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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 세월호 추모시집
고은 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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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 고은 외, 실천문학사(2014)​

​세월호 추모시집

 세월호 참사 1주기. 아이들의 1주기로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위로 캡사이신 비가 내렸다. 갈 수 없어서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추모의 자리는 또다시 아비규환을 떠올리게 했다. 유족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고 사는 모든 부모들은 이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들의 현재진행형인 끝나지 않는 싸움 앞에서 함께 울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노한다. 2014년과 2015년 분명히 해는 다르건만 나아진 게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런 역적 같은

이런 강도 같은 참변 앞에서

과연 이 나라가 나라 꼬라지인가 물었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야만이 저지른 희생 앞에서

이 사회가

언제나 청정한 하루하루일 것인가를 따졌습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얼마나 인간이었던가를 뉘우쳤습니다

영혼이라는 말

양심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몰라야 했습니다 알아야 했습니다

(24쪽, 고은 시인의 '이름 짓지 못한 시' 일부 발췌) ​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한다. 그러나 국민을 책임질 이 나라는 일련의 여러 사건 때처럼 잊히기를 기다린다. 보통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게 된다. 국민의식은 높아져가지만 정치의식은 제자리걸음인지 오래이다. 진정한 진보란 무엇일까. 비단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을 유추해보며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용감한 이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보통의 사람. 추모만이 길이 아닌 분노와 관심이야말로 보통의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나와는 무관한 삶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우리네 아이였고 우리였다. 추모시집의 제목처럼 그렇게.

​뒤집어라, 뒤집힌 저 배를 뒤집어라

뒤집어라, 뒤집힌 세상을 뒤집어야 살린다

탐욕으로 뒤집힌 세상, 부패와 음모와 기만으로 뒤집힌 세상

이게 아닌데, 이럴 순 없어, 뒤집지 못한 우리들

가슴을 치며 지켜만 봐야 하다니, 회한의 눈물을 삼키며

우리가 너희들을 다 죽이는구나, 뒤집어라,

폭력과 약탈로 뒤집힌 세상을 뒤집어야 살린다

이렇게 내버려둘 순 없어 저 죽음을 뒤집어라

뒤집지 않고서는 살리지 못해 저 죽음의 세력을 뒤집어라

(85쪽, 백무산 시인의 '세월호 최후의 선장 박지영' 일부 발췌) ​

 이 책은 세월호 참사 100일을 앞두고 나온 추모시집이다. 그러니 작년 7월에 출판되었는데 지금 읽어도 가슴 먹먹하기는 여전하며 뭐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도 없어서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세월호 관련 책으로 아마도 가장 많이 읽은 책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겠지만 나는 시인들의 추모시를 먼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주에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고 있을 것이다. 차마 못 읽어나갈 거 같아서 마주하지 않았던 책. 이제 얼굴을 맞대고 바로 읽어야만 하겠다.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였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평형수를 덜어냈다

(89쪽, 송경동 시인의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일부 발췌) ​

​ 시인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투명하지만 힘센 시를 지어올렸다. 누군가는 슬퍼하고, 분노하고, 미안해하고, 넋을 위로하고, 썩어빠진 권력 등을 비판했다. 그들의 자괴감이야말로 우리의 자괴감이었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여전히 그렇지 아니하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 이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뿐 아니라 화물차 기사들, 20대 청년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까지. 또한 간접적인 영향으로 타격을 입은 진도 시민들의 정신적 타격, 살아남은 이들의 정신적 충격 등 우리는 그 모든 아픔을 잘 모른다.

​엄마 아빠

부탁이 있어요

우리 없다고 이 나라를 떠나지는 마세요

우린느 죽지 않았어요

검은 리본은 싫어요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우리는 지금

천년의 장미를 찾아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이에요

엄마 아빠도 아시잖아요

천녀의 장미를 찾아 돌아오는 날까지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몸은 여기 두고 250개의 물방울이 되어

홀가분하게 더나요

무사히 돌아오는 그날

엄마 아빠 안 계시면 우린 무척 슬플 거예요

(101쪽, 안상학 시인의 '엄마 아빠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일부 발췌) ​

  ​그들이 물방울 되어 홀가분하게 날아오르는 날은 과연 언제란 말인가. 살다 보면 누구나 억울한 날 있다지만 이건 그런 차원을 넘은 비교할 수 없는 인재, 수장이 아니던가. 전 국가적인 충격 앞에서 어찌 보면 국민 모두가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린 살아있지 않은가. 그러니 지나친 우울증에 빠지라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린 깨어나야 하고 이들을 지켜보고 응원해야 한다.

 교육부가 추모관 건립을 추진하는데 단원고 학생과 교사만 해당된다고 한다. 교육부가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진행했다면 학생과 교사가 아닌 다른 이들까지 평등하게 추모할 수 있었겠지. 게다가 우리도 안 하는 일을 외국인이 한단다. 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들 션 헵번 페리가 비정치성, 비이념성으로 세월호 기억의 숲(9일 착공식이 있었다)을 조성한다. 그가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에서 첫 영화 일을 시작한 인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게 30여 년 전 일이라는데 이 외국인은 나라와 민족을 떠나 세월호 유족을 위해 이 일을 추진한 것이다.

 고맙고 동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유대인들은 학살 당시의 역사적 이야기와 상황을 철저하게 되새겨 배운다고 한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 꼭 되짚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가슴에, 뼈에 넣어두는 거란다. 일련의 참사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숙고해볼 일이다.

 

■간단 서평: 세월호 관련 책 중 이 책은 시인들이 모여 쓴 추모시집.

유가족의 목소리 대신 시인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우리네 마음이 시집에 들어있다.

 

엄마 아빠

부탁이 있어요

우리 없다고 이 나라를 떠나지는 마세요

우린느 죽지 않았어요

검은 리본은 싫어요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우리는 지금

천년의 장미를 찾아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이에요

엄마 아빠도 아시잖아요

천녀의 장미를 찾아 돌아오는 날까지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몸은 여기 두고 250개의 물방울이 되어

홀가분하게 더나요

무사히 돌아오는 그날

엄마 아빠 안 계시면 우린 무척 슬플 거예요



(101쪽, 안상학 시인의 `엄마 아빠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일부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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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바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1
최승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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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문학동네시인선의 시작이 최승호 시인이어서 그때 사두고 이제야 제대로 읽어본 시집.

당시 두 번째가 허수경 시인의「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어서 함께 샀었다. 허수경의 시집은 일반판으로 사서 그나마 바로 읽었지만 최승호의 시집은 특별판만 샀던지라 더 늦게 읽게 되었다. 특별판이라는 시도는 신선하고 좋았지만 부피가 커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지독하게 눈부신 여백을 보며 여유도 느꼈으나 좀 아깝다는 현실적인 생각도 동시에 했다. 그럼에도 어찌 되었건 문학동네시인선 그 첫 권이었으니 특별판을 산걸 후회하진 않는다.
최승호는 재치 있는 시인이다.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재간둥이랄까.
그래서인지 작곡가 방시혁과 엮어낸 동시집도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참 재미있었다.
관찰력도 있고 상상력도 풍부하다. 특징을 잘 포착해서 이미지로 남기는 사진가처럼 그의 시에 담긴 것들은 그만의 것이라 독특하다. 이 시집은 아메바처럼 수많은 것을 나열해서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것들을 파생시키도록 유도한다.
아니 길 안내를 하는듯하다. 끝이 없는 말, 언어, 상상의 공간, 경계의 무분별함.
그는 표면적으로 따뜻하다거나 마음을 위로하는 시인은 아니지만 ​ 독자에게 시(詩)를 통한 별 하나씩을 쥐여준다.
신성이 폭발하듯 누군가는 소멸과 동시에 세계를 다시 조합할 테고 창조할 테지.
내 머릿속에서도 수많은 조합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아, 오랜만이구나. 이런 느낌. 
눈앞의 현실도 내 마음처럼 조합하고 재창조하는 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모든 시인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의 내적 세계를 독자에게 강요 없이 솔직하게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은 사실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럽지 않을까.
그럼에도 시인과 작가는 그렇게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니 존경스럽다.
그의 시에서 북어는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 나도 처음에 그의 <북어>라는 시를 한참을 읽었던 기억.
이후 만난 그의 시집 몇 권에서 가끔 만나는 북어 이야기는 반갑기까지 하다.
시집을 읽으며 끊임없는 망상이 펼쳐지더니 어느 순간 하나로 이어졌다. 참 재미있구나.
아, 아, 아~ 내 속의 얽히고설킨 스팟들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 같다. 
잠시의 반짝이는 순간을 황홀하고 즐겁게 느꼈다. ​
이것이 일회용 전구라도 상관없어라. 이 기분 좋음이란~

"낱말이나 이미지를 먹고 자라나는 언어 생명체(…)

나는 그들을 아메바(amoeba)라고 불러본다."



-3쪽, 시인의 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붕괴된 벽에

누가 언어의 사다리를 걸어놓고 기어오를 것인가"



-41쪽, 14 붕괴에서.

"그동안 시는 나의 돛이자 덫이었다. 시가 부풀어 나를 설레게 했고 사해(死海)를 항해하게 했으며 닻 내릴 곳은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글쓰기가 가능하도록 일깨워주었다."



-48쪽, 17 그동안에서.

"절망의 닻을 끌어올리는 익살스런 농담들

유머가 돛이다"



-49쪽, 17-4 전문.

"내 눈물의 연중강우량은

1mm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안구건조증의 사막에

북어 같은 눈물이 있다"



-91쪽, 36-3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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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고민고민
송수빈 지음 / 문학의전당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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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쓰던 동시는 꾸밈이 없고 쓸데도 부담이 없었다. 그저 일상적인 생각과 느낌을 쓱쓱 썼기 때문이다. 커갈수록 시어는 많아졌으며 표현이 어려울 때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시를 쓰고 그만두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시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아쉽다. 남아있는 시도 없다. 그런데 여기 열 살 아이의 시집과 마주하노라니 어찌나 반갑고 또한 부러웠는지 모른다. 
 
 송수빈양은 지금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한다. 부모님이 시 100편을 쓰면 내준다고 약속한 시집이 바로 이 시집으로 수빈양이 아홉 살에서 열 살로 가는 시기에(몇 편은 더 어릴 때.) 대부분 썼으며 그림도 직접 그렸다. 아이의 마음이 담긴 시는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진다. 아이가 그렇게 썼기에 읽는 이마저 동화시키는 것이다.
 
 세 살 수빈이는 바다와 파도를 보고 우윳물이라고 감탄했다. 첫 시부터 입가에 미소가 절로 생긴다. 어른의 눈에는 아마도 소금물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다른 이들은 웃으며 지나쳤을 아이의 말을 부모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아이의 말, 단어, 시를 오롯하게 느끼고 그 순간을 포착해서 기억화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다. 수빈이의 감성을 키워주고 이해해준 부모님이 있어서 탄생한 시집의 의미는 그래서 각별하다. 이 얼마나 값지고 평생 기억할 부분일까.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유산이 아니고 무엇일까.
 
 겨울의 빼빼 마른 나무를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어준다는 '겨울나무'(46쪽.)의 마지막 한 줄이 인상 깊다.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따스한지 느껴졌다. 그밖에도 '우리 선생님'(88쪽.)의 4연에서 세상의 모든 기운을 모아 선생님께 드리는 이유가 아이들을 더 이해할 수 있게라는 표현도 예뻤다. '사랑하는 우리 아빠'(102쪽.)를 읽으면 아이에게 참 좋은 아빠임도 느껴진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는 수빈이라는 나무가 앞으로도 더 크게 영글어가기를 빈다.
 
 이 시집은 시의 형식을 빌린 한 소녀의 성장 일기가 아닐까 싶다. 중학생 수빈이는 이제 시를 쓰지 않지만 방송작가를 꿈꾸며 대본을 쓰고 싶어 한단다. 이렇게 포근한 마음결을 가진 아이가 성장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기대된다. 초파리가 되어서 쓴 시도 신선했다. 나는 그 많은 것 중 초파리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해본 거 같은데 말이다. 경쾌하고 따스한 열 살 아이의 시집이었다.
 
 시집으로도 좋았고 더불어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느낀 바가 크다. 나도 내 아이들의 세계를 함께 이해하고 잊지 않도록 남겨야겠다. 그리고 아이를 진정으로 공감해주는 부모이고 싶다. 아이게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을 다시 돌아보았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간단 서평: 열 살 아이의 행복한 시집. 두근두근 고민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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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시선 326
천양희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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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양희 시인의 시를 오랜만에 마주한다.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이 좋았다. 우두커니가 된다는 말에, 공감해서일까. 멍한 듯 한자리에 박혀 사물처럼 공간을 지키는 일. 그리하여 존재감이 사라진 느낌이지만 때로 그렇게 어느 영역 안의 무언가로 잠시 있는 일이란 생각보다 편안하다. 가끔은 우두커니가 되는 게 정말로 좋다. 그때의 기분이 우울하거나 아무 생각 없거나 와는 별개로 말이다. 

 시집을 읽으면서야 시인이 나와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수락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점을 나눠 쏘이거나 눈과 햇볕을 쪼개 썼을지도 모른다. 싱거운 생각인데도 기분이 좋은 건 시인의 <마들시편>과 <수락산>을 읽으며 괜스레 수락산 근처만 지나도 시인의 숨결이 느껴질 거 같아서이다. '산이 가파른 듯 내가 가파르다 삶을 수락하려는 듯 마들을 다 지나고서야 겨우 수락산에 든다' (67쪽, <수락산>에서 부분 발췌.) 

 시인은 언어유희를 즐긴다. 중첩의 의미를 이용하고 단어의 비슷함을 끌어내 의미를 부여한다. 아래에 적은 <사라진 것들의 목록>은 시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닿지만 결국 이 시를 다 읽기도 전에 사리진 것들에서 살아진 나를 찾게 되었다. 사라져 간 것들 그리고 살아진 혹은 살아온 나 사이에는 어떤 공식이라도 있을까. 그런 게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단 한 줄의 글로 독자의 마음을 열고 사고의 폭을 터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인이 의도하건 아니건 간에. <사라진 계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이 세상에 와서 내가 없는 계절은 없을 것이었다'(94~95쪽. <사라진 계절> 부분 발췌.) 

 유독 시인과 시에 대한 시가 많았다. 시가 보여주는 것이 마음의 지도라고 한 <시는 나의 힘>, <그자는 시인이다>, <시인이 시인에게> 등이 있다. 특히나 <시인이 시인에게>의 마지막 말인 울분을 함께 나눠 가지면 안 되겠느냐는 시인의 말이 왜 이다지도 슬프게 들리는지. 시집을 보내주었던 한 시인의 부재가 몹시도 서글펐다. 어디선가 시를 쓰고 있을지 모를 나의 잃어버린 시인에게 그립다는 말을 수없이 보내고 싶은 밤이다. 시인의 울분을 나눠 가질 수 없는 시인이 아닌 나는 독자로 그저 시를 손에서 놓지 않고만 싶다. 

 깊어지는 시인의 시를 마주하며 내게 마음의 지도를 보여준 시인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기차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오래전 소리 내 읽던 <단추를 채우며>란 시가 겹친다. 그렇다. 누가 읽어도 이건 천양희 시인의 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가 마음의 지도라면 시에 포함된 단어와 느낌 등은 지도를 이루는 섬이나 강줄기가 될 것이다. 내게는 이럴만한 섬과 강줄기가 있던가. 부러운 일이다. 

 삶을 노래하는 시인들에게 우리는 늘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네들의 성찰과 눈물과 그 무엇으로 쓰인 시 한 토막으로 위안받고 사니 말이다. 반찬 한 끼로 찬을 하기에는 너무도 미안한 일이다. 시집은 읽을 때마다 새롭지만, 더 많은 시를 읽지 못해 가끔은 조바심이 인다. 그러나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한 권을 읽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을 발견한다면 두고두고 읽어도 좋으니까. 

 끝으로 시인의 시를 인용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하자면,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86쪽, <어처구니가 산다> 부분 발췌.)

 

 


사라진 것들의 목록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가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 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뒤켠으로 사라진 것들이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네 내가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것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을 것이네

 

 ( 28~29쪽. 詩 <사라진 것들의 목록> 전문. )


  

'세상에서 가장 죄없는 일이

시쓰는 일이라고 아직도 믿으면서.' (시집 끝 시인의 말에서.) 
 

이 말을 들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詩…. 많이 쓰세요. 시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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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창비시선 300
박형준 외 엮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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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손난로로 쓰이는 오늘같은 날 다시 꺼내서 읽으니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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