눈에 띄는 남성에게 혐오증과 함께 넌더리를 내게 된 것이다.
아폴론은 이 에로스의 화살을 맞은 뒤, 다프네를 보는 순간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앞일을 헤아리는 예언의 신 아폴론의 예언력도 하필 없었다. 아폴론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만을, 즉 다프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아폴론의 가슴은 타작 마당에서 검불을 태우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의 가슴에서 타 들어가는 불길은, 밤길을 가던 나그네가 날이 새자 내버린 횃불이 잘 마른 울타리를 태우듯이 그렇게 타올랐다. 그는 이 허망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끝내 버릴 수 없었다.
이성에 눈먼 아폴론은 목 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 아, 빗질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워 보일까?"
그는 별처럼 반짝이는 다프네의 눈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다프네의 입술에도 머물렀다. 그는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다프네의 손가락, 손, 어깨까지 드러난 팔을 찬양했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보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폴론이 다가가면 다프네는 달아났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아폴론이 뒤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그의 하소연조차 들어 주지 않았다.
" 요정이여, 페네이오스의 딸이여, 부탁이니 달아나지 말아요. 비록 그대를 이렇게 뒤쫓고 있기는 하나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에요. 아름다운 요정이여, 거기에 서요. 이리를 피하여 어린 양이 도망치듯이, 사자를 피하여 사슴이 달아나듯이, 비둘기가 독수리를 피하여 날갯짓하듯이, 만물이 그 천적 되는 것을 피하여 몸을 숨기듯이, 그대는 지금 그렇게 내게서 달아나고 있어요. 달아나지 말아요. 내게 그대를 뒤쫓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오. 나는 당신을 사랑해서 이렇게 뒤쫓는 거랍니다.
도망치지 말아요. 도망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것이오? 장미 덩굴에 그 아름다운 발목이라도 긁히면 어쩌려는 것이오? 그대가 달아나고 있는 이곳은 험한 곳이오. 부탁이오. 제발 좀 천천히 달려요. 걸음을 늦추어요. 나도 천천히 뒤따를 것이니, 그대에게 반하여 이렇듯이 번민하는 내가 누군지 그것은 물어 보고 달아나야 할 것이 아니오?
나는 산 속에서 오막살이나 하는 농투성이가 아니에요. 이 근처에서 가축이나 먹이는 양치기도 아니에요. 어리석기는! 어째서 그대는 뒤따르는 내가 누군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알면 그렇게 달아나지 않을 텐데.......
델포이에 아폴론 신전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나는 그 땅의 주인이랍니다. 테네도스 섬에 아폴론 신전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나는 그 땅의 주인이랍니다. 항구 도시 파타라에 아폴론 신전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나는 그 항구의 주인이랍니다. 나는 저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아들이랍니다. 내게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는 재주도 있답니다. 신과 인간을 통틀어 수금을 나보다 잘 뜯을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답니다. 내 화살은 백발백중이오만, 나보다 솜씨가 나은 녀석이 있어서 내 가슴에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어요.
의술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속병을 고치고 상처를 치료하는 기술을 아시지요? 의술은 내 손에서 시작 되었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나를 파이에온, 즉 '고치는 자'라고 부른답니다. 아, 나는 약초를 잘 아는 천하의 명의인데도, 이 사랑병 고칠 약초는 찾을 수가 없어요. 남을 돕는 재주가, 있어야 할 그 임자에게는 없으니 장차 이 일을 어쩌리요........"
처녀가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한 말은 이보다 훨씬 더 길었으리라. 그러나 처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달아났다.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었는데도 다프네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바람은 달아나는 다프네의 옷자락을 날려 사지를 드러나게 하고 있었다. 사지가 드러난데다 바람이 머리카락까지 흩날리게 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달아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젊은 신 아폴론은 입에 발린 아첨으로 낭비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 젊은 신의 추격 속도를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했다. 갈리아 사냥개가 풀밭에서 토끼 한 마리와 쫓고 쫓기는 형국과 흡사했다. 사냥개는 속도로 이 사냥감을 확보하려 하고, 사냥감은 속도로 절체 절명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법이다.
아폴론과 다프네가 쫓고 쫓기는 형국은, 사냥개가 한시바삐 이 추격전을 마무리하고 싶어 주둥이로 토끼의 꼬리를 덥석 물고, 토끼는 사냥개 입에 물렸는지 안 물렸는지도 모른채 죽자고 몸을 날려 아슬아슬하게 사냥개의 이빨을 피하는 형국과 아주 흡사했다.
이 젊은 신과 아름다운 요정은, 전자는 따라잡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후자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쫓기며 빠르기를 겨루었다. 그러나 쫓는 쪽이 빨랐다. 아폴론에게는 에로스의 날개,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론은 달아나는 다프네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고 발뒤축에 바싹 따라붙었다. 숨결이 다프네의 목에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따라붙자 힘이 빠진 다프네는 더 이상 달아나지 못했다.
다프네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기진맥진한 다프네는 아버지 페네이오스 강의 강물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 아버지, 저를 도와 주세요. 강물에 정말 신통한 힘이 있으면 기적을 베푸시어 몸 바꾸기의 은혜를 내려 주세요.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세요."
다프네는 이 기도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사지가 풀리는 듯한 정체 모를 피로를 느꼈다. 다프네의 그 부드럽던 젖가슴 위로 얇은 나무 껍질이 덮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나뭇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있게 달리던 다리는 뿌리가 되고, 얼굴은 이미 우듬지가 되고 있었다. 이제 다프네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만 남아 있을 뿐......
나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폴론은 다프네(월계수)를 사랑했다. 나무 둥치에 손을 댄 아폴론은 갓 덮인 나무 껍질 아래서 콩닥거리는 다프네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월계수 가지를 다프네의 사지인 듯 끌어안고 나무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나무가 되었는데도 다프네는 이 입맞춤에 몸을 웅크렸다.
아폴론이 속삭였다.
" 내 아내가 될 수 없게 된 그대여, 대신 내 나무가 되었구나. 내 머리, 내 수금, 내 화살통에 그대의 가지가 꽂히리라. 기나긴 개선 행렬이 지나 갈때, 백성들이 소리 높여 개선의 노래를 부를 때 그대는 승리자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뿐인가? 이날 이때까지 한번도 잘라 본 적 없는, 지금도 싱싱하고 앞으로도 싱싱할 터인 내 머리카락처럼, 그대의 잎으로 만들어 승리자들의 머리에 씌워 줄 월계관 또한 시들지 않으리라."
아폴론이 이런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가지를 앞으로 구부리며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듯이 잎을 흔들었다.
이렇듯이 모든 나무의 가지는 아름다운 다프네 아니면, 파에톤의 죽음을 슬퍼하던 누이들의 팔이다. 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꺾을 때 우리가 명심할 일이다.
- 글, 이윤기
워터하우스, 아폴론과 다프네
작자 모름
아폴론과 다프네, 티에폴로
카를로 마라티, 다프네를 쫓는 아폴론
POLLAIOLO, 아폴론과 다프네
Apollon amoureux de Daphne, 푸생
아폴론과 다프네, 푸생
베르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