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200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 마침내 세상속으로 나온 <왕오천축국전>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여행기문이다. 반도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잡아 우여곡절 끝에 삼국일부를 통일한 신라는 고구려, 백제 보다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다. 물론 신실한 종교적인 입장보다는 당시는 지정학적 고려가 불교수용의 최대 관건이었고 이는 왕권강화라는 시대적 소명과 결부되어 더욱더 필요한 조치였다. 하지만 불교는 당시 통일이라는 대과업이후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던 불협화음을 하나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고 정권은 정권나름대로의 회유책으로 그리고 민중은 민중들 나름대로의 화합의 장으로 승화시켰다. 당시 불교는 그 기원인 천축국보다는 당에서 더 융성하였고 이 영향은 고스란히 신라로 유입되었으며 의상,원효등을 필두로한 엘리트층의 고승들에게 당나라 유학은 부처에서 한발자국더 나아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사실 혜초 역시 남아 있는 그에 대한 기록이 미비해서 정확한 출신성분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아마도 일반서민층은 아니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떻게 불교에 입문했고 어떻게 당나라로 유학을 갔는지에 대한 추측만이 있지만 아마도 당시 승려들과 같은 당나라 유학 경로와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혜초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귀국후 보장된 지위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혜초는 당 유학중 만나 스승의 권유도 있었겠지만 그만의 구법에 대한 갈망이 유독 강했고 이러한 열정은 그를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구법의 길로 이끌게 했다. 그리고 후대에 길이 남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비단 지금은 이역만리에서 애타게 고국을 그리면서 입적한 혜초와도 너무나 흡사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그의 분신인 기록물 역시 이역만리에서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듯이 현장의 <대당서역기>처럼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은 당대하질 않다. 이유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듯이 그 원본을 필사한 필사본으로 그나마나도 훼손되어 현재 전하는 분량은 6000자 정도로 미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주목받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부처의 열반지인 구시나국 처음으로 속치마를 입는다는 안서의 오기국까지 약 40여개국을 돌아본 여정을 양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함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 내용만은 각국의 특색만을 기록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주변의 잡다함을 걷어낸 내용들이 오히려 더 실감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체로 수도하는 수도승의 나라 페사리국(바이샬리)는 불교의 성지이자 불교와 비슷한 자이나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혜초는 이곳 풍습중 가장 인상적인 노예문제를 언급한다. 노비를 두는 한이 있더라도 노비를 매매하지는 않는다 이는 어쩌면 혜초에겐 다소 낯선 광경이었을 것이다. 혜초의 신분이 구도를 구하는 승려이기에 그의 주된 관심사는 부처와 관련된 불교에 집중되어 있지만 혜초의 눈에는 중생이 부처라는 말처럼 모든이들의 삶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건들이 구법 못지 않게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그 전하는 양적인 내용은 비록 적지만 실질적인 내용면에서는 그 어느 여행기에 비해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 천축국들의 지리 인문적 태양을 비롯하여 각종 신분계층의 습성을 비롯한 의식주와 생활방식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복잡다난한 서술식 기술이 아닌 한눈에 봐도 알수있는 엑기스만을 모와 놓고 있어서 그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물론 불교적인 시각에서 천축국을 불국토로 바라본 그였기에 노비문제에 대한 환상과 토번국에서 관찰했던 불교전파에 대한 곡해의 부분도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들이 존재하더라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록물 전반을 훼손시키지는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몇 편의 시를 통해서 혜초는 구도승이나 관찰자의 입장을 초탈한 순수한 일개 개인의 심정도 담아내고 있다. "달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와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고" 등의 시를 통해서 아무리 속세를 떠나 구법의 도를 찾는 승려의 몸이지만 수구지심마저도 떨굴수는 없었고 굳이 혜초는 득도자의 자세 또한 보이지 않아 일개 개인으로서의 인간미를 물씬 담아내고 있다. 왠지 이 시는 향후 자신이 어쩌면 달밤의 흩날리는 구름처럼 어쩌면 영원히 그리운 고향땅을 밟지 못한 운명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읽는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함과 쓸쓸함을 자아내게 한다. 1200년전 한반도 작은 나라의 일개 승려가 구법의 열망을 안고 불법의 발상지인 인도를 두 발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비록 그 자신은 고국에서 잠들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입적했고 그의 분신인 <왕오천축국전> 역시 너무나 먼 곳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짧다면 짧은 기행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선조의 문자 기록물이다. 비록 불교라는 종교적인 색체가 강해게 내재되어 있으나 당시 그들의 삶과 생활방식등을 간략하게 인지할 수 있는 희귀한 문건이고 중국인의 시각이 아닌 신라인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세계 각지에서 애타게 고국의 품으로 귀환되길 고대하고 있듯이 <왕오천축국전>역시 하루빨리 우리 품으로 돌아오길 다시한번 기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