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동안 잘 놀았다. 서재 관리 따윈 관심도 없었다. 더러 책을 샀고, 가끔은 읽었으나 별 진전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긴 하다. 모두가  '나의 영어 선생님' 때문이다. 책을 멀리 하는 동안 영어를 가까이 했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영어 선생님을 가까이 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몇 개월 새 내게 영어 선생님이 두 분 생겼다. 수잔과 에밀리.

  수잔에게 나는 유료 회원이고, 에밀리에게 나는 무료 회원이다. 수잔은 뉴욕주 출신이고, 에밀리는 필리피노이다. 수잔은 시원하고 에밀리는 발랄하다. 수잔은 늙었고 에밀리는 젊었다. 수잔은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이고, 에밀리는 대학강사(?) 출신이다. 수잔은 발음이 좋고 에밀리는 본토 발음과는 거리가 있다. 수잔은 어린이 눈높이에서 가르치고 에밀리는 학구적으로 가르친다. 수잔은 점잖고 에밀리는 수다스럽다. 수잔은... 에밀리는....

  비교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소중하다.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여자라는 것 외에 낙천적이라는 점이다. 몇 개월 간 그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결론? 낙천적인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의 낙천성이 나로 하여금 이런 일기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들의 긍적적인 사고 방식을 배우는 것 만으로도 내 영어 공부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어 공부에 관한 것보다 영어 선생님에 관해 쓸 수 있다는 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에밀리와 만났다. 나는 영어 초보자이기 때문에 영어에 관한 얘기는 별로 할 게 없다. 다만, 나의 영어 선생님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그들은 내 모국어를 잘(에밀리 경우) 또는 전혀(수잔 경우) 모르는데다 내가 알라딘에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테니까.  

  에밀리는  몇몇의 나 같은 이를 위해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준다. 천성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오해마시라. 왕초보자도 영어로 누군가를 가르쳐 본 사람 앞에서는 이 정도의 독해력은 따라 준다. 처음엔 무척 신기했다.)

  오늘은 네 명이 에밀리와 만났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화제는 당연히 비에 관한 것이었다. showery에 관한 설명을 꽤 오래 했다. 소나기 쯤 되겠다. 한마디로 on and off로 오는 비가 showery한 비라고 설명해 주었다. 에밀리가 물었을 때 누군가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싫어한다고 했다. 나는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기어코 하고야 만다고 말해주었다.  있지도 않은 오래된 남자 친구를 급조해내어  그에게 전화를 건다고 말했다. 물론 거짓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꼭 오래 알고 지낸 남자인 적은 없었다.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이 영어라는 울타리를 만나면서 표출된 것이다. 이를테면 의식하지 않은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

  모국어보다 영어로 얘기할 때 좀 더 내면의 솔직성이 뿜어져 나온다. 영어 배우려고 모인 멤버들이 유창하지 않으니 막연한 보호막이  되겠거니 하는 믿음 때문이리라. plastic surgery(성형수술)에 관한 얘기를 할 때 나는 쌍거풀 수술을 했음을 고백했다. 에밀리는 웃으면서 really?를 연발했다. 이십 대 때의 일이었고, 그간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긴데도 술술 잘도 나왔다. 에밀리는 필리핀에는 게이들이 많다고 얘기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스무 명 남짓한 멤버 중에 반 정도가 게이 흉내를 내고 있어서 충격이었노라고 말해주었다. 정말로 우리 넷은 really?를 남발하고야 말았다. 에밀리의 의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사고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필리핀은 아무래도 미국적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렇단다. 커밍아웃이 환영받는 날이 오면 우리나라도 필리핀이나 태국 못지 않을 것이라나? 믿거나 말거나.

 보컬보다는 연주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그녀는 트럼펫 악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고전이나 재즈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dvd도 많이 가지고 있다니 아마도 비오는 날 모짜르트의 유일한 트럼펫 협주곡 연주 실황을 들여다 보며 향수를 달랠지도 모르겠다. 비오는 날 음악 틀어 놓고 커피 마시며 청승 떠는 것은 세계 공통 관습인가 보다. 무슨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에밀리가 물었을 때 나는 요즘은 노래를 부르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했다. 다만, 어제 알라딘에서 책 주문하면서 클레이 에이킨의 세 번째 앨범을 같이 주문했기에 올드 팝인 without you에 대해서 얘기했다. 오리지널은 배드핑거가 작곡하고 불렀고, 해리 닐슨이 리바이벌 해서 히트쳤고, 머라이어 캐리가 확대 재생산했으며 최근에는 클레이 에이킨까지 합세했노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해리 닐슨의 보컬이 내 정서에 가장 와닿는다고 말했다. 내 청춘이 그의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배드핑거의 멤버 중 두 멤버가 자살에 이르렀다고 말했을 때 에밀리는 확실하게 짚어주었다. suicide는 commit suicide와 합쳐졌을 때 완벽한 의미전달이 된다는 것을.

  에밀리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텔리이자 인텔리 남편을 두었다. 미국 유학 중에 만났다는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 치과 의사이다.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해서인지 대가 없이 영어를 가르쳐주면서도 신이 났다.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는 그녀의 선의가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토킨어바웃'을 좋아하는 그녀가 이국에서의 외로움과 갑갑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가르치는 것을 선택한 것임을. 그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어디 있을까?

  바라건대, 에밀리가 지겨워하지 않고 나의, 아니 우리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내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맨날 김치 담글 줄 아니, 남편 어떻게 만났어, 한국의 시댁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딴 것만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영어에 입문하면서 영어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전제되어야 맥 끊기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초보자를 면할 순 없겠지만 에밀리를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임에는 틀림없다. 에밀리가 너무 일찍 우리 그룹(대 여섯 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은 수잔을 만나는 날이다. 수잔 얘기는 내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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