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 살림지식총서 340
김용수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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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 김용수, 살림(2008)

 

한국비평이론학회와 살림출판사가 함께 비평이론의 대중화를 위해 기획한

비평이론 시리즈 세 번째 권.

  내가 좋아하는 살림지식총서. 340번은 자크 라캉에 대한 이야기. 작고 얇아서 휴대하기 좋은 책이지만 가볍게 들고나가서 읽기보다는 집중해서 읽게 하는 마력의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내가 라캉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책장에 두 권이 꽂혀있다. 둘 다 라캉 입문서 역할을 하는 책이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듯한데 일단 살림책으로 라캉과 만나기로 선택했다.


>> 나는 이 책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쉽고 충실한 입문서로 쓰고자 했다. 이론 전반을 두루 다루기보다는 '욕망의 윤리'라는 하나의 핵심 주제에 집중하여 독자들이 라캉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특히 이 책에서 욕망과 쾌락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욕망의 정치, 쾌락의 윤리가 자유로운 공동체를 향한 희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길 기대한다.


>> 관심사와 연구계획은

주로 포크너의 문학과 정신분석을 연구해 왔다. 요즘 관심은 정신분석 영화이론에 있다. 그중에서도 정신분석 개념들과 영화기법을 연결하여 영화 작품을 세밀하게 해석하는 작업에 무한한 흥미를 느낀다. 앞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과 영화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책날개에서 발췌)

 입문서면서 하나의 주제인 '욕망의 윤리'에 집중해서 이야기하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책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자크 라캉을 더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상가로 유명하다. 흔히 정신분석하면 프로이트를 생각하는데 이제 내게는 라캉의 자리가 더 커질 거 같은 느낌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책을 읽을 때도 흥미롭기는 했지만 라캉은 마음에 들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이 책은 라캉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읽어서 제대로 라캉을 알려면 그의 책을 만나야겠다.


 그런데 독자인 내가 라캉에게 매력을 느꼈으니 저자의 의도는 성공이다. 살림책을 읽으면 대개 그렇게 된다는 게 함정이다. 거기서 확장하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 대개 거기서 그쳤다면 라캉은 꼭 파고들고 싶어졌다는 게 차이점이다. 예전에 미쉘 푸코도 이렇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라캉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그렇다면 라캉의 매력은 무엇일까.


 자크 라캉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한마디로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욕망에 대한 적극적이고 비타협적인 긍정을 요구하는 이러한 도덕원칙은 그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당혹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오기 쉽다. (…중략…) 욕망은 흔히 윤리의 적으로 여겨진다. 성숙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어 욕망은 도덕적 성취를 위협하는 이물질이다.


(12쪽, 정신분석과 욕망 일부 발췌)

 지금 들으면 그다지 충격적인 말은 아니다.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당연한 말이 아닌가? 이것을 동물적 혹은 성적 욕망으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쪽으로 만 확대해석하는 게 문제다. 삐뚤어진 욕망이나 내면은 이렇듯 확장된 사고가 정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이 발언은 위험할 수 있다. 잘못 이해했을 경우의 파장이 클 테니 말이다. 그래서 또 다른 예를 아래 인용한다.


'욕망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이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우선 모든 종류의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가령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의 욕망들은 정신분석에서 윤리적인 긍정의 대상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욕망의 만족을 대체하는 환상이고, 진정한 쾌락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욕망은 또한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욕망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타자를 소멸시키는 반윤리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17쪽, '보 에스 바(Wo es war)' 일부 발췌)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반윤리적인가? 이 물음에 대답 현명한 답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김영하 작가의 책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각설하고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 에스 바(Wo es war)' 또한 We ar war로 잘못 보지 않기를.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We es war, soll ich werden)."라는 프로이트의 말에서 온 것. 욕망은 내가 아니라 그것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는 순간. 어쩌면 사로잡힌 욕망에서 헤어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어려운 이유가 책에 나오는 말처럼 또한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핵심주체가 타인이 아닌 나이기 때문에.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물론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욕망이 아니라 환상을 가로지르는 욕망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닌 부재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임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윤리적 행동과 관련된다.

(28쪽, 쾌락과 충동 일부 발췌)

 명쾌한 말이다. 이렇듯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사드와 칸트의 접점을 이야기할 때도 흥미롭다. 자신의 철학을 이해시키고자 다른 이들을 데려와 연결하는 공존 능력. 인정ㅂ다고 싶은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재미있다. 게다가 칸트의 우화 이야기를 할 때 칸트가 놓친 것을 바로 찾았다. 다른 가능성도 있는 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문장에서 라캉 또한 그 점을 언급했다. 그래서 더욱 라캉에게 관심이 간다. 라캉의 책이니 그가 유리한 입장에 놓이는 건 당연하건만 그럼에도 흥미를 끄는 이유는 공감하기 때문이겠지. 그의 사상을 더 알아보고 싶다. 그때 공감의 폭이 더욱 커질지 아니면 그칠지 확인해야겠다. 가끔 나오는 지젝을 보며 아끼는 책 「삐딱하게 보기」를 꺼내 보려 했더니 못 찾았다. 오래도록 꺼내보지 않아서 어딘가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을듯하다.


 끝으로 다시 말하지만 라캉의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여러 가지 불순한 욕망이 아니라 '순수 욕망'이라 불러야 한다고 김용수 저자는 말한다. 깨부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처럼 틀을 깨고 열린 사고와 열린 욕망을 기필코 추구해야 더욱 다양화된 그 무언가가 탄생할 것이다.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물론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욕망이 아니라 환상을 가로지르는 욕망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닌 부재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임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윤리적 행동과 관련된다.



(28쪽, 쾌락과 충동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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