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책. 「월든」읽기.

해마다 겨울이면 손이 가는 책. 이레 출판사 책이 오래된 책. 초판이 1993년인데 내가 가진 건 개정판 9쇄로 2003년 책. 그런데 원래 책을 곱게 읽는 편이라 책장만 살짝 바랬다. 그래도 다른 출판사 책도 사고 싶던 차에 소담 출판사의 책도 샀었다. 초판이 2002년인데 2012년 5쇄로 샀으니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냥 두 책을 비교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같은 책 다른 느낌으로 읽어볼까 하고 올려본다. 겨울만 읽지 말고 때때로 찾아 읽고자 하는 작은 시도랄까.

 

 

 

독서를 잘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중하는 어떤 운동보다 독자에게 힘이 드는 운동이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과,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독서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요청한다. 책은 처음 쓰여졌을 때처럼 의도적으로 그리고 신중히 읽혀져야 한다.

 책이 쓰여진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말로 한 언어와 글로 쓴 언어, 듣는 언어와 읽는 언어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대개 일시적인 것으로 하나의 소리, 하나의 혀 또는 하나의 방언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동물처럼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어머니로부터 배운다. 후자는 전자가 성숙되고 경험이 쌓여서 이루어진 말이다. 전자가 '어머니 말'이라면 후자는 '아버지 말'이며 신중하고 선택된 표현이다. 이 표현은 단순히 귀로 듣기에는 너무 깊은 의미를 가졌으며, 이것을 입으로 말하려면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월든」이레 출판사, 146쪽.) 

 

 책을 잘 읽는 일, 다시 말해서 참된 정신으로 참된 책을 읽는 일은 숭고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관습이 존중하는 그 어떤 운동보다도 힘든 일이다. 그 일은 운동선수가 하는 것만큼 훈련을 필요로 하며, 독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책은 그 책이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읽혀야 한다. 그 책이 씌어진 국민의 언어로 말을 할 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데, 왜냐하면 구어와 문어, 귀로 듣는 언어와 글로 씌어지는 언어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보통 일시적인 현상이며 하나의 소리, 하나의 말투, 방언에 불과하고 거의 미개하며, 우리는 그 언어를 동물들처럼 무의식 속에서 어머니에게서 배운다. 후자는 전자의 언어가 성숙하고 경험을 쌓아 이루어지는 말이다. 전자가 어머니의 말이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말이고 신중하게 선택된 표현이며, 너무 깊은 의미를 갖고 있어서 귀로는 듣기 어려운 말이다. 그 말을 하려면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월든」소담 출판사, 12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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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끼적였던 이레 출판사의 월든.

이레 출판사의 월든은 이제 판매하지 않는거 같다. 검색에 없는걸보니.

 

 화면에서 오른쪽 책이 이레 출판사의 <월든>

 

 

'월든'은 늘 가까운 곳에 두고 이따금 제목만 쳐다보아도 편한 책이다.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호수에 살던 때와 같은 28살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당시 나는 직장생활에 찌들어 있던 터라 퇴근 후 늘 독서를
하며 무료함을 달래고는 했다. 월든은 비단 나뿐이 아닌 많은 이에게 이런
즐거움을 선사했으리라 믿는다. 예전에 가수 '한영애'씨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그녀도 힘들 때 이 책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다. 왠지 같은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내게는 그만큼 이 책이 소중하다.

'얼마나 많은 가을날과 겨울날에 마을 밖으로 나가 바람 속에 들어 있는 소식을
들으려고 했으며, 또 그 소식을 지급으로 전하려고 했던가!' 29쪽

이 말에 걸맞게 그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나무 테를 세다가 독감에 걸렸고 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니 말이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데,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두지 말라.' 132쪽

명백한 진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된다. 그의 말이 맞다. 간소하게!
때로 내가 벌이려는 일들을 보면 너무 많은 것을 안고 가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버릇이 생겨버렸다. 메모하기...이 버릇은 늘 여전해서 얼마 전 만난
후배는 내가 아직도 메모 수첩을 가방에 챙겨다니는 모습에 놀라워했다.
메모하고 완성된 것이나 불필요한 것은 선을 긋는다. 선 긋기 놀이의 묘미랄까...

'긴 줄에 꿸 만큼 많은 물고기를 낚지 않으면 운이 없거나 시간 낭비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내 호수를 바라볼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낚시
질의 불순물이 가라 앉고 그 목적이 순수해지기까지 그들은 아마 천 번쯤은 낚시
질을 가야 할 것이다.' 307쪽

결과에 집착해서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드는 허탈감보다 얼마나 바람직하고 삶을
즐기는 적절한 태도인지 모르겠다. 진지한 관찰과 그것을 삶으로 연장하는 안목이
탁월하다.

'대자연이 생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상당수가 희생되거나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 차라리 다행스럽게 여겨진다..(중략)..자연은 그것을
허용할 여유가 있는 것이다.' 452쪽

그러나 지금의 자연은 어떠한가? 인간이 파괴함으로 인해 자연은 그럴 여유가
없는 상태이다. 그가 최초의 환경보호론자였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물론 옛 선조는 모두가 그럴 테지만 말이다.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의해 표가 나도록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큰길은 얼마나 밟혀서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 자국은 얼마나 깊이 패였겠는가! 나는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앞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했다. 나는 이제 배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다.' 461쪽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 트는 것이다.' 477쪽

책에는 그의 기질이 충분히 들어있고 재미있는 문장력으로 이야기해 준다.
사실 처음 읽을 때는 조금 지루하게 만든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괜찮았다.
그는 은둔자가 아닌 세상에서 잠시 나와 그곳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본 사내였다.
세상을 사랑하고 따뜻하게 안으려 했으며 동시에 비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에게 진심 어린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책을 펴볼 때마다 즐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월든]을 기억하는 것이다.

- 4338.11.25.쇠의 날

 

긴 줄에 꿸 만큼 많은 물고기를 낚지 않으면 운이 없거나 시간 낭비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내 호수를 바라볼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낚시
질의 불순물이 가라 앉고 그 목적이 순수해지기까지 그들은 아마 천 번쯤은 낚시
질을 가야 할 것이다.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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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살림지식총서 340
김용수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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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 김용수, 살림(2008)

 

한국비평이론학회와 살림출판사가 함께 비평이론의 대중화를 위해 기획한

비평이론 시리즈 세 번째 권.

  내가 좋아하는 살림지식총서. 340번은 자크 라캉에 대한 이야기. 작고 얇아서 휴대하기 좋은 책이지만 가볍게 들고나가서 읽기보다는 집중해서 읽게 하는 마력의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내가 라캉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책장에 두 권이 꽂혀있다. 둘 다 라캉 입문서 역할을 하는 책이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듯한데 일단 살림책으로 라캉과 만나기로 선택했다.


>> 나는 이 책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쉽고 충실한 입문서로 쓰고자 했다. 이론 전반을 두루 다루기보다는 '욕망의 윤리'라는 하나의 핵심 주제에 집중하여 독자들이 라캉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특히 이 책에서 욕망과 쾌락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욕망의 정치, 쾌락의 윤리가 자유로운 공동체를 향한 희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길 기대한다.


>> 관심사와 연구계획은

주로 포크너의 문학과 정신분석을 연구해 왔다. 요즘 관심은 정신분석 영화이론에 있다. 그중에서도 정신분석 개념들과 영화기법을 연결하여 영화 작품을 세밀하게 해석하는 작업에 무한한 흥미를 느낀다. 앞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과 영화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책날개에서 발췌)

 입문서면서 하나의 주제인 '욕망의 윤리'에 집중해서 이야기하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책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자크 라캉을 더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상가로 유명하다. 흔히 정신분석하면 프로이트를 생각하는데 이제 내게는 라캉의 자리가 더 커질 거 같은 느낌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책을 읽을 때도 흥미롭기는 했지만 라캉은 마음에 들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이 책은 라캉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읽어서 제대로 라캉을 알려면 그의 책을 만나야겠다.


 그런데 독자인 내가 라캉에게 매력을 느꼈으니 저자의 의도는 성공이다. 살림책을 읽으면 대개 그렇게 된다는 게 함정이다. 거기서 확장하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 대개 거기서 그쳤다면 라캉은 꼭 파고들고 싶어졌다는 게 차이점이다. 예전에 미쉘 푸코도 이렇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라캉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그렇다면 라캉의 매력은 무엇일까.


 자크 라캉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한마디로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욕망에 대한 적극적이고 비타협적인 긍정을 요구하는 이러한 도덕원칙은 그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당혹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오기 쉽다. (…중략…) 욕망은 흔히 윤리의 적으로 여겨진다. 성숙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어 욕망은 도덕적 성취를 위협하는 이물질이다.


(12쪽, 정신분석과 욕망 일부 발췌)

 지금 들으면 그다지 충격적인 말은 아니다.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당연한 말이 아닌가? 이것을 동물적 혹은 성적 욕망으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쪽으로 만 확대해석하는 게 문제다. 삐뚤어진 욕망이나 내면은 이렇듯 확장된 사고가 정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이 발언은 위험할 수 있다. 잘못 이해했을 경우의 파장이 클 테니 말이다. 그래서 또 다른 예를 아래 인용한다.


'욕망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이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우선 모든 종류의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가령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의 욕망들은 정신분석에서 윤리적인 긍정의 대상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욕망의 만족을 대체하는 환상이고, 진정한 쾌락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욕망은 또한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욕망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타자를 소멸시키는 반윤리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17쪽, '보 에스 바(Wo es war)' 일부 발췌)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반윤리적인가? 이 물음에 대답 현명한 답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김영하 작가의 책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각설하고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 에스 바(Wo es war)' 또한 We ar war로 잘못 보지 않기를.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We es war, soll ich werden)."라는 프로이트의 말에서 온 것. 욕망은 내가 아니라 그것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는 순간. 어쩌면 사로잡힌 욕망에서 헤어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어려운 이유가 책에 나오는 말처럼 또한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핵심주체가 타인이 아닌 나이기 때문에.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물론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욕망이 아니라 환상을 가로지르는 욕망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닌 부재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임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윤리적 행동과 관련된다.

(28쪽, 쾌락과 충동 일부 발췌)

 명쾌한 말이다. 이렇듯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사드와 칸트의 접점을 이야기할 때도 흥미롭다. 자신의 철학을 이해시키고자 다른 이들을 데려와 연결하는 공존 능력. 인정ㅂ다고 싶은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재미있다. 게다가 칸트의 우화 이야기를 할 때 칸트가 놓친 것을 바로 찾았다. 다른 가능성도 있는 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문장에서 라캉 또한 그 점을 언급했다. 그래서 더욱 라캉에게 관심이 간다. 라캉의 책이니 그가 유리한 입장에 놓이는 건 당연하건만 그럼에도 흥미를 끄는 이유는 공감하기 때문이겠지. 그의 사상을 더 알아보고 싶다. 그때 공감의 폭이 더욱 커질지 아니면 그칠지 확인해야겠다. 가끔 나오는 지젝을 보며 아끼는 책 「삐딱하게 보기」를 꺼내 보려 했더니 못 찾았다. 오래도록 꺼내보지 않아서 어딘가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을듯하다.


 끝으로 다시 말하지만 라캉의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여러 가지 불순한 욕망이 아니라 '순수 욕망'이라 불러야 한다고 김용수 저자는 말한다. 깨부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처럼 틀을 깨고 열린 사고와 열린 욕망을 기필코 추구해야 더욱 다양화된 그 무언가가 탄생할 것이다.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물론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욕망이 아니라 환상을 가로지르는 욕망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닌 부재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임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윤리적 행동과 관련된다.



(28쪽, 쾌락과 충동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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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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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 강유원, 살림(2004)

살림지식총서 085

 가족 모두를 괴롭히던 감기가 사그라졌다. 어른들은 거의 나았고 아이들은 약간의 감기 불씨가 남았지만 그럼에도 예배가 끝나자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며 오후까지 놀았다. 덕분에 꽃잎이 날리는 모습을 오늘은 오래도록 볼 수 있었다. 책을 들고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그 순간을 즐기는 게 더 좋았다.

 책이라는 텍스트를 늘 지니고 있어도 좋겠지만 이런 유형의 텍스트가 아닌 무형의 텍스트가 모두에게 있으니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공중으로 떠다니고 흩어지는 것들이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니 말이다.

 사실 어느 이웃분이 감기 걸렸다고 하니 즐거운 책을 읽으라고 처방을 내려주셨다. 그래서 책장을 쭉 훑어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책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손길이 가는 책은 대부분 인문쪽이거나 우울하다고 할 수 있는 책들이었다. 발랄하다고 생각하는 김애란 작가의 책등도 있었지만 결국 손이 간 책이 「책과 세계」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책은 즐겁기보다는 진지하다. 서론이 길었는데 각설하고 간단하게나마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살림지식총서 대부분의 책이 얇고 가격도 싸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아주 진득하다. 얇으니 대략적이며 입문하기 좋고 다른 쪽으로 의식을 확장하는 길을 열어준다. 이 책 또한 고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이기도 했다. 훌륭하다. 저자의 의도가 성공했으니까. 그럼에도 저자의 말처럼 버려둘 수 없는 책이었다.

>> 나는 이 책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지 이루어진다면, 이 책은 불필요해진다. 결국 이 책은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셈이다.

>> 관심사와 연구계획은

인간의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탐색하고 정리하여, 가능하다면 그 오고감과 산물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다. 철학은 객관세계를 잊은 채 공상에 몰두하고, 자연과학은 인간을 내버려둔 채 물신숭배에 빠져, 그 둘이 도저히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해볼 작정이다.

- 책날개에서 발췌.

 이론적으로 체계화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 저자라면 가능할 거 같다. 저자의 저서를 찾아보니 인문학, 철학, 고전 쪽으로 책을 내고 번역했음을 알았다. 어떻게 풀어가는지 조금씩 만나봐야겠다. 무언가를 정의하기 위해 고심해본 적이 있다면 그 사고과정이 얼마나 힘들지 알 것이다. 몰입의 즐거움과 결과는 색다른 희열을 안겨준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을 읽고 흩어진 사고들이 이어지는 경험을 했다거나 한 단계 성숙해진 나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을 읽고 그런 희열을 느끼진 못했지만 생각해본 적 없는 시선을 발견해서 좋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고대세계의 텍스트들은 본래 기억에 의지하여 암송되어 전해지다가, 진흙판, 금속 그릇, 거북 등껍질, 죽간, 파피루스 등에 기록된 것들이다. 그것들을 기록한 매체가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아무리 고대세계의 텍스트들이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우리에게 전해지는 내용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텍스트들의 유통은 근본적으로 지배계급-사회의 상층 일반이기보다는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과 부를 지닌 집단-에 의해 좌우되었음을 알 수 있다. (39쪽)

  역사가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 않던가. 역사학자들이 새롭게 찾아내 조금씩 달라지는 세계사 등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텍스트 자체를 두고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을 추론하고 추적하는 것은 독자 대부분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어느 한 조각(혹은 조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느낀 순간! 그 틀에서 우린 벗어날 수 있다. 아니 의식이 벗어나도록 다른 틈을 찾게 되는 적극적인 태도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틈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 마키아벨리 역시 본질적으로 궁정 지식인이었다. 그 역시 지배자를 위한 이념과 실천 지침서, 즉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그였다. 그러나 그는 전원에 파묻혀 고요한 질서를 찬양하는 비현실적 궁정 지식인이 아니라, 분열과 반목, 침략과 방어라는 날것의 현장에서 동분서주했던 서기관이었다. 그의 텍스트들은 역사적 현실이라는 컨텍스트에 너무나 철저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그에 대한 텍스트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64쪽)

 일반적인 혹은 상식적인 시선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고전이 왜 고전일 수밖에 없는지는 읽어봐야 아는 일이지만 그 고전의 배경이나 시대상까지 알고 읽으면 더 풍부함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몰랐던 이야기들을 저자는 들려준다. 대략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 이 책을 펼치면 좋을 거 같다. 특히나 서양철학과 중세, 르네상스 시기의 책을 읽을 계획인 독자라면 먼저 이 책을 읽거나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책과 세계,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해 잠시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을 계획이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 늦추고 있다. 이 책을 만나며 다시 한 번 빨리 읽고 싶어졌다. 즉흥적으로 읽는 책도 있지만 때를 기다리는 책이 있으니 내게 아퀴나스의 책이 후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에필로그를 남기며 이 책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92~93쪽. 에필로그 부분 발췌)


 ■간단 서평: 인문학이나 고전 입문서로는 추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읽고 그것들과의 접점을 찾거나 새로운 시각에 눈 뜰 독자에게 추천하는 책.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 :)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92~93쪽. 에필로그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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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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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 조지 오웰, 민음사(2001)

원제 Homage to Catalonia (1938년)​

 책장에 오래도록 있었던 조지 오웰의 책을 잡았다. 사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버려서 즉흥적으로​ 선택했다. 스페인 내전 이야기를 통해 어쩌면 우리네 5.18처럼 부당한 상황을 재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혹은 일어났던 일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데 마침 눈에 띈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2006년 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책인데 이제야 제대로 읽어보았다.


 배경은 스페인 내전(1936~1939. 한참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던 시대)이며 당시 직접 공화파 의용군으로 참전한 오웰의 기록문학이다. 당시 파시즘에 반대하고자 반파시즘으로 즉 파시즘과 싸우고자 스페인에 온 외국인들이 많았다. 오웰을 비롯한 헤밍웨이 등의 지식인들도 있었는데 이 책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헤밍웨이」를 통해 당시 상황을 만날 수 있으며 특히 조지 오웰의 책은 기록문학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읽어보니 알겠다. 왜 그런 것인지.

 정부군과 군부 프랑코 장군의 반란군(쿠데타군)의 대치였는데 결국 프랑코 장군의 파시즘 세력이 승리한다. 오웰은 정부군 입장(통일노동자당)으로 패배했다. 그런데 오웰은 이 내전에 참가함으로써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스페인 혁명을 가로막는 세력이 오히려 좌익임을 발견하며 자신이 속한 통일노동당이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사실 통일노동당을 오웰이 선택한 게 아니라 파시즘의 반대편이기에 자원했던 거였는데 결과는 그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것이었다. 이를 통해 혁명의 세력이 누구이냐에 따라 진정한 승리와 그 반대인 패배로 이어지는 결과를 겪었다. 패배란 그저 상대 세력에 눌렸다는 거뿐만이 아니라 배반으로 이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오웰은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를 확장해 가는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참여할 때는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정의감 등이 앞서서 자세한 상황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직접 참여해서 겪은 내전에서 총알에 맞아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고 스페인 사람들의 엉뚱함과 색다름을 느낀다. 그래서 「카탈로니아 찬가」는 스페인 내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에게도 새로운 국면을 맞는 책이기도 할 것이다. 오래전에 읽은 「1984」, 「동물농장」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 책을 읽기 전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다.


​나는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마치 수동적인 물체처럼 그냥 존재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중략…)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러니까 나 자신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전선에서 보낸 처음 서너 달은 내가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무익했다.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일종의 휴지 기간이었다. 이전에 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아마 앞으로 살게될 어떤 삶과도 다를 것이다. 그 시기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중략…)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 몇 달이 나에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제8장, 138~141쪽 부분발췌)

 

 영국에서는 아직 정치적 불관용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중략…)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숙청>하거나 <제거>한다는 생각은 아직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셀로나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13장, 254쪽 부분발췌)

​ 책의 앞부분은 블랙코미디 같으면서 재치가 있다. 중반 이후부터는 당시의 상황과 특히 11장은 오웰의 정치적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셀로나 시가전에 대해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는 오웰이 사실은 왜곡시켰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관적이지만 기록적이었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오보되고 있는지 짚어보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읽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사건의 전말은 과연 진실일까? 그것들을 모두 제대로 가려 볼 수 있는 능력과 관심이 시급하다. 오웰이 말했듯이 말이다. '진짜 쟁점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 비방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11장, 231쪽)' 특히 선거때 상대방 후보를 비방하기만 하는 식의 경쟁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국회에서 싸우기만 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이다.


나의 당파적 태도, 사실에 대한 오류, 사건들의 한 귀퉁이만 보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왜곡을 조심하라.

(14장, 295쪽 부분발췌)

 책을 읽다가 불현듯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오래전 드라마로 <제5열>이 있었다. 당시 이영하, 한진희 등의 배우가 나왔는데 내용은 거의 잊었지만 그 분위기가 기억난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원작자 김성종의 작품들이다. 책으로 읽은 적은 없지만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들. 한 시대를 풍자하고 사건과 그 앞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의 환멸과 희망이 떠오른다. 조지 오웰 또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서 느꼈을 경험적 자산에 여러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그의 문학적 행보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견해나 의지의 뿌리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끝으로 이 책을 번역한 정영목 교수가 발췌한 오웰의 글을 나 또한 적어본다.

 정치의 목적 ㅡ <정치적>이란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ㅡ​「나는 왜 쓰는가」에서  

 ■간단 서평: 조지 오웰에 의한 스페인 내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오웰을 이해하기 위한 책.

 

나의 당파적 태도, 사실에 대한 오류, 사건들의 한 귀퉁이만 보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왜곡을 조심하라.



(14장, 295쪽 부분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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