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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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풀로 엮은 집'이라는 곳에서 가을 강좌를 한다고 안내문이 왔는데 거기 사상체질에 관한 강좌가 있었다. 강의 제목을 주욱 훑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각각의 체질별로 성향 같은 것이 써 있었다. 그에 따르면

소음인-지혜로우며 씨앗 같은 사람 이란다. 와, 아주 좋은 말 아닌가? 그렇다면 다음은?
태음인-대세를 따르며 땅 같은 사람. 이것도 괜찮네. 하지만 나는 소음인도 태음인도 아닌 소양인이다. 나는 뭘까? 궁금해 할 사이도 없이 바로 아래에 적혀 있었다.

소양인-폼생폼사 새 같은 사람.

헐. 좋게 나가다가 소양인에 와서 이 무슨.......뭐야, 이 사람 소양인에게 무슨 억하심정 있는 거 아냐? 라고 투덜투덜 댔지만 한편으로 100% 공감하며 가슴 한쪽이 뜨끔하였다. 허, 정곡을 찌르네. 어떻게 알았지. 내가 폼생폼사인 줄을?

레이먼드 챈들러의 폼생폼사에 내가 꼼짝을 못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필립 말로라는, 이 스타일 죽여주는데다가 냉소적이며 우울하고 고독하고 체념적이나 그러나 결국은 인간의 존엄성을 믿고 있음을 슬며시 증명해보이고야 마는 이 느와르적인 인물에게 나는 꼼짝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뭐 내가 그런 줄 여적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미 '앰버 연대기'에 열광하며 내가 스타일에 꺼뻑 죽는 애라는 것은 증명된 바 있으니(젤라즈니는 판타지계의 레이먼드 챈들러라 불린다) 아무래도 나는 착한 척 하지 않으며(심지어는 못된 척 하며) 냉소적이고 잘 비아냥대나 결국은 매우 착하여 평소 자신의 언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희생적인 행동을 하고 마는 이 주인공들에게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비정하고 비열한 도시에서 그 비열함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이기든 지든 얻어맞든 때리든간에 항상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며(아마 그는 절대 고함을 지르지 않을 것이다) 법전의 정의가 아닌 자기자신의 정의를 실현하는 남자. 그의 정의도 마음에 들며 그의 과장하지 않음도 마음에 들며 그의 변명하지 않음도 마음에 든다.

필립 말로가 나오는 시리즈 6권 중 이제 겨우 첫 권을 읽었다. 그러고서 벌써 열광의 조짐을 보이니 지름신이 강림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책의 장정도 매우 그럴듯해서(오래되어서 빛 바랜 영자신문 분위기의 하드커버임) 여섯권을 쭈루룩 책꽂이에 꽂아놓고 싶어 침을 흘리고 있다. 천천히 사자, 천천히.......

이 책을 읽을 때 눈여겨 본 포인트.

1.  멋지고 폼 나는 주인공

2. 그와 다른 인물들간의 대화의 묘미(암시적이기도 하고 비유적이기도 하고 하여간 읽어보란 말 밖에는)

3. 죽여주는 문장('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 무겁다' 뭐 이런 식)

그런데 이 소설에는 왜 제대로 된 여자가 한 명도 안 나오는가?(도박에 미친 여자, 마약 중독자 등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스타일 많잖아? 책도 영화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레이먼드 챈들러 이후의 많은 작가들이 그를 따라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탐정의 반은 그가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그는 창시자인 것이다. 아무리 새로 생긴 맛집이 맛있어도 원조집에는 한번 가봐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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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2-3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이 적당하고, 비유 딱 떨어지고, 시시콜콜하지 않게 유혹하는, 폼 나는 리뷰입니다.^^

깍두기 2005-12-3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마워요~~~^^
(특히, '폼'난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