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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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자신의 몸을 기댈 수 있는 버팀목과 같은 존재이다. 길에서 넘어졌을 때나, 친구에게 놀림을 당했을 때, 몸이 아프거나 배가 고플 때, 아이는 부모에게 찾아가고 부모에게 기댄다. 그렇게 아이는 사람을 신뢰하며, 서로에게 기대며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기댈 수 있는 부모나 그 누구도 없이 자란 아이가 있다면 어떨까? 황량한 벌판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다면... 누구에게 기대 본 경험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외롭고 삭막할까?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라는 소설의 여주인공 '기노 쎄스코'라는 여인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쎄스코는 이제는 한때의 흥청거림만을 기억하는 낡은 항구도시의 유각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여성이었다. 쎄스코는 어린 나이부터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학대를 당하고 자랐다. 심지어는 그녀가 어머니 가게에 드나드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때도, 어머니는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모르는채 했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 남자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일을 했다.


소설의 쎄스코가 어머니의 유각에서 화재로 자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의 애인과 결혼했고, 어느 정도 부유한 삶을 사는 그녀가 왜 어머니의 술집에서 자살을 했을까? 소설은 다시 이주 전으로 돌아가 그녀의 일상을 비춘다.


그 날 쎄스코의 남편 기이치로는 아침부터 드라이브를 간다고 집을 나선다. 한때 어머니의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남편인 기이치로는 변두리 호텔의 사장이다. 그는 쎄스코에게 부족함 없는 결혼생활을 약속하고 결혼했으며, 실제로 그녀가 가집까지 낼 수 있도록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 '가집'이 무엇인지는 접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아마 한국의 시조 정도 비슷한 운율을 가진 시집이나 수필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날 오후 기이치로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기이치로는 그 사고로 혼수상태가 되고, 기이치로가 사고난 길은 어머니의 유각과 연결된 도로였다. 결국 기이치로는 그 날 어머니를 만나러 갔던 것일까? 이야기는 기이치로가 혼수상태가 된 이후의 사건들을 통해 쎄스코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녀의 가집 제목인 '유리갈대'처럼 그녀는 아무에게도 기대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소설 곳곳에는 그런 그녀의 상황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쎄스코는 숨을 토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거르실리는 말을 해도 엄마는 이제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생각나는 말을 전부 퍼부으며 욕해도 상처 따위나지 않는다. 자신이 엄마를 원하지 않는다. 태아난 뒤로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다." (p73-4)


"사모님이 홀가분해지는 건 상관없어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요, 홀가분해지는 건 무서운 거예요. 속박이 없는 생활의 무서움, 아세요? 의지할 데도 없고 구속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필요 없어져요." (p221)


소설은 추리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끝에서는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등장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본 소설이 그렇듯, 추리소설의 형식에 주인공 쎄스코의 공허한 내면을 잘 끄집어 내고 있다. 특히 쎄스코가 쓴 가집 제목인 '유리갈대'와 함께 소설 중간중간에 갈대의 이미지가 쎄스코의 이미지와 겹치며, 그녀의 공허한 삶의 모습을 표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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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양면성이 있다. 대부분 종교의 교리에는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보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심지어는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거나 일생을 받치며 약한 자를 돌보는 경우가 있다. 인도의 성녀로 불리는 마더 테레사나 일평생 문등 병자를 돌보았다는 한국의 손양원 목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반면 종교가 특정한 권력에 갇히게 되면, 교리가 폐쇄적으로 되어간다. 그로 인해 종교는 신이나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특정한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변모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세 유럽의 가톨릭이다. 유럽과 교황의 권력 안에 갇힌 종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 현대에는 알카에다나 IS의 권력에 갇힌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를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본 [종교 유전자]라는 책에서는 종교가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면서부터 그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희생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종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형성되고,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종교는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종교와 전쟁의 관계에 관해서 3대 일신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유대교는 확장적인 신앙에서 시작했지만 패배를 경험한 다음 평화적인 종교로 변했다. 기독교는 처음에 비폭력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제국을 위해 공격적인 종교가 되었고, 세속 국가의 발흥과 더불어 어느 정도 중도적인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슬람은 제국의 종교로 시작했으나 아직 세속 국가 안에서 어울리는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로 존재한다.

종교와 전쟁 사이에는 일관된 관계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는 통치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강력한 잠재적 도구인 것만은 확실하다. 종교가 초기의 인간 사회에서 발생했던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라고 보는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다. 종교적 행동은 사회가 전쟁을 할 수 있는 활력을 부여하고, 사람들이 결핍을 견디면서 전쟁에서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은 종교적 결속력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P 434)



 

과연 종교가 인간들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들이 전쟁을 위해 종교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일까?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 무게를 둔다.



 

종교는 현대의 전쟁에서 더 이상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세속적인 권력자가 종교를 구실로 전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현대 국가에서조차, 종교는 병사에게 전투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비공식적일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전쟁의 슬로건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무엇보다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족은 문제의 본질이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쟁을 정당화하고 국민들의 결의를 굳히는 데 종교를 이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전쟁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다. 그리고 종교는 무기처럼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한 국가의 군비증강이 적국에 대해 참기 어려운 위험이 된다고 여겨질 때, 무기는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무기는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P 452-3)



 

또한 평화시 종교인들은 종교 지도자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만, 전쟁 시에는 그 불만을 타종교에 표출하며 잔악한 학살을 하게 된다. 띠라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에 대한 불만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전쟁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자군 전쟁이다.

결국 종교가 잔혹해지는 이유는 특정 지도자들이 종교를 전쟁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슬람의 청년들이 전쟁의 무기가 되어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함께 버리고 있다. 결국 저자는 종교가 세속 권력과의 결탁을 끊는 것이 종교의 폭력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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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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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우리를 들여다 본다!"


니체의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은 니체가 이야기하는 '괴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했다. 종교인지, 권력인지, 사람인지. 그런데 최근에는 어쩌면 그 괴물은 인터넷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매일 살아있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인터넷에서 형성된 여론이라는 괴물은 마치 거대한 포식자처럼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 우리의 생각, 배려심, 자유의지, 그리고 인간이라는 마지막 가치까지...


인터넷이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교류와 의사소통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어떠한 힘이 인터넷을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터넷이라는 속성이 그런 것이지, 어느 순간 인터넷은 괴물로 변해 버렸고, 요즘에는 그 괴물과 싸우는 우리도 괴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도 우리를 들여다 보고 있다. 이제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




[댓글부대]라는 책을 읽기 전에 우연히 장강명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그 중 댓글부대를 쓸 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댓글부대]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니, 작가가 왜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작가나 배우나 모두 작품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읽는 나까지 몸소리를 칠 정도의 거북한 소름이 돋게 하는 작품이니,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공감이 된다.


이 소설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배경이다. 팀-알렙이라는 회사는 인터넷 여론 조작을 하는 회사이다. 사실 회사라는 이름도 거창하다. 단지 팀-알렙에는 삼궁과 차탓캇, 그리고 01査10이라고 불리는 세 명만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도 처음에는 작은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제품이 인터넷검색 상위에 오르게 하는 비교적 단순한 인터넷 여론 조작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철수라는 인물을 만난다. 이철수는 삼궁에게 '가장 슬픈 약속'이라는 영화의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맡긴다. 이 영화는 전자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린 사건을 영화한 것이다. 삼궁은 기존의 다른 조직과는 다르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여론을 조작한다. 그들은 영화회사에서 인금을 받지 못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결국 여론은 자기 회사 노동자의 월급도 주지 않는 영화사가 다른 회사 노동자의 권익을 말한다며, 영화에 대한 사늘한 반응을 보인다. 그 후 팀-알렙은 여러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진보성향의 사이트들을 무력화 시킨다. 그 방법이 너무나 치졸하지만, 또한 너무나도 잘 먹혀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 접할 때는 단지 정치권의 여론조작의 음모를 들춰 낸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소설은 처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가 않았다. 이 소설은 인터넷 여론을 조작하는 보수세력을 음모를 이야기 할 뿐 아니라, 그 음모에 너무나도 쉽게 놀아나는 진보세력의 허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인터넷에 여론을 조작하는 세력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여론에 쉽게 흔들리는 많은 사람들의 속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을 물고 뜯고, 무리를 쉽게 따라가려하는 짐승과 같은 우리의 본성을 이 소설을 너무나 잔인하게 파해치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인터넷이라는 공간 속에 드러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느껴져서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소설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만큼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되는 인터넷의 민낯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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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인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주로 인간의 원시성과 그로부터 나오는 공포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그의 작품 중에서 [악의 숲](문학동네)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은 끔찍한 연쇄 살해로 시작된다. 살해 현장에서 시신은 잔인하게 잘려 있고, 시신이 있는 벽면에는 시신의 피와 배설물로 해독할 수 없는 주술적 모양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주인공의 사건을 추적하면서 이 사건이 원시부터 내려온 친부 살해의 관습과 관련이 있고, 그런 관습을 이어받은 어디에게 존재하고 있는 원시 종족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한다.

 

[악의 숲]이란 소설에서 나오는 친부 살해와 원시 종족의 모티브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라는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모두 4편의 논문을 묶여 있는 이 책은 주로 토템과 타부를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 (우리나라에도 대부분 토템과 타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인 [종교의 기원]이라는 책에 수록된 부분을 읽었다.) 이 논문들에서 프로이트는 원시 종족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동물에 대한 토템과 근친상간에 대한 타부를 방대한 조사와 책들을 인용하며 언급한다.  그리고 이런 관습이 현대 유럽에서도 형태만 바뀐 채 여전히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런 토템과 타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프로이트는 다윈의 진화론을 근거로 태초의 원시 종족의 형태를 언급한다. 태초의 원시 종족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한 명이 여러 여성들을 거느리는 부족 형태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들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죄책감을 나누기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먹었고, 이 풍습이 유전되면서 종교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토템과 타부]라는 논문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현대에는 대부분의 학자가 이 논문의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논문에 등장하는 친부 살해와 원시적 의식의 과학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여러 가지 강박증을 진화론적 심리학으로 해석하다 보니, 나름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의 존재나 종교의 허구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적 이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학자가 [이기적인 유전자]나 [만들어진 신] 등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이다. 그는 인간이 진화의 과정에서 부모의 관습을 따르는 유아기적 심리가 종교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니콜라스 웨이드는 [종교 유전자]라는 책에서 도킨스와는 다른 각도로 진화심리학을 통해 종교를 접근한다. 그는 다른 진화심리학자들과는 다르게 종교의 유용성을 언급한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두머리가 전체를 관활하는 유인원 무리와 다르게, 인간은 모두 평등한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한 우두머리가 없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는 것이다. 종교는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동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교의 유익성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종교의 나무'라는 이론을 주장한다. 언어가 원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종교도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종교란 특별한 종류의 언어다. 종교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식이며, 의식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몸짓과 언어적 상징으로 표현되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식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만일 이 '특별한 언어'가 언어와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변화하고 분화해가는 것이라면, 이론적으로 볼 때, 전 세계의 언어를 포괄하는 계통수를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세계의 모든 종교를 포함하는 종교의 나무(종교의 계통수)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P265-6)



 

이런 신념에 의해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기원을 설명한다. 저자의 설명의 공통점은 이런 종교들이 결국은 국가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서 기존의 종교나 관습들을 변형하며 발전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일관성이 있다. 프로이트가 현대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강박증을 해석하기 위해 원시의 토템과 타부를 언급하여 인류의 심리상태의 커다란 줄기를 그리고 있다. 니콜라스 웨이드 역시 종교의 존재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원시사회에서부터 부족국가, 근대국가와 현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역할과 변화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이론들이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나,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실질적으로는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유인원에서 수렵-채집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탄생했지는, 그 종교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또 그런 유익을 위해서 여러 종교가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문헌이나 유물로 발견된 것이 없다. 단지 종교가 인류의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유전적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상황을 언급할 뿐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인문학에서 종종 발견된다. 인문학자들은 무언가 인류와 사회를 하나로 해석할 수 있는 거대담론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마르크스, 칸트, 헤겔 등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학자들마다 역사와 인류 정신을 해석하기 위해 거대 해석이론을 만들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이론 하나로 모든 역사와 인류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의 이론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니콜라스 웨이드는 종교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기원과 진화를 해석하는 이론들을 제시한다. 그중에서는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고, 예리한 부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이란 한 가지 분야, 그리고 그 진화심리학 중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한 가지 이론으로 과연 세상의 방대한 종교의 기원과 진화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먼 훗날 인류의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유전자를 통해 과거를 완벽하게 읽을 수 있다면, 그때는 또 어떤 이론이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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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견만리 : 미래의 기회 편 - 윤리, 기술, 중국, 교육 편 명견만리 시리즈
KBS '명견만리' 제작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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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시대를 읽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오랫동안 인류의 지식이 배로 증가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100년이었다. 지금은 13개월만에 인류의 지식이 두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2030년에 3일만에 인류의 지식이 두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이 넘치는 시대에 좁은 지식들과 지엽적인 것들만을 보는 시각을 가지고는 살아가기가 힘든 시대이다. 전체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앞날을 읽는 능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특히 정치인이나 기업가, 리더들에게는 이런 시각이 더 필요할 것이다. 구한말 시대를 읽지 못한 지도자들로 인해 나라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는가? 또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져간 대기업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접하는 소식들에서 많은 정책들이 너무나 근시안적인 것들을 보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명견만리]라는 책은 KBS에서 반영된 명경만리를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1편에서는 인구, 경제, 복한, 의료의 주제를 다루었다. 2편에서는 윤리, 기술, 중국, 교육의 주제를 다룬다. 이 책의 첫번째 주제는 '윤리'의 문제이다. '공정무역'이나 '김영란법'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이 한국의 부패지수를 언급하는 부분이다. 부패인식지수에서 우리나라는 100점만점에서 56점을 받았고, 세계 37위에 머물렀다고 한다. OECD 기준으로는 34개국 중 27위로 거의 꼴지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김영란법에 대한 반발이 심하다. 김영란법이 내수경제를 망친다는 원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국가가 청렴할수록 국민소득이 오히려 많아진다고 말한다. 그 예로 보스니와와 싱가포르의 반부패정책과 그로인한 경제성장의 과정을 언급한다.

 



두 번째 주제인 '기술분야'에서는 인공지능과 플랫폼시대를 이야기한다.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은 우리에게 기대와 함께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는 [터미네이터]나 [아이로봇]같은 영호에서 보듯이, 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인류라는 종이 멸종위기까지 처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두려움을 철학의 부재에서 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술에만 의지하고 그 기술을 방향을 이끌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술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한까지 높여주겠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를 알려주지는 못한다. 인공지능으로 인류에게 위기가 닥친다면 그것은 바로 철학의 부재때문일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정점에 달한 21세기에 더욱 필요한 것은 올바른 철학과 세계관이 아닐까? 인류는 인공지능을 사용해 우주와 생명의 비밀에 한 발짝 더 접근할 수 있고 평범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인류의발전을 함께하는 친구가 될 것이다. (P104)"



3번째 주제인 '중국'분야에서는 유커들과 중국경제위기를 다룬다. 쓰나미처럼 세계관광지와 한국의 주요관광지를 휩쓸고 있는 중국여행객과 차이나머니.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외면하자니 그 경제력이 너무 무섭고, 받아들이자니 메뚜기때와 같은 그들의 식성?이 두렵다. 이 책은 제주도와 같은 곳에 밀려드는 차이나머니의 두얼굴을 이야기한다. 아울러 중국의 경제 위기에 대해서도 말한다. 과연 중국은 계속 성장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위기를 겪을 것인가? 그에 따라 한국경제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중국이란 나라와 차이나머니는 우리에게는 뜨거운 감자이다.



4번째 주제는 '교육'의 분야이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서울대학생들의 우수생 대부분이 거의 백프로 교수의 강의를 받아적고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한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하는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거나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는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대학교육이 창의력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대학생들의 교감신경을 측정한 부분이다. 주변의 변화나 인식반응을 보여주는 교감신경이  강의시간이나 텔레비젼 시청때 가장 낮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고, 어떤 인재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두려운 현실을 보게 하는 책이었다. 물론 이 책에는 대안도 등장한다. 중국과 유럽의 교육을 통해 젊은 세대의 창의력을 키워주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래를 읽는다는 것은 현실을 본다는 것이다. 미래는 점이나 무당을 통해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통해 미래를 보는 것이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미래도 볼수가 없다. 이책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며, 그 현실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한다.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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