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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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래 본인은 독서일기를 개인 파일이나 노트에 다양한 시선으로 논문형식으로 적는다.
하지만 게으른 내가 그걸 온라인에 또 올리는 일은 드물 것 같다.
주로 이곳 온라인 서재에는 100자 이내의 짧은 감상만 적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번 하루키 편처럼 원래 적어둔 독서일기를 그대로 올려볼 것이다.

  아래 부분은 작픔에 대한 다양한 인물들의 평을 위주로 본 [노르웨이의 숲 ㅡ 상실의 시대] 이다.
  [노르웨이의 숲] 독서 후기는 총 10장으로 나눠 썼으며, 며칠에 걸쳐 한장씩 옮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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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의 숲] 은 1~3장 까지는 단편 [개똥벌레 ㅡ 반딧불이] 의 내용이다. 그 다음 부분은 장편소설로 쓰면서 첨가시킨 것이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장편으로서, <군조> 신인 문학상 수상작이다. 우리나라에는 1988년 삼진기획에서 이병익씨가 번역한 최초의 번역본이 나왔는데, 문학사상사에서 1989년에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후 널리 알려졌다. 제먹을 바꾼 이유는 '상실감'이라는 단어가 독자에게 더 공감을 일으킬 것이라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발간된 [노르웨이의 숲] 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로 겉표지가 상권은 붉은색, 하권은 녹색으로 되어 있다. 작품 겉표지의 라벨에는 하루키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이 소설은 여태까지 제가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종류의 소설입니다. 또한 어떻게든지 한번 쓰고 싶었던 종류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연애 소설입니다. 매우 구식 명칭이라 생각하지만 그 외에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격렬하고 고요하며 슬픈 100퍼센트 연애 소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르웨이 숲] 은 남자와 여자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다룬것, 그에 따라 녀성의 비중이 매우 커진 점이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요코조 가즈히로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무라카미의 80년대 테마는 확실히 '큰 이야기'를 경험한 후로부터의 귀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60년대 후반의 카은터 컬쳐, 베트남 반전 운동과 학생운동 등의 반체제 운동이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났던 것으로부터의 좌절, 축제가 끝나고 난 후의 공허함이라고 하면 이해하실 수 있겠으나 그 잃어버린 것, 상실의 이야기가 무라카미에게는 본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르웨이의 숲] 에서도 나오코라는 애인이 자살한 뒤에 남겨진 '나'의 슬픔, 서정은 아주 훌륭히 써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한 애인 나오코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하는 독자 측의 의문이 남습니다. 나는 '마음의 병을 앓는 나오코'는 분명 어떤 관념으로 속박되어진 과거의 우리들 모습의 상징이라고 해석합니다. 그에 대치되는 형태릉 보이는 '미도리'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미도리는 현실적이고 생과 사, 정과 동 등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특기인 좌우대칭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생을 상징하고 있는 샘입니다."

 [노르웨이의 숲] 표지는 요코오 가즈키가 말한 것처럼 나오코와 미도리를 통해 생과 사나 정과 동과 같은 대칭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록색은 나오코에 대한 '조용하고 부드러운 맑은 애정'이고, 빨간색은 '서서 걸어다니고, 호흡하고, 고동치는'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은교씨는 [숲] 이라는 자연을 예로 들어 숲의 한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다른 나무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이 인간 또한 하나의 존재로서만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며, 그 죽음 또한 다른 존재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케다 세이지는 <연애소설의 공간> 에서 [노르웨이의 숲] 은 하루키 자신의 연애소설이라 언급하고 있지만, 오히려 연애라는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자폐적인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센고쿠 히데요는 <다림질하는 청년, 노르웨이 숲 속에서> 에서 작품 후기에 주목하여 후기가 있기 때문애 작품이 자기언급적인 이중소설화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주인공 와타나베가 세탁물을 다림질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말하는 것으로 주름을 잘 잡아 정황을 청결하게 하는 작가의 수법과 겹친다고 주장한다.

 엔도 신지의 <노르웨이 숲 론> 에서 언어의 불완전성을 전재로 쓰인 작품이라고 주장함과 함께 등장인물의 언어와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하쓰미, 심지어는 와타나베와 만나자마자 하릇밤을 보내는 여자까지 모두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자기요양'을 시도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자기요양'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에서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며, 미도리와 레이코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 여상은 결국 '자기요양'을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가토 고이치는 <이상의 숲을 걷다, 무라카미 히루키편> 에서 이 작품의 원형인 단편소설 [반딧불이] 와는 달리 어째서 방대한 분량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이 의문의 해답으로는 와타나베가 [반딧불이] 에서는 화자였지만, [노르웨이의 슾] 에서는 청자의 입장임에 주목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앙금을 쏟아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토 노리히로는 <옐로 페이퍼 무라카미 하루키> 에서 이 작품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원인이 내적 세계로부터의 회복을 그린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ㅡ다음 인물의 심리별로 읽어본 내용은 "작품으오 본 작가"코너에 있다 ㅡm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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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30th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초창기 단편들과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등을 좋아하고
10억의 선인세를 받고 나왔던 [1Q84]나, 얼마전 나왔던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는 애매함만 느꼈던 독자로서.
하루키의 매리트의 근원은 무엇인지.
그의 책들이 정말 문학적 완성도를 지금도 보이고 있는지.
아니면 첫 작품이 좋으면 습관적으로 그냥 다음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사는 
독자들을 겨냥한 판매가 성공한 케이스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국내에서 단편 외에 하루키를 널리 알려주었던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적어가 보자고 한다.
왜냐하면, 그를 알린 첫 장편이기도 하고
이후의 그의 많은 장편소설에서 같은 구조와 비슷한 인물, 비슷한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 원래 본인은 독서일기를 개인 파일이나 노트에 다양한 시선으로 논문형식으로 적는다.
하지만 게으른 내가 그걸 온라인에 또 올리는 일은 드물 것 같다.
주로 이곳 온라인 서재에는 100자 이내의 짧은 감상만 적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번 하루키 편처럼 원래 적어둔 독서일기를 그대로 올려볼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 독서 후기는 (소제목 목록 포함) 총 10장으로 나눠 썼으며, 며칠에 걸쳐 한장씩 옮겨보려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1)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으로 본 노르웨이의 숲
이 내용은 "국외순문학" 마이리뷰에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로 살펴 본 [노르웨이의 숲]
    (1) 기즈키의 자살과 나오코의 세계
    와타나베는 비행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를 듣거 나오코에 대한 혼란스러눈 기억을 떠올린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유일한 고교시절 친구인 기즈키의 연인이었다. 나오코는 기즈키라는 존재와 함께 둘만의 `완전한 세계`를 추구했다.여기서 `완전한 세계`라는 개념은 소에다 라오코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어릴 때부터 둘이서만 자랐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나갈 수가 없었다.무인도에서 자란 알몸의 아이란 많은 인간이 사는 실제 사회에 나갔을 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 없이,쉽게 상처입고 지쳐가는 것과 같은 정신벅으로 미숙한 두 사람의 미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나오코는 기즈키의 둘만의 세계는 두 사람이 성장해갈 수록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이런 결과로 기즈키의 기즈키의 자살 원인은, 기즈키와 나오코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결과로 만들어진 `완벽한 세계`가 없어질 상황에 놓이게 되고,사회에 나와 일하면 나오코와 기즈키 외의 타인이 둘만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고 그 결과 `완벽한 세계`는 무너지게 된다.기즈키는 그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안고 있었기에 자살했다고 볼 수 있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자살 동기를 알지 못했음은 물론 예상도 하지 못했다. 기즈키의 좋은면만을 봐 온 와타나베와 나오코 셋이서 있는 것이 좋았다는 말은,바꿔 말하면 기즈키의 단점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나오코는 기즈키의 단점을 알고 받아들이기보다 회피한 것이다.
   당연히 기즈키의 죽음 이후 나오코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특별히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예전과 달리 혼자 남겨진 나오코는 말을 함으로서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그녀의 행동이 서투르고 말을 잘 하지 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오코는 자신의 스무 살 생일 밤에 와타나베와 자려고 한다.그것은 자신의 결핍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기즈키는 나오코에게 있어 자신과 다른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기 때문에 서로 관계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다기보다는 `불필요`했던 것이라 추측해본다. 나오코에게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채우고자 하는 행동,즉 섹스가 필요 없을 만큼 자신의 일부인 기즈키와 함께 함으로서 둘은 완전하다고 느꼈던 것이다.기즈키와 와타나베와의 우정이 바깥 세계와 소통하려는 시도였던 것처럼,나오코 또한 와타나베를 바깥세계의 사람이라고 여긴 것이다.
   기즈키가 죽은 후 와타나베와 육채적 관계를 맺은 일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사도였다.그러나 그 결과는 나오코에게나 와타나베에게나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없다.기즈키와는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없었는데 어째서 와타나베와는 쉽게 반응했을까하는 죄책감을 동반한 의문이 나오코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나오코와 기즈키 둘만의 세계는 나오코 자신이 완전하다고 믿었던 것뿐이지 객관적으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둘이 완벽한 하나가 된 둘만의 세계라면 서로의 고민과 깊은 속내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했다.나오코와 기즈키 사이의 블완전성은 나오코가 기즈키의 자살로 인해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를 마지막까지 힘들게 했다고 볼 수 있다.

   (2) 자폐의 상징, 말과 세상 회피
   나오코는 자폐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그 결향은 더욱 부각된다. 나오코가 자폐적 성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은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 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이른 바 `말 찾기 병`증상을 보일 때이다.   나오코는 기즈키가 살아 있을 때에도 기즈키 없이 와타나베와 둘만 남겨졌을 때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는 것은,기즈키 없이 혼자만으로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가 어렵더는 것을 모여준다.기즈키는 와타나베를 바깥 세계와 교류하기 위한 연결 고리라고 여기고 와타나베를 통해 외부세계에를 바라본다.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 밤,와타나베와 둘이서 생일파티를 했을 때 나오코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고 이야기 전개도 비상식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 하고자 했을 것이다.그러나 말이 서툴기 때문에 (그래본 적이 없기 때문에)나오코의 이야기 전개는 비상식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양원에서도 편지를 고쳐 써서 보내고 잘 보낼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오코는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다 와타나베가 두 번째 방문에서 함께 살자고 하자 혼란스러워한다. 그녀는 요양원에서 나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 했고,혼자만의 `완전한 세계`(이제는 기즈키가 없기에)에서 벗어나 바깥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이다. 알반적으로 자폐상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와 질서,공간이 바뀌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오코의 자살을 부추기게 된 것이다.   나오코는 어렸을 적에는 기즈키와 둘만의 `완전한 세계`에서 살다, 기즈키가 죽고 난 후에는 아미료 요양원에서 혼자만의 세계,실재 세상과 거리를 둔 공간에서 지내왔다. 그런 그녀에게 요양원을 나와 와타나베와 함께 산다는 것은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세상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 보다 더.   
   (3) 아미료 요양원,혼자만의 완전한 세계
   아마료 요양원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곳이다. 미움도,증오도,사랑도 없는 완전히 무중력 상태의 안공적인 세계와 같다. 와타나베도 아미료 요양원을 찾아갔을 때 바깥 세계와는 상장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요양원 방문 후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와 세상을 느끼던 와타나베의 느낌도 달랐었다,    요양원 사람들이 하고 있던 테니스 게임이 누가 이기고 지는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공의 탄성에 흥미를 두고 주고받기만 할 뿐이라고 느꼈다는 자체가 라나의 묙표를 위해 앞다투어 다투는 경쟁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욕망이 없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하지반 욕망이 없는 세계가 과연 인간에게 진짜 세상일까?) 또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같은 음량으로 이여기하는 광경은 감정의 기복 없이 살아가는 (진짜 세상을 거부하는)요양원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육체 관계을 가진 후,아마료 요양원으로 들어가기 직전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재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깥 세계와 차단된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신경을 절대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야."
   그러나, 나오코는 바깥 세계와 일시적인 격리 이상으로 타인과의 교류가 필요 없는 혼자만의 세계를 꿈꾸었다. 잃어버린 마음, 닫힌 신체에서 (기즈키와는 불가능이 아니라 불필요했던 섹스가 왜 와타나배와는 했는지 나오코는 끝까지 고뇌 했을 것이다.) 와타나베와의 일을 통해 육체적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나오코는 요양원이라는 장소의 시스템을 빌려 타인을 거부하고 스스로 닫아버린 것이다.   와타나베에게 요양원으로 면화와줄 것을 희망한 것은 그녀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음을 보여주며,와타나베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곧 바깥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오코는 자살하게 된다.   나오코의 몸은 와타나베와 잤던 이후로 전혀 육체 관계에 반응하지 않는다,드것은 그 시절에는 기즈키와의 세계에서 이탈되어 상실된 자신의 일부를 와타나베와의 섹스로 매우고자 했지만,요양원이라는 완벽히 고립된 세계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개 된 후에는 다시 와타나베에게 신채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가토 고이치는 나오코가 와타나베와 마도리의 관계를 의식함으로써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하지만,이것은 나오코의 마음을 잘못 읽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의 말처럼 미도리와의 관계로 인해 나오코가 상심에 빠졌으며,와타나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라면 와타나베의 두번째 방문 직후 (와타나베가 같이 살자고 한 후)부터 병이 악화될 것이 아니라,와타나베가 마도리와의 이야기를 편지에 써서 보내고 그것을 읽은 후부터 병이 악화되었을 것이다.나오코는 와타나베가 두번째 방문하기 전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였다.그러다 와타나베가 같이 살자고한 두번째 방문 이루 갑자기 상테가 악화된다.   나오코의 "나비 핀"은 자폐를 상징하는 의미 중 하나이자 혼자만의 `완전한 세계`를 꿈꾸고자 하는 그녀의 심리적 메타포라 할 수 있다. 와타나배와 우연히 교토 전차에서 만났을 때 나오코는 `평범한 머리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양원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나비 모양의 핀`을 하고 있었다.   문학 작픔에 나타나는 나비의 경우,빛의 세계를 지향하는 무의식을 상징하거나 하늘의 세계 또는 천상의 빛을 갈망하는 영혼을 암시한다. 나비는 인간의 혼이며 생명으로 인간 혼의 비상을 의미하며,인간의 자량성을 축소시키는 내면 의식을 나타낸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비는 나오코를 상진하는 것이고 있다. 나비는 애벌레로 있다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 성충이 된다. 나비는 볼품 없는 유충에서 번데기의 고정을 고치며 완벽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나오코는 와타나배와의 관계에서 페쇄적인 세계가 구축될 수 없으며,요양원이라는 바깥세계와 차단된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러야 완전함을 느낀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비 모양의 핀은 나오코의 삶,그 자체를 상징하며,이것은 와타나베가 꾼 꿈에서도 암시가 되어 나타난다. 요양원을 방문해 나오코가 잠시 나가고 잠이 들었을 때 와타나베는 나비에 관한 꿈을 꾼다.   와타나베는 요양원에 들어간 후 변한 나오코를 보고 반년 만에 여성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가하고 놀란다.불완전했던 몸이 완벽하게 성숙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녀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지만 나비 모양의 헤어핀만 꽂고 있었던 것이다. 나오코의 그런 모습에 와타나베는 실제로는 아주 가까이 있어도 몇광년 정도 떨져 있는 것차럼 느낀다.   나오코는 스스로 말했듯이 페쇄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고,급기야 혼자반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을 거부한 채 죽음을 선택한다. 객관적으로 그것이 가능했다면 기즈키나 나오코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은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한 완벽한 세계의 구축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그것이 `숲`이라는 공간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하루키가 보여주는 세계일 것이다.   
   (4) 미도리의 세계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통해 련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생한 기분을 느낀다. 미도리 또한 타인의 죽음을 경험했고 죽음이 만연하는 곳에서 살아왔다.그러나 미도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피하지 않고 살아간다.와타나베는 세상과의 교류를 피하고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살아온 인물이다.그와는 달리 미도리는 현실에 맞서 열심히 살았고,그것은 그녀의 중,고교 시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미도리는 처음엔, 와타나베에게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입원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우루과이에 갔다고만 했다. 여기서 미도리는 우루과이의 경제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데 그것은 그녀의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나귀 똥이 가득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간병에 지치고 고독한 미도리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이자 미도리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그녀만의 기호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유난히 죽음이 많이 나온다. 작품 속 등장인물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다른 인물의 죽음에 가까이 있는데 미도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미도리는 다른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살아왔고,죽음이 생명의 영역을 침범해가는 과정까지 낱낱아 봐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도리는 인간의 중대한 관심사이자 공포 대상인 죽음을 겪어야 하는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억척스럽게 견뎌낸다.

   (5)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미친 영향

  [노르웨이의 숲] 은 1959년 1970년이 배경이다. 그 시대의 젊은 여성인 미도리의 연애관은 작품을 닝ㄱ는 련재 젊은 여성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킨다. 미도리는 자신의 응석을 다 밥다줄 수 있는 사랑을 원하고, 그런 미도리의 애정관을 '케니크'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이ㅛ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6) 사랑의 허구 
   (7) 사랑의 가능성

3)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4)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일번 전겅투 세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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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명작을 영화로 민드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고
좋아하던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다해도
매 머릿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의 이미지들이 손상될까봐 영화보기를 꺼렸었다.

  [일 포스티노] 는 그 중에서 몇 안되는 작품성을 갖추고 원작에 충실한 좋은 영화였다.

 정치적인 문제로 망명을 하기도 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파블로 네루다.

  영화 속에서는 책에서 표현되었던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소년의 우정과
자연으로 배우는 시 수업이, 시를 알아가는 청년의 기쁨이,
시가 전해주는 큰 우주의 깨달음이 잘 그려졌다.

  원작인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역시 두말 할 필요 없이 좋은 작품이다.

  [일 포스티노] 를 좋게 보았고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를 읽으며
시인 네루다 파블로가 궁금해지신 분들이라면
그의 시집들을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의 시들은 [일 포스티노] 영화와 작품에 나왔던 시처럼
잔잔한 감동을 주는 좋은 시들과
사회상을 반영한 의미 있는 시들로 이루어져있다.

전 선생님이 모든 아름다움을 갖고 가신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이제 보니 저를 위해 남기신 게 맘ㅎ은 걸 알개되었어요.
ㅡ (네루다가 떠난 후, 상실감 속에서 시를 계속 써가던
우편배달부 소년의 말)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어디서 그게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언제 어떻게인지 나는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목에서
밤의 한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 길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ㅡ파블로 네루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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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소설의 통령 박상륭이 [칠조어론] 이후 십 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박상륭 교도의 열렬한 신자였던 나는 그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행복했지만
그의 작품이 더 많이 대중들에게 알여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또한 작가들의 작가인 박상륭의 별세는
한국문단에서 큰 별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다] 역시
작가의 일관된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하며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해온 저자가 
이번에는 '니체'와 그의 '차라투스트라'와 한판 대결을 펼친다. 

 니체에 대한 도전장이나 다름아닌 이 작품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처럼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되어 
늙은 성자를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박상륭이 읽은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를 만날 수가 있다. 

 박상륭은 생존작가로서는 전례 없었던 예술의전당의 '박상륭 문학제'를 1999년 진행했다.
(평론가 김현이 "이광수의 [무정]이후 가장 잘 쓰인 작품)이라고 격찬했던 [죽음의 한 연구], 
'박상륭 교도(敎徒)'라고까지 불리우는 일군의 독자들의 영향 때문이기도하다.

 박상륭은 1969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서점 노스셔 북스(North shore Books)를 경영하기도 했으며 
영구 귀국하였다. 

(캐나다 뉴학 시절 그 서점을 방문했던 것이 내겐 영광이었다.
박상륭은 현지 신문에 오로지 글로만 (영어) 이루어진 기나긴 신문광고를 직접 내서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박상륭 소설은 인류의 '원형'을 찾아가는 기나긴 도정이면서 
죽음을 통한 삶과 생명의 이해라는 것을
소설작업의 일관된 주제로 삼고 있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일상 어법을 깨뜨리는 
난해하고 유장한 문체와 철학적 사유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박상륭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글쓰기를 통해 종교나 샤머니즘과는 다른 어떤 '원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늙은네는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초췌한 모습이 슬픈 듯, 깊은 한숨을 불어냈다. 차라투스트라는 미소만 짓고, 말은 만들려 하지 안했는데, 운명을 초극했기는커녕, 허긴 그 원죄의 무게 탓이었을 것이지, 것인데, 늙은네보다 더 늙어 보였다. 못 입고 지낸 지도 오래되었으니, 가시쟁이나 바위 사이로 다니며, 생활生活을 거둬들이기에 애쓴 흔적으로 남은, 무수한 생채기 자국이나, 움푹 들어간 눈과 볼 등은, 그가 전에 어떤 얼굴을 해달고 있었던지, 그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으려니와, 그러는 동안, 뼈에 발린 피부가, 추위와 더위, 찬 비와 꺼끄러운 바람 따위에 시달리느라 거칠어지고 두터워져, 어린 코끼리나 멧돼지의 가죽처럼 변했는데다, 깎지 못한 머리칼과 수염에 덮여, 사람이기보다는 성성이를, 그것도 병든 성성이를 방불케 했다. 그가 예찬해 마지안했던, 그 대지에 밀착해, 하루하루의, 몸의 삶을 꾸리기는, 동물과 인간을 초극하려는 자에게도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꺼져들고 있는, 삶의 한 재무더기였으나, 그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쪽은, 비교하면, 타오르는 불은 아니라도, 이글거리는 잉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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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 김영하가 자신의 친구의 결혼식에서 축가 대신 
자신이 쓴 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지만
가끔 청춘을 생각하며 파일을 찾아 읽어보곤합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왔다 멀어져가는 청춘을 떠올리며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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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은둔을 꿈꾸는 친구에게
- H의 결혼에 부쳐

스무살 무렵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촌에 작은 낚시집이나 하나 열어서 살아가는 꿈.
또는 땡중이나 수도승이 되어 산사의 목어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꿈.
백두대간 봉우리 하나쯤 잡아서 산장지기를 하며 늙어가는 꿈.
그때는 그게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가끔 세상은 나를 성가시게 하고
인연이 없는 여자들은 매몰찬 상처만 남기고 떠나가지.
스무살 무렵에는 유난히 그런 일이 많은 법이지.

가끔, 자살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네.
마음 주지 않는 여자나 허망하게 무너진 추운 나라 때문에
음습한 거리를 청바지에 손을 꽂은 채 헤매기도 했을 것이네.
그런 때면 하늘은 너무도 청명하여 새들조차 날아다니지 않지.

스무살 무렵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았네.
무인도에 함께 가자던 초등 학교 동창생들이 그립고
공주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짝궁이 그립기도 하지.
심지어 무던히도 두들겨패던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이 그립기도 하지.

그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반갑기만 했지.
수화기를 들 때마다 새로운 날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네.
이별을 고하는 전화,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전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전화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들었지.

토악질로 범벅된 입영전야.
자아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그런 노래를 부르며 밤새 거리를 헤매며 누군에겐지 모를 발길질을 해대며
눈물을 뿌려댔어도 그땐 외롭지 않았네.
대가리박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화장실에서 삼켜버리는 소보루 빵맛도 기가 막혔지.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이 때로는 정겹기도 했을 것이네.

스무살 무렵, 세상은 언제나 낯설었지.
사람들은 바삐 떠나가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지.
맑스 떠난 자리에 푸코가 들어앉고
조용필은 21세기가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데도 사라졌네.

군복을 벗고 찾아온 교정에는
막바지 진달래만큼이나 싱싱한 젊음들이 배타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네.
시험지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언어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그때쯤 깨닫게 되지.
남몰래 도서관에서 시험지 채우는 연습을 하는 동안
세월은 시험지 채우기보다는 쉽게 흘러가지.

스무살 무렵. 어떤 여자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지.
인간이 얼마나 바보스러워질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그런 여자.
그런 여자는 포기할만하면 다가와 은전처럼 말을 흩뿌리고 지나가네.
그래서 상처는 더 오래도록 곪아가지.
그런 세월이 계속되면 마음 속에는 두려움마저 생기네.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누이가 되고 간호교사가 되지.

그런 여자를 만난 가을이면 음악은 소금이 되고 마음은 염전이 되지.
염전의 물을 퍼내느라 하루종일 수차를 돌리는 세월.
그 세월이 오래면 짜디짠 소금처럼 음악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 음악들은 하나둘 상처 위로 내려앉아 감각을 퇴행시키지.
산울림과 조용필, 들국화가 귓전을 떠나지 않게 되고
어느새 음악에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그런 여자를 만난 겨울이면 서가에는 책이 쌓일 것이네.
지리산 토끼봉을 넘어 변산반도로 뛰는 사랑,
사랑하는 여자가 조총련이어서 간첩이 되는 사랑,
독일인의 사랑,
구월산 재인말에 천기로 스며들던 묘옥의 사랑,
그런 사랑들로 마음을 다스리네. 그러나 참 추운 겨울이었네.
그런 겨울이면 친구들은 군대로, 외국으로 하나둘씩 떠나가네.

그러다 봄이 되면 모임들을 기웃거리기도 했네.
함께 세미나를 하고 거리로 달려나가거나
어두운 뒷골목 소주집에서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네.
여기 오네 젊은 넋들 들판을 가로질러....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 선배 들은 그럴 때 참으로 아름다웠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소주를 따라주던 그런 선배를 죄스럽게 훔쳐보면서
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에도 세월은 차곡차곡 흘러갔네.
그 선배들도 하나둘 교정을 떠나고 말지.
도서관에 처박혀서 9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거나
양복입은 남자와 거리를 거닐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지.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쓰린 속을 만지며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이젠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그럴 때 둘러본 책장의 책들 위에는 뽀얀 먼지가 앉아있고
지난 1년간 단 하나의 음반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마음을 아리던 여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으며
지난 며칠간 단 한 통의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지.
이십대가 간 거지.

비록 아직은 나이에 ㄴ 자가 들어가지 않는다해도
실질적인 이십대는 서해 낙조처럼 부질없이 스러져갔다는 걸
자신만은 잘 알게 되는 거지.
무심코 뒤져본 지갑 속에선 옛 친구들의 명함이 비져나오고
그들의 이름은 거개가 한자로 적혀있곤 하지.

우편함에는 듣도 보도 못한 발신인의 카드들이 들어있기 시작하지.
왜 청첩장에는 부모 이름이 적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없이 백색 아트지로 된 그 종이들을 서랍 속에 밀어넣게 되지.

문화적 삼십대는 그렇게 시작하네.
사람이 그립지만 막상 만나면 아무도 그립지 않네.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게 되는 것도 그 무렵이네.
밤마다 열쇠로 따고 들어오는 자취방은 보일러를 켜도 스산하기만 하지.
시리즈 비디오를 빌려보게 되고 반쯤은 다 못보고 반납하게 되고
가끔 극장가를 배회하기도 하지.

그럴 때 한 여자를 만나게 되지. 이제 바보짓은 하지 않아도 좋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서툴고 어색하지만
세월은 사람을 허투로 관통시키지 않기에
이제 다소는 무덤덤하고 심드렁하게 사랑을 고백해보게 되지.
그런 방식이야말로 서로의 상처를 줄이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인간이 만든 최악의 제도라던 결혼이 차악으로 보이게 되는 것도 그 쯤이고
서로를 간헐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더벅머리 친구보다
지속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반려가 더 나아보이는 때도 그 무렵일 것이네.

스무살 무렵에는 여자의 매력이 마음을 데우지만
이제는 여자의 아픔이 용기를 북돋게 되지.
스무살의 전장에 묻고 왔다고 믿었던 부장품들이 옷장 속에서 기어나오지.
열정, 질투, 희망 따위.
말없고 단정하던 그녀가 자신에게만 응석을 부리기 시작하지.
월급을 탄 그녀가 중저가 브랜드의 티셔츠를 사다주면
그게 쑥스러워 일부러 옷자락을 바지 밖으로 빼어내서 입고 다니지.

하늘의 빛깔은 여전히 어둡고 앞날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게 되지.
소설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하네. 코미디 영화가 좋아 지네.

그래도 가끔 스무살 무렵을 생각하네.
밤새 술 마시던 골목을 지날 때면, 그때 읽던 책을 책장에서 치울 때면,
가끔 담배를 피워대네. 그땐 그래도 자유로웠다, 고 생각하지.
오, 그때의 그 자유가 얼마나 버거웠는지,
얼마나 성가셨는지,
얼마나 사람을 환장케했던 지를 생각하면서
이제 더 이상 그 자유를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네.

어느날 자리에서 일어나 면도를 하게 되지.
면도날을 새것으로 갈아끼우고 그녀가 사다준 면도거품을 정성껏 바르고
뜨거운 물을 세면대에 받아서 말이네.
그리고는 머리를 깎고 몸에 잘 맞지 않는 이상한 옷을 입고 황급히 달려가네.
꼭 황급히 달려가야만 하네. 그게 어울리네.
그렇게 달려가면 거기 신부가 역시 이상한 옷을 입고 피곤한 표정으로 기다리네.

그때 잠시 멈추어서서 뒤를 돌아다본다네.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를 것이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머리를 세차게 내젓고 걸어가 신부의 손을 잡네.

서른살 무렵에 다시 은둔을 꿈꾸지.
그 은둔은 스무살 무렵의 은둔과 다른 새로운 은둔일 것이네.
새로운 은둔의 동반자와 함께 걸어나가네.
드보르작의 한여름밤의 꿈이 울려퍼지네.

마흔 무렵이 되면 다시 이런 글을 쓸 것이네.
서른 무렵에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로 시작하는 글 말일세.
당신이 부럽네. 축하하네. 이제 새로운 세계로 걸어가게.
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싸우고 토악질하고 부둥켜 안고 울기를 바라네.
그래야 마흔이 되어도 이런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네. 안 그런가?

스무 살 무렵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자살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네.

수화기를 들 때마다 새로운 날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네.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이 정겹기도 했을 것이네.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쓰린 속을 만지며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이젠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사람이 그립지만 막상 만나면 아무도 그립지 않네.

세월은 사람을 허투로 관통시키지 않기에
이제는 다소 무덤덤하고 심드렁하게 사랑을 고백해보게 되지.
그런 방식이야말로 서로의 상처를 줄이는 방법임을 알고 있음으로.

마흔 무렵이 되면 다시 이런 글을 쓸 것이네.
서른 무렵에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로 시작하는 글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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