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금융 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제윤경.이헌욱 지음 / 부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하나,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 한도가 줄어드는 바람에 더 이상 카드 대금을 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언니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언니는 온갖 악담 중 순화된 건 동생에게, 강도가 심한 건 카드 회사에 퍼붓고 적금을 깨서 사금융에서 빌린 돈과 카드 연체금을 갚아줬다. 아니, 빌려줬다. 그녀는 다시는 카드를 만들지 않겠으며 자기 소득 범위 내에서만 생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 서울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정규직 전망이 보이지 않는 무한 비정규직의 20대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꿈일지도 모른다.

 

 둘, 이사를 하면서 대출을 받아볼까란 생각을 했다. 어차피 월세로 나가는 돈을 대출금 이자로 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본적인 돈 자체가 말도 못하게 없어서 어마어마한 전세 보증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파트 거품이 빠지면서 시세차익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다들 몇천씩 수익을 올린다는데 끝물에 나도 살짝 발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건 아니다. 뭔가 복잡하고 나랑 맞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나만 가만히 앉아서 손해보는, 전혀 손해가 아닌데도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4퍼센트대 적금과 예금에 가입해 있던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자산 증식 잔치에서 소외된 듯한 억울함에 휩싸였다. 안정적인 재무관리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경쟁에서 낙오한 패자의 몫으로 느껴졌다. 결국 펀드 투자를 계기로 평범한 중산층도 불안정한 노동 소득을 대체할 대박 투자 기회를 얻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전국적으로 부자 열풍, 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셋,  관리비를 카드로 결재하면 포인트를 쌓아주는 카드가 있다. 이왕 내는 돈이면 포인트까지 받으면 좋을 것 같다. 카드를 신청하려다 조건을 살펴봤다. 최초 3개월은 조건 없이 포인트를 쌓지만 그 후에는 이용실적에 따라 포인트를 차등 적립한다, 포인트는 어디 어디에 쓸 수 있으며 어쩌고 저쩌고. 포인트를 모아서 관리비를 절약하려는 야무진 생각은 복잡한 계산 앞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특정 주유소에서 포인트를 적립하기 위해 포인트를 훨씬 웃도는 기름값을 도로에 뿌리며 다니는 차주도 많을 것이다. 관리비 결재 카드를 쓴다면 포인트를 위해 배보다 배꼽이 큰 배팅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카드는 몇 푼 안 되는 포인트 적립과 할인 혜택에 대한 강박으로 소비의 선택이 제한되는 일이 허다하다.'

 

 약탈적 금융은 소득 수준을 뛰어넘는 신용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회는 높은 신용을 제공하는 금융기관, 빚도 자산이란 프레임을 짜는 언론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더라도 정부 역시 빚에 쪼들린 사람에게 또 다시 빚을 빌려주거나 법개정과 복지로 해결해야할 일을 모조리 빚으로 해결하는 셈이다.  전세자금대출이 아니라 주거 약자를 보호하도록 제도 개선을 검토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가혹한 채권 회수 시스템 자체가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지금까지의 채권 회수 시스템은 채무자들을 고통으로 내모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다시 재기에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해 보려는 의욕마저 꺾는다. 채무상환에 앞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채무자의 품위부터 지켜야 한다'는 말 역시 그런 연속선상에서 나왔다. 채무조정이 지연될수록 범죄와 자살, 가정파탄 등으로 인해 사회적 비용만 증가할 뿐이다. 채권추심에 시달리고 자신들을 도덕적 해이로 보는 사회의 시선이 만들어 내는 죄의식은 채무자들을 이중 삼중의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저소득층에게 더 불리한 채무조정, 개인파산 제도 역시 문제이다.

 

 이 책은 자칫 일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채무자에 대한 도덕적 해이를 희석하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는다며 은행에서 일하는 분과 얘기를 하다가 나온 이야기도 그와 같았다. 전문적으로 빚을 지고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려주는 학원까지 있다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의 잘못된 속성을 지적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하고 '선의의' 채무자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수익률이 높은 곳에 투자한다면 빚도 자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경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돈을 더 벌 수 있는데 너무 방어적인건 아닐까란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한번 어긋나면 도저히 회생불가능한 현금융체계에서 더 큰 돈을 바라고 투자라기보다는 투기를 한다면 쪽박 차는건 순식간일 것이다. 게다가 거품 낀 집세와 가게세 덕분에 생기는 사회적 비용(청년층이 자립할 수 없고 내 집 마련은 점점 요원해지는 일)은 어쩌고. 이런 위험 대신 대박행진이니 누가 얼마 벌었단 식의 소문들에 일희일비하며 소극적 금융이용자의 자격지심만 덩달아 키운다면 약탈적 금융의 좋은 먹잇감이 될 확률이 높다.

 

  타협의 시대에는 큰 부자가 된 사람은 없었지만, 절대 다수의 미국인이 전보다 더 잘 살게 되었습니다. 비록 혁신은 덜됐지만 개개인의 삶의 스케줄은 대개 예측 가능했고, 지금과 같은 절박감이나 불안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성공에 이르는 비밀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를 필요도 없고, 언제 뱀사다리를 밟고 미끄러져 내려올지 몰라 가슴을 졸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죽음의 계곡>의 저자 유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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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2-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서점에서 <부채인간>이라는 책을 봤는데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채를 만들지 않는 것은 매우 힘들고, 부채는 결국 개인의 모든 것을 통제하여 지배한다는 이야기인데, 뭐 그것을 '약탈적 금융사회'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제 아는 분도 개인파산을 하신 분이 있고, 하우스 푸어들의 이야기도 들리고, 무엇인가가 상당히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있어요. (그 무엇은 파국일수도,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겠죠.)저도 최근에 가지고 있던 카드 몇 장을 없앴어요. 근데 도저히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겠더라구요. 이게 약탈적 금융사회의 자발적인 노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rch 2013-02-21 11:41   좋아요 0 | URL
저는 신용카드를 하나 갖고 있어요. 자동이체용으로. 몇달 전에 아예 없앴는데 처음엔 삼성꺼라 없애고 그 다음엔 너무 높은 한도가 부담된달까. 아니다, 이게 아니라 월급 받으면 고스란히 카드 대금으로 나가니까 허탈했어요. 카드 긁으면서 불안했거든요. 엄마랑 고스톱 치다가 제가 가리?하니까 '은행 돈 없어도 니 주머니에 돈 없는 일 없다'고 하시긴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이 얘기는 왜 나온건지.

숲노래 2013-02-1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가 어려워도 즐겁게 즐겁게 써서 좋은 생각 나누어 주셔요~

Arch 2013-02-21 11:41   좋아요 0 | URL
즐겁게 안 써지네요. 잘 정리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요.
 

 

 

 

 

 

 

 

 

 김두식의 책을 보다가 정혜신씨 인터뷰를 찾아봤다. 인터뷰에서 소개한 책을 보고는 정혜신의 칼럼과 이전 저작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통찰과 감탄할만한 이야기들을 읽길 바랐다. 헌데 웬걸, 무슨 잠언집 같은 이야기만 잔뜩 씌여져 있는 것이다. 제목이랑 저자만 바꾸면 '좋은 생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물론 두분이야 서로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지만 책을 읽는 입장에선 참 맥 빠지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나도 나이가 들고 세상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면 좀 납득이 될까 싶은 이야기들.

 

 그래서 설렁설렁 책을 봤다. 그만 봐도 될 것을 설마 정혜신인데, 남자vs남자를 쓰고 '식판의 슬픔'을 쓴 정혜신인데 싶어 계속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책을 좀 더 봐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답지 않아'란 부분에서 말이다.

 

 지나가는 말로 친구에게 그랬다. '공무원 시험 준비할까봐. 지금처럼 하루를 출근과 퇴근으로 반복하느니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의 삶도 나쁘지 않겠어.' 친구는 그 얘기가 도저히 납득되지 않으며 왜 '너답지 않은' 얘기를 하느냐고 질책했다. '그럼 나다운건 뭔데'란 호응구 대신 살짝 겁이 났다. 이 친구가 알고 있는 나다움을  잃어버린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어렸던 내가 안정을 추구하는건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라며, 나는 다르다며 열과 성을 다해 '다름'을 말로만 보여주는 동안 누군가는 정말 다르게 살거나 기반을 닦아놓은 다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변해야한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던가, 실은 나다움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던가.

 

 나는 여태 좀 모자라게' 하기 싫지만 돈을 벌기 위해 해야하는 일:돈이 안 되지만 하고 싶은 일'로 모든걸 나눠왔다. 그런데 조금 오래 일을 하다보니 월급=권태와 무임금=불안정=자유로움만은 아니란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역시 남들 진작 알고 있는걸 이제 와서 알게 됐다고 뒷북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업의 본질'에서도 길게 푸념하긴 했지만 일의 어떤 면은 설레고 어떤 면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이런 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렇지 않겠나 싶은거다.

 

 알바를 할 때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나는데도 최저임금에 못미치는 돈을 쥐고선 함부로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지금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저 그런 흔한 일을 하면서 흔한 불안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업의 본질을 꿰뚫고 원하는대로 살려면 지루한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월급을 위해서 일하는거냐고 되묻는건 우문이다. 일의 기간이 늘어가면서 일에 연관된 사람들을 알게 되고 업의 본질만큼이나 융통성 있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경험같은게 쌓이는 것도 꽤 짜릿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써보고 싶었던 책, 하지만 벌써 나온 책.

이 책에서도 일 얘기가 나온다. 뱃일은 끝이 없어 힘들다는 막내에게 큰형님이 말한다.

 

 그래, 뱃일이 힘들지. 그치만 무슨 일이든 다 마찬가진 기라. 막내야 바라, 니가 평생 여 있을 거 아이다 아이가? 이 세상에 있제, 이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다. 무슨 일이든 다 힘든 기라. 니 당장은 뱃일이 제일 힘든 거 같제? 여만 나가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제? 근데 그게 안 그렇다. 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건 그거 다 힘들 끼라. 내가 앞날이 창창한 아한테 악담을 하는 게 아이고 일이란 게 그런 기라. 일은 우찌 됐든 힘든 기라.

 그러니까 뭐든지 있다 아이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 니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해내는 기라. 내는 있다 아이가, 여 아들은 이런 얘기함 비웃는다만 그냥 바다가 좋았다. 내는 언제나 바다가 좋았어. 내가 힘들고 답답할 때 아무 말 없이 품어주는 게 바다뿐이었거든. 그니까 내 이적까지 이라고 잇는 거 아니겠나?

 

 일은 우찌 됐든 힘든거다. 왜 일을 재미있게 해야한다고 생각했지? 인생이 행복할거라고 믿는 인간들을 조롱했던 철학자처럼 전제가 잘못된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공무원은 어때란 말이 나온거고 이 페이퍼까지 이르게 된거다. 하고 싶은 일을 직업의 범주에 넣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은 어떨까. 여러명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제대로 진행시키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거나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는 줏대를 기르는걸 업으로 삼던가, 혹은.

 

 '너답지 않아'의 결론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학교 다닐 때 친하게 지낸 언니랑 통화를 하다 요새는 나도 나답지 않다고 느끼고 내가 그런 소리를 들어서 충격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언니는 어렸던 내가 독특했다면서 좀 더 까졌어야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 방구석에서 여행을 꿈꾸고, 불만만 말하면서 자유롭길 바라고 말이지.

-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어른이 되는건 그런거 같아. 뻔하게 안정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보듬을 수 있고 일상의 권태도 견딜 수 있는거 말야. 우리가 안정을 추구하는 어른을 뻔하게 봤지만 그것도 얼마나 힘든지 이젠 느끼잖아.

- 그럼, 그럼 나는? 그때 난 뭘 믿고 그렇게 까불었대

- 다 젊으니까 그렇지. 아직 덜 여물고 어리니까.

 

 언니란 거울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다운 게 뭔지 모르면서 혼자 생각하고 읽은걸 내 것마냥 떠벌리고 다니며 위악을 부릴 때, 너 나중에 그렇게만 안 해봐라 벼르는게 아니라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도 그런 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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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2-06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도 arch 님이 있어서 늘 좋고 고맙게 여기리라 느껴요.
힘들거나 고달픈 일이 있음
그 삶 그대로 하루를 찬찬히 돌아보며
새로운 마음 되어 어떤 이야기가 나한테 찾아오려는가 하고
생각해 보셔요.
이제 겨울도 얼마 안 남았어요.

Arch 2013-02-07 09:38   좋아요 0 | URL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나는 또 나인지라... 그래도 가끔 정신을 번쩍 깨우는 소리를 들으면 각성하고 반성하게 돼요.

맥거핀 2013-02-0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것들이 그 때가 되어보지 않으면, 스스로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말만 들어서는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아는걸까...아, 이 말도 말이군요.

Arch 2013-02-07 09: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페이퍼에 자기합리화 속셈이 들어있는 것도 아직 전 몰라서 뭔가를 더 증명하고 싶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뷰리풀말미잘 2013-02-0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여쓰기도 하고, 문단 사이 간격 띄우기도 하는군요. 왜죠?

Arch 2013-02-07 09:40   좋아요 0 | URL
원래 그랬거든요! 뒷북 미잘

M의서재 2013-02-0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 님,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 남기네요. 저 또한 한때 나다운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위악을 부린 적도 있는 것 같아서요.ㅎㅎ 이제야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법을 좀 알아가고 있어요.. 말씀하신데로, 생각보다 짜릿하네요^^

Arch 2013-02-07 09:42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의 삶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아직 나를 잘 몰라서인 것 같아요. 누군가의 일상에 일희일비하거든요. 나를 잘 알아야 남도 잘 안다고 하는데 말처럼 쉽진 않아요.
 

* 무도의 '어떤 가요'가 욕을 먹고 있다. 논란의 본질은 '완성도 떨어지는 노래가 공중파 방송 프라임 시간대에 홍보가 돼 음원차트에서 인기를 얻는건 부당하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번 논란에는 거대 기획사와 신인 작곡가, 음원 유통체계, 대중의 취향 등등의 문제가 걸쳐져 있다.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각자가 표명하는 입장도 다르다. 사람들의 의견을 읽다보니 애초에 내가 직관적으로 느꼈던 지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북 멋쟁이'는 좀 뻔했고, 박명수는 대단하고, 무도의 기획은 살짝 아쉬운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하기는 어떤 문제마다 의견을 갖고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도 든다.

 

* 강심장에는 여러 명의 연예인이 나와서 토크 배틀을 벌인다. 어느 회에선가 안타까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 여자 연예인이 화장을 고치는 장면이 캡쳐됐다. 찌라시 신문에서는 '태도 논란'-이게 왜 논란거리인지 모르겠지만- 문제를 네티즌의 날카로운 눈썰미 운운하면서 기사를 띄운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라면서 자신들이 기대하는 바대로 웃고 울기를 바라는걸까. 그런 발상은 어디서 나온건지 참 역겹다. 

 

* 누가 자기도 성기 수술을 해야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중년 남성들이 많이들 하는데 자기도 그래야할 것 같다고. 러프한 비교지만 도서 정가제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사고, 잘 읽지 않는다, 책과 연관된 인프라라고 해봐야 공공 도서관의 책읽기 프로그램이 다인데 이마저도 유명무실하다.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가까운 곳에 서점도 없다. 도서정가제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도서정가제만 시행되면 인터넷 서점은 어려워지고 출판계와 서점은 살아날 것 같은 분위기다. 수술만 한다면 중년의 자신감이라도 샘솟을 줄 아는가보지?

 

 끝장토론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냥 서로 좀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그간의 사정과 서로의 입장차가 좀 더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같은 업계 사람들끼리 한방이 아닌 여러 방의 정책 제안 같은 것도 할 수 있을테고 말이다. 독자들도 참여하고 출판사, 인터넷 서점, 동네서점 사람들 모두 모여서 얘기를 하면 좀 더 낫지 않을까.

 

* 술 먹다가 음악 배틀이 벌어졌다. koop에 이어 nujabes의 Aruarian dance가 나온다. 곡 중간 중간에 하모니카 연주가 나오니까 바로 뒤를 이어 하모니카 연주곡이 나온다. 저가의 스피커와 잭, 핸드폰 혹은 mp3만 있다면 가능한 주접이었다. 우리 둘은 주접 떠는 줄도 모르고 겸손한 벼처럼 고꾸라진 동생 옆에서 새벽 깊어지는줄 모르고 찧고 까불었다. 딱 주접 수준의 감상이었다. 그래서 그 노래들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아이와 개성과 조직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간간히 떠오른다.

 

 자신의 개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금의 회사에서 뜻한 바가 있어 참고 있다는 그에게 물었다. 그럼 자기가 훼손되거나 달라지지 않냐고. 확고하게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정말 그럴까 싶다. 불평불만을 일삼던 아치가 회사에서 웃음과 침묵, 고개 끄덕임으로 버티는 동안 '지랄 총량의 법칙'에 따른 분출되지 않은 욕구 혹은 욕망 같은 것이 회사 아닌 곳에서 막 튀어나와서 답답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니 말이다. 옆에 사람은 물론 나를 변화시키거나 각성시키지 못하는 불평불만은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한편으로 나의 모남만큼 좀 다른 조카에 대해서 숙제를 잘 하고, 이를 잘 닦고 등등의 바람을 갖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 아이 사이'를 읽다보니 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이모 말을 잘 듣는 조카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할 일을 하고 자신이 판단하고 책임지는 아이가 되길 바랐는데 나는 조력자가 아니라 지휘자였다. 나의 개성만큼 누군가의 개성도 받아줄 수 있는 아량이 있는가 앞에서 한참 동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 예전에 다른 서재분도 말했지만 책을 읽는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다른 건 정말 책을 좀 더 읽는다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책에 짚어 놓은 문제의식, 다른 사람의 진보적인 생각,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읽는 행위에서 끝나고마는거다. 그런데 남의 생각을 자꾸 입으로 말하다보니 표리부동이 습관으로 굳어버렸다. 조카들에게 말이 안 먹히는 이유다.

 

* 아침에 아이들 방학 중 프로그램을 까먹었다고 지희한테 '이모 치매 아니냐, 병원 가봐라'란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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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13-01-2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면에서 밑줄을 긋게 하네요 ㅋㅌㅋ

Arch 2013-01-22 19:45   좋아요 0 | URL
ㅋㄷㅋㄷ 비아그라가 더 세던데요.

숲노래 2013-01-2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하다고 하셔요~ 나이 먹으면 다 잊어버리기도 한다고 ^^;;

Arch 2013-01-22 19:45   좋아요 0 | URL
아침에 좌절했다고 앓는 소리 냈어요. 히~

이진 2013-01-2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도가 욕을 먹는 건... 그러니까 참 보기 안 좋아요.
음원 수입을 자기네들이 다 챙긴다면 몰라, 좋은 일에 쓰는데.
다른 가수들의 시장을 침해했다는 의견은 개인적으로 와닿지 않네요.
무도도 다른 가수들만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정도로 큰 호응을 얻는 거지,
만약 무모한 도전때 이런 특집을 했으면 과연...

Arch 2013-01-22 19:50   좋아요 0 | URL
음원 수입 기부 가지고도 뭐라고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음원 유통체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큰 기획사의 기획력을 따를 수 없는 열패감도 있을 것 같아요. 예술하는 분들의 정통 의식 같은 것도 있기 때문에 그전 가요제와 다르게 '어떤 가요' 기획이 더 욕을 먹는지도 모르겠어요.

카스피 2013-01-2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돈 문제로 귀결되는데 Arch님 말처럼 '완성도 떨어지는 노래가 공중파 방송 프라임 시간대에 홍보가 돼 음원차트에서 인기를 얻는건 부당하다'가 이번 논란의 본질이겠지요.

Arch 2013-01-23 11:32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전 꼭 음악이 그렇게 완성도가 높아야하나, 음악하는 사람의 선민의식 같은 것도 느껴져요.
 

 한가로운 오후였다. 발 뒤꿈치가 가끔씩 찌릿하고 몸도 찌뿌등했지만 모처럼 까미랑 산책을 나오니 참 좋았더랬다. 언제 내린 눈인지 기억도 안 나는 눈이 아직도 안 녹았다.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디디던 까미가 젖은 발로 나를 타고 올랐지만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옷은 빨면 되고 까미는 목욕할 때가 됐으니.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았다. 지난번에 봤던 할아버지도 강아지랑 산책을 나오셨나보다.

 

 몇개월 전에 봤던 할아버지의 개, 또또는 정말 귀여운 강아지였다. 까미가 돌아다니는건 신경도 안 쓰고 할아버지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얌전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폴짝 폴짝 뛰면서 할아버지 말은 귓등으로 죄다 흘리고 아주 신이 났다. 까미는 집에서 보여주던 고집과 식탐과 호기심 가득한 성향을 까맣게 잊고 또또 앞에선 자꾸 피해다니기만 한다. 또또는 그게 또 신났는지 까미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장난을 건다. 할아버지는 또또가 집에선 안 그러는 나오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신다. 저도 모르겠어요.

 

 강아지와 생활하는데 초보인 내가 이것저것 질문하면 할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간혹 질문이나 호응이 없어도 큰 개를 만나도 쫄지 않는 또또, 핸드폰을 물어뜯는 또또, 아내의 무릎 수술, 자녀의 내력 등의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나도 내 얘기의 어느 지점을 털어놔야하지 않을까, 왜 어른들은 자꾸 말을 하는 걸까, 자신을 드러내는 대화가 아니라 분위기 환기용 대화라면 날씨 얘기 정도는 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던가 안 했던가. 큰 개를 만나도 쫄지 않는 또또가 큰 개의 주인에게도 쫄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몇 번인가 더 듣고 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날이 추워선지 사람이 많이 없어 까미와 또또는 아주 신났다.

 

 까미 쫓아다니기가 시들했는지 나무 옆에서 안 나오는 오줌을 싸는 시늉을 하던 또또가 내게 다가왔다. 으응, 나랑 놀자고? 까미처럼 나한테 올라오려고 발을 타는가 싶었다. 부드러운 개발이 나를 감싼다. 또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땅을 딛은 또또의 두 다리가 리드미컬한 한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적인, 혹은 무의식적이면서 의식적인 행위였다. 또또는 내 다리를 몇번 감싸다가 할아버지에게 붙잡혔다. 할아버지와 또또는 인사말도 남기지 않은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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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1-2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승전...어머나 군요. 까미는 검은색 얼룩무늬가 있는 그레이하운드로 또또는 푸르고 귀가 아주 큰 시추로 내 맘대로 상상하고 갑니다. (물론 이것은 제 마음대로의 상상.)

Arch 2013-01-21 13:05   좋아요 0 | URL
둘 다 아니에요. 까미는 까만 미니핀이구요. 또또는 생소한 종의 강아지였어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가고 싶어요. (물론 이것은 그냥 꿈일지도)

숲노래 2013-01-21 0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를 키우는 분은
개랑 마실을 다니며
개한테도 사람한테도 좋은
풀내음과 흙내음을 찾아다닐 수 있어
즐거우리라 느껴요

Arch 2013-01-21 13:06   좋아요 0 | URL
네. 혼자 다닐 때보다 배는 즐거워요. 저는 음악 듣고 까미는 냄새 맡고 돌아다녀요. 가끔 까미를 부르면 기절할 것처럼 뛰어와서 아는척하는게, 참.

카스피 2013-01-2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어려서는 참 강아지를 많이 키웠는데(변견부터 도사견까지...),남의 집 살이는 하면서부터는 동물키우기 참 힘들더군요^^;;

Arch 2013-01-23 11:31   좋아요 0 | URL
지금 남의 집 살이 하고 있어요. 까미가 문짝을 다 긁어놔서 나중에 이사갈 때 어떻게 해야할지 눈 앞이 깜깜해요.
 

 

 1119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특례법),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5개 법안의 개정안을 심의, 의결되었다. 개정 법률들은 오는 619일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는 완전히 폐지되어 고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중압감을 덜었다. 반의사불벌죄로 가해자 측이 끈질기게 합의를 요구하는 일이 뒤따라 피해자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주는 일이 사라질 것이며 고소 취하를 염두에 두고 수사재판기관 측에서 소극적 수사로 일관하는 모습도 없어질 예정이다.

 

 유사성교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신설됐고 성폭력 범죄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했다.

 강간죄의 구성 요건과 객체를 '성기 삽입''부녀'로 한정해온 형법의 규범적 표상은, 여성에 대한 성기간음을 특별히 취급하여 남성 성기를 여성 성기에 삽입하는 행위를 성관계의 핵심으로 취급하는 남성성기 중심의 성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강간죄를 '여성에 대한 간음행위'라는 성차별적이고 성기중심적인 행위에 한정함으로써, 성폭력이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아닌 여성의 정조 보호라는 이데올로기를 존속시키는데 기여해왔다.

 

 피해자 보호제도도 대폭 강화되었다. 다만 성범죄의 형량과 처벌도 전반적으로 강화된 점은 문제로 보인다. (강간죄와 유사강간죄의 법정형이 상향되었고, 전자발찌의 착용 대상이 강도죄까지 확대.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대상이 제도시행 3년 전까지 소급되었으며, 성폭력 피해자의 연령과 무관하게 화학적 거세 적용대상이 확대.) 처벌 강화와 화학적 거세는 사회의 불관용과 인권 보호 제외 대상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성폭력은 우리 사회 전체의 성의식, 성관념 문제가 아니라 몇몇 개인의 문제로 특수화시킬수록 여성이나 아동, 성소수자 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하는 문화는 성찰될 수 없고 성폭력의 근본적 해결은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기사 전문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244§ion=sc1§ion2=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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