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유전자 - 제국을 향한 피의 역사가 깨어난다
에릭 두르슈미트 지음, 이상근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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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마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세계인들에게 중국이라는 나라는 그 어느때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다. 불과 십여년전만 해도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싸구려 물품을 조달하고 세계 모든 명품의 짝퉁화에 이바지하고 심지어 먹는 음식마저도 철저하게 상품화해 세계인들의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중국. 비단 그들의 경제성장이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지만 그래도 중국은 멀었다는 인식들(특히 서구선진산업국의 시선은 더 고지식했을 것이다) 정치시스템과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언제인가는 중국이라는 나라도 자본주의시스템속에 귀의하여 평범하게 한쪽 구석을 자리잡을 것이라는 예견들이 거의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이들 전문가들의 예상을 뛰어 넘어 버렸다. 그동안 세계대전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세계를 지배해온 미국의 위상마저도 위협받을 정도로 중국의 거침없는 하이킥은 그 끝이 어디있지 모르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고 이제 팍스 차이나 시대는 아니더라고 적어도 팍스 차메리카나라는 양두시대가 도래한것에 대해 부인하기 힘든 형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용의 유전자>는 이런시기에 중국을 재조명할 수 있는 시의적절한 책으로 보인다. 비단 저자는 징기스칸의 제국에서 그 시발점을 찾고 그리고 그들의 침략전쟁에서부터 중국이라는 용의 유전학적 기원을 찾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 오늘의 중국을 가능케 한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서 출발했다. 중국은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먼저 제국이라는 조직체를 운영한 국가이다. 서양의 로마제국보다 먼저 출발한 진제국은 봉건시스템을 거부하고 중앙집권시스템과 관원대리라는 특유의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제국이라는 경영혁신을 가져왔고 이러한 시스템은 왕조가 바뀌어도 그 근본적인 틀은 고스란히 유지되어왔다. 이는 그 어느 조직체보다 오래된 시스템으로 서구 근대화라는 유별난 패러다임에 비록 굴복한바는 있지만 그 명맥은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래토록 지속되어왔다. 그리고 지금 중국의 시스템은 세계각국에서 거의 채택되지 않고 있는 또 다른 독특한 시스템구조로 가지고 있다. 1990년대를 전후하여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시대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켠의 시스템을 고수하면서 지금처럼 그 영향력이 지대한 나라는 중국이외에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의 중국은 그 옛날 로마와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가 인종과 출신성분에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다각적으로 수용하고 자기것을 만들어 갔듯이 지금의 중국역시 그 이면에는 다른 정치논리가 존재하겠지만 한족뿐 아니라 기타 소수민족과 그들의 역사를 품어가서면서 그 세를 넓히고 있는 모습이 비슷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중국과 로마가 다른점은 무엇보다 그 목표의식의 차이점일 것이다. 중국은 얼마전부터 대국굴기라는 패러다임에 의해 역사마저 왜곡하고 포장해가면서 대국에 대한 강력한 열망에 쌓여있고 또 그렇게 대국을 향해서 피라미드를 쌓듯이 한단계 한단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열망은 사회주의라는 정치시스템의 비뚤어진 모습이라기 보다는 중국민족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의 분출이라고 봐야 타당할 것이다. 

광할한 영토와 막대한 부존자원 그리고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나라 남들이 다 포기하고 사실상 실패작으로 기억될 정치시스템을 고수하면서도 가장 자본주의 색체가 짙은 나라, 바로 그 나라 중국이 지금 잠룡에서 서서히 하늘로 비상하는 비룡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라는 개혁과 개방의 시대를 넘어 이제 중국은 단 한가지의 목표를 향해서 세상에 자신들의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제국의 완성이다. 그 제국을 향해서 중국은 내부적으로 역사와 문화등에 걸쳐 다양한 레퍼터리를 창조하고 포장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조금의 세월이 흐르면 거의 완성될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을 둘러싼 주변국의 시선은 그리 탐탁치 않은것이 사실이다. 그 옛날 로마라는 대제국이 해체되었던 점을 상기할 때 지금의 브레이크없는 중국의 미래도 실상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처럼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일개 한국가의 독점적인 비약 특히 중국처럼 경제규모의 파이가 큰 나라의 도약과 그에 상응하는 추락은 또 다른 공황을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국을 논할때 항상 로마라는 제국을 그 사례로 말하는 이유는 다른것이 아니라 제국은 제국다워야 한다는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제국이라는 자체가 가지는 불합리성을 제외하자는 말은 아니다. 단지 제국이라는 호칭에 걸맞는 국제적인 신뢰와 명망을 갖추는 것이 진정한 제국으로 자기매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국의 모습은 비록 제국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그리 적절한 도약으로 비쳐지는 구석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려의 목소리가 높게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지척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에게 중국의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은 많은 생각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 이번 책을 통해서 다시금 중국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그들의 사고방식 그리고 다양한 시각의 검토가 필요할 시점이다. 역사문화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속내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우리에게 중국을 새롭게 알게 하는 견인차 역활을 할 책이다. 다시금 중국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책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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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 혜초, 천축 다섯 나라를 순례하다
혜초 지음, 지안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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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200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 마침내 세상속으로 나온 <왕오천축국전>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여행기문이다. 반도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잡아 우여곡절 끝에 삼국일부를 통일한 신라는 고구려, 백제 보다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다. 물론 신실한 종교적인 입장보다는 당시는 지정학적 고려가 불교수용의 최대 관건이었고 이는 왕권강화라는 시대적 소명과 결부되어 더욱더 필요한 조치였다. 하지만 불교는 당시 통일이라는 대과업이후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던 불협화음을 하나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고 정권은 정권나름대로의 회유책으로 그리고 민중은 민중들 나름대로의 화합의 장으로 승화시켰다. 당시 불교는 그 기원인 천축국보다는 당에서 더 융성하였고 이 영향은 고스란히 신라로 유입되었으며 의상,원효등을 필두로한 엘리트층의 고승들에게 당나라 유학은 부처에서 한발자국더 나아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사실 혜초 역시 남아 있는 그에 대한 기록이 미비해서 정확한 출신성분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아마도 일반서민층은 아니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떻게 불교에 입문했고 어떻게 당나라로 유학을 갔는지에 대한 추측만이 있지만 아마도 당시 승려들과 같은 당나라 유학 경로와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혜초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귀국후 보장된 지위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혜초는 당 유학중 만나 스승의 권유도 있었겠지만 그만의 구법에 대한 갈망이 유독 강했고 이러한 열정은 그를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구법의 길로 이끌게 했다. 그리고 후대에 길이 남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비단 지금은 이역만리에서 애타게 고국을 그리면서 입적한 혜초와도 너무나 흡사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그의 분신인 기록물 역시 이역만리에서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듯이 

현장의 <대당서역기>처럼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은 당대하질 않다. 이유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듯이 그 원본을 필사한 필사본으로 그나마나도 훼손되어 현재 전하는 분량은 6000자 정도로 미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주목받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부처의 열반지인 구시나국 처음으로 속치마를 입는다는 안서의 오기국까지 약 40여개국을 돌아본 여정을 양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함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 내용만은 각국의 특색만을 기록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주변의 잡다함을 걷어낸 내용들이 오히려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체로 수도하는 수도승의 나라 페사리국(바이샬리)는 불교의 성지이자 불교와 비슷한 자이나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혜초는 이곳 풍습중 가장 인상적인 노예문제를 언급한다. 노비를 두는 한이 있더라도 노비를 매매하지는 않는다 이는 어쩌면 혜초에겐 다소 낯선 광경이었을 것이다. 혜초의 신분이 구도를 구하는 승려이기에 그의 주된 관심사는 부처와 관련된 불교에 집중되어 있지만 혜초의 눈에는 중생이 부처라는 말처럼 모든이들의 삶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건들이 구법 못지 않게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그 전하는 양적인 내용은 비록 적지만 실질적인 내용면에서는 그 어느 여행기에 비해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 천축국들의 지리 인문적 태양을 비롯하여 각종 신분계층의 습성을 비롯한 의식주와 생활방식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복잡다난한 서술식 기술이 아닌 한눈에 봐도 알수있는 엑기스만을 모와 놓고 있어서 그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물론 불교적인 시각에서 천축국을 불국토로 바라본 그였기에 노비문제에 대한 환상과 토번국에서 관찰했던 불교전파에 대한 곡해의 부분도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들이 존재하더라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록물 전반을 훼손시키지는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몇 편의 시를 통해서 혜초는 구도승이나 관찰자의 입장을 초탈한 순수한 일개 개인의 심정도 담아내고 있다. "달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와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고" 등의 시를 통해서 아무리 속세를 떠나 구법의 도를 찾는 승려의 몸이지만 수구지심마저도 떨굴수는 없었고 굳이 혜초는 득도자의 자세 또한 보이지 않아 일개 개인으로서의 인간미를 물씬 담아내고 있다. 왠지 이 시는 향후 자신이 어쩌면 달밤의 흩날리는 구름처럼 어쩌면 영원히 그리운 고향땅을 밟지 못한 운명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읽는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함과 쓸쓸함을 자아내게 한다. 
 
1200년전 한반도 작은 나라의 일개 승려가 구법의 열망을 안고 불법의 발상지인 인도를 두 발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비록 그 자신은 고국에서 잠들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입적했고 그의 분신인 <왕오천축국전> 역시 너무나 먼 곳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짧다면 짧은 기행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선조의 문자 기록물이다. 비록 불교라는 종교적인 색체가 강해게 내재되어 있으나 당시 그들의 삶과 생활방식등을 간략하게 인지할 수 있는 희귀한 문건이고 중국인의 시각이 아닌 신라인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세계 각지에서 애타게 고국의 품으로 귀환되길 고대하고 있듯이 <왕오천축국전>역시 하루빨리 우리 품으로 돌아오길 다시한번 기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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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致仕하게 은퇴하고 싶다 - 은퇴하기 전 꼭 알아야 할 49가지
김형래 지음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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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찾오는 것 보다는 어느정도 예견된 경우가 많다. 비단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예견을 하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눈앞에 은퇴라는 두글자가 보이고 현실로 다가오면 그에 대한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안당해본 사람은 논하지 말라는 정도로 그 여파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은퇴는 마치 생을 마감하는 사형선고가 다름것이 없을 정도이다. <나는 치사하게 은퇴하고 싶다>는 바로 지금 이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겪게 되는 은퇴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제목을 얼피보면 뭔가 수상쩍다 치사하게라니... 하지만 여기서 치사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치사(致仕)는 조선시대 관리가 70세가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제도로 주로 당상관이상인 고위직 고관들에게 자리잡은 제도이다. 특히 종1품이상의 고위직중 나라의 중대한 일로 치사하지 못할 경우 그에 대한 예우로 국왕이 직접 궤장을 하사하기도 했고 이렇게 치사한 관리들은 기로소라는 모임에서 국가발전과 국왕보필을 음지에서 해왔던 제도이다. 저자는 바로 이 치사라는 제도에서 은퇴이후의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럼 조선시대 치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제일먼저 70세까지라는 장수를 해야 한다. 70세까지 살기 위해선 자기 건강관리가 무엇보다 우선일 것이다. 그리고 당상관이라는 직책에 오르기 위해 과거를 패스해야하고 이래저래 다방면에 걸쳐 두각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두각은 비단 신분제사회였지만 각 개인의 각고의 노력과 준비가 관직을 출발하면서부터 준비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런점에 착안하여 우리의 은퇴 또한 어느날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닌 언제가는 다가오게 마련인 점을 감안하여 은퇴할때를 치사하는 것처럼 해보자는 의도이다.

막상 은퇴를 직면해서 막연하게 어떻게 되겠지 혹은 어떻게 할거야라는 발상보다는 미리 미리 은퇴이후를 대비하자는 것이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버킷리스트>라는 영화는 그런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시한부인생을 사는 두 노인이 죽을때까지 하고 싶은 일들을 리스트로 만들고 이를 하나 하나씩 이루어가는 줄거리이지만 왠지 서글프다. 서글픈 이유는 다름아닌 왜 진작에 이러한 리스트를 만들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이다.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혹은 은퇴가 임박한 시점에서의 버킷리스트보다는 어느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을때 만들어 보는 버킷리스트가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면에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치사하기 위해서 수신제가치국을 향한 나름대로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여 초지일관 그에 매진하고 은퇴할 시점에 당당하게 치사하는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우고 느껴할 점은 다름아닌 방법론보다 은퇴를 대비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저자는 제시하는 49가지는 어쩌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공통된 사항들일지 모른다. 단지 이러한 리스트를 언제 어떻게 만들어서 하나 하나씩 준비하고 실천해 나가느냐에 따라 致仕하게 은퇴하는냐 아니면 정말 치사한 은퇴가 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아직까지 선진산업국에 비해 우리의 노령이후의 대비는 극히 빈약하다. 그리고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등의 말이 자주 회자 되듯이 은퇴의 마지노선이 점점 더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적 풍조가 그러니 어쩔수 없다는 생각보다 언제 닥치더라고 직면할 수 밖에 없다면 현실을 즐길줄 아는 것 역시 나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생의 종착점에서 작성되는 버킷리스트는 한없이 슬프고 애잔할 뿐임을 비록 영화지만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차라리 지금 바로 자신이 해야할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고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면 정말 고무도 당당하게 박수받으면서 은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치사를 자랑스럽게 여겼듯이 우리도 치사하게 은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40를 넘어선 독자들에겐 더욱더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은퇴라는 말만 들어도 뒷골이 묘연해지는 이들에게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극복가능한 대상으로 늦었다고 할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처럼 지금부터 차근차근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팁을 제공한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보면서 새삼 그간의 삶을 다시한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이다.

""DO IT NOW !!! - 지금 당장 떠날 준비를 하라 !!!"" 그러면 앞날의 걱정은 없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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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 인문학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속옷 문화사 지식여행자 10
요네하라 마리 지음, 노재명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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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국내에 소개된 <마녀의 한 다스>라는 책을 통해서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여사의 감칠 맛 나는 문필과 기발한 발상 그리고 문화인류학에 해박한 지식을 엿 본 국내 독자라면 그녀만의 남다른 매력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비록 故人이 되었지만 마리여사의 글들은 지금도 일본내에선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고 국내에도 마니아층을 형성할 정도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녀의 유니크하고 시크한 문체와 더불어 유년시절 유럽과 러시아에서 생활한 관계로 흔히 우리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일본스럽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마리여사의 글들은 문화인류학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그동안 서양학자들이나 저널리스트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팬티 인문학>이라는 책 또한 역시 마리여사가 아니면 가히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가지게 하는 어쩌면 가장 저자다운 상념의 표출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우선 책표지에 나온 볼세비키혁명의 아버지인 레닌의 근엄한 모습 그리고 대조적으로 하체는 팬티만 입고 있는 모습에서부터 이번 책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있다. 저자는 팬티 즉 속옷에 대한 메타포를 거침 없으면서도 적나라하게 또는 그동안 터부시 되어왔던 프로파간다에 대해서 문화 인류학적인 지식과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극히 사적인 영역을 지상밖으로 끄집어 내고 있다. 팬티에 무슨 인문학적 의미가 담겨있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만 팬티의 역사와 그 기원 그리고 지금의 팬티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적나라하게 서술하면서도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 저자만의 필력으로 인해 절로 수긍하게 만들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주요부위를 가렸던 무화과 나무의 잎, 십자가나 성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의 하체를 가리고 있는 것은 팬티일까 아님 그냥 옷일까? 또한 유물에서 보이는 북방기마민족의 의상에서 팬티의 기원을 찾아야 하는걸까? 등등 문화인류학적인 저자만의 접근이 눈에 띄는 책이다. 

고쟁이,훈도시,드로즈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온 속옷의 변천은 산업화 현대화를 거치면서 팬티라는 것으로 대체되어 왔고 지금 현대인들에게 출장이나 여행등 집을 잠시라도 떠날때는 어김없이 가장 먼저 챙기는 필수품이자 현대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팬티이다. ""속옷은 특히 하반신에 입는 속옷은 사회와 개인, 집단과 개인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를 분리하는 최후의 물리적 장벽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하반신의 속옷은 개인들에게는 최후의 자기 방어용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으로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일 것이다. 이러면에서 저자는 속옷에 대한 그 어떠한 사회적 미학적 정치학적인 담론을 걷어내고 보통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누구나 한번쯤은 궁금해왔던 사안에 대해서 흥미롭게 팬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기에 가능한 저자의 소소한 이야기가 오히려 심각한 역사적 사건과 연결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라는 거대한 강에서 개인의 사소한 영역은 그저 묻히기 마련이지만 개인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지금의 역사라는 거대한 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속옷에 대한 저자의 담론들은 그저 흥미거리로만 치부하기엔 많은 점들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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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인문학 서재
크리스토퍼 베하 지음, 이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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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하버드다. 세계초일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어린시절부터 맞춤교육을 받고 특목고를 거쳐 아이비리그 최정상의 학교 하버드로 보내는 것이 부모들의 소원이자 출세와 부의 예비상징으로 비쳐지는 하버드, <정의란 무엇인가>로 하루아침에 비소설분야로는 보기 드물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마이클 샌델 역시 하버드 교수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석학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리더들이 졸업한 학교 바로 하버드 하버드하는 하버드이다. 그러면 한번쯤은 왜 세상사람들이 하버드라고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오랜전통, 뛰어난 교수진, 우수한 재정지원등 여러가지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요즘 왜만한 대학교육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려나기 쉽상이다. 그것보다 다른 견인차역활을 하는 무엇인가가 하버드에 있기 때문에 세상은 하버드를 주목하는 것일게이다. 

아마도 어쩌면 <하버드 인문학 서재>가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군주론],[수상록], [아이네이스],[국부론]등 50여편의 서양고전을 한데 묶어 출간한 하버드 클래식 시리즈는 한번쯤은 누구나 들어보거나 읽어보았던 전형적인 서양고전들이다. 마치 우리에게 [연암집],[한중록],[북학의]등의 고전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거나 이해하기 난해한 고전들의 목록자체만 접하는 것으로도 일반적인 독자들에겐 그저 부담으로 와닿을 수 밖에 없는 책들이 즐비하다. 솔직히 이중 과연 몇권의 책이나 읽어나 봤을까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나마 한때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으로 인해 인문학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증폭되어 학계나 출판계 전반에 걸쳐 고무된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뜻있는 학자들이나 출판계에서는 꾸준하게 인문학 출간에 매진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이지만 아직도 선진산업국에 비하면 갈길이 멀기만 한것 역시 사실이다.  

<하버드 인문학 서재>는 하버드 클래식의 50여권의 고전에 대한 저자의 리뷰중심으로 1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독서계획에 의해 읽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살아있는 독서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는 보기 드문 책이다. 그때 그때 읽었던 책들을 정리한것이 아니라 컬럼비아대학의 교양수업을 통해 고전의 참맛을 일깨워 주었던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처럼 자신이 직접 읽고 느낀 바를 간략하게나마 정리해서 같은 책을 읽었던 독자라면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 접해보지 못했더라도 각 고전에 대한 리뷰와 그 책을 읽게되는 동기 및 주변여건등의 설명만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충분히 가슴에 와닿는 표현들과 책에 대한 느낌을 가져오게 한다. 다만 접해보질 못했던 책들이 너무 많아 리뷰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구름잡는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전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주기엔 부족함이 없다. 

인문학에 지속적인 관심과 더불어 왜 인문학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하버드라는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출세와 부의 상징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제대로 된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인것 같다. 저자처럼 인문학이라는 바다속에서 한 1년쯤은 허우적 거려 보는 것 또한 그 다지 나쁘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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