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최근에 랄프 왈도 에머슨의 책을 세 권 내리 읽었다. 맨먼저 읽은 두툼한 책 덕분에 예전에 미처 끝까지 읽지 못하고 내려 놓았던 두 권의 얇은 책마저도 이번 기회에 읽게 된 건 정말 뜻밖의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에는 좀처럼 와닿지 않던 에머슨의 낯선 문장들이 어느새 내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점도 놀라웠다.

그의 책을 통해 다시 만나는 몇몇 인물들도 몹시 반갑다. 그런 인물들이 반드시 헨리 데이빗 소로우로 대표되는 콩코드 주변 사람들만은 아니다. 고전 작품들을 통해 내가 이미 만났던 여러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소개받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그의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인물들에 대한 얘기를 글로 쓰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었다.

단적인 경우가 필록테테스라는 인물이다. 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통해 그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을 만난 뒤로 여태 한 번도 그를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인물 때문에 내가『로빈슨 크루소』를 새삼 읽었다고 말한다면 그에 대한 엉뚱한 핑계가 되리라. 왜냐하면 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내내 필록테테스를 어느새 새까맣게 잊어버린 탓에 그에 관한 어떠한 글도 새롭게 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에머슨의 글을 통해 그 불쌍한 사나이를 다시 만나는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는 순전히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저 필록테테스(트로이 전쟁 때의 유명한 사수.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을 썼다. 역자 주) 극(劇)에 나타난 자연애(自然愛)를 찬탄한다. 그 잠과 별과 바위와 산과 파도에 대하여 호소하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시간이 썰물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느낀다.(373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 자기신념의 철학』,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에머슨이 쓴 문장들이 가끔씩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문장들과 너무 닮은 느낌도 받곤 했는데, 그 두 사람의 문장이 그렇게 서로 닮은 점들에 대해 나는 조금도 놀랄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됐던 특별한 교감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하면서 도리어 기분이 좋아질 수는 있어도, 누가 누구를 남몰래 모방했다는 속좁은 의심을 품을 계제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토록 독립심이 강한 인물들이, 서로를 남몰래 감화시키는 일은 있었을지언정, 누가 누구의 문장을 베낄 정도로 하찮은 생각을 어떻게 품을 수 있었겠는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주석달린 월든』말미에 끄적여 놓은 메모. 콩코드에 살았던 에머슨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너대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과도 친했다. 그런 흔적들이 『주석달린 월든』에 상세히 나온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작가들, 플루타르코스, 셰익스피어, 단테, 몽테뉴, 밀턴, 다니엘 디포 등도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주석달린 월든』에서 에머슨이 등장하는 대목은 내가 대충 헤아린 것만 따져도 21곳이다.)


간혹, 에머슨이 남겨 놓은 아주 생경한 문장들을 만날 땐 그가 낯설면서도 신비롭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런 문장들은 거듭 읽어도 그 뜻이 모두 독자에게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문장들을 거듭 읽으면 어느새 좁은 틀 안에 갇힌 생각들을 조금씩 더 확장시켜 주는 기분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에머슨의 책들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흔히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불확실한 미래로 미뤄 놓는 편이 더 안전할 듯싶다. 그가 남긴 예사롭지 않은 문장들을 거듭 곱씹어 재음미할 틈도 없이 서둘러 그에 대해 말하기란 여러 모로 여간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을 읽은 덕분에 오래 전에 사두고 끝까지 읽지 못했던 나머지 두 권의 책도 꼼꼼하게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자연』을 번역한 신문수 교수님은 예전에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잠깐 만난 적이 있는 분이다. 그 분은 원래 '허먼 멜빌'을 전공하신 분이다. 그분이 에머슨의 책을 번역한 이유가 허먼 멜빌과 에머슨과의 친분 때문이라면 더욱 반갑다. 사진에 담긴 세 권의 책 가운데는 그분의 번역이 단연코 가장 매끄럽다. ☞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둘러싼 이야기 ☞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 * *


(밑줄긋기)


책은 과거의 영향 중에서 최상의 형태


책은 과거의 영향 중에서 최상의 형태이다. 아마 우리는 책의 가치만을 고찰하더라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ㅡ 즉, 보다 편리하게 그 영향의 양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가르침은 고귀하다. 초창기의 학자는 주위의 세계를 자기 속에 받아들였다. 그것에 대해 명상하고, 그것에 자기 정신의 새로운 배열을 부여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말하였다. 그것은 생명으로 그 안에 들어가, 진리가 되어 그에게서 나왔다. 그것은 단명한 생각으로 그에게 와서 불멸의 사상이 되어 그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업으로서 그에게 다가와서 시가 되어 그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죽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 있는 사상이다. 그것은 서 있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다. 그것은 이제 인내하고 비상하고 영감을 준다. 그것이 생겨난 정신의 깊이에 정확히 비례하여, 그것은 높이 날기도 하고, 오래 노래하기도 한다.(102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공기 펌프로도 완벽한 진공을 만들 수 없는 첫처럼,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저서에서 범속하고 국지적이고 사멸할 수 있는 것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동시대인, 아니 차라리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먼 후손에게, 모든 점에서, 호소력을 잃지 않는 순수한 사상으로 이루어진 책을 쓸 수는 없다. 사실, 모든 시대는 자기 자신의 시대의 책을 써야 한다. 아니, 각 시대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보다 오랜 시대의 책들은 오늘의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103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안내자가 폭군이 되는 것


창조의 행위, 사색의 행위 그 자체에 수반되는 성스러움이 씌어진 것으로 전이된다. 노래하는 시인이 신성하게 여겨졌었다. 그 때문에 그가 노래한 시도 또한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작가는 바르고 현명한 영혼의 소유자로 간주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책도 완벽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마치 영웅을 사랑하는 마음이 타락하여 그의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과 같다. 그리하여 책은 즉각 해악스러운 것이 된다. 안내자가 폭군이 되는 것이다. 아둔하고 편벽된 대중의 마음은 이성의 침투에 문을 여는 것이 더디지만, 일단 문이 열리면, 곧 책을 일단 받아들이면, 그것에 의지하여 서고, 그리하여 그것이 비판받으면 반항의 아우성을 지른다. 대학도 책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다. 사색하는 인간이 아닌 사상가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또 책을 써낸다. 이처럼 단순히 재능만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여 출발이 잘못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통찰한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통용되는 도그마로부터 출발하여 책을 써내는 것이다.(10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온순한 젊은이들


도서관에서 책에 파붇혀 자란 온순한 젊은이들은 키케로나 로크 혹은 베이컨이 제공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들은 키케로, 로크, 베이컨이 이 책들을 썼을 때, 그들 역시 도서관에 파묻힌 젊은 청년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10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책벌레


이리하여 사색하는 인간 대신 책벌레가 생겨난다. 다시 말하여, 책을 순전히 책이라는 이유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책에 박식한 부류가 생겨난다. 그들은 책을 자연과 인간성에 관련된 사색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영혼과 함께 그것으로 3부 회의를 구성한다. 이리하여 원문 확정자, 교정가, 그리고 각종 서적 수집광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10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책의 바른 사용이란 무엇인가?


책은 잘 사용하면 최상의 것이나, 오용하면 그것처럼 나쁜 것도 없다. 책의 바른 사용이란 무엇인가? 모든 수단이 효과를 얻고자 하는 그 유일한 목적은 무엇인가? 책은 오로지 영감을 불러일으커는 것으로써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책에 이끌려 자기 자신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의 체계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위성이 되어버린다면 차라리 책을 읽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살아 움직이는 심령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심령을 가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에 이르는 길이 막혀 있어서 아직 현동화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 살아있는 심령이 그의 내부에 잠재해 있다. 이 생기 있는 심령이 절대적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고 혹은 창조한다. 이러할 때에 그 심령은 천재성을 발휘한다. 천재는 결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견실한 자산이다. 그 본질에 있어서 살아 있는 심령은 진보적이다.(10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그러나 천재는 앞을 바라본다


책, 학교, 예술 유파, 그리고 제도는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과거의 천재가 토로한 생각에서 멈추어 있다. 이들은 말하자면, 이것이 좋다, 그러니 이것을 신봉하자고 말한다. 그들은 나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보기만 한다. 그러나 천재는 앞을 바라본다. 인간의 눈은 머리의 뒤쪽이 아니라 이마에 달려 있다. 인간은 미래를 전망하고, 천재는 창조한다. 어떤 재능을 소유하고 있건 간에, 인간이 창조하지 않는다면, 신성의 순수한 유출은 그의 것이 아니다 ㅡ 타다 남은 불기운이나 연기는 있을지 모르지만, 불꽃은 없다. 창조적인 태도, 창조적인 행동, 창조적인 말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 행동, 말은 관습이나 권위의 흔적이 배어 있지 않고,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정신 그 자체의 감각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온 것이다.(10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바른 독서의 길

의심할 바 없이 바른 독서의 길이 있다. 독서을 엄격히 종속적인 것으로 삼는 것, 그것이 바른 길이다. 사색하는 인간은 자신의 도구에 짓눌려서는 안 된다. 책은 학자의 한가한 시간을 위한 것이다. 학자가 신을 직접 읽을 수 있다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읽은 기록을 읽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것이다. 간간이 찾아오는 암흑의 시간(그런 시간이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다)에 ㅡ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별들도 반짝임을 멈출 때, 그때 우리는 그들의 불빛으로 밝혀진 램프에 의지하여, 새벽이 다시 열리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는 것이다. 우리가 듣는 것은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아라비아에는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며 열매를 맺는다"는 속담이 있다.(106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곤충류의 경우와 흡사한 것

최상의 책에서 우리가 얻는 즐거움의 특성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그것을 쓴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본성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들의 운문, 예컨대, 초서, 마블, 드라이든의 운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장 현대적인 기쁨에 젖는다. 다시 말하여, 그 기쁨의 대부분은 그들의 시에서 모든 시간이 추상회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우리는 꽤 먼 과거, 곧 이백 년 혹은 삼백 년 전에 살았던 이 시인들이 내 영혼에 밀접하게 다가온 바 있는 것, 나 역시 생각해본 바 있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을 말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경이의 기쁨을 맛보면서 동시에 얼마간의 외경심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철학적 주장은 그 증거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이 밖에도 우리는 어떤 예정된 조화, 곧 앞으로 태어날 심령에 대한 어떤 예견과 함께 이들이 장차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한 저축을 준비할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기 전에 보지도 못한 유충을 위하여 먹을 것을 비축해 두는 어떤 곤충류의 경우와 흡사한 것이다.(10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속담에도 있듯이, "서인도 제도의 부를 집으로 가져오길 원하는 자는 그것을 운반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창조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마음이 노력과 창의성으로 분발하고 있을 때, 우리가 읽는 어떤 책이든 그 책장은 다의적인 암시로 빛날 것이다. 모든 문장은 겹으로 의미를 띠고, 그 저자의 의미는 세계 자체만큼이나 광대해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통찰자의 투시와 시간이 그 많은 둔중한 날과 달에 비하여 짧고도 드문 것이듯이, 책 속에 기록된 것은 아마 그 책의 최소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항상 진실인 것이다. 그리하여 분별 있는 자는 플라톤을 읽든 셰익스피어를 읽든, 그 안에서 그 최소의 부분 ㅡ 진정한 예지의 말씀 ㅡ 만을 읽을 것이다. 그는 나머지 부분을,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저서나 셰익스피어의 저서의 몇 배의 분량이라도, 모두 무시해버린다.(108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자연』, <미국의 학자> 중에서


 * * *



에머슨의 대표적인 시도 여기에 덧붙인다. 이미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다시 읽어도 새롭기만 하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지성인들에게 존경받고,

아이들로부터 호의를 얻는 것.


정직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분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거나, 한 뙈기 정원을 가꾸거나,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러한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접힌 부분 펼치기 ▼


 *  뒤늦게라도 링크 하나를 걸어 둔다. 먼 훗날에도 혹시 이 글을 보고 방송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다.

     이 글을 올리고 나서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라디오에서 '에머슨'에 대한 이야기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정말 우연이었겠지만, 마치 '에머슨'을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했다.

    (KBS 제1FM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은 이튿날 새벽 1시에도 전날 저녁 방송을 다시 들려준다.)


http://radio.kbs.co.kr/player/player.html?title=세상의 모든 음악_(2017-04-07)&url=R2007-0077_S000_20170407_PS-2017054157-01-000_02_M4AA0012.mp4&type=303&kind=aod#url

 

펼친 부분 접기 ▲

 



 * * *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7-04-0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머슨에 대한 강의를 얼마전에 들었어요. Kant에 대한 것부터 강의 시작을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초월주의, 자연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도구적 이성에 대한 반향... 미국의 문화부흥, 문화적 독립 선언으로서 <자연>등등. 이후로 에머슨의 사상이 다음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주홍글씨를 쓴 나타니엘 호손도 에머슨의 사상을 흠모하여 에머슨이 살던 곳에서 살아보기까지 했을 정도라고요. 에머슨 다음에 나타니엘 호손, 그 다음으로 허먼 멜빌 순서로 이어지는 강의를 듣고 와서 마침 oren님의 이 페이퍼를 보니 반갑습니다.

oren 2017-04-08 13:54   좋아요 0 | URL
hnine 님께서 들으신 ‘강의 내용‘을 전해 듣고 보니 저도 그 강의 내용을 다시 듣고 싶을 정도네요. 에머슨의 철학과 사상이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우리는 정작 그의 저작조차 제대로 읽고 소화해 내기 벅차다는 생각도 듭니다. 월트 휘트먼이 ˝나는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에머슨이 나를 펄펄 끓도록 했다.‘고 말한 게 제가 가진 책의 날개에도 적혀 있더군요. 우리가 휘트먼처럼 에머슨에 대해 공감하기란 여간 벅찬 게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cyrus 2017-04-0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시가 마음에 듭니다. ‘많이 웃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안할 수 없는 일입니다.

oren 2017-04-08 13:59   좋아요 0 | URL
저는 저 시를 읽으면서 어느새 ‘아이들처럼 많이 웃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반성부터 하게 되더군요.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도 ‘성공‘이라는 에머슨의 말에 다시금 용기를 내봅니다^^

포스트잇 2017-04-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앞문장, ‘정직한 비평가‘와 관계가 있는 걸까요? .......
에머슨....이름은 알고 있지만 한번도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덕분에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oren 2017-04-08 14:30   좋아요 0 | URL
포스트잇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소로우와 에머슨 사이의 우정과 갈등‘이 떠오릅니다. <소로우의 일기>에도 ‘친구와의 갈등‘ 때문에 겪는 고통이 몇 군데 등장하고, <콩코드강과 매리멕 강에서의 일주일>에도 ‘우정‘에 대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심각한 고찰‘이 나오는데, 아마도 틀림없이 에머슨을 염두에 두고 쓴 대목인 듯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갈등에 대해서는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라는 책으로도 나와 있네요.

프레이야 2017-04-0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조적 읽기에 대한 문장도 눈에 듭니다. 최소 부분, 진정한 예지의 말씀만 담기.

oren 2017-04-08 14:32   좋아요 0 | URL
에머슨의 말들은 참 인상적인 표현들이 많은 듯해요. 그가 말한 ‘최소 부분‘,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매번 그 부분만이라도 제대로 찾아 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캐모마일 2017-04-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머슨은 <세상의 중심에서 너 홀로 서라>(원제 : Self-Reliance)로 알게 되었는데, 에머슨이 살았던 시대나 사상적 맥락을 몰라서 이게 왜 그렇게 유명하지? 하고 읽었습니다.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상황과 초월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보고 아 그렇구나 정도만 알고 그냥 넘어갔었네요...이번에 동서문화사 책을 통해서 에머슨의 사상을 좀더 알아보고 싶어지네요.

oren 2017-04-08 14:58   좋아요 0 | URL
캐모마일 님의 말씀처럼 ‘에머슨‘이 미국의 문학과 철학 등에 끼친 영향이 엄청났다는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에머슨의 저작들은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 드물고, 에세이처럼 가볍게 편집되어 나온 얇은 책들이 대부분인 형편도 한 몫 거든 듯합니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말한 대로, ˝책은 그것이 처음 씌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읽혀져야˝ 하는데, 에머슨의 작품에서는 특히 번역 문제가 그걸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듯합니다.

blueyonder 2017-04-08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거나, 한 뙈기 정원을 가꾸거나,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 이런 생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좋은 포스트 감사합니다.

oren 2017-04-08 14:54   좋아요 1 | URL
에머슨의 말을 들으면 누구나 대단하게 여기는 성공이 사실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뀌는 듯합니다. 숱한 성공 스토리를 쓴 사람들이 과연 진짜로 성공한 게 맞을까 싶기도 하고요. 에머슨이 25세때 쓴 일기 한 대목도 이와 연관지어 음미해 볼 만한 내용이 있더군요.
* * *
대중의 무지에 관한 대화나 민중의 마음에 맞는 장황한 웅변이나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늘 불안을 느낀다. 그런 대화야말로 현학적이고 무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은 알고 있고 우리만큼 잘 판단할 줄 안다. 타고날 때부터 지닌 뛰어난 재능이나 훌륭한 재주를 그들보다 더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다. 흔히 이러한 말투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은 모두 범인의 이해력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이다.


솔뫼 2017-06-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에머슨과 헨리 소로우, 허먼 멜빌, 나다니엘 호손이 서로 친구였다니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나 봅니다. 다들 좋아하는 작가분들인데 그런 사이라는 것은 새삼 알았습니다. 물론 님의 글을 보고서야 무릎을 치게 된 것이지요.

oren 2017-06-05 00:03   좋아요 0 | URL
에머슨의 책에서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허먼 멜빌, 너새니얼 호손을 찾기가 어렵지만 『월든』(특히 『주석달린 월든』)에는 이 네 사람들이 가까이 지낸 흔적이 무척 자주 나온답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8041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