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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연 작, 바다 이야기 시리즈 중에서> 

 

 

  베레모를 쓰지 않은 선생님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간혹 두피에 땀이 챌 때나 엉긴 이마머리칼을 정리하기 위해 모자를 고쳐 쓴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결코 사람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 보인 적은 없었다.

  어느 날 한 수강생이 물었다. 왜 빵모자를 쓰시냐고. 당연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치장 자체도 거추장스러우니 편리를 위해 모자를 찾는다는 그런 대답.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선생님은 ‘단 한 순간도 화가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모자를 쓴다’라고 답하셨다. 흔히 ‘화가 빵모자’로 불리는 베레모는 선생님께는 자신을 향한 채찍이자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체였다. 다시 말해 선생님의 자존심이자 예술혼의 상징이었다.

  진정한 예술가였던 선생님은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화단뿐만 아니라 예술계에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먼저 가신 선생님은 내 초등학교 은사셨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갓 스물을 넘겼을 선생님은 초임 발령지로 우리학교에 오셨다. 삼십 년이 훨씬 지났지만 우리반 담임이셨던 선생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책이 귀하던 그 시절 선생님은 아침마다 동화책을 읽어주셨다. 선생님 덕분에 ‘엄마 찾아 삼만 리’(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마르코는 어린 내 상상력을 자극하던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대서양을 건너 저 먼 아르헨티나까지, 오직 엄마를 찾아 떠나던 마르코의 험난한 여행기를 선생님은 실감나는 톤으로 구연했다. 하숙방 한 벽면을 장식했던, 약관에 공모전에 입상한 솟을대문 그림도 잊을 수 없다. 어린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신세계이자 경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 년 만에 전근을 가신 뒤, 선생님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십여 년 전, 그림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등록한 문화센터에서 선생님과 해후했다. 지도강사와 수강생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만남이었다. 다시 만난 선생님은 그야말로 나의 사표였다. 어쩌다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따로 할 이야기를 쟁여놓으신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늦게까지 술잔을 마주해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꼿꼿한 모습이셨다. 취한 사람 상대하지 마라. 시류에 휩쓸리지 마라, 뜻대로 안 된다고 너무 힘겨워하지 마라, 올곧음을 항상 마음에 새겨라. 스승은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 잔소리꾼이셨다. 나는 그 말씀들이 싫지 않았다. 내게 하는 훈육의 형식이었지만, 선생님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내면의 소리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그림이 주목 받기 시작했을 땐 그 누구보다도 기뻤다. 선생님 그림의 주제는 한마디로 고독이었다. 감상하는 이 누구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화폭엔 정갈한 구체성이 담겨 있었다. 담대한 여백과 잎 없는 큰나무줄기는 허무와 내면의 고독을 말해주는 상징 코드 같은 것이 돼버렸다. 잎조차 없는 도시의 나무들, 한 방향으로 세찬 바람결을 맞는 소나무 등에서 나는 개별자 안에 서성이는 불안들을 감지하곤 했다. 캔버스의 반을 차지하는 흰 이불 호청이 주는 순백의 공허, 뒷짐 지고 허리 구부러진, 한낮의 적요를 감내하는 할머니, 무료한 해변의 적막을 견디는 소년, 그 뒤를 앞서거나 뒤따르는 누렁이와 흰둥이. 선생님 그림에 등장하는 구체적 대상들은 온전한 고독에 이르는 한 예술가의 막막한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 병세가 완연해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것이 내가 본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남은 삶 ‘이기적으로 살란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예술혼에 다다르기 위한 선생님의 강인한 다짐으로 이해했다. 그 다짐 굳히기도 전에 선생님은 너무 빨리 떠나시고 말았다. 선생님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빵모자 쓰고 섬세한 필치로 둥치 굵은 나무에 고독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 더러 지치면 지나가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마르코의 감동적인 여정을 구연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부디 선생님께 평화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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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9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분을 만나는 건 축복이지요.
스승님이 가신 곳에서도 빵모자를 쓰고 붓을 들겠네요~

다크아이즈 2010-02-12 17:22   좋아요 0 | URL
네, 빵모자만 보면 스승이 떠올라요. 정신 없는 날들이라 책은 읽는데 리뷰 올릴 시간도 제대로 없어요. 순오기님 서재 구경도 잘 못하니 이게 무슨 재민겨?

穀雨(곡우) 2010-02-1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안부 전하고자 들렀더니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네요.
멘토처럼 그려지던 분이었으니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좋은 곳에서 편히 영면하시리라 믿습니다.

느와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하는 일 다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곡우드림.

다크아이즈 2010-02-12 17:23   좋아요 0 | URL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에요. 곡우님도 건강 조심하시고, 설 잘 보내세요.

로사 2010-09-0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의 글....잘 읽고 갑니다.
서로 모르는 관계이지만,같은 분을 함께 알고 있음이
그나마 작은 축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젊은초임교사시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좋았습니다.
그 교사생활을 그만두시고....미술대학으로 오셨을 때부터....인연을 맺어서
각별한 우정을 나눈 친구중에 한명입니다.
우리의 대학생활이...이화백으로 하여금 더 빛이 났더랍니다.

고요한 휴일아침.....먼 타국에서
잠시 추억속의 선배를 생각하고 갑니다.

다크아이즈 2010-10-03 00:19   좋아요 0 | URL
어맛, 서재 방치하는 일이 잦은데 이창연 선생님 친구분을 여기서 만나다니 넘 영광입니다. 오늘 같은 가을날 선생님 생각 더욱 납니다. 작년 가을에 마지막으로 뵈었으니... 노란 봉투에 쾌차하시라는 편지를 써서 드렸는데, <봉투가 예쁘다> 하시더군요. 눈물 참느라 혼났습니다. 로사님 이름을 떠올리면 이창연 화백이 절로 생각날 것 같습니다.

잠드리아 2011-06-18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저도 초등학교때 담임은 아니였지만,선생님을 잘알고있죠^^돌아가시기2년전쯤
우리동기들과 선생님을 뵈었죠~서울 전시회땐 서울동기들도....세계를 돌며 전시회를 하고싶어하셨다는데....역사에 남을 초등미술책에 선생님 위 작품이 실렸어요^^오늘따라 생각이 많이나네요`

다크아이즈 2012-12-03 23:08   좋아요 0 | URL
잠드리아님도 이제야 안부 전합니다.
이창연 선생님의 제자라는 공통분모로 이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초등 미술책 구할 수만 있다면 간직하고 싶네요. 한 번 알아봐야 겠어요.
님도 건강하시길...

바다 2012-12-03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슴이 아파~~~ 힘이 듭니다
당신이었네요
선생님은 님 애기와 젊은날 안동에서 교직생활 애기도 많이 하셨어요
어느날은 님이 쓴 단편을 읽어보라고 책을 가지고 와서 저도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창연선생님을 기억해 주세요
아름답운 분입니다.

다크아이즈 2012-12-03 23:14   좋아요 0 | URL
아, 혹시 아주 가까운 분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너무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을 좀 더 보필할 걸 하는 아쉬움...
요즘 나이 먹는다는 것, 산다는 것 생각하면 눈물 마를 날 없는데 기어이 바다님께서 절 또 울리시는군요. 울 수 있다면 님도 감추지 말고 우시어요. 힘내시고...
선생님께 종 울리자마자 그네 타러 나가다가(공부 안 하고 딴 생각 한다고 그랬겠지요.ㅋ) 손바닥 20대 맞은 기억 있어요. 그 얘길 했더니 정작 선생님은 기억조차 못하시더군요.
제 단편까지 읽어보라고 권하셨다니 몸둘 바를... 정진해야겠습니다.

이창연 스승님을, 단 한 시도 잊어 본 적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마르코가 쉽게 엄마를 찾았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동화 구연 솜씨가 그만이었거든요^^
님도 부디 건강하고, 잘 견디시길...
 

 

   

  서재질을 하면서 의아했던 게 숱한 리뷰 중 시집에 관한 건 흔치 않다는 것이다. 알라딘을 벗어나 각종 문학 사이트 같은 곳엔 시가 넘쳐난다. 시인만 해도 삼만 명이 넘는 나라라니 어련할까?  시인이 많은 나라니 예비 시인도 엄청 많을 것이고, 그런 분들이 시를 읽고 리뷰를 올린다면 산문에 비해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할 줄 알았다. 한데, 의외로 시인과 예비시인이 많은 나라치고 시집 리뷰는 드문 편이다.  잘 쓰는 시인들을 존경하다 못해 경이롭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못내 서운하다. 많은 독자들이 시집에 관한 리뷰나 페이퍼를 올려 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내 욕심일 뿐이다. 시를 모르면서 좋아만 하는 욕심... 

  젊은날부터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웬만하면 사모았다. 당선시들 중 내 취향에 맞는 몇몇 작품들을 만날 때면 심사위원들이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어쩜 이리 내 취향에 맞는 시의 구름을 불러내 풀썩이는 내 영혼에 단비를 내려주실까, 하는 맘에... 좋은 시를 발견하는 그 눈이야말로 천상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믿고, 좋은 시에 공감하는 나도 어쩌면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보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시는 짓는 게 아니라 절로 써진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그분이 오셔야 시가 된다는 것. 더 쉽게 말하자면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만들어진 시인은 시인이라 불릴 수는 있겠지만 시인은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시인 자신들이 더 잘 안다는 것.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천재가 못돼서 시 못 쓰거나 안 쓰는 사람들은 좋은 시를, 취향에 맞는 시를 그저 감상하면 된다. 안 써도 되니 맘 고생 안 해도 되고,  영혼의  요기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한데 올해 신춘 당선시집을 곁에 두고 읽자니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시가 없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천재 시인들이 사라졌을 리도 없고, 심사위원들의 눈썰미도 삐뚤어졌을 리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게 있다. 참신하고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신춘시들을 접수하기엔 내가 너무 늙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스스로를 책망하면서도 자꾸 의문이 드는 건 왜일까?  

 그나마 맘에 드는 두 시는 골목의 각질(강윤미, 문화일보), 모른다고 하였다(권지현, 세계일보) 두 편이다. 두 편의 시, 우연하게도 제목부터 시적이다.   

골목의 각질 - 강윤미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했다

전봇대, 우편함, 방문, 화장실까지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로 붙어 있다 붙어 있던

자리에 붙어 있다 어쩌면

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일 것이다
 

 

모른다고 하였다 - 권지현

우루무치행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북경공항 로비에서 삼백삼십 명의 여행자들은 

여섯 시간째 발이 묶인 채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현지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행가방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떠들어대거나 서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워올리건 말건

나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비행기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착한다는 안내표시등 한 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나는 로비를 몇 바퀴나 돌고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마침내는 쪼그리고 앉아 지루하게 졸았다

항의하는 나를 마주한 공항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가야할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

 

비행기는 오지 않고

결리는 허리뼈를 아주 잊을 때까지 오지 않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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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30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천재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니까 시집을 읽고 감성이 통하는 시를 발견해도 리뷰를 쓰기는 어렵더라고요. 서평단 리뷰 부담에 오히려 책읽기나 리뷰쓰기가 더 안되는 것도 있고요.ㅜㅜ

다크아이즈 2010-01-30 10:49   좋아요 0 | URL
이런, 순오기님이 서평단인지도 몰랐다는... 언제 서재에 적응될까요? 천재들의 속삭임을, 읽는 이 맘대로 해석하는 거야말로 시적인 거 아닐까요?ㅎㅎ

穀雨(곡우) 2010-01-2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랑 담 쌓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은 벌써 늙다리가 되도 한참이겠는걸요.
리뷰도 그렇지만 글쓰기의 최고봉은 시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끼적여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30 10:49   좋아요 0 | URL
곡우님은 일단 글을 잘 쓰시기 때문에 시집 안 읽으셔도 패스! 제가 일단 꽂히면 주욱~ 신뢰해버립니다요. ㅎㅎ


꼼미 2010-02-04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 주신 두 편의 시 잘 읽고 갑니다. 전 최근에 읽고 있는 시집 전동균의 "거룩한 허기"를 읽고 몇번을 울먹였더랬어요. 그리고 그 시집 뒤에 붙은 신형철의 해설을 읽고는 제가 지금까지 만난 (어쩌면 김현을 포함하더라도) 최고의 해설이자 비평이라고 생각했죠. 참으로 기막힌 아픔과 감동과 기쁨이었죠. 그저 나만의 사견이자 감상일지라도요...

다크아이즈 2010-02-04 07:06   좋아요 0 | URL
꼼미님 덕에 거룩한 허기, 를 담게 되네요.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신형철이 쓴 해설들은 시보다 그 해설 때문에 시를 읽게 한다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지요. 시인들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신형철의 해설이 붙은 시집을 만나는 건 독자로서는 굉장한 복인게지요. 언젠가 신형철 해설이 굉장하다니까 로쟈님이 잘 아신다고 책 사인회 정보를 알려주셨던 것 같은데, 여긴 지방이라 갈 수도 없었지요.
 

  수감자들을 만나러  **교도소에 갔다 왔다.  독서토론 지도라는 밥벌이용 명목이 있긴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적은 없다. 그냥 십 여명의 회원들과 둘러 앉아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서로의 무탈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언젠가  회원들 몇몇이 졸랐다.  (남자만 수용하는 곳이라  회원들 모두 남성이다. 이십대에서 오십대까지 그야말로 개성이 뚜렷한) 자신들과 너무 먼 작가들의 작품만 얘기하니 공감도 가지 않고 재미가 없단다. 해서 내 작품을 꼭 한 번 토론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직 내 작품집이 없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대답해주었다. 못내 아쉬워하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 그간  발표한 작품 중 그나마 그들에게 공개해도 별 무리가 없겠다 싶은 것으로 여섯 편의 단편을 소책자로 만들어 갔었다. 그 교재로 토론하는 동안 나는 쑥스러웠다. 단편 속에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자의식과 내 생활인 듯한 에피소드가 도드라지는 부분에서 그들이 몹시 좋아하며 놀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옛애인을 곧 만나게 될 주인공이 번민 끝에 친한 친구더러 '자줄까?'라고 동의를 구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요?' 라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원래 소설은 구라까는 것이니 상상은 자유'라고 급하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지난 시간 수업이었다.   

  오늘 두 시간의 주어진 시간을 끝내고 나오는데, 평소 가장 열성적인 <안경>씨(앞 선 글에서 '구름'으로 등장한 적 있음)가 면회를 요청했다. 그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서도 교도관 입회 없이는 단독 플레이를 할 수 없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라면 규칙이다. 담당 교도관이 얘기를 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안경 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예의 내 작품이 실린 소책자를 펼쳤다. 세상에나! 책 갈피갈피마다  꼼꼼하게 적은 감상문이 실려 있었다. 때론 포스트 잇에다, 더러는 수첩을 잘라  붙인 곳에, 구절구절마다 자신이 느낀 감흥이나 고쳐야 할 부분까지 자신 만의 독후감을 써 놓은 것이었다. 얼마나 꼼꼼하게 봤으면 여섯 편 중 두 편 밖에 읽지 못했노라고 미안해 했다. 다음에 만날 때 나머지 것을 읽고 또 그렇게 손 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안경 씨는 시를 쓴다. 자작시를 써서 내가 수업을 마치면 서류 봉투에 넣어 준다.  나는 주변 시인들에게 부탁해 감상문을 받아 넘겨주곤 한다. 안경 씨는 그 작업을 무척 고마워하고 흥미있어 한다. 장기수인데다 이곳 생활을 오래 하면서 읽고 쓰는 데 무척 관심이 많아진 경우이다. 얼마 전 한 공모에서 2등으로 뽑힌 적 있어 거금의 상금을 타기도 했다. 다음 번 모임에 한 턱 쏜다고 기대하라는데 어쩐지 회원들보다 내가 더 기대가 된다.

  안경 씨가 지적해준 내 문장에 대한 언급은 반은 무시해도 되고 반은 받아들일 가치가 충분한 것들이었다.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했고, 주변에서도 애써 지적해주지 않은 그 구멍난 문장들을 들여다 보며 나는 안경 씨야 말로 진정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제 글 바른 지적에 내가 상처 받을까 봐 지우개 흔적을 몇 번이나 남긴 그 세심한 감상문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다. 바지런을 떨어 그 꼼꼼한 흔적들을 사진으로나마 올리고 싶지만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그것까지는 곤란하고, 지금도 멍하니 그 귀한 감상문을 들여다 보고만 있다. 어쩜 글자 한 자, 문장 부호 하나 틀림이 없다. 꼼꼼하고 완벽한 성격이라는 건 눈치챘지만 이 정도 일줄이야.  

  방금 발견한 메모인데, 회덮밥을 좋아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 옆에는 '저두 좋아해요.^^'라고 괄호를 쳐서 써 놓았다. 십여 년이 넘는 수감 생활 동안 안경 씨는 회덮밥을 먹어 본 적이 있을까? 까다로운 그곳 식단으로 봐서 (식중독을 유발할 수 있는 그 어떤 식재료도 반입될 수 없다.) 아마 먹어 본 지 오래일 것이다. 그곳을 나올 때까지 좋아하는 회덮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죗값은 치러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회덮밥 앞에서는 자연스레 안경 씨가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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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7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8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9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꼼미 2010-01-28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정말... 자체로 소설보다 더한 소설이네요. 팜므님 이런 일도 하시는군요. 저랑 친구라며요, 놀러 오셨으면 좋겠어요. 미시건. 언젠가.. 사는 얘기 더 많이 듣고 싶어서.

다크아이즈 2010-01-28 07:38   좋아요 0 | URL
미시건에 사신다는 건 몰랐어요. 용서하세요.^^* 제가 놀러 간다고 한 곳은 님의 이곳 서재. 아직 꼼꼼하게 둘러 보지 못했어요. 밥 하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것만으로도 님은 벌써 제 친군걸요.^^*

글샘 2010-01-28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소책자를 만날 영광을 누릴 수 없을까요? ㅎㅎㅎ
그러려면 빵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감??

다크아이즈 2010-01-28 07:48   좋아요 0 | URL
글샘님께는 소책자로는 안 돼요.
정식 작품집 원고로 교정 봐 달라하면 거절 안 하실 거죠?
(제가 십 년 뒤라고 했던가요?)
참고로 로쟈님은 서평 써주시기로 했다니까요.ㅎㅎ

穀雨(곡우) 2010-01-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의 활동범위가 대단하시네요. 교정교육까지 하시다니...^^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떠오르는군요. 그 안경씨도
인생을 새로 배운 감정으로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도하는 생각...
여튼 팜므님의 소책자가 어여 활자화 되어 제 손에 잡히기를 바랍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8 22:34   좋아요 0 | URL
활자화 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내공 쌓는 게 어렵지요. 곡우님 같은 분이 계시는 한 절망에 절망을 거듭합니다. 그래도 절망보다 더한 힘을 얻으려고 버티고 있습니다.^^*
 

   

   . 

  필요에 의해 읽은 책

  리뷰 대신 정리라도 해놓자.

 

 

 

 

 

 

 

  이 책에 실린 여러 사연들은 저마다 고유한 아픔, 설움, 분노를 담고 있다. 시대 상식에 어긋나고, 사람이 일용해야 할 최소한의 양식조차 거부당한 이야기들이다. 읽는 이의 마음은 무겁지만 이 사연들 속에서 삶이란 그리 외롭지도 힘겹지만도 않다는 희망의 싹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

1. 초몰룽마(에베레스트)의 두 사람 :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뉴질랜드 출신의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 정상을 몇 발자국 앞두고 첫 발자국은 자네 몫이야. 아니, 나는 셰르파야. 1953년, 세상의 꼭대기에는 두 사람이 있었고, 첫 번째 사진에는 단 한 사람만이 찍혔다. 텐징 노르가이.       플러스) 전문 산악인 김세준 -  


2. 어떤 스트라이커의 1승 : 2002년 6월 월드컵. 한국:폴란드. 전반 26분 그가 왼발로 날린 공이 폴란드 골문을 갈랐다. 4무 10패 ‘1승’이 되는 순간. 1승 그것은 월드컵 진출 48년 만에 이룬 대한민국의 승리였고, 대표팀 선수들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4강 진출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플러스) 축구 저널리스트 서형욱 -  

 

3. 텔레비전 : 백남준,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 TV는 대중매체다. 현재 대중은 네트워크의 일방적 대상이다. 상호소통, 관객참여 같은 TV의 무궁한 잠재력은 지금까지 무시되고 교묘하게 억압되어왔다.       플러스) 팝아티스트 낸시랭  


4. 지독한 싸움꾼 : 진정한 힘이란 물리적 수단 속에 있지 않다. 꺾을 수 없는 의지 속에 있는 것이다. 제가 한 행위는 한 시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고결한 의무였습니다. 제 행위에 대한 대가로 제게 부과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판결을 기꺼이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무기한 이어지는 옥중 단식.  


5. 어머니의 그림 : 케테 콜비츠 - 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솟구쳐 나오는 힘이었다. 나는 이 시대에 변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싶었다. (83쪽)     플러스)판화가 이철수 - 내가 ‘착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그런 언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따뜻한 언어’만 언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분노에 차 있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데 대해 두려움과 환멸을 느끼고 산 지 오래다. 설사 내가 언젠가 분노에 찬 언어를 다시 사용해야 할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것이 나를 삼켜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6. 몸의 학교 : 알바로 레스트레포 - 콜롬비아 고향으로 돌아와 몸의 학교 세움. 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존경’이었다. 나는 춤을 통해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다. 2009 현재 ‘몸의 학교’는 빈민아동, 1,2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플러스) 노리단 퍼포머 강희수 - 그냥, 지금 내가 행복한가 물어요.  


7. 안 돼! : 1976년 Silent Movie에서 피에로 빕이 처음으로 한 말. 마르셀 마르소 - 말과 침묵은 같은 뿌리다. 다만, 말은 수많은 진실을 속이고 자극하고 상처 입히며 우리가 사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침묵으로 끝난다. 우리의 판토마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플러스) 유진규 - 1세대 마임이스트, 춘천마임축제 : 요즘 고민은 춘천마임축제만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 결국은 한국성, 아시아성을 확보하는 문제. 마임의 기반이 대부분 서구적인 것들이어서 이런 정체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8. 파블로 카잘스의 콘서트 :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정치에 대해 말하고 나는 원칙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항상 콘서트의 마지막에 연주하는 곡은 스페인의 민요, <새들의 노래>입니다. 나의 고향 카탈루냐의 하늘에서는 새드리 “피스, 피스”하고 노래합니다.      플러스) 공연연출가 탁현민 - 기본적으로 나는 공적인 영역에서든 사적인 영역에서든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예인도 마찬가지고,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손석희가 정말 좌파라면 방송에서 “나는 좌파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정상적인 사회다.  


9. 프라이버시 : 내 것, 남의 사정, 우리 일이 ‘경우에 따라’ 확 트이게 되는 사회? 남들이 다 아는 나만의 사생활?       플러스)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장여경 -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분야 담당. 통신비밀보호법 - 이번 통비법 개정안은 위헌소지를 없애기 위한 행보.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반인권적 시행령을 만들어 놓고, 이후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아예 모법을 뜯어고치는 식이다. 과태료 조항까지 끼워넣었다. (163쪽) 한국정부의 인터넷 통제가 위협적인 것은 중앙집중화 때문이다. 그래서 구글로 우르르 쏠리는 현상도 안타깝다.

10. 남겨진 논쟁 : 안락사. 품위 있는 죽음, 의학적 방조? - 목숨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은 살인행위.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은 환자의 존엄성을 해치는 짓.  2008년 11월 연대 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 할머니’의 안락사 인정 판결이 나왔으나, 산소호흡기장치가 제거된 이후 한동안 할머니는 의식불명상태로 생존해 있었다.

<인생편>  

 

11. 칩코의 연인들 : 칩코 안돌란, 은 힌두어로 나무를 껴안는다는 뜻. 벌목 반대 비폭력 운동의 이름. 반다나 시바 등 여성 생태학자들이 속속 참여 인도 전역으로 퍼짐.  


12. 가비오따스 : 1970 콜롬비아 열대우림 운하 건설 계기로 파견된 파올로 루가리. 개발로 행복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고민 끝에 척박한 땅 가비오따스로 향함. 진정한 위기는 자원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 부족에서 온다. 가비오따스 대안기술은 콜롬비아 700여 개 마을로 전수되고 중남미 다른 나라로 퍼져나감.       플러스)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도법 스님 - 인드라 망은 화엄경에 나오는 말로, 하늘에 있는 그물. 온 우주가 총체적 관계 그 자체라는 의미. 인간 삶 자체가 그물과 같은 공동체. 지리산 산내면 실상사 주변에서 마을공동체 회복운동. 


13. 서머 오브 러브 : 히피 문화. 냉전, 케네디 대통령 암살, 베트남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꿈.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가에 모여 공동생활 시작. 스코트 맥켄지 - 샌 프란시스코 노래(샌 프란시스코에 간다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불가능해진 소통과 교감 끝에 결국 히피의 죽음을 선언. 각자 있는 곳에 머무르며 우리들이 사는 그곳에 변화를 전합시다. 더 멋진 세상을 꿈꾸던 희망도 어떤 면에서는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플러스) 한 대수 - 나는 평화주의자. 공존 서로 함께 사는 문제를 생각한다.   


15. 카메라는 무기다 : 크리스틴 최 - 미국이 만든 우습고 못난 동양인의 이미지를 깨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이럴 때는 고민에 빠져 있는 것보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게 낫다. 내게는여전히 카메라가 무기이기 때문이다.       플러스)미디어몽구 김정환 - 미디어 몽구, 는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네티즌들이 궁금해할 것 같고 내가 궁금한 것을 찾아 나설 뿐이다. 꾸준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보면 콘텐츠도 나아질 것이고, 글솜씨나 취재능력도 나아질 것이라 희망한다. 약자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블로그였음 좋겠다.  


17. 바타와 삼부 곰보수레와 바트델거 : 2007년 신도림동 고층 공사현장 화재. 사람들을 구하ㅣ고도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네 사람의 몽골인 불체자.       플러스) 용산 철거민 유가족 김영덕 - 사는 동안 철거민이 되리라곤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개발업자를 위한 재개발은 지금도 수도 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용역업체들 고용할 돈으로 철거민에게 한 푼이라도 나눠줄 생각은 왜 못하는 거지요?  


18. 괴물의 그림자 : 18세, 가네코 지즈오. 조선이름 이진우. 죽음을 앞에 두고 조선어 첫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최후에 이르러 나는 나를 진우로 인식한 것이다. 2004년 현재 60만여 명의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 살고 있지만 속속 일본 국적으로 귀화 연평균 5,500명씩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      플러스)  보노짓 후세인 - 한국에서의 인종차별주의 유경험자. 인종차별이라는 의식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단일민족, 단일언어에 익숙햇던 삶의 근저가 바뀌는 거세 당혹스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도적 인종차별이 아니라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20. 보키니 : 불행은 종종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는 데서 생겨난다. 행복은 종종 사소한 일에 관심을 기울일 때 생겨난다. 이 지구상에는 60억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따라서 행복에 이르는 길 역시 60억 개가 된다. 인디언 소년이 찾은 해답은 라코타 어 보키니... 새로운 행복한 평화로운 삶.          플러스) 슬로 라이프 운동, 쓰지 신이치 - 걷기, 느림,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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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칫국물인지 진흙탕인지 모를 얼룩이 묻은 청춘의 문장들을 다시 꺼낸다. (두꺼운 종이질은 넘기기가 힘들다. 독자보다 책 파는 게 우선인가? 마음산책하려다가 마음상함이 먼저 오려한다. ) 

스물이 그립다.  간직해둔 거문고들 줄 끊어지는 소리는 나이들수록 자주 들린다. 김연수도 그러한가 보다.

   

 

 

 

  125 -126쪽 ) 

  이덕무가 글을 뽑고 박제가가 서문을 붙인 학산당인보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거문고 갑 속에 간직하여 두었더니 

  이따금 줄 끊어지는 소리 들려오누나 

  내 마음 속에 간직해둔 거문고들도 이따금 줄 끊어지는 소리를 울린다. 그 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또 얼마나 놀라는지! 나는 참 많이도 흘러 내려왔구나. 항상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구나. 스무 살, 그 무렵에 나는 '이제 그만 바라보자 / 저렇게 멀리서 반짝이는 섬들을'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지만, 이제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빛이, 마치 새로 짠 스웨터처럼 , 얼마나 따뜻한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가만가만 고개만 끄덕인다. 이따금 마음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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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1-2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살, 전 무얼 해도 좋을 거란 막연한 설렘으로 가뭇없이 흘려 버렸던 기억만...
정말이지 사람은 추억을 빼먹고 사는 건가 봅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현이 나이를 먹어 느슨해져도 그 속에서 부유한 추억이 새록새록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청춘(?)을 돌파하고 있는 무지랭이의 전언이자 잡설입니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팜므느와르님의 글과 채취에서 제가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가식없이 흐르는 감정표현, 붙들어 매는 글사위. 숨은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라면...^^

다크아이즈 2010-01-2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여삐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인뎌~ 알라딘이 좋은 점은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제대로 자극 받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죠. 곡우님께 많은 것 배우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