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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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귓가에서 철석철석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문을 열고 몇 발자국 나가면 파도가 출렁일 것 같고, 어둡고 조용한 해안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이야기보다는 아무래도 그 배경에 푹 빠졌나보다. 포토알처럼 많은 섬이 흩뿌려진 바다 어디쯤 존재하는 작은 섬, 그 곳에서 조용히 슬픔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하루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그 섬에 온 이유는 제각각 달랐지만 그들이 슬픔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 섬에서의 한없이 잉여로운 생활이 나에겐 특별하게 다가왔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1년전 세상을 떠난 정미경 작가의 유작이다. 남편 김병종 화가가 정미경 작가의 유고 후 작업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미완의 원고였다. 소설의 뒷 부분에는 남편이 이 소설에 바치는 발문이 담겨있다. 이 소설은 애초에 자신이 강요해서 쓰게 된 소설이라고. 신안의 젊은 군수 P에게서 그 지역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작가 정미경은 다른 할일이 많다고 꺼려했지만 남편인 자신이 거듭 추천하여 쓰게 된 소설이라고 한다. 평소 완벽주의에 가깝던 정미경 작가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 소설을 쓰면서 급격이 몸이 삭아내리기시작했고, 어느 날 글을 쓰다가 병원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다. 아내의 힘듦과 아픔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속상한 마음 때문에 한동안 집안의 어둠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지냈다는 그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평소 아내의 소설 쓰는 스타일과 다르긴 하지만 오히려 그 다름이 새롭고 아름답게 다가왔기에 용기를 내어 출판사에 원고를 내밀었다 한다. 

설을 프린트 해놓고 책더미 사이에 쌓아둔 걸 보면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써놓고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혹은 초안만 작성하고 아직 다듬지 않은 소설일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인지 이야기의 전체적인 완결성이나 결론이 탄탄하지 못하고 다소 허술한 부분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의 완결성을 떠나서 소설이 풍기는 분위기와 배경이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듯 하면서도 글 중간 중간에 위트가 있다. 여고생 '이우'의 발랄함과 이삐 할미의 우악스럽지만 친근한 정이 대화 곳곳에서 느껴져 좋았고, 무뚝뚝한듯 보이는 정모의 마음 씀씀이와 판도의 무심한 듯 따뜻한 눈빛 때문에 난 그 섬이 좋아졌다. 

계속해서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해 하는 딸 이우를 짐짝처럼 생각하는 연수는 최근 고향의 섬으로 귀향한 정모에게 거의 강제로 딸 이우를 맡겨버린다. 저항도 없이 인생을 포기한 듯 갑자기 섬으로 내던져진 여고생 이우는 난생 처음보는 정모 아저씨와 한집에 살게된다. 정모의 집에 온 첫날부터 새벽바다에 혼자 뛰어들어 죽을 뻔 하질 않나, 정모에겐 팔자에도 없는 말 안듣는 딸이 생겨버린 것만 같다. 그 마을에는 아무 때나 불쑥불쑥 집에 쳐들어와 욕과 함께 반찬을 챙겨주는 이삐 할미가 있고, 할미가 육지의 어느 서커스단에서 구해와 함께 살고 있는 청년 판도가 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이우는 가장 소중한 친구 태이를 사고로 잃었고, 이삐 할미는 아들 세 명을 바다에서 차례로 다 잃었다. 정모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병에 걸렸고, 판도는 듣고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 하지만 바다라는 커다란 자연 앞에서 그들은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 

이우는 넘치는 낮 시간동안 해안가를 걸어 맨발로 섬 반대편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햇볕으로 따뜻하게 달궈진 판판한 돌 위에서 대자로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한다. 바다가 만들어낸 조그만 동굴에 들어가 하루종일 앉아있다 나오기도 하고, 해안가를 기어다니는 칠게를 잡아 밀가루를 묻혀 바삭한 게튀김을 만들어먹기도 한다. 이 섬엔 자연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왠지 그것이 가장 큰 선물인 것 같다. 

정모는 섬에 버려진 소금창고를 개조해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있다. 파도 소리가 BGM으로 깔려있는 도서관이라니 너무 멋지잖아. 책을 읽다 지겨우면 해안가를 걷다와도 좋고, 파도 소리에 귀 기울여봐도 좋다. 그냥 오롯이 하고 싶은 일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풍성한 시간들을 상상하는 것이 좋았다. 

「물구나무를 선 채 책을 읽던 판도는 이 구절을 두 번 읽었다. 그러고는 팔을 늘어뜨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바다는 유난히 고요하다. 허공에 걸린 바다를 바라보며 막 읽은 구절을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내게 실제 일어난 일은 거의 없고 나는 많은 일들을 읽었을 뿐입니다…… 판도는 이런 순간이 좋다. 마치 누군가가 나 대신 써놓은 일기장을 우연히 집어든 듯한, 그냥 읽어나가다 어떤 한 문장에 붙들려, 그 문장의 무엇에 붙들렸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는.」
< 당신의 아주 먼 섬 p.59>

그들은 상대방이 눈물을 흘리면 어줍짢은 위로 대신 턱에 걸린 눈물을 찍어먹어 보고는 "염도 0.5네." 하고 빙긋 웃어준다. 슬픔의 농도가 다를 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몫의 슬픔을 달고사는 법이니까. 

바닷물이 증발해 하얀 소금이 엉겨붙어 소금꽃이 만들어지는 곳, 하루 한번 물이 들어오고 빠지며 삶도 이런거라며 속삭이는 곳.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슬프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나의 아주 먼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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