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춥다.  동해안 쪽으로는 폭설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다.   이곳은 눈은 오지 않았지만 찬바람까지 비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자료를 건네받기로 되어 있어 외출을 했다. 추위를 심하기 타기 때문에 중무장을 했다. 토끼털 외투에 캐시미어 목도리까지 휘감았는데도 등짝이 시렸다.  약속인을 위해 제과점에 들러 맛깔스런 만쥬를 포장하고, 마트에 들러 비타민 음료를 챙길 때까지는 룰루랄라였다. 

 주차 공간이 마땅찮아 대로변 갓길과 맛닿은 차선에 비스듬히 차를 세웠다. 그야말로 자료만 건네받으면 되니까 잠깐 동안 실례한들 어쩌랴 싶었다.  시동도 일부러 끄지 않았다. 차가워진 차를 다시 데우는(?) 게 끔찍했던 것이다. 히터를 약하게 틀어둔 채 비상깜박이를 켜두고 차에서 내렸다. 숄더백도 차 안에 그대로 두었다.  평소 내 가방은 보통 여성들 것보다 좀 더 무거워 쇼핑백과 더불어 들기엔 무리가 있겠다 싶었다. 

  자료를 건네받고 돌아서 나오는 시간, 십 여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차 문을 열었다. 손잡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뿔사!  내릴 때 차문을 잠가버렸던 것이다. 보조 열쇠조차 가방 안, 지갑에 있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차선에 비스듬히 걸친 채, 눈치없이 비상깜박이만 똑딱거리는 고물차가 그토록 한심하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집 아저씨에게 sos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내 보조열쇠를 열쇠꾸러미에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 (동정심 유발하는 목소리로) 내, 일  또 저질렀다.  시동 켜놓고 문 잠갔뿟다! "

  "벌써 몇 번째고? 어디고?

  "## 초등학교 앞인데, 빨리 와서 열어줘."

  "내, 열 한시부터 회의라서 못 간다."

  시계를 보니 그 때가 10시 25분 경이었다. 바람같이 달려오면 십 오분 정도 걸릴 거리였다.  저렇게 말해도 달려올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느긋이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진짜 춥네, 따뜻한 캔 커피 하나..."

  이렇게 말하려다 말고 얼른 말을 집어삼켰다. 수중에 지갑도 없는데 웬 캔커피?  아침부터 남의 사정 줄줄이 들어주고 물건부터 냅다 줄 사업주가 어디있겠나 싶어 그냥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 앞 야외용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기다리니 우리집 아저씨가 도착했다. 열쇠꾸러미를 건네는  눈길이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터키산 칼날보다 매섭다. 우쒸,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겁먹을 내가 아니다. 누군 실수하고 싶어서 하냐고?  시계를 보니 열시 45분. 빛의 속도로 달려가면 회의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따뜻한 커피라도 건네주고 싶었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저만치 달려가버린다.

  차 열쇠와 관련된 내 건망증은 추위와 관계가 깊다. 이를테면 상습범이다.  추위를 피해야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 시동을 켜둔채 내린 뒤, 수동으로 차문을 잠가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내리막길에 주차해둔 차를 시동도 켜지 않은 채 핸드브레이크를 내린 채 운전대를 돌리다 구석에 처박을 뻔도 했다.  (이 때도 겨울이었고 너무 추운 나머지 시동켜는 걸 깜박하고 그딴 무모한 짓을 했다!) 그 때마다 우리집 아저씨를 불러내야했다. 남들은 보험회사에 전화한다지만 번거로운 절차도 싫고 해결 속도도 우리집 아저씨보다 빠를 것 같지 않아 그렇게 해본 적은 없다.  싸한 눈길 한 번만 참으면 내가 편한데 싶어 그간 애꿎은 우리집 아저씨를 괴롭혔다. 

  앞으론 절대! 라고 외치지만 이 몹쓸 병,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이탓이려니 한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이들은  출산 탓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차마 인정하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출산율 저하 때문에 심각한 이 땅,  아리따운 젊은 여성들 자극하는 그런 망발을 할 수는 없고... 젊은 날엔 건망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으니 나이탓이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오, 신이시여! 이 겨울 가기 전 다시는 이 병 도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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