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은 환갑이 넘은 영어 선생님이다. 한국에 온 지 만 이 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교수인 아들의 초청으로 같은 대학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답게 다정다감하고 이해심이 있으며 시원한 성격이다.

  한데, 어제 공부 멤버 중 한 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잔의 교수법에 대해 우리들의 의견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게 요지였다. 그미 앞에서는 대세를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 고민하고 있다.

  수잔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첫 강의를 맡은 학기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고급반 학생들의 요구와 수잔의 교수법이 달라 종강 무렵엔 많은 이탈자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 다음에 우리를 맡게 되었는데 수강생들이 초보자들이라서 그런지 별 무리 없이 한 학기를 마쳤다. 얼마 전 개설한 가을 학기에 10명이 재수강할 정도로 출발은 산뜻하다. 한데 2학기 수업을 서 너 번 들은 상태에서 재수강생 사이에서 몇 의견이 나오는 모양이다.

  발표하는 사람만 한다.  질문을 하라는데 초보자가 쉽게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수잔이 번호대로 질문하고 그들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 골고루 수잔의 입김을 맛보지 않겠는가, 하는 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수잔의 가르치는 방식이 여물지는 못한 게 사실이다. 나이가 있다보니 테이프나, 디브이디 조작도 서툴고 , 수업 리듬을 놓치면 잠시의 공백이 생기기도 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정적이 곧 수잔의 카리스마에 흠이 될 수도 있음을 사람들은 감지하는 것이다. 두 시간 동안 다채로운 방식을 활용하지 못하고 단조롭게 진행하니 흥미를 못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수업자체를 장악하지 못해서 어수선할 때가 많다. 이런 불만들을 멤버 몇몇이 수잔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해보자 하는데, 내 개인적 심정은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수잔에게는 수잔의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따라가냐, 마냐는 학생이 선택할 문제이다. 수 십년 동안 해온 교수법을 수강생들이 요구한다고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요구한 만큼 수강생들의 태도가 진전될 것 지도 않다. 두 번째는 수잔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 좋게 얘기한다고 해도 안 좋은 경험이 있는 수잔은 자신의 교수법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마음 아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콩글리쉬를 할지라도 질문이 많은 나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수잔을 대면해주길 바라는데 고민이다. 멤버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수잔에게 별 불만이 없는 내가 앞장 설 수도 없고. 특히,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우루루 몰려 다니면서 패를 만드는 모양새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든지, 타협을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일단은 대세를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글쎄 대세가 무엇인지는 낼 수업을 가봐야 알겠다.

  어떤 식의 결론이든 수잔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쉽게 상처받을 영혼은 아니겠지만. 수잔, 호기심 많고, 욕심 많은 수강생들 입장도 생각해 줘. 그리고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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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개월 동안 잘 놀았다. 서재 관리 따윈 관심도 없었다. 더러 책을 샀고, 가끔은 읽었으나 별 진전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긴 하다. 모두가  '나의 영어 선생님' 때문이다. 책을 멀리 하는 동안 영어를 가까이 했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영어 선생님을 가까이 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몇 개월 새 내게 영어 선생님이 두 분 생겼다. 수잔과 에밀리.

  수잔에게 나는 유료 회원이고, 에밀리에게 나는 무료 회원이다. 수잔은 뉴욕주 출신이고, 에밀리는 필리피노이다. 수잔은 시원하고 에밀리는 발랄하다. 수잔은 늙었고 에밀리는 젊었다. 수잔은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이고, 에밀리는 대학강사(?) 출신이다. 수잔은 발음이 좋고 에밀리는 본토 발음과는 거리가 있다. 수잔은 어린이 눈높이에서 가르치고 에밀리는 학구적으로 가르친다. 수잔은 점잖고 에밀리는 수다스럽다. 수잔은... 에밀리는....

  비교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소중하다.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여자라는 것 외에 낙천적이라는 점이다. 몇 개월 간 그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결론? 낙천적인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의 낙천성이 나로 하여금 이런 일기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들의 긍적적인 사고 방식을 배우는 것 만으로도 내 영어 공부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어 공부에 관한 것보다 영어 선생님에 관해 쓸 수 있다는 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에밀리와 만났다. 나는 영어 초보자이기 때문에 영어에 관한 얘기는 별로 할 게 없다. 다만, 나의 영어 선생님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그들은 내 모국어를 잘(에밀리 경우) 또는 전혀(수잔 경우) 모르는데다 내가 알라딘에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테니까.  

  에밀리는  몇몇의 나 같은 이를 위해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준다. 천성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오해마시라. 왕초보자도 영어로 누군가를 가르쳐 본 사람 앞에서는 이 정도의 독해력은 따라 준다. 처음엔 무척 신기했다.)

  오늘은 네 명이 에밀리와 만났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화제는 당연히 비에 관한 것이었다. showery에 관한 설명을 꽤 오래 했다. 소나기 쯤 되겠다. 한마디로 on and off로 오는 비가 showery한 비라고 설명해 주었다. 에밀리가 물었을 때 누군가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싫어한다고 했다. 나는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기어코 하고야 만다고 말해주었다.  있지도 않은 오래된 남자 친구를 급조해내어  그에게 전화를 건다고 말했다. 물론 거짓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꼭 오래 알고 지낸 남자인 적은 없었다.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이 영어라는 울타리를 만나면서 표출된 것이다. 이를테면 의식하지 않은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

  모국어보다 영어로 얘기할 때 좀 더 내면의 솔직성이 뿜어져 나온다. 영어 배우려고 모인 멤버들이 유창하지 않으니 막연한 보호막이  되겠거니 하는 믿음 때문이리라. plastic surgery(성형수술)에 관한 얘기를 할 때 나는 쌍거풀 수술을 했음을 고백했다. 에밀리는 웃으면서 really?를 연발했다. 이십 대 때의 일이었고, 그간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긴데도 술술 잘도 나왔다. 에밀리는 필리핀에는 게이들이 많다고 얘기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스무 명 남짓한 멤버 중에 반 정도가 게이 흉내를 내고 있어서 충격이었노라고 말해주었다. 정말로 우리 넷은 really?를 남발하고야 말았다. 에밀리의 의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사고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필리핀은 아무래도 미국적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렇단다. 커밍아웃이 환영받는 날이 오면 우리나라도 필리핀이나 태국 못지 않을 것이라나? 믿거나 말거나.

 보컬보다는 연주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그녀는 트럼펫 악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고전이나 재즈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dvd도 많이 가지고 있다니 아마도 비오는 날 모짜르트의 유일한 트럼펫 협주곡 연주 실황을 들여다 보며 향수를 달랠지도 모르겠다. 비오는 날 음악 틀어 놓고 커피 마시며 청승 떠는 것은 세계 공통 관습인가 보다. 무슨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에밀리가 물었을 때 나는 요즘은 노래를 부르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했다. 다만, 어제 알라딘에서 책 주문하면서 클레이 에이킨의 세 번째 앨범을 같이 주문했기에 올드 팝인 without you에 대해서 얘기했다. 오리지널은 배드핑거가 작곡하고 불렀고, 해리 닐슨이 리바이벌 해서 히트쳤고, 머라이어 캐리가 확대 재생산했으며 최근에는 클레이 에이킨까지 합세했노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해리 닐슨의 보컬이 내 정서에 가장 와닿는다고 말했다. 내 청춘이 그의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배드핑거의 멤버 중 두 멤버가 자살에 이르렀다고 말했을 때 에밀리는 확실하게 짚어주었다. suicide는 commit suicide와 합쳐졌을 때 완벽한 의미전달이 된다는 것을.

  에밀리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텔리이자 인텔리 남편을 두었다. 미국 유학 중에 만났다는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 치과 의사이다.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해서인지 대가 없이 영어를 가르쳐주면서도 신이 났다.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는 그녀의 선의가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토킨어바웃'을 좋아하는 그녀가 이국에서의 외로움과 갑갑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가르치는 것을 선택한 것임을. 그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어디 있을까?

  바라건대, 에밀리가 지겨워하지 않고 나의, 아니 우리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내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맨날 김치 담글 줄 아니, 남편 어떻게 만났어, 한국의 시댁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딴 것만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영어에 입문하면서 영어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전제되어야 맥 끊기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초보자를 면할 순 없겠지만 에밀리를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임에는 틀림없다. 에밀리가 너무 일찍 우리 그룹(대 여섯 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은 수잔을 만나는 날이다. 수잔 얘기는 내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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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자발적 리뷰 쓰는 게 낫지, 타의에 의한 원고 쓰기는 내게 험난한 산과 같다.

  연말이라 그런지 원고 청탁이 조금씩 늘어난다. 걔중에는 고료가 주어지는 것도 있고, 안 주어지는 것도 있다.  세 건의 청탁 중 한 건은 현금 고료이고(역시나 돈 되는 것은 부자 회사들의 회사 신문이나 사보이다.), 한 건은 현물 고료(지방 신문사인데 워낙 열악해 설이나 추석 때마다 선물을 배송해준다. 김, 멸치, 과일, 수건 등등 닥치는 대로), 나머지 한 건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고료이다.(그도 그럴 것이 딸내미 중학교 신문 편집 담당 선생님이 졸업하는 학생들을 위한 학부형의 메시지를 원했다.) 

 셋 다 내가 원해서 쓰는 글이 아니니 머리 짜깁기 하느라 죽을 쑨다. 새벽 4시까지도 모자라 잠시 한 숨 돌리고 지금 겨우 끝냈다. 그것도 결국 두 번째 원고는 펑크를 내버렸다.  첫 번째 원고는 고료가 금세 입금되니 망설일 수 없고,  세 번째 원고는 학부형으로서 교육계의 황송한 눈치를 보느라 거절할 수 없고,  세 번째는 써주면 그 쪽에서 고맙게 활용할 것이고, 안 써줘도 내 쪽에서 원망 한 번 들으면 끝나는 장사니 배짱을 부릴 수가 있었다. (정말이지 고료가 곶감보다 무섭긴 하다!)

  멋 모르고 쓰던 시절, 글쓰기를 좋아하니 재능도 좀 있는 줄 알았다. 한데, 절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다.  자의든 타의든 원고를 써야할 때, 최대한 미루고 미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자신 있고, 즐기는 일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글쓰려고 컴 앞에 앉았다가 인터넷만 주야장천으로 붙들고 늘어진 날이 하 몇 날이던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쉽게 독해지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실망하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쓰려고 앉아도 쉽게 써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내켜서 쓰는 글은 술술 써지는데 강요(?)에 의한 글은 그렇게 헤맬 수가 없는 것이다. 원고지 10매 메우는데 세 시간을 넘기는 것은 다반사다. 아무리 아마추어 글쓰기라지만 진정 고지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만 하다. 

   전문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하기야 전문 작가도 나름이다), 알라딘을 넘나드는 숱한 ~디너들(!) (내가 부러워하는 이란 단서를 붙은 이들)은 어찌 그리 쉽게 글을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직 덜 읽어서 그럴 것이다. 더한 내공을 쌓아, 씨불이는 것마다 문장이 되고, 누르는 것마다 글이 되는 날이 내게 왔으면 좋겠다.

  뭔 헛소리 해쌌노?  남은 배추 속이나 넣으러 가야겠다.  장장 10시간이나 투자하고도 만족할만한 글을 못 건진 눈으로 배추 속이나 제대로 보일지 모르겠다.  

 

  **덧붙임  - 디너질 몇 달만에 연말 부록으로 , 그간 내가 지켜본 몇몇 디너들의 발군의 글솜씨에 대해서 '칭찬 한 마디' 해볼까나 하는데, 시간이 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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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22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돈도 되지 않는 타의적 글쓰기...머리 허옇게 세죠. 흐흐흐
검은 눈동자님 기운 내셔서 연말부록 거하게 한 번 써 주세요(또 다른 압박!)^^*

다크아이즈 2006-12-2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연말부록 진짜 쓰고 싶어요. 물론 그 중심에 '파란여우'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로쟈 2007-01-19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글쓰기 장애 환자랍니다. 매번 마감을 놓치고 괴로워하는.^^;

다크아이즈 2007-01-2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감을 놓치고 괴로워하는 건 고수나 신참이나 한 가진가봐요. 위안 모드^^*

내가 지켜 본 ~디너들, 코너에 로쟈님 이름도 당근 있는데, 게으름 때문에 미루고 또 미루고.
 

 



개나리가 피었다.  산수유 열매도 아직 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 쯤 아파트 꽃밭에 오질없이(?) 핀 개나리를 보고 여고시절 생각이 났다.

그 때도 개나리는 계절 감각이 없었다.  고1이던가 기말고사 수학 시험을 망치고

(한 35점 쯤,  그 때 평균이 40점 쯤 되었을 거다.)

망연자실 화단을 쳐다보는데 지랄할 개나리가 화들짝 피어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12월 한 겨울이었다.

그 때 알았다.  계절에 상관없이 개나리는 날씨와 온도만 맞으면 마구마구 피어댄다는 것을.

내 마음도 몰라주고, 그 겨울 샛노랗게 발랄하던 개나리만 보면 그 해 성적표 수학과목  평어 '양'이 자꾸 떠오른다. (내 생애에 '양'이와 친구가 된 적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00미터를 22초에 주파해주시는 놀라운 '나무뎌'과이지만 체육과목조차 '양'이와 친구한 적은 없었다. 흑흑...)

그 때 결심했다. 개나리 같은 줏대없는 꽃일랑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아, 아직도 유효한 결심이다.)

 

 

봄이면 개나리 못지않게 일찍 샛노랗게 피는 꽃이 산수유다.  봄이면 이곳 주변 산은 온통 산수유 꽃으로 샛노랗다. (걔들은 꼭 이른 봄에만 피어주는 센스를 잊지 않는다.  그 줏대, 고마우셔라!)  늦가을이면 타원형의 붉은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아직도 아파트 화단에 매달려있다. 

다른 곳에는 폭설 난무하다는데, 좀 전 꽃밭에 내려가 보았더니 개나리와 산수유 열매 모두 무사하시다.  오늘 제법 매서운 날인데도.... 며칠 추위가 더하면 개나리 얼어 붙으려나?   개날아, 네 오질없음을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용서하련다!

산수유 열매에 내려앉는 눈꽃도 볼만한 터인데 이곳에서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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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몹시 춥다.  동해안 쪽으로는 폭설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다.   이곳은 눈은 오지 않았지만 찬바람까지 비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자료를 건네받기로 되어 있어 외출을 했다. 추위를 심하기 타기 때문에 중무장을 했다. 토끼털 외투에 캐시미어 목도리까지 휘감았는데도 등짝이 시렸다.  약속인을 위해 제과점에 들러 맛깔스런 만쥬를 포장하고, 마트에 들러 비타민 음료를 챙길 때까지는 룰루랄라였다. 

 주차 공간이 마땅찮아 대로변 갓길과 맛닿은 차선에 비스듬히 차를 세웠다. 그야말로 자료만 건네받으면 되니까 잠깐 동안 실례한들 어쩌랴 싶었다.  시동도 일부러 끄지 않았다. 차가워진 차를 다시 데우는(?) 게 끔찍했던 것이다. 히터를 약하게 틀어둔 채 비상깜박이를 켜두고 차에서 내렸다. 숄더백도 차 안에 그대로 두었다.  평소 내 가방은 보통 여성들 것보다 좀 더 무거워 쇼핑백과 더불어 들기엔 무리가 있겠다 싶었다. 

  자료를 건네받고 돌아서 나오는 시간, 십 여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차 문을 열었다. 손잡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뿔사!  내릴 때 차문을 잠가버렸던 것이다. 보조 열쇠조차 가방 안, 지갑에 있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차선에 비스듬히 걸친 채, 눈치없이 비상깜박이만 똑딱거리는 고물차가 그토록 한심하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집 아저씨에게 sos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내 보조열쇠를 열쇠꾸러미에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 (동정심 유발하는 목소리로) 내, 일  또 저질렀다.  시동 켜놓고 문 잠갔뿟다! "

  "벌써 몇 번째고? 어디고?

  "## 초등학교 앞인데, 빨리 와서 열어줘."

  "내, 열 한시부터 회의라서 못 간다."

  시계를 보니 그 때가 10시 25분 경이었다. 바람같이 달려오면 십 오분 정도 걸릴 거리였다.  저렇게 말해도 달려올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느긋이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진짜 춥네, 따뜻한 캔 커피 하나..."

  이렇게 말하려다 말고 얼른 말을 집어삼켰다. 수중에 지갑도 없는데 웬 캔커피?  아침부터 남의 사정 줄줄이 들어주고 물건부터 냅다 줄 사업주가 어디있겠나 싶어 그냥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 앞 야외용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기다리니 우리집 아저씨가 도착했다. 열쇠꾸러미를 건네는  눈길이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터키산 칼날보다 매섭다. 우쒸,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겁먹을 내가 아니다. 누군 실수하고 싶어서 하냐고?  시계를 보니 열시 45분. 빛의 속도로 달려가면 회의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따뜻한 커피라도 건네주고 싶었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저만치 달려가버린다.

  차 열쇠와 관련된 내 건망증은 추위와 관계가 깊다. 이를테면 상습범이다.  추위를 피해야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 시동을 켜둔채 내린 뒤, 수동으로 차문을 잠가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내리막길에 주차해둔 차를 시동도 켜지 않은 채 핸드브레이크를 내린 채 운전대를 돌리다 구석에 처박을 뻔도 했다.  (이 때도 겨울이었고 너무 추운 나머지 시동켜는 걸 깜박하고 그딴 무모한 짓을 했다!) 그 때마다 우리집 아저씨를 불러내야했다. 남들은 보험회사에 전화한다지만 번거로운 절차도 싫고 해결 속도도 우리집 아저씨보다 빠를 것 같지 않아 그렇게 해본 적은 없다.  싸한 눈길 한 번만 참으면 내가 편한데 싶어 그간 애꿎은 우리집 아저씨를 괴롭혔다. 

  앞으론 절대! 라고 외치지만 이 몹쓸 병,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이탓이려니 한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이들은  출산 탓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차마 인정하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출산율 저하 때문에 심각한 이 땅,  아리따운 젊은 여성들 자극하는 그런 망발을 할 수는 없고... 젊은 날엔 건망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으니 나이탓이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오, 신이시여! 이 겨울 가기 전 다시는 이 병 도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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