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뜨거운 여름이었었다.
아는 비평가 선생이 집앞에 놀러오셔서 슬리퍼 차림으로 집 앞에 나간 적이 있다.
그때 바평가 선생이
캐나다에 계신 박상륭 선생님이 한국에 올 때마다 머무시는 집이
우리집바로 뒤에 있다고 인사드리러 가자고하여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무지와 젊음이 그렇게 무식하고 용기만 있는 건지,
양말도 신지 않은 슬리퍼 차림으로 나는 
단촐하지만 깨끗한 박상륭 선생님이 기거하셨던 아파트에 방문하게 되었고,
선생님과 사모님은 당황하셨을텐데도 아무렇지 않은듯 받아주셨었다.
(나도 그렇지만 비평가 선생은 지난밤 숙취를 매달고 있는 상태였다)

어느 집을 가든 책장을 가장 먼저 보는 나는 책장을 찾다 안보여 여쭤보았는데
박상륭 선생님은 닫힌 한 빙문을 가리키며 '저 안에 있다'고 하셨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 박상륭 선생님도 자신의 보물창고인 서재를 쉽게 보여주시지 않는다 하셨다.
대신 거실 한쪽에는 후배 작가들이 보낸 책들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같이 갔던 선생은 나에게 
평소에는 말만 잘하더니 왜 벙어리가 되었냐고 했지만
선생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박상륭 거장 앞에서
20대 얼뜨기 3류 글쟁이가 무슨 말을 할 구 있겠는가.

대신 나는 나도 저렇게 곱게 나이들고 싶다고 느꼈던
박상륭 선생님 사모님과 함께 캐나다 생활이라던지
(나도 캐나다, 미국에서 수학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요즈음 젊은이들이 왜 외국 작품만 읽는지
또 한국문단의 젊은 소설가들의 수준이 왜 이렇게 떨어졌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상륭 선생님도 그렇지만
사모님 역시 명장 소설가 사모님 답게 본인만의 확실한 문학관과 생각을 깊이 있고 확고하게 가지고 계셨다.

박상륭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들의 대화에서 소외 될까봐
젊은글쟁이로서의 의견을 사안 끝마다 물으셨지만
나는 너무 긴장해서 얼뜨기 같은 말만 할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 '아직 어린데 겁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라며
순간순간 나를 구해준 사모님께 감사했을 뿐이다.

그때 느낀 박상륭 선생님의 눈빛은 
작품에서 느꼈던 것과 같이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깊었고 고요한 호수의 수면처럼 내면이 들여다보일만큼 맑았었다.
또한 허리를 펴고 앉아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에서는
소탈함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작가들과 문학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보았지만
그들은 그저 불안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일 뿐인 경우가 많았는데
박상륭 선생님에게서는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처럼 
젠체하지 않아도 내공이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방문 이후로도 나는 박상륭 선생님 생각을 할 때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고요하지만 상대의 내면을 다 들여다보는듯한 눈빛과 함께
무지에서 비롯된 문학에 대한 철없는 자신감을 내뿜던 철없던 내 모습과
양말도 신지 않고 우연히 방문해서 죄송함에 자꾸 어디로든 숨어버리고 싶던 내 마음과 같이
자꾸만 곱아지던 내 못난 열 발가락이 생각난다.

* 요즘 많은 문청들은 작가들과 자신의 인연을 과장하며
그것이 자신의 위치이고 그만큼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작가는 커녕 3류도 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들은 작가는 커녕 3류 글쟁이도 못된다.
자신이 못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 줄 뿐이다.

나의 어리석었던 젊음을 떠올리며
요즘 젊은 작가나 문청들이 그런 오만에 빠지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2017, 여름 mangoㅡ추억의 한 귀퉁이를 뜯어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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