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의 책을 보다가 정혜신씨 인터뷰를 찾아봤다. 인터뷰에서 소개한 책을 보고는 정혜신의 칼럼과 이전 저작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통찰과 감탄할만한 이야기들을 읽길 바랐다. 헌데 웬걸, 무슨 잠언집 같은 이야기만 잔뜩 씌여져 있는 것이다. 제목이랑 저자만 바꾸면 '좋은 생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물론 두분이야 서로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지만 책을 읽는 입장에선 참 맥 빠지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나도 나이가 들고 세상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면 좀 납득이 될까 싶은 이야기들.

 

 그래서 설렁설렁 책을 봤다. 그만 봐도 될 것을 설마 정혜신인데, 남자vs남자를 쓰고 '식판의 슬픔'을 쓴 정혜신인데 싶어 계속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책을 좀 더 봐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답지 않아'란 부분에서 말이다.

 

 지나가는 말로 친구에게 그랬다. '공무원 시험 준비할까봐. 지금처럼 하루를 출근과 퇴근으로 반복하느니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의 삶도 나쁘지 않겠어.' 친구는 그 얘기가 도저히 납득되지 않으며 왜 '너답지 않은' 얘기를 하느냐고 질책했다. '그럼 나다운건 뭔데'란 호응구 대신 살짝 겁이 났다. 이 친구가 알고 있는 나다움을  잃어버린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어렸던 내가 안정을 추구하는건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라며, 나는 다르다며 열과 성을 다해 '다름'을 말로만 보여주는 동안 누군가는 정말 다르게 살거나 기반을 닦아놓은 다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변해야한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던가, 실은 나다움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던가.

 

 나는 여태 좀 모자라게' 하기 싫지만 돈을 벌기 위해 해야하는 일:돈이 안 되지만 하고 싶은 일'로 모든걸 나눠왔다. 그런데 조금 오래 일을 하다보니 월급=권태와 무임금=불안정=자유로움만은 아니란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역시 남들 진작 알고 있는걸 이제 와서 알게 됐다고 뒷북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업의 본질'에서도 길게 푸념하긴 했지만 일의 어떤 면은 설레고 어떤 면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이런 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렇지 않겠나 싶은거다.

 

 알바를 할 때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나는데도 최저임금에 못미치는 돈을 쥐고선 함부로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지금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저 그런 흔한 일을 하면서 흔한 불안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업의 본질을 꿰뚫고 원하는대로 살려면 지루한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월급을 위해서 일하는거냐고 되묻는건 우문이다. 일의 기간이 늘어가면서 일에 연관된 사람들을 알게 되고 업의 본질만큼이나 융통성 있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경험같은게 쌓이는 것도 꽤 짜릿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써보고 싶었던 책, 하지만 벌써 나온 책.

이 책에서도 일 얘기가 나온다. 뱃일은 끝이 없어 힘들다는 막내에게 큰형님이 말한다.

 

 그래, 뱃일이 힘들지. 그치만 무슨 일이든 다 마찬가진 기라. 막내야 바라, 니가 평생 여 있을 거 아이다 아이가? 이 세상에 있제, 이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다. 무슨 일이든 다 힘든 기라. 니 당장은 뱃일이 제일 힘든 거 같제? 여만 나가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제? 근데 그게 안 그렇다. 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건 그거 다 힘들 끼라. 내가 앞날이 창창한 아한테 악담을 하는 게 아이고 일이란 게 그런 기라. 일은 우찌 됐든 힘든 기라.

 그러니까 뭐든지 있다 아이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 니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해내는 기라. 내는 있다 아이가, 여 아들은 이런 얘기함 비웃는다만 그냥 바다가 좋았다. 내는 언제나 바다가 좋았어. 내가 힘들고 답답할 때 아무 말 없이 품어주는 게 바다뿐이었거든. 그니까 내 이적까지 이라고 잇는 거 아니겠나?

 

 일은 우찌 됐든 힘든거다. 왜 일을 재미있게 해야한다고 생각했지? 인생이 행복할거라고 믿는 인간들을 조롱했던 철학자처럼 전제가 잘못된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공무원은 어때란 말이 나온거고 이 페이퍼까지 이르게 된거다. 하고 싶은 일을 직업의 범주에 넣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은 어떨까. 여러명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제대로 진행시키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거나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는 줏대를 기르는걸 업으로 삼던가, 혹은.

 

 '너답지 않아'의 결론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학교 다닐 때 친하게 지낸 언니랑 통화를 하다 요새는 나도 나답지 않다고 느끼고 내가 그런 소리를 들어서 충격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언니는 어렸던 내가 독특했다면서 좀 더 까졌어야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 방구석에서 여행을 꿈꾸고, 불만만 말하면서 자유롭길 바라고 말이지.

-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어른이 되는건 그런거 같아. 뻔하게 안정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보듬을 수 있고 일상의 권태도 견딜 수 있는거 말야. 우리가 안정을 추구하는 어른을 뻔하게 봤지만 그것도 얼마나 힘든지 이젠 느끼잖아.

- 그럼, 그럼 나는? 그때 난 뭘 믿고 그렇게 까불었대

- 다 젊으니까 그렇지. 아직 덜 여물고 어리니까.

 

 언니란 거울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다운 게 뭔지 모르면서 혼자 생각하고 읽은걸 내 것마냥 떠벌리고 다니며 위악을 부릴 때, 너 나중에 그렇게만 안 해봐라 벼르는게 아니라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도 그런 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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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2-06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도 arch 님이 있어서 늘 좋고 고맙게 여기리라 느껴요.
힘들거나 고달픈 일이 있음
그 삶 그대로 하루를 찬찬히 돌아보며
새로운 마음 되어 어떤 이야기가 나한테 찾아오려는가 하고
생각해 보셔요.
이제 겨울도 얼마 안 남았어요.

Arch 2013-02-07 09:38   좋아요 0 | URL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나는 또 나인지라... 그래도 가끔 정신을 번쩍 깨우는 소리를 들으면 각성하고 반성하게 돼요.

맥거핀 2013-02-0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것들이 그 때가 되어보지 않으면, 스스로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말만 들어서는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아는걸까...아, 이 말도 말이군요.

Arch 2013-02-07 09: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페이퍼에 자기합리화 속셈이 들어있는 것도 아직 전 몰라서 뭔가를 더 증명하고 싶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뷰리풀말미잘 2013-02-0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여쓰기도 하고, 문단 사이 간격 띄우기도 하는군요. 왜죠?

Arch 2013-02-07 09:40   좋아요 0 | URL
원래 그랬거든요! 뒷북 미잘

M의서재 2013-02-0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 님,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 남기네요. 저 또한 한때 나다운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위악을 부린 적도 있는 것 같아서요.ㅎㅎ 이제야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법을 좀 알아가고 있어요.. 말씀하신데로, 생각보다 짜릿하네요^^

Arch 2013-02-07 09:42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의 삶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도 아직 나를 잘 몰라서인 것 같아요. 누군가의 일상에 일희일비하거든요. 나를 잘 알아야 남도 잘 안다고 하는데 말처럼 쉽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