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3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3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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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듯 연암의 발길을 따라 숨가쁘고 머나먼 여정을 했다. 물론 연암은 이러한 여정이 찰나처럼 짧게만 느껴졌겠지만 조선선비로는 최초로 열하의 피서산장을 구경하고 이교도인 반선을 만나는등 그야말로 자신의 목적을 120%달성한 여정이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번 권은 연암이 열하와 그리고 열하에서 북경으로 건너와서 북경 거리의 진기한 모습을 보고 느낀점을 위주로 기록한 일종의 박물기라고 해야할 것이다. 특히 귀국하는 길에 옥갑이라는 곳에서 역관들과 격식을 떠나 담소를 하는 도중 윤영의 이야기라는 단소를 달면서 들려준 <허생전>은 지금까지도 많은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번 권은 앞에서 말했듯이 박물기의 성격이 강하지만 연암이 누구인가 연암은 쉽고 부담없이 읽을거리에도 그만의 촌철살인같은 해학과 자기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연암을 읽으면 읽을수록 역시 프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건륭황제의 만수절을 기념하여 열하곳곳에서 펼쳐진 신기한 요술이벤트를 목격하고 남긴 환희기는 그 내용만으로도 현대의 마술 디너쇼를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듯이 리얼하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환희기의 원문은 모두 4자씩 토를 끊을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연암의 탁월한 글솜씨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연암은 말미에 화담 서경덕과 장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생물학적인 눈에 보이는 실체가 세상의 모든것이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광명정대한 눈이란 진정한 자신의 소견이 없으면 그저 창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 선비들의 학문연구를 독려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권의 하이라이트는 옥갑에서 들려주는 허생전일 것이다. 우리는 허생전을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지금으로 따지면 허생은 거시적 경제흐름을 읽을줄 아는 대가였다. 특히 상품의 유통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지고 한나라 경제를 통제한다. 하지만 연암은 허생전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경제적 체력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비판함과 동시에 아직도 존명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는 엘리층의 위선적인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허생은 아마도 연암 자신의 분신일 것이다. 탁상공론과 명분에 목메고 있는 당시의 지식층은 연암눈엔 마치 어린애들의 투정으로만 비쳐졌다. 북벌의 쌍두마차였던 효종과 이완을 슬그머니 끌여들여 북벌의 허와 실을 세세하게 밝혀 북벌의 허망함을 질타하고 있다. 그렇다고 연암이 친청주의자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연암은 열하일기 곳곳에서 되놈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듯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지만 연암에게 그러한 되놈에게도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는 근본적인 갈망이 이었다. 연암은 손자가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했듯이 그토록 증오하는 적을 알아야 그 적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암은 청나라의 제도 특히 기와나 수레, 난방장치 심지어 똥거름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철철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던 것이다. 그만큼 연암에게 청의 모든 문물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극기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북경의 사찰과 도교사원 그리고 야소교의 성당을 관람하면서 느꼇던 양엽기에서 연암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를 보여주므로서 다시 한번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북경의 법장사라는 절에서 발견한 김창업과 홍대용의 이름을 발견하고선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고북구 만리장성벽에 새겼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새겨볼까라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우리들이 공공건물이나 화장실등에 써갈기는 낙서의 기원은 역사적으로도 그 내력이 있는것 같다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연암의 여정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열하일기 전반에 걸쳐서 연암은 이용후생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주체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비단 지금의 청제국이 최강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은 있고, 비록 오랑캐라고 하지만 그런 오랑캐에게도 배울것은 분명이 있다는 점을 소중화라고 떠벌이는 조선의 비루한 선비들에게 던져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 정조가 침몰하는 조선이라는 배의 선장이었다면 연암은 알려지지 않는 조타수였다. 이는 물론 사견이지만 정조의 문체반정은 정조의 노론에 대한 히든카드였다. 정조는 문체반정의 시범케이스로 연암의 열하일기를 지목했고 열하일기는 그야말로 금서로 낙인 찍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금서지정이 오히려 세간의 불을 댕겨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게 되면서 그동안 우물안의 개구리격이었던 조선선비들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일조를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마도 정조는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역으로 식자층의 허상을 깨는데 연암의 열하일기를 적극 활용했던 것은 아닐까.

분명히 열하일기는 당시에 불온한 서적이었다. 건륭이라는 연호를 버젓이 사용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무엇보다 열하일기의 내용자체가 쓰나미와 비견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 그자체였던 것이다. 왜 연암은 이렇듯 위험한 게임을 했을까 아마도 그 해답은 치서록에 담겨있는 밴댕이가 새우가 되고 새우가 가오리가 된다는 우스개 소리처럼 진실이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할려고 하는 것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연암에게 진실이나 진리는 고정화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그 과정을 찾아가는 길이 있을 뿐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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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0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 100년간의 삶을 통해 얻은 지혜의 메시지
엠마뉘엘 수녀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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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라는 시간적 개념은 역사적 또는 그 비슷한 잣대를 견줄 경우 그다지 긴 세월은 아니다. 기꺼해야 1세기로 표현되는 100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개념에서 한켠으로 비켜나 있다. 하지만 이 100년이 다름아닌 우리 인간들의 생을 살아가는 삶을 지칭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지금처럼 최첨단 과학기술의 진보와 그로 인한 의학혁명을 통해서 이젠 왠만큼 산다고 하는 국가들의 평균수명자체가 어머어마하리 만큼 연장된 것은 사실이지 아직까지도 인간에게 100살이라는 삶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나는 100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는 2008년에 영원한 안식을 가진 '카이로의 넝마주이'라고 불리는 엠마뉘엘 수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전적 에세이이다. 특히 그녀가 살아간 시대는 격동과 변화 그리고 인류사상 가장 잔혹한 역사가 묻어있는 20세기를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남다른 100년이다. 종교에 귀화한 성직자로서 이러한 세기를 바라보고 느꼈던 그녀의 삶은 얼마나 많은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는게 오히려 한세기를 살다간 성녀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소 아쉬움으로 남을 수 도 있다. 

엠마뉘엘 수녀는 이 책을 통해서 사랑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물론 그녀의 직분상 종교적인 색체를 띠고는 있지만 수녀는 결코 자신이 속한 종교를 강요하거나 의도적으로 안내하지는 않는다. 특히 영원한 맞수인 이슬람과의 화해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고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선 그 어떠한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수녀 자신이 한평생을 소외받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러 과정에서 참 사랑과 희망을 발견한 것은 종교적인 봉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이들에게 던져주는 숙제이기도 하다. 수녀가 책에서 회상했듯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이도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자신이 속한 종교의 진리로 재단하지 않더라도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 길을 잃지 않는 법, 희망을 찾아가는 법을 통해서 그 삶이라는 여정을 통해 희망의 메세지를 던져 주고 있다. 마치 한여름밤 모깃불을 피워놓고 어린 손자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이야기를 해주는 자상한 할머니처럼 차근 차근 희망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삶을 먼저 살았고 수 많은 일들 겪고 가까이에서 보았던 인생의 선배로서 격하지 않게 편안하게 인생의 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명상록이나 위인들의 잠언 그리고 종교인들의 가르침등 무수히 많은 좋은 말들이 많고 또 많이들 접하고 있다. 하지만 대게의 경우 이런말들은 그저 말뿐인 허상인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엠마뉘엘 수녀의 말한마디가 더 절실하게 살아있는 우리에게 와닿는 것은 바로 그녀가 걸어왔던 길이 진정한 종교인으로서 길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가슴에 애잔하게 와닿는 것이다. 엠마뉘엘 수녀는 비록 영면하였지만 그녀가 이 땅에 헌신한 흔적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대의 불빛 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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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모더니즘+제국주의+몬스터+종교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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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라고 하면 대개의 경우가 딱딱하고 지루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부류의 책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걸맞게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딱딱하고 지루하고 전문적인 학자들의 서책인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국내사의 경우 한시대적 배경과 정치적인 쟁점 및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보니 일반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가 녹녹치 않다고 볼 수 있다. 하물며 세계사의 경우라면 일단은 그 방대함에 멈칫거릴수 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에게 역사는 크로니클적인 암기과목 내지는 알쏭달쏭하고 헷갈리는 인물들과의 조우였기 때문에 더욱더 친숙하지 못했던 분야였다. 그렇다고 역사를 모른다고 하지도 못할정도로 많이 접하게 되는것 역시 역사이다. 근래들어 철학이나 경제학, 자연과학분야에서는 이러한 독자층을 겨냥해서 스토리텔링방식으로 일반대중들에게 좀더 쉽게 접근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좋은 호응을 받고 있지만 막상 이러한 스토리텔링방식을 역사에 접목시키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스토리텔링방식의 역사서술은 자칫하면 야사로서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쪽으로 흘러가서 역사적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괴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적 서술의 다양성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 역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고착화 때문이지는 않을까 싶다. 그러면에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역사서이다. 기존의 연대기적 서술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욕망>,<모던주의>,<제국주의>,<몬스터>,<종교>라는 다섯가지의 테마로 세계사를 개괄하고 있는 깔끔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세계사 개괄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저 책장속에 자고 있는 백과사전같은 개념은 아니다. 세계사를 거꾸로 상고해 봤을때 역사 발전의 원동력 내지는 근원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역사발전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이자 가장 오래된 요소인 욕망과 종교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탄생한 모던이즘,제국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파시즘에 대한 뿌리깊은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범위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욕망편에서 커피와 홍차, 금과 철 그리고 브랜드와 도시는 인류의 탄생과 역사시대를 개창하면서 발생하게 된 필연적인 요소들이었고 향후 도시화와 민족국가 단위의 개념이 창출되면서 충돌하게되는 문명과 민족간의 대결등이 결국 인간의 작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욕망에서 그 근원을 찾는 방식과 이해도출이 돋보인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역사는 광기와 우연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 진다고 했듯이 역사발전의 가장 근원적인 밑바탕에는 욕망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 이런한 욕망이 종교를 탄생시켰고 그 종교를 바탕으로 국가와 제국 그리고 각종 이념들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커피나 홍차처럼 아주 변변치 못한 물품에서 비롯된 세계사의 얼룩진 이면들이 마치 또다른 욕망의 시작을 가져오는 것처럼 세계사를 떠받치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은 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게 될 것이고 바로 이러한 점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인간들의 욕망의 출구를 향해서 마지못해 혹은 떠밀려서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점인 것이다.  

당초 이 책을 읽기전에 약간의 우려했던 점은 나 역시 아직까지 일본이라는 강력한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나 몬스터장에서 저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일본을 서술해 나갈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의 기본적인 서술방식이 비판적인 관점보다는 이러한 원인으로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형식으로 취하고 있는 관계로 일본제국주의의 행태나 만행에 대한 심도깊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고 있는 점도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일본학자라로서 제국주의와 몬스터에 일본을 여러차례 거론하면서 독자들의 판단에 맡겼다는 자체로 위안을 삼고 싶다.  


전반적으로 아주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테마속에는 심도깊은 역사가 숨겨져 있다. 역사는 이렇듯 쉬운듯 하면서도 약간만 깊이 들어가면 어려운것이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역사적 접근방법에 차별화를 둔 이번 기획물은 여러가지 면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기술적인 면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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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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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양차대전을 기화로 세계 중심의 축은 신생국가인 미국으로 옮겨갔고 세계사를 통틀어 팍스 로마나만큼의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면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비단 9.11사태와 그로인한 끼워 맞추기식 보복과 근래발생한 서프프라임모기지사태로 그 위상에 손상을 입긴했지만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것 역시 사실이다. 프랑스 혁명이 태동하기전 기존 종교에 대한 염증과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낯선땅에 첫발을 디딘 이들에게 신대륙은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꿈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광활한 대지, 풍부한 자원 그리고 속박 받지 않는 그들만의 자유 그리고 이 신생국가는 국가설립의지에도 담겨 있듯이 철절하게 개인의 자율의지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향해서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질주했다. 그래서 영국이나 프랑스와 독립전쟁이나 내전을 거치면서도 서서히 유일무이한 강자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탄생배경에게는 그들만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전세계인들이 동경하는 <아메리칸 드림> 모든 개인에게 그 어떠한 차별도 없고 개인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그래서 특히 개도국 사람들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바로 그 꿈 아메리카 드림이 지금의 미국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프론티어정신이 깃든 아메리카 드림은 전세계인들로부터 찬사와 동경을 받으면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후발 개도국들에게 또 하나의 표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급격한 산업화를 일구어 냈던 신흥국가들에서는 그 정도가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까지 번지게 된것도 사실이다. 그 만큼 아케리칸 드림은 상당히 설득력있고 미래지향적인 꿈이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9.11사태에 대한 반응이나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바로 이 신기루 같았던 아메리칸 드림에 하나 둘씩 의문점을 제시하기 시작하였고 EU라는 거대한 집단이 대두되면서 아메리칸 드림은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다름 아닌 미국인에 의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게 된 동기를 마련했다. <소유의 종말>,<노동의 종말>로 국내에서도 익숙한 제러미 리프킨은 그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인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을 비교 분석하고 왜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로 접어들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와 실을 분석하면서 미국인들의 각성을 일깨우고 있지만 비단 이점은 미국인들만이 아닌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 우리처럼 미국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그냥 지나칠수 없는 문제이다.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모범생을 자처해온 우리의 경우는 이처럼 변화하는 패러다임을 놓칠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포용성>,<문화적 다양성>,<보편적 인권>,<삶의 질>,<지속 가능한 개발>,<평화 공존>등 6개분야에서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가 아닌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비록 지금 유럽공동체가 저자나 다른이들이 생각하는 만큼 궤도에 올라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유럽에서 보여준 일련의 형태와 유럽인들의 의식구조의 변화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유럽피언 드림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유는 유럽인들의 각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미국인들 스스로가 보여준 일련의 행태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으로는 미래에 대한 인류의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6가지 분야에서 조목조목 아메리칸 드림과 유럽피언 드림을 비교하고 왜 유럽피언 드림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구절을 해석하는 입장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유럽피언 드림의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고 바로 이점에서 이제는 왜 유럽피언 드림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지배하라) 하시니라"

과학기술의 맹아인 미국이지만 성서를 가장 완벽하게 해석하고 아직도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50%를 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바로 이 구절을 해석해 나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충실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포용성, 문화적 다양성, 보편적 인권, 삶의 질, 지속 가능한 개발, 평화 공존이라는 더불어 생존한다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대리인 자격 즉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위감과 미국인만의 카우보이 정신이 합쳐서 사회가 없는 개인의 자율성만이 강조된 아메리칸 드림은 지금처럼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데는 낡은 생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유럽인들은(물론 전부다는 아니지만)하나님의 대리인 자격인 아닌 자연과 공생하는 파트너로서 그리고 관리&보호자의 역활로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하겠지만 이러한 시각차이에서 출발한 양쪽의 드림은 그 결과물에서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단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범세계적 논의와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논의 대상에서 항상 미국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 전쟁방지를 위한 핵무기감축등의 협약에서도 항상 빠진다는 점등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바로 이러한 지배라는 의식구조가 아메리칸 드림의 근저에 깔려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수렵 채집의 시대를 출발점으로 농경시대를 거치면서 획기적인 비약을 했다. 야생동물을 길들이고 야생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자연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자연을 관리나 보호의 대상이 아닌 지배 내지는 다스림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산업혁명을 맞이하여 이러한 지배의식은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배나 다스림의 결과는 냉혹한 현실로 우리 인류를 내몰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비단 자연과 환경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등 다양한 분야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서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왔고 인류가 다시금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 새로운 대안으로 저자는 관리 보호란 기본적인 틀에서 출발하는 유럽피언 드림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유럽피언 드림은 전세계적인 비전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개별국가적으로도 많은점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그 정신적 뿌리마저도 찾기 힘든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과 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전대통령이 서거전까지 손에 놓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지금 우리시대에 만연한 지배의식의 폐단 그리고 포용성 부족, 다양성 없는 획일성등에 대한 기난긴 숙고였지는 않았을까 싶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브리타니카나 팍스 아메리카나나 평화가 절정을 달했던 시기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포용성,다양성,보편적 인권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천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들 제국의 평화구축이 실패했던 것은 공존이라는 개념보다 지배라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임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글로벌시대를 맞이한 인류에게 과연 어떠한 드림이 인류를 위해 올바른 꿈이 될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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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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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초 연암의 계획은 북경에 도착하여 사행단과는 별도로 당시 조선선비들의 지식의 창고였던 유리창을 비롯한 북경의 선진문물을 접하면서 자신의 식견을 넓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당시 서학이라는 형태로 조선에 들어온 아소교의 진상도 파악할겸 친구이자 선경험자인 홍대용의 중국측 지인들을 만나 안부도 묻고 학문적 교류를 왕성하게 펼치고자 사행단을 따라 오는 길에 줄곧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갑작스런 열하 호출로 인하여 고민끝에 여태껏 조선선비중 누구도 밟아보지 못했던 열하로 향하게 된다. 와중에 시복이었던 장복과의 생이별을 통해서 타지에서의 이별과 청나라관리들의 독촉으로 인한 마부 창대의 발병등으로 연암은 열하까지 혼자의 몸으로 강행군을 하게되고 마침내 열하에 도착하게 된다. 

이번 권은 열하에서 연암이 보고 겪었던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다. 1권에서는 연암의 원론적인 견해들이 수록되어 있다면 이번권은 각론적인 세세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어 약간의 무게를 더하는 다소 무거운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다. 특히 열하 태학관에서 우연하게 만난 곡정 왕민호, 통봉대부 대리시경이라는 상당한 높은 관직에서 은퇴한 형산 윤가전등과의 조우을 통하여 당시 천하의 대세, 음악, 역사, 과학, 종교, 정치등의 심도 깊은 필담을 나누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곡정이나 형산등의 한족출신의 선비들 뿐만 아니라 경순미같은 몽고출신의 선비나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만주족 관리들과의 만남은 연암에게 또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소중한 만남이었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이들과의 필담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과 철학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 중국학자들과의 논쟁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곳곳에 연암 특유의 패러디를 동원해가면서 정곡을 찌르는 그의 언변은 잔잔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사물을 보는 그의 정확한 눈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주로 곡정과의 대화가 주가 되었던 것은 곡정 역시 연암과 비슷한 아웃사이더겸 다양한 방면의 지적소유자이면서 시대와 불협화음하고 있다는 면에서 연암은 동질적인 동지의 끈끈한 정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망양록과 곡정필담에서 연암과 곡정은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황제들과 신하들을 자신들만의 무대에 등장시켜 호되게 때론 가련하고 애틋하게 이모저모 낱낱이 탐색하는 과정이 호기심 많은 어린이를 보는 것 같아 절로 웃음짓게 한다. 물론 이 두사람의 의견이 통일되지는 않지만 서로 주거니 받거니하는 필담과정에서 연암이나 곡정이나 그 학식의 깊이를 짐작하고 남게 만들 정도로 박식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구와 태양와 달에 대한 연암의 피력은 비록 그 자신은 친구인 홍대용의 의견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가히 혁명적인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아웃사이더인 곡정 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연암의 우주론은 지금의 우주론과 차이점이 없을 정도로 깊이있는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황교문답과 반선시말등을 통해서 당시 청황실의 라마교에 대한 숭배를 사행단이나 중국측 학자들의 생각보다 한발짝 더 나아간 의견을 보임으로써 연암 특유의 인식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연암은 라마교를 당시의 정세와 연결하여 청나라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의 융통성에 대해서 그만의 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기존의 중국의 기본방침이었던 이이제의방식이 아닌 사전포석방식으로 서반과 몽고등 외곽지역의 불안정한 정세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파악했던 것이다. 이민족 출신의 황제로서 누구보다 이민족의 강력한 힘을 알고 있는 건륭황제는 서반의 반선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서반을 끌어안고 또한 열하에 더위를 피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거동하면서 자신이 직접 몽고에게 강력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연암은 지적하고 있다.

연암은 이러한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조선이 먼저 파악해서 시의적절한 외교정책을 감행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제국은 이렇게 정책변화를 통해서 더욱더 강대한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숭명배청 사상에 물들어 있는 조선의 고루한 선비들의 작태가 그저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연암과 중국측 학자들과의 필담을 통해서 연암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연암은 곡정으로 대변되는 중국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확실한 주장도 언급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 또한 한글자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므로서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흐름을 바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주장에 반대의견이 있더라도 누락하지 않고 후에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케하는 배려야 말로 연암의 열린 정신을 보여주는 단례일 것이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고 연암과 곡정의 필담은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나듯이 다양한 주제에 관해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게 되고 연암의 이번 사행길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북경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이야기들은 대체로 상당히 수준높은 담론들을 담고 있다. 특히 망양록은 고대 주나라의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禮와 관련된 난해한 대담을 그 주제로 담고 있어 일반 대중에게 다소 지루한 느낌 마저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연암 특유의 노마디즘과 재치있는 위트 한마디로 인해 오히려 더 깊이 그의 담론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연암이 누구인가 아무리 불세출의 논거나 주장이라도 이를 읽어 주는 대중이 없으면 공염불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그는 곳곳에 특유의 나이브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입담을 던저 주고 있는 것이다. 역시 연암답다는 생각을 재차하게 된다.

太學留館錄(태학관에 머물며)
還燕道中錄(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
傾蓋錄(열하에서 만난 중국 지인들)
黃敎問答(라마교에 대한 문답)
班禪始末(반선의 내력)
札什倫布(반선을 만나다)
行在雜錄(사행과 관련된 문건들)
審勢編(천하의 대세를 살피다)
忘羊錄(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
鵠汀筆談(공정과 나눈 필담)
山莊雜記(피서산장에서의 기행문들)
 

▣ 황교문답,반선시말,찰십륜포을 통해서 조선의 식자로서는 난생처음 겪게 되는 티벳불교와 달라이라마의 접견에서 사행단 대다수가 황제의 강압에 의한 결정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반선을 접견하게 되고 덕담까지 듣게 되고 또한 덤으로 불상을 비롯한 선물공세까지 받게 된다. 정사 박명원을 비롯한 공식 사행단은 상당히 곤란한 입장에 처하지만 연암은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즐긴다. 연암 특유의 유머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반선과 라마교를 관찰하면서 이후 곡정과의 필담에서 선수를 칠 수 있겠구나 하면서 내심으로 미소까지 짖는 연암의 모습과 사행단의 모습이 대조적이이다. 연암으로서는 이번 사행길에 열하와 반선을 접하게되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연암은 붓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래저래 자신이 횡재했다고 느낀 연암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은 그저 가볍기만 해 보인다. 마부 창대도 몸이 완쾌되어서 동행할 수 있게 되고 돌아가는 길에 만리장성 북쪽끝인 고북구을 자세히 구경도 하고 빈승한테 수작도 걸어보면서 더 많은 견문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북경을 항해서 가는 길은 그저 노마드적인 풍모를 볼 수 있다. 

▣ 개인적으로 이번 권에서 망양록의 내용이 가장 난해한 것 같다. 궁,상,각,치,우로 대변되는 동양음악의 기원과 하,은,주 상고시대부터 공자에 이르는 예약의 정의와 범위 그리고 후대 왕조에 미치는 악의 영향등에 대한 논거를 보면서 연암의 박식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정도랄까 물론 후반부에 중국역사 전반에 대한 고찰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어려운 내용이었다. 

▣ 옥에 티라면 연암 역시 성리학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곡정과의 필담에서 고려사에 대한 그의 인식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뭐 여기까지 지금의 잣대로 욕심을 부린다면 그야말로 연암의 열하일기는 아예 세상의 빛을 보지못했으라 여겨지지만, 그 만큼 이데올로기의 잔상이 깊고 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 열하를 걸쳐 다시 북경에 도착한 연암의 눈에 비쳐지는 북경의 거리와 문물들을 연암이 어떻게 요리해 나가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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