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김승옥 작가에 대한 글을 자주 읽게 되었다. 문학잡지에서, 수필에서, 때로는 서평들에서 여전히 김승옥의 소설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김훈 작가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에서 읽은 부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작가였던 아버지와 친구들이 김승옥이라는 신예 작가를 접한 충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70년대의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
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식은 안주를 연탄아궁이에 데워서 가져다 드렸다. 아침에 아버지의 친구들은 나에게 용돈을 몇 푼씩 주고 돌아갔다. - [라면을 끓이며] P45

 

 

 

 

 

갑자기 김승옥의 소설들이 읽고 싶어져서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제3세대 한국문학 전집을 다시 뒤적여 보았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던 해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전집이니, 가지고 있은 지가 벌써 20년은 넘었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려고 생각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이사 때마다 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다니고 있다. [무진기행]을 펼쳐보니 뒷면에 내 글씨체로 감상이 적혀있고,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기억이 없는데... 20년 전의 내가 적은 글들인가 보다.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의 고향인 무진과 무진의 안개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시작부터 분위기는 무겁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이다. 아침에 잠자리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 가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아내와 장인 덕에 제약회사의 중역이 될 처지에 놓인 주인공은 자괴감을 느끼며 잠시 무진에 내려온다. 그리고 그 자괴감은 오래전 자신의 골방에 숨어 있던 기억과 겹친다.

 

 

 

내가 졸업한 무진의 중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무명지에 붕대를 감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을 부르며 읍 광장에 서 있는 트럭들에 올라타고 일선으로 떠날 때도 나는 골방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행진이 집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대학이 강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나는 무진의 골방 속에 숨어 있었다. 모두가 나의 홀어머니 때문이었다.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나는 내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 이웃집 젊은이의 전사 통지가 오면 어머니는 내가 무사한 것을 기뻐했고, 이따금 일선의 친구에게서 군사 우편이 오기라도 하면 나 몰래 그것을 찢어 버리곤 하였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 부분이다. 고등학교 때 국어 문제집에서 읽었던 부분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이 글이 적혀 있고, '이 소설의 제목은?'이라는 질문이 있었던가...

소설의 내용은 잠시 무진이라는 고향을 찾은 주인공이 옛 선후배를 만나고, 그곳에 음악교사로 있는 인숙이라는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인숙을 사랑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만을 다시금 경험할 뿐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아내에게서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고, 그는 다시금 부끄러운 자기 자신과 타협을 한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는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 한 번만, 이 무진을 ,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번만, 그리고 나는 개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렇게 주인공은 무진을 떠나고, 다시금 심한 자괴감을 느낀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직 주인공이 느낀 그 부끄러움을, 그리고 무진이 상징하는 그 무력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당시 이 소설이 왜 벼락을 맞은 충격을 주는 작품인지 온전히 공감을 할 수 없었다. 김승옥의 소설이 대부분 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당시 60년대를 살던 청년들의 무력감을 느끼기에는 세대가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이든다. 그럼에도 소설 전반에서 풍기는 무진의 안개와 주인공의 무력감이 읽는 나를 누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톤의 사상 중 일반인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처자공유와 재산공유를 언급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으로 인해 플라톤의 사상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오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중세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같은 책은 플라톤의 처자공유와 재산공유의 사상을 이어 받는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공상적 사회주의사상이나 원시적 공산주의 사상이라고 부르며,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플라톤의 처자공유와 재산공유에 대한 부분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과 관련하여 생각하기 전에, 먼저 플라톤이 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처자 공유제와 재산 공유제에 대한 사상은 그의 저서 [국가] 5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에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을 대화를 통해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로운 국가란 통치자(지혜), 수호자(용기), 백성(절제) 계급들이 자신의 일을 바르게 수행하는 상태를 말한다. 특히 이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계급이 수호자 계급이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계급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목적이 물질적 보상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그것 자체가 정의이기 때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내용이 주로 [국가] 4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국가] 5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수호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사상을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계급은 공동생활을 하며, 가정이나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도 이런 주장이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고,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특유의 대화법으로 청중들에게 설득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수호자계급의 처자공유제와 재산공유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들 모든 남자는 이들 모든 여자를 공유하게 되어 있고,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개인적으로 동거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네, 또한 아이들도 공유하게 되어 있고,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을 알게 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아이도 자기 부모를 알게 되어 있지 않다네." (P 334)

"구별할 길이 없다네. 그러나 이들 중의 한 사람이 신랑으로 된 날부터 이후 일곱 달째에서 열 달째까지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들 모두를 이 사람은 남자들의 경우에는 알들들로, 그리고 여자들은 딸들로 부를 것이고, 이들은 그를 아버지로 부를 걸세. 또한 이런 식으로 그들의 아이들을 그는 손자들로 부를 것이며, 이들은 그 또래를 할아버지들 그리고 할머니로 부를 걸세.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이들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아이를 낳던 그 시기에 태어난 자들을 형제 자매로 불러, 방금 우리가 말하고 이었듯, 서로 건드리지 않을 걸세." (P341)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되는 혈연 관계를 없애려는 이유는, 수호자들의 타락으로 인한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이다. 수호자들이 내 가족과 내 것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 이해관계가 생기게 되고, 나라는 분열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앞서 말한 것들은 지금 말한 것들과 함께 이들을 한층 더 참된 수호자들로 만들어 주며, 동일하지 않을 것을 '내 것'이라 일컬음으로써 나라를 분열하게 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즉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것을 두고 '내 것'이라 일컫게 됨으로써, 한 사람이 자기가 남들과 따로이 가질 수 잇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며, 다른 한 사람도 다른 자기 자신의 집으로 그렇게 끌고 가고, 또한 아내도 자식들도 따로 갖고, 사사로운 것들에 대한 사사로운 즐거움과 고통도 나라에 생기게 함으로써 분열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일세. 오히려 이들이 자기 자신들의 것에 대한 한 가지 신념으로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서, 고통 및 즐거움과 관련하여 모드가 최대한으로 '공감상태'에 있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P 347)



 

이런 수호자 계급의 공동생활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녀평등사상이 이야기한다. 그는 남녀의 성향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면 다른 일을 해야한다는 주장에 반박한다. 그는 남녀가 국가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인 성향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자질이 있는 여성은 남성과 같이 군사훈련련과 시가교육을 받으며, 수호자로서 훈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당시 체육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김나지온(Gymnasion)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김나지온은 벗은 상태라는 김모스(Gymos)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유례했듯이 모두 옷을 벗고 운동을 했다. 여성이 그런 남성이 훈련을 받는 곳에 함께 동참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런 편견을 버리고 여성이 남성과 같이 옷을 벗고 김나지온에서 체육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수하게 길러진 수호자 계급의 여성과 남성의 결합을 통해 출생적으로도 건강한 수호자 계급의 자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 5권의 끝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이런 이상국가의 시스템과 수호자계급의 양성을 위해서는 그는 철학자나 철학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 통치자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져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주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P 365)



 

플라톤의 사상은 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상적인 면이 있다. 플라톤 역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런 부분을 인정한다. 자신의 사상이 최고의 이상 국가의 사상이고,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온전히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이상을 바라보고 나갈 때 국가가 혁신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처자공유제와 재산공유제는 통치자나 수호자 계급에만 한정함으로서, 모든 국가에 적용하는 사회주의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과는 다르다. 특히 그는 국가의 통치자나 수호자들이 개인의 부귀영화에 집착해서 일을 하는 것을 원치 않고, 오로지 국가와 정의를 위해서 일을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방해가 되는 가정이나, 처자, 재산의 부분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어쩌면 현대의 정치인의 재산공개나, 특정 이권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들과 취지는 비슷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가정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는 효율적으로 수호자 계급을 양성하기 위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단지 효율적이 교육만으로 양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정을 통해 부모가 주는 인성의 부분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바른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결국 가정과 자녀,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도, 그런 것에 집착하거나 좌우되지 않을 투명한 시스템이 현대 정치인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처럼 희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2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옛날 옛날에 사이 좋은 두 공주가 살고 있었다. 두 공주는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공주가 사라졌다. 남은 공주는 사라진 공주를 찾아 헤매다가 7년만에 사라진 공주가 있는 곳을 발견한다. 그 곳에는 용이 지키고 있었고, 사라진 공주는 그 용이 지키는 탑 속에 갇혀 있었다. 남은 공주는 갇힌 친구를 구하기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탑까지 찾아간다. 그런데탑에 갇혀 있던 공주는 그 순간 잔인한 용으로 변해 버린다. 용이 공주 속으로 들어간건지, 공주가 용이 된 건지, 과연 친구를 구하러 간 공주는 용이 된 친구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용으로 변한 친구에게 잡혀 먹히게 될까?


핀란드의 작가 살라 시무카의 두 번째 소설 [눈처럼 희다]에 나오는 동화의 한 대목이다. 살라 시무카는 스노우 화이트 트릴로지로 불리는 세 편의 소설을 써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피처럼 붉다],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라는 세 편의 소설은 모두 백설공주의 이름을 딴 루미키라는 소녀가 주인공이다. 그녀가 쓴 세 편의 소설들은 모두 백설공주나 그림형제의 동화같은 유럽의 전래동화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편 [피처럼 붉다]에서 루미키는 우연히 범죄조직의 돈다발을 가로채려다가 위기에 빠진 친구 엘리사의 요청으로 범죄조직과의 싸움에 연관되었었다. 이 사건이 일달락 되지 그녀는 모든 복잡한 것으로부터 잠시 피하고자 체코의 프라하로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프라하에서 그녀의 언니라고 주장하는 젤렌카라는 여성을 만난다.


젤렌카의 주장에 의하면 젤렌카의 어머니는 루미키의 아버지가 프라하로 여행을 왔을 때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미키의 아버지가 핀란드로 돌아갔을 때, 젤렌카가 생겼다. 혼자 젤렌카를 키우던 어머니는 몇 해 전에 사고로 강물에 빠져 죽었고, 그 후로 젤렌카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핀란드에서 아버지가 보내 온 편지와 사진 속에서 루미키의 얼굴을 보았고, 우연히 프라하에 온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젤렌카와 루미키는 자매일까?


그런데 젤렌카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 누구에겐가 쫓기는 것 같았고, 젤렌카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루미키가 젤렌카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알고 보니 젤렌카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화이트 패밀리라고 부르는 신흥 종교집단이었다. 그들의 리더인 아담 하벨은 모두가 예수의 가족이라고 주장하며,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 패밀리가 단순히 금욕적인 삶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담 하벨은 무언가 더 큰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루미키는 그 음모 속에서 젤렌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눈처럼 희다]는 전편보다 더 어둠고 자극적인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이단종교와 그 종교가 가진 음모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 어둡다. 이 시리즈는 백설공주나 그림형제의 동화같은 북유럽의 전래동화들이 더 어둡고 잔인하게 변주한다.

이 소설에서도 루미키와 젤렌카의 만남이 단지 자매의 만남처럼 아름답게만 묘사되지 않는다.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젤렌카는 자신을 돌봐주는 이단종교에 깊이 빠지게 되고, 교주인 아담 하벨이 이야기하는 모든 사상에 세뇌되어 있었다. 결국 이단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대부분 외롭고 약한 사람들이다. 아무도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주지 않고, 약함을 돌봐주지 않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해 준다. 그리고 자신의 외로움과 약함을 돌봐주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소설 속의 젤렌카는 이미 용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긴 상태이다. 그런 젤렌카를 루미키는 구해낼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 박태식 신부가 읽어주는 영화와 인권
박태식 지음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영화를 보는 스타일은 참 단순하다. 영화를 보는 순간만은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블록버스터 영화 위주로 본다. 그러다보니 정치나 인권, 복잡한 사상이나 미학 등이 담긴 영화는 잘 보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이런 영화편식으로 인해 좋은 영화들을 놓친 것이 아쉬울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책에는 좋은 영화들이 많이 언급된다. 대부분 내가 보지 못한 영화들이다.


이 책은 27개의 챕터로 되어 있고, 대부분은 한 챕터에 두편씩의 영화를 소개한다. 마치 토요일 오전에 영화를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에서 같은 주제의 영화 두 편을 연괂서 소개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저자가 첫 번째로 소개하는 영화는 [한공주]와 [도희야]라는 영화이다. 두 편 모두 폭력에 희생되는 힘없는 약자들이다. 우리사회에는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오히려 죄인처럼 자신이 당한 피해를 숨겨야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신상이 인터넷에 노출되고, 오히려 그런 여성들이 세상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야 하는 상황들이 지금도 빈번히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약자의 시선에서 상황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런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여건이 변하면서 한공주 자신의 목소리도 슬금슬금 사리지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학교로 전학가야 했고, 후배 부탁으로 잠시 받아주기는 햇지만 재단의 눈치도 봐야 한다며서 공주를 학교에서 내보내는 교장의 입장까지 받아들여야 할 처지에 놓인다. 심지어 '네가 꼬리를 쳐서 이런 일이 터진 게 아니냐'며 공주를 궁지로 모는 가해 남학생들의 부모와, 갈 곳 없이 도망치듯 거리로 내몰린 공주에게 합의서에 도장을 찍으라는 경찰서장에 의해 공주의 목소리는 묻혀버린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 절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P 21-2)



이 책의 제목은 [트래쉬]라는 영화에서 가져왔다. 이 영화의 배경은 난지도를 연상시키는 브라질의 쓰레기 마을이다. 부패한 정치인과 그 정치인의 부패를 덤는 청부업자가 나오고, 이에 대항하는 순수한 소년들이 등장하는 영화이다.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정치인가 대항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 수녕게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저자는 이 영화를 통해 온갖 부패한 권력 가운데서도,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을 믿는 소년들의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는 내가 본 영화들도 몇 편 소개하고 있다. 차이나타운, 국제시장, 변호인, 고지전이다. 저자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놓쳤던 부분들을 여러 가지 방향에서 바라보며 이야기를 해 준다. 공감을 가는 부분도 있고,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국제시장]이란 영화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본 영화이다. 원래 감수성을 자극하는 영화를 싫어해서 이 영화를 끝내 보지않으려했다. 결국엔 아내의 손에 이끌려 보게 된 영화이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펑평 운 영화이다. 그 뒤 이 영화가 기성세대에 대한 변명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펑펑 운 내 자신이 머쓱해지는 비평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세대의 갈등이나 정치적 시각이 아닌 그냥 영화로 보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평생 맏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짊어져야 햇던 무거운 짐을 가진 남자의 내면을 그냥 공감하면 안되는 걸까. 이 책의 저자 역시 이 영화를 세대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


"국제시장을 보면 눈물을 자아내는 요소가 한두 가지 아니다. 윤제균 감독은 어떻게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동적인 장면을 곳곳에 배치하여 잠시도 눈물 샘이 쉴 틈을 주지 않는다. 훌륭한 연출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제시장이 불러 일으킨 효과가 단순히 '눈물 짜내기'에 그친 것은 아니다. 감독은 극구 부인하지만 세대간 분열을 부추기는 영화로 해석될 소지가 들어 있다.

  기성세대는 국제시장을 보며 '요즘 젊은 것들은 돼먹지를 못했어!'라는 넋두리를 늘어놓을 법하다. 특히 덕수와 여자의 아들과 며느리들이 부모에게 하는 짓을 보면 분명해진다. 어떻게 부모를 저렇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들이 누구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생각은 그와 다르다. 배금주의, 과도한 교육열, 집단 이기주의, 기성세대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비윤리적인 행동....... .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게 기성세대의 잘못이지 어디 젊은 세대의 잘못인가? 과거는 그렇게 우리를 즐겁게도 만들고 슬프게도 만든다." (P 140)



영화는 단순히 흥미를 위한 오락 수단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영화에 담긴 시선은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그 영화의 시선들을 예리하게 파해친다. 특히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특히 저자가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매우 담맥하면서도 진솔하다. 어려운 영화기법이나, 멋져 보이는 전문용어들을 쓰지 않는다. 간단한 영화 줄거리와 감상, 그리고 저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러기에 읽는 이가 쉽게 공감하게 된다. 특히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접하지 못한 좋은 영화들을 알 수 되었다. 기회가 되면 한 번씩은 꼭 보고 싶은 영화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릿터 Littor 2016.8.9 - 창간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릿터 1호를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호를 받았다. 1호를 읽고 리뷰를 쓰려고 미루고만 있다가, 2호를 받고 늦었지만 서둘러 1호 리뷰를 쓰게 되었다.

릿터는 [세계의 문학]이라는 문예지를 펴내던 민음사에서, 세계의 문학을 폐간하고 새롭게 출간한 문학잡지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세계의 문학을 구독하다가, 릿터의 출간 후 이 잡지를 구독하게 되었다.

요즘 새롭게 출간하는 문예지들은 예전의 고루?한 디자인과 내용에서 벗어나 무척 참신하고 현실참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릿터 역시 매달 새로운 주제로 현실과 문학을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매우 신선했다.


 

 

릿터 1호의 커버스토리는 '뉴 노멀'이란 주제이다. '뉴 노멀'에 대해서는 인터넷이나 신문 기사에서 자주 접했지만, 막상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이 기회에 뉴 노멀의 의미를 알아보니 '새로운 경제 상황'이라는 의미로 보통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상황을 이야기하는 용어였다.

'뉴 노멀'이라는 말은 이제 그야말로 '노멀'로 자리 잡은 듯하다. 저금리, 저성장, 저수익, 고위험, 국가 개입, 고실업, 정치 및 사회 불안 등을 이제는 우리 존재 조건의 '디폴트' 값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P24)

요즘 유행하는 '뉴 노멀'이라는 용어는 2008년 세계대공황 이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의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뉴 노멀은 2008년 세계대공황 이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뉴 노멀은 2008년 세계대공황이 경미한 상처가 아니며, 따라서 쉽게 치유하기 어려운 세계졍제가 이전 상태와는 달라진 새로운 환경에 처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상황에서 국가 채무와 가계 부채의 증가, 소득 및 부의 불평등으로 인해 수년간 세계경제의 불안이 지속될 수밖에 없벗다는 것이다. (P29)


 

 

이 잡지의 시작에는 '뉴 노멀'과 관련된 세 명의 소설가의 짦은 글을 담고 있다. 1998년의 IMF,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현재 2016년을 배경으로 한 세 인물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삶이 주변의 경제상황에 의해 어떻게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와 청년의 역할을 점검하는 글도 실려져 있다. 20세기초 구한말의 시대부터, 한국전쟁, 군사독재, 그리고 현재까지 청년들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의 현대 시대의 청년들은 더 이상 저항하기를 멈추었다고 말한다. 대신 현실 순응이나 냉소가 전부라고 말을 한다.  

이들은 더 이상 아버지, 기성세대에 저항하지 않는다. 물려받을 것이있는 청년들은 부모세대에게 순종하면서 착실하고 예의 바르게 스펙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주의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나서고, 고관대작과 부르주아의 자녀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던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청년들은 이 시절이 만족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물려받을 것 없는 청년들이 분노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앞 세대가 상승의 사다리를 거뒀다고 생각하니 화는 나는데, 행동에 나서 봐야 자기 손해일 뿐이라고 여긴다. 기성세대의 '노오오오력'요구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이닞를 잘 알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우리에겐 들 짱돌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대신 이들이 선택하는 전략은 냉소와 혐오다. (P21)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작가의 분석이 예리하고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문예잡지에 경제학자의 글 두 편이 실려져 있다. 그 중 장시복 교수(목포 대학교)의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뉴 노멀 시대에는 더욱 더 승자독식의 경쟁체제와 국가가 경쟁체제에서의 패자보다는 승자만을 배려하는 시스템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더 암담한 것은 국가가 승자 독식의 위계화된 먹이사슬 구조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부는 한마디로 승자만을 위한 정부다. 정부는 승자에게 유리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승자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골몰하고 있으며, 승자가 사회에 손실과 위험을 양산하더라도 이를 사회 전체에 부과하고 패자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다. (P30)

 

                 

 

 

 

응답하라 시리즈와 아다치 미츠루의 [H2]를 연관해서 쓴 기사도 있었다. 나 역시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를 많이 떠올렸다. 내 또래 남자 아이들은 당시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를 보며 나름 감성을 키웠었다.

 

 

 

 

 

작가 인터뷰에는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경모 작가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KTX를 타면서 소설을 쓴다는 작가의 창작 방식이 매우 특이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소설 부분에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애란 작가의 소설이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