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심리학 - 천 가지 표정 뒤에 숨은 만 가지 본심 읽기
송형석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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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차원의 소녀, 멍 때리고 앉아 있는 남자,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을 수 없는 아버지, 십년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았건만 남처럼 느껴지는 남편... 도무지 이들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생각들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한두번쯤 하게 마련이다. 뭐 굳이 정신분석학의 대가 칼 융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정신세계 즉 심리에 대해서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익히 알고있을 것이다. 특히 현대처럼 복잡한 시스템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혹자는 발현되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거의 전부다 한두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도 말한다. 굳이 이런저런 병명을 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다양한 문제들이 현대인만의 특성은 아니다. 잠시만 우리 역사를 살짝 엿보더라도 남을 전혀믿지 못하고 심지어 자식도 믿지 못햇던 의심많았던 인조, 모든 문제에서 우유부단으로 일생을 마감한 덜떠어진 선조 그리고 너무나 철두철미했던 이순신등 다양한 케이스를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다보면 그 응용분야는 무궁무진하게 확장된다. 특히 요즘처럼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한 시대에는 직원의 채용에서부터 직원의 교육 그리고 소비자의 소비성향 및 기업경영전략 전반에 걸쳐 심리학의 응용분야는 점점 더 확장된다. 어디 기업뿐이겠는가 정치, 문화, 교육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심리학이 응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이미 심리학은 우리와 근접한 거리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이처럼 심리학의 분야가 갈수록 확대되는 것일까? 심리학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관찰자적 학문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심리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이 심리학이고 인간활동중에 인간의 정신세계를 거치지 않는 활동이 거의 없듯이 심리학 역시 사회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위험한 심리학>는 바로 이러한 심리학에 대한 전반적인 증세와 대처방안 그리고 자가진단등에 걸쳐 우리가 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심리적 행동에 대해서 스토리텔링방식으로 아주 쉽게 접근토록 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각종 ㅇㅇ컴플렉스 시리즈에서 부터 은둔형 외톨이까지 그 증세의 근본적인 원인과 치료방안 그리고 예방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심리학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럼 왜 저자는 책의 제목에 위험한이라는 단어를 첨부했을까?
흔히 우리는 타인의 심리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서 알고져 한다. 타인을 지배할려고 하던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사랑을 얻기위해서던 간에 타인에 대한 심리상태를 파악하고져 한다. 예를들어 저 사람은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경계대상이고 이 사람은 이러저러해서 가까이 지내도 별 탈이 없을꺼라는 안도감을 가지면서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된다. 특히 만남의 관계를 수량적으로 환산하게 될수록 이러한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대게 마련이다. 곧 이미 알려져 있는 심리학적 접근방법을 동원해서 타인에 대한 심리상태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에 대한 모든것을 판단해 버린다.

저자가 말하는 위험한이란 다름아닌 바로 이러한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지사지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타인의 눈에 나라는 자신은 어떤 심리학적 병세를 갖고 있고 그래서 나를 만나는 상대하는 타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생각만해도 섬뜩하지 않을까? 주변의 모든사람을 그러한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 살벌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학이란 위험한것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심리학이란 바로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즉 서로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라는 것이다. 타인은 자신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타인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나감으로써 보다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자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을 반면교사로 삼아 나도 타인에게 언제든지 그렇게 비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타인에 대한 포용력을 키워나가야 현대처럼 복잡다양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내 판단의 잣대로 삼는 위험한 심리학이 아닌 타인과 자신이 공생할 수 있는 안전하고 긍정적인 심리학이 필요할 시점인 것이다. 수신이라는 것이 결코 본인 스스로 혼자서 이룩할 수 없듯이 진정한 수신은 타인과 더불어 부딛쳐 살아가는 중에 진정한 수신이 이루어 지듯이 인간관계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다. 돼지가 될것인가 부처가 될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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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1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1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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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로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을 정사로 하는 사행단에 군관자제(개인수행원)자격으로 장장 5개월에 걸쳐 중원대륙을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기행기이다. 당시 연암과 교류를 가졌던 일명 연암사단인 박제가, 홍대용등은 연암보다 먼저 청제국을 다녀온 상태에서 연암의 이번 기행은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오히려 연륜으로나 학문으로 정체성이 확립된 시점에서의 중국기행은 그의 안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 왔고 이런 기회를 연암은 열하일기라는 저작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후대에 우리에게 왜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라 칭하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열하일기는 그 형식상은 기행문의 일종이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들은 가히 당시 조선을 경천지동하게 할 정도의 위력이 담겨져 있다. 오죽했으면 정조의 문체반정의 시범 케이스에 걸려 금서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책이 간행되기도 전에 여러 선비들의 입소문으로 필사본이 먼저 돌아다니게 되었다. 결국 열하일기는 연암의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하게 되고 하물며 그의 손자인 박규수가 영의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도 세인의 두려움으로 간행 되지 못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핵폭탄같은 위력을 담고 있는 저서이었다.

연암은 당시 계급상승의 지름길격인 과거를 거부했고 아직까지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못하고 소중화로 자부하던 당시 주류양반들의 사상적 연대참여에 철저히 거부한 외로운 아웃사이더로 생을 살아갔다. 북학이라는 실용학문의 거두로써 이용후생적인 삶을 지향했던 그는 유언으로 그저 자기 "몸 하나 깨끗히 씯어달라"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당시 여타의 선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다. 비록 말년에 강권에 의해 몇차례의 지방직에 출사하지만 그의 관직생활 역시 일반민중들과의 소통에 거의 전부를 보내게 되고 <과농소초>라는 불후의 농경학서를 남기기도 한다.

이처럼 연암은 당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청나라에 대해서 오랑캐가 아닌 진정한 제국으로 인식했다. 열하일기가 당시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를 사용치 않고 청의 연호인 건륭을 사용하므로써 시작부터 직격탄을 받게 되지만 연암의 생각은 이들과 달리했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도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는 신념하에 여행을 하면서 청제국의 문물과 제도, 문화, 과학,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표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론격인 일신수필에서 언급한 수레제도, 벽돌제조과정, 난방방식, 말타기, 의복에 대한 그의 견해는 날까로운 눈썰미를 엿볼 수 있다. 사대부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선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또한 도강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인식은 연암으로부터 230여년이 지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상고사에 대한 왜곡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고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해석하고 있는 현 주류사학자들에게는 더욱더 일침을 가한다. 연암은 심양(성경)에 도달하면서 여기가 바로 고조선,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라는 명칭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표명하는데 이 논지는 지금 학자들 사이에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열하일기는 이처럼 역사,경제,문화,정치등의 다방면에 두루두루 걸친 백과사전이자 연암의 지식의 보고인 셈이다. 그럼 왜 우리는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 칭할까. 열하일기를 이런 백과사전으로 본다면 왠지 딱딱한 학문적인 뉘양스만 풍길테지만 사실 그 비밀의 열쇠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열하일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암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이자 노마드였다. 연암이 강을 건면서 던지 화두에서 그의 노마드적인 삶을 추측할 수 있다. 언덕과 물 사이에서 '사이'의 정의를 두 견해 사이의 중간이나 평균을 뜻하지 않고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변이형이라고 해석하므로서 하나의 고정된 가치나 방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고 삶의 현실속에서 구체적이고 매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일생을 통해서 초지일관 지속되었던 사상이고 사행길에서 부딛치는 사물과 인물들의 만남에서도 그런 모습을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이 인간적인 연암을 보여 주기도 한다.  

북경에 도착하여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북경에서 하인 장복과와 이별하는 모습에서 마치 절친한 지인과의 이별에서나 느끼는 애절함과 마두인 창대와 열하로 떠나는 여정에서 창대의 예기치 못한 발병을 간호해주는 모습은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휴먼니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암의 노마디즘과 휴머니즘보다 더 강력하게 열하일기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철촌살인같은 그의 웃음 즉 유머러스하고 나이브한 철학이 담긴 위트일 것이다. 사행중 갑자스럽게 들런 상가집에서의 문상장면, 그리고 흉악하고 덩치큰 무뢰배를 만나 슬그머니 뒤걸음치는 장면, 가게점포의 현판을 곡해해서 생기는 해프닝, 한밤중에 고북구를 나오면서 성벽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쓰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술을 사용하는 장면, 정진사를 비롯한 사행단에게 중간 중간 날리는 맨트를 그야말로 왜 우리가 열하일기에 열광하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칫 기행문이 백과사전 내지는 철학서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라도 하듯이 연암은 군데 군데 적절하게 이런 나이브한 웃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천하의 문장가인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이런 나이브한 웃음도 호질(범의 꾸중)에 이르면 씁슬한 맛을 느끼게 한다. 비록 중국 이야기라고 운을 떼지만 이는 필시 조선양반사회를 실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계급에 대한 비판은 비단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연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渡江錄(압록강을 건너며) --> 盛京雜識(심양의 이모저모) --> 馹迅隨筆(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 -->關內程史(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 漠北行程錄(북경에서 북으로 열하을 향해)

이처럼 한양를 출발하여 심양을 거쳐 산해관을 통과하여 마침내 수도 북경에 도달하게 된 사행단 일행은 갑작스런 황제의 통보로 부랴부랴 열하(승덕)으로 급히 출발하게 되고 수많은 난관을 무릎쓰고 열하의 태학관에 도달하게 된다. 

▣ 눈여겨 볼 만한 각론은 일신수필의 장대기, 관내정사의 이제묘기와 호질등이 있다. 장대기는 산해관 만리장성의 장대를 오르면서 느낀 감회로 무릇 인간이란 높은데 오를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막상 내려올때는 그 높이에 질려 혼비백산하듯이 이는 관직이 높을수록 그 나락의 충격도 크다는데 비유해서 관직생활의 청렴함과 덧없음을 시사한다.

▣ 이제묘기에서는 또 한번 연암의 나이브한 넋두리가 보인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만으로 살았다지만 정작 자신은 고사리를 먹고 속이 불편했다면서 고사리는 어느 땅에서 난 것이냐며 에둘러 백이,숙제에게 한방 날리는 풍경은 연암이 이율배반적인 중화사상에 젖어있는 이들에게 가한 일갈인 것이다. 

연암과 함께 하는 18세기말의 중국기행은 다름아닌 연암이라는 불세출의 문장가이자 노마드, 휴머니스트 그리고 재치있는 위트가 있어 여행의 끝은 지루하지 않고 마냥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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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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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가난한 열등생, 서울대 합격하기까지의 인생역정- 책 제목과 부제만 보면 난 개인적으로는 한숨이 먼저 나오면서 결코 이런 내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다.

왜곡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중에 하나로써 그리고 영원한 숙제이자 지상과제인 교육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 봐야만 하는 입장에서 이런 내용의 책들이 더 이상 출간 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부모들이 절대로 읽어서는 안된다. 특히 이 책을 무슨 서울대 가는 비법서인양 착각하고 읽는 부모들이 있을 것 같은 노파심 때문이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필자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절대로 그런 책이 아니다. 또 읽어 보면 별 특별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의 부모들이 그렇게 받아 들일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왜? 속되게 표현하면 애들 잡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봐라 이처럼 가정형편이 힘들고 공부도 지지리도 못했던 학생도 죽어라고 노력하니까 서울대를 가니까 이 사람보다 조건이 더 좋은 너가 서울대를 못 간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고 하면서 공부, 공부, 공부를 왜쳐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부모들의 심정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조상 속칭 말하는 일류대를 나오면 분명 삶의 질(외형적인 질과 자칭 내면적이라고 착각하는 질을 포함해서)이 향상되는 것은 사실이다. 부모세대가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리고 지금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공부가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트인 생각을 하는 부모세대도 많이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자사고나 특목고를 보내기 위해 초등학교때부터 남과는 다른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국가통수권자가 솔선수범하여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유치원에서부터 우리말을 알기전에 영어부터 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마냥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기엔 왠지 불안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 사회적 분위기가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우리자녀들을 바라보는 점 또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로 나누어서 결국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를 조금이라도 잘하는 방법론만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이 서점가의 로얄박스에는 언제나 공부잘하는 비법이나 나도 일류대를 갈 수 있다는 등등 그야말로 공부기계를 양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굳이 부모들이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작정을 한다면 다른 내용은 모조리 잊어 버리고 단 하나 필자인 철범씨의 어머니 같은 마음만 받아 들이길 바란다. 필자의 어머니처럼 절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부하라는 소리 않고 그냥 묵묵히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말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의 필자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가장 큰 밑거름은 바로 필자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필자의 노력도 대단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에 '공'자 한마디 안하고 지켜봐 준 어머니가 그저 대단할 뿐이다. 그리고 공부 보다 책읽기를 중요시 여겼던 점 또한 학창시절 필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하는가 뻔한 말이지만 우리 학생들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필자처럼 어두운 밤길을 손전등을 비쳐가면 단어장을 보고 문제집을 몇번씩 되풀이 해서 풀어야 한다는 그런 방법론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들의 삶을 보면 대체로 어려운 가정형편속에서도 주위 환경에 굴하지 않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곤한다. 필자 또한 만만치 않은 환경속에서 나름 성공했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우리가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아마 필자도 같은 심정이겠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위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실패가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말하듯이 인간은 항상 실패를 하게 마련이다. 단지 성공한 사람과 일반인의 차이는 그 실패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살이에서 그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학생의 본분은 첫째가 공부에 있음은 당연하다. 단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다음 문제인 것이다. 공부를 받아 들이는 마음가짐에서 나름의 기본원칙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자전적인 삶에 투영된 일관된 점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한창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은 학생들에게 또 공부관련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경험을 해본 이들의 솔직한 삶을 한번 들여다 보고 새삼 마음을 한번 더 추스려보는 것이 영어단어 하나더 외우고 수학공식 하나 외우는 것 보다야 백배는 낫다는 점이다.

지금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잘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가장 잘맞는 옷을 찾는 것이다. 하루를 입어도 10년을 입은것 거처럼 편안하고 10년을 입어도 하루를 입은것 처럼 세련된 그런 자신만의 옷을 찾는 것이 공부에 대한 진실을 알게되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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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스바루>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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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멜리사, 판 시스터스, 도널드 트럼프, 세이디 그리고 딕 체니 이들 이름만 들어도 상당히 알려진 저명인사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다름 아닌 염소, 개, 수탉 그리고 코요테를 지칭한다. <굿바이, 스바루>는 저자인 덕 파인의 에코 농장 프로젝트를 다룬 자서전적 현장 체험 보고서이자 지구 온난화 위기에 봉착해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뉴욕커인 저자가 어느날 갑자기 수천킬로 떨어진 뉴멕시코의 외진 곳 그야말로 산넘고 물건너 위치한 목장을 인수하면서 그의 좌충우돌 에코농장 가꾸기 생활이 시작된다. 단순한 농장생활이 아닌 그야말로 자급자족형태를 갖추면서 친환경적인 농장 경영을 해보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게 된다. 첫출발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애마와의 작별이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운행하던 자동차를 처분하고 폐식용유를 연료는 하는 픽업대형트럭을 개조한 몬스터를 운행하면서 에코경영의 첫발를 딛게 된다. 난생 처음염소(나탈리와 멜리사)을 키우면서 겪게되는 어려움과 하나씩 배워나가면서 얻게 되는 성취감과 기쁨은 작가 특유의 위트감각으로 지면을 대신해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농작물을 심고 재배하고 닭을 키워 달걀을 생산해서 자급자족을 하면서 여유분은 인근마트에 파는 방식을 통해 서서히 에코농장경영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축적방식으로 최대한의 탄소발생을 억제하는 삶을 실천해 보이기 있다. 

산업혁명이후 급작스러운 기술발달로 인해 인류는 엄청난 편의를 제공받고 있다. 하지만 자연법칙이란 작용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분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구온난화를 통해서 몸소 확인하고 있다. 국지성호우, 기온급상승등 해마다 그 규모를 더해가는 자연재해로 인해 인간 삶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쏟아낸 이산화탄소로 인한 후유증이다. 부랴부랴 기상이상협약등을 체결하여 탄소배출에 대한 억제 의지를 내비치고는 있지만 몇몇 거대 방출 국가의 불참으로 사실상 그 실효는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비록 우리와는 정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다른 미국 대도시 젊은이의 실천지향적인 행동에는 정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결국 작가는 자긴의 친환경생활체험을 통해서 지구를 그나만 지금보다 악화되지 않게 지키는 방법은 거대한 담론이나 프로젝트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각 개인이 지금의 생활습관을 조금씩만 바꿔 나간다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간생활 영위의 3대요소인 의,식,주에 약간의 방법 변화만 가져와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면을 모르는것은 아니지만 막상 실천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결국 무임승차라는 커다란 유혹앞에서 좌절하게 마련이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편의성이라는 달콤한 설탕앞에 눈을 감을 수 밖에 없는 생활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신종플루로 인한 위협 거의 공포심을 느끼게까지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어찌보면 이러한 바이러스의 범람 역시 자연과 소통이라는 극히 간단한 진리를 외면해 버린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작가처럼 우리도 친환경생활을 위해서 훌훌 다 털어버리고 시골 산간으로 가자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지금의 생활패턴을 아주 조금만 바꾸더라도 환경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경제성을 무시하고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만든 시스템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그 시스템속의 노예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음을 근래들어 벌어지는 각종 위기와 자연재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는 아닌가 싶다. 

책장을 덮으면서 작가가 장미밭을 지키기 위해 염소들과 사투하는 모습 그리고 음험한 딕 체니(코요테, 정말 적절한 비유이다)로 부터 닭들을 지키위한 노력들에 미소를 짓게 하고 달걀을 수확하면서 뿌듯해 하는 모습들이 생각난다. 그러한 환경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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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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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중에 한 다스(물론 이 말은 일본어이다 영어로는 알다시피 dozen)는 12개라고 알고 있기 마련이고 여태까지 이런 개념은 변하지 않는 진리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한 다스가 12개가 아니라 13개라고 하면 어떨까? 여기 <마녀의 한 다스>는 바로 이러한 개념들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즉 개념이 먼저냐 말이 먼저냐에 대한 이를테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엇비슷한 이야기들로 넘처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상식중(물론 일신교적 가치관으로 무장된 일부 인들은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은 보편타당성을 획득한 과학 진리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 내지는 진리들이 국가와 민족간에도 과연 적용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에 대해선 일식견이 없지만 그녀의 책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 특히 인류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민족의 특징들을 자신의 주업무인 동시통역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인간내면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다가오는 것 같다.

러시아에서 만난 일본인, 중국인, 일본에서의 중국인, 미국인, 조선인, 이탈리아에서 만난 중국인 기타 등등 다양한 환경속에서 다양한 민족들과 좌충우돌과정에서 그 민족(이 역시 전부다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의 특성과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인간만이 가지는 속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세계를 이처럼 재미있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는 책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인류학적으로 구분되는 민족이라는 개념의 특수성을 르네상스시대이후 쟁점이 되었던 지동설과 천동설의 충돌이 아닌 오직 천동설의 영역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내가 바라보는 모든 관점은 본인 위주의 세상이라는 점이다. 흔히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易地思之 즉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봐라" 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아마도 이는 특히 전혀 다른 문화권을 가진 이들에게는 한줄기 빛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비슷한 발음상의 차이로 어느쪽은 긍정적인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듣는 상대쪽에서는 엄청난 모욕이 될 수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자체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부자연스러울수도 있다는 것이 작가의 뜻이다. 더욱이 역사도 나라도 문화도 상이한 사람들끼리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우리와 일본의 경우 같은 한자 문화권을 향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네들과 우리들의 사고 시스템은 아무리 상대방의 배려차원에서 생각해도 멀기만 한 당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럴바에는 상배방이 말을 그대로 하게 하고 나서 그 관점에 우리의 마음과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대처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어페가 있는듯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수긍이 절로 가는 말이다. 우리 주변 시야를 좁게 가져가 보면 남녀관계에서 그 효과는 여실히 들어날 것이다. 상대방에 맞춘 언행보다는 상대방의 언행에 좀더 귀기울이는 것이 관계 진척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다.

러시아 동시통역사인 요네하라 마리는 동시통역이라는 특수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나라와 민족 구성원들을 통해서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각각의 말고 개념이 다르듯이 역사와 문화가 이질적인 환경속에서 과연 어떻게 상대방에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한 다스가 12개라는 개념은 이제는 고정관념에 불과할 수 도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13개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11개가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차피 한 다스가 12개라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잠시 편의를 위한 방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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