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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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래 본인은 독서일기를 개인 파일이나 노트에 다양한 시선으로 논문형식으로 적는다.
하지만 게으른 내가 그걸 온라인에 또 올리는 일은 드물 것 같다.
주로 이곳 온라인 서재에는 100자 이내의 짧은 감상만 적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번 하루키 편처럼 원래 적어둔 독서일기를 그대로 올려볼 것이다.

  아래 부분은 작픔에 대한 다양한 인물들의 평을 위주로 본 [노르웨이의 숲 ㅡ 상실의 시대] 이다.
  [노르웨이의 숲] 독서 후기는 총 10장으로 나눠 썼으며, 며칠에 걸쳐 한장씩 옮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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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의 숲] 은 1~3장 까지는 단편 [개똥벌레 ㅡ 반딧불이] 의 내용이다. 그 다음 부분은 장편소설로 쓰면서 첨가시킨 것이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장편으로서, <군조> 신인 문학상 수상작이다. 우리나라에는 1988년 삼진기획에서 이병익씨가 번역한 최초의 번역본이 나왔는데, 문학사상사에서 1989년에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후 널리 알려졌다. 제먹을 바꾼 이유는 '상실감'이라는 단어가 독자에게 더 공감을 일으킬 것이라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발간된 [노르웨이의 숲] 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로 겉표지가 상권은 붉은색, 하권은 녹색으로 되어 있다. 작품 겉표지의 라벨에는 하루키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이 소설은 여태까지 제가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종류의 소설입니다. 또한 어떻게든지 한번 쓰고 싶었던 종류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연애 소설입니다. 매우 구식 명칭이라 생각하지만 그 외에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격렬하고 고요하며 슬픈 100퍼센트 연애 소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르웨이 숲] 은 남자와 여자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다룬것, 그에 따라 녀성의 비중이 매우 커진 점이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요코조 가즈히로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무라카미의 80년대 테마는 확실히 '큰 이야기'를 경험한 후로부터의 귀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60년대 후반의 카은터 컬쳐, 베트남 반전 운동과 학생운동 등의 반체제 운동이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났던 것으로부터의 좌절, 축제가 끝나고 난 후의 공허함이라고 하면 이해하실 수 있겠으나 그 잃어버린 것, 상실의 이야기가 무라카미에게는 본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르웨이의 숲] 에서도 나오코라는 애인이 자살한 뒤에 남겨진 '나'의 슬픔, 서정은 아주 훌륭히 써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한 애인 나오코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하는 독자 측의 의문이 남습니다. 나는 '마음의 병을 앓는 나오코'는 분명 어떤 관념으로 속박되어진 과거의 우리들 모습의 상징이라고 해석합니다. 그에 대치되는 형태릉 보이는 '미도리'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미도리는 현실적이고 생과 사, 정과 동 등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특기인 좌우대칭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생을 상징하고 있는 샘입니다."

 [노르웨이의 숲] 표지는 요코오 가즈키가 말한 것처럼 나오코와 미도리를 통해 생과 사나 정과 동과 같은 대칭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록색은 나오코에 대한 '조용하고 부드러운 맑은 애정'이고, 빨간색은 '서서 걸어다니고, 호흡하고, 고동치는'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은교씨는 [숲] 이라는 자연을 예로 들어 숲의 한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다른 나무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이 인간 또한 하나의 존재로서만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며, 그 죽음 또한 다른 존재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케다 세이지는 <연애소설의 공간> 에서 [노르웨이의 숲] 은 하루키 자신의 연애소설이라 언급하고 있지만, 오히려 연애라는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자폐적인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센고쿠 히데요는 <다림질하는 청년, 노르웨이 숲 속에서> 에서 작품 후기에 주목하여 후기가 있기 때문애 작품이 자기언급적인 이중소설화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주인공 와타나베가 세탁물을 다림질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말하는 것으로 주름을 잘 잡아 정황을 청결하게 하는 작가의 수법과 겹친다고 주장한다.

 엔도 신지의 <노르웨이 숲 론> 에서 언어의 불완전성을 전재로 쓰인 작품이라고 주장함과 함께 등장인물의 언어와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하쓰미, 심지어는 와타나베와 만나자마자 하릇밤을 보내는 여자까지 모두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자기요양'을 시도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자기요양'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에서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며, 미도리와 레이코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 여상은 결국 '자기요양'을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가토 고이치는 <이상의 숲을 걷다, 무라카미 히루키편> 에서 이 작품의 원형인 단편소설 [반딧불이] 와는 달리 어째서 방대한 분량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이 의문의 해답으로는 와타나베가 [반딧불이] 에서는 화자였지만, [노르웨이의 슾] 에서는 청자의 입장임에 주목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앙금을 쏟아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토 노리히로는 <옐로 페이퍼 무라카미 하루키> 에서 이 작품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원인이 내적 세계로부터의 회복을 그린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ㅡ다음 인물의 심리별로 읽어본 내용은 "작품으오 본 작가"코너에 있다 ㅡm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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