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오후였다. 발 뒤꿈치가 가끔씩 찌릿하고 몸도 찌뿌등했지만 모처럼 까미랑 산책을 나오니 참 좋았더랬다. 언제 내린 눈인지 기억도 안 나는 눈이 아직도 안 녹았다.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디디던 까미가 젖은 발로 나를 타고 올랐지만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옷은 빨면 되고 까미는 목욕할 때가 됐으니.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았다. 지난번에 봤던 할아버지도 강아지랑 산책을 나오셨나보다.

 

 몇개월 전에 봤던 할아버지의 개, 또또는 정말 귀여운 강아지였다. 까미가 돌아다니는건 신경도 안 쓰고 할아버지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얌전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폴짝 폴짝 뛰면서 할아버지 말은 귓등으로 죄다 흘리고 아주 신이 났다. 까미는 집에서 보여주던 고집과 식탐과 호기심 가득한 성향을 까맣게 잊고 또또 앞에선 자꾸 피해다니기만 한다. 또또는 그게 또 신났는지 까미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장난을 건다. 할아버지는 또또가 집에선 안 그러는 나오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신다. 저도 모르겠어요.

 

 강아지와 생활하는데 초보인 내가 이것저것 질문하면 할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간혹 질문이나 호응이 없어도 큰 개를 만나도 쫄지 않는 또또, 핸드폰을 물어뜯는 또또, 아내의 무릎 수술, 자녀의 내력 등의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나도 내 얘기의 어느 지점을 털어놔야하지 않을까, 왜 어른들은 자꾸 말을 하는 걸까, 자신을 드러내는 대화가 아니라 분위기 환기용 대화라면 날씨 얘기 정도는 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던가 안 했던가. 큰 개를 만나도 쫄지 않는 또또가 큰 개의 주인에게도 쫄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몇 번인가 더 듣고 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날이 추워선지 사람이 많이 없어 까미와 또또는 아주 신났다.

 

 까미 쫓아다니기가 시들했는지 나무 옆에서 안 나오는 오줌을 싸는 시늉을 하던 또또가 내게 다가왔다. 으응, 나랑 놀자고? 까미처럼 나한테 올라오려고 발을 타는가 싶었다. 부드러운 개발이 나를 감싼다. 또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땅을 딛은 또또의 두 다리가 리드미컬한 한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적인, 혹은 무의식적이면서 의식적인 행위였다. 또또는 내 다리를 몇번 감싸다가 할아버지에게 붙잡혔다. 할아버지와 또또는 인사말도 남기지 않은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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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1-2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승전...어머나 군요. 까미는 검은색 얼룩무늬가 있는 그레이하운드로 또또는 푸르고 귀가 아주 큰 시추로 내 맘대로 상상하고 갑니다. (물론 이것은 제 마음대로의 상상.)

Arch 2013-01-21 13:05   좋아요 0 | URL
둘 다 아니에요. 까미는 까만 미니핀이구요. 또또는 생소한 종의 강아지였어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가고 싶어요. (물론 이것은 그냥 꿈일지도)

숲노래 2013-01-21 0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를 키우는 분은
개랑 마실을 다니며
개한테도 사람한테도 좋은
풀내음과 흙내음을 찾아다닐 수 있어
즐거우리라 느껴요

Arch 2013-01-21 13:06   좋아요 0 | URL
네. 혼자 다닐 때보다 배는 즐거워요. 저는 음악 듣고 까미는 냄새 맡고 돌아다녀요. 가끔 까미를 부르면 기절할 것처럼 뛰어와서 아는척하는게, 참.

카스피 2013-01-2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어려서는 참 강아지를 많이 키웠는데(변견부터 도사견까지...),남의 집 살이는 하면서부터는 동물키우기 참 힘들더군요^^;;

Arch 2013-01-23 11:31   좋아요 0 | URL
지금 남의 집 살이 하고 있어요. 까미가 문짝을 다 긁어놔서 나중에 이사갈 때 어떻게 해야할지 눈 앞이 깜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