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에 관한 모든 것
파스칼 보니파스 지음, 정상필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냉전세대가 무너지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면서 자란 세대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할 때는 이미 베트남 전쟁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가 훨씬 전에 끝났지만, 초등학교 내내 방공교육을 통해 베트남전쟁의 비극 등을 귀에 못이 밖히도록 들었다. 특히 킬링필드는 하루 수업을 빼먹고라도 전교생이 봐야 하는 방공영화의 명작?이었다. 그 후 자라면서 뉴스를 통해 동유럽이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독일 통일이 되고, 고르바초프와 옐친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과 옐친 시대의 러시아의 군부 구테타 과정을 거의 생중계에 가깝께 텔레비젼으로 시청한 것이다. 특히 열친에 대한 소련 군부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고등학생의 시기임에도 매우 관심있게 보았다. 뉴스를 통해 소련의 구데타 과정을  보면서 다시금 냉전체제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구테타가 진압되는 과정을 뉴스를 통해 그대로 보면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 나이에 세계 정세에 이처럼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지금의 나도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런 세계정치의 관심으로 인해 이번에 레디세고 출판사에서 출간한 [지정학에 관한 모든 것]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파스칼 보니파스'라는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 소장이 1945년부터 지금까지 현대세계의 변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냉전과 데탕트, 양극화 이후의 세계라는 3부로 구성되어 있고,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어떻게 냉전체제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붕괴되었는지를 통해 현대 세계의 형성 과정을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1부 냉전에서는 독일의 패전처리 과정을 통해 어떻게 세계질서가 형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상태이고, 제대로 힘을 구사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소련뿐이었다. 물론 미국은 당시 핵무기를 통해 소련보다 훨씬 우위의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을 통해 미국은 소련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했고, 이것은 소련이 전후 동유럽과 아시아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저자는 이 과정을 스탈린의 날카로운 판단과 루스벨트의 안일한 판단의 결과로 본다.


전쟁이 끝나기 전, 독일의 진군에 충격을 받은 스탈린은 소련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위성국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스탈린은 유고슬로비아의 지도자 티토와 그의 보좌관 질라스에게 "이 전쟁은 과거의 전쟁과 양상이 다르다. 영토를 가진 세력이 그들 고유의 사회적 시스템을 강요하게 된다. 각 세력은 군대가 앞으로 나아간 거리만큼 자신들의 체제를 심을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중략- 그러나 루스벨트는 스탈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한 교섭 상대자가 소비에트의 지도자를 독재자로 묘사하자, 루스벨트를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스탈린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미고 있소,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만약 내가 그에게 대가 없이 어떤 것을 준다면 그는 어떤 영토이든 합병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도록 나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오." - P 20-1


루스벨트의 이런 안일한 판단의 결과는 동유럽의 대부분, 더 나아가 그리스와 터키까지 소련의 영향을 미치게 했고, 그 후 프라하의 봄 사태와 같이 동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학살과 철권 통치를 경험하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남북이 북단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혼란기에는 누가 더 냉철하게 현실을 판단하고, 과감하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후에 이어지는 체제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전후 소련이 막강한 힘을 발휘했지만, 미국은 핵무기를 통해 한동안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이 곧 핵무기를 개발하고, 영국과 프랑스까지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빠지게 된다. 결국 냉전체제는 핵전쟁의 공포 속에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양대 세력이 서로를 견제했던 시기이다.



2부 데탕트에서는 이런 냉전체제가 부드럽게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데탕트는 냉전체제의 붕괴가 아니다. 저자는 데탕트가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다른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로 인한 핵확산의 방지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이해가 같아지면 가지게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대화를 하게 되고, 이 과정에 과거의 극단적인 대립이 누그러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데탕트 시기에도 위기는 발생햇다. 대표적인 것이 쿠바의 미사일 위기이다. 원래 민족주의자였던 쿠바의 카스트로는 친미정권을 무너뜨리고, 미국에 대항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미국의 위협에 맞서 소련을 끌어들이고,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소련은 쿠바에 핵 미사일 설치한다. 원래 미국은 유럽에 핵무기를 배치함으로서 소련에 직접적인 핵 위협을 가할 수 있었던데 반해 소련은 당시 기술로 소련 본토에서 미국에 직접적인 핵무기 위협을 가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쿠바 사태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결국 케네디의 결단으로 이 위기가 타계된다.


 

 


비록 쿠바 위기에서 미국이 소련의 양보를 받아냈지만, 그 후 데탕트 시대에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서 여러 전쟁과 대립에서 계속해서 손해를 보게 된다. 반면 소련은 인도차이나반도나 남미, 아프리카, 중앙 아시아 등에서 자신의 세력을 펼치게 되고,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강한 미국을 다시금 주장하게 된다. 그 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 정책으로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3부 양극화 이후의 세계에서는 소련의 붕괴 이후에 평화로운 세계질서의 가능성이 걸프 전쟁으로 인해 위기를 맞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걸프전쟁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경제적 위기를 맞은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발생했다. 레이건 이후 강한 미국을 주장하고, 소련 붕괴 이후 세계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하며 걸프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이 결국 911테러까지 이어지고, 세계는 아직도 혼란 가운데 있다. 특히 이런 지정학적인 전쟁 위협과 함께, 2000년대에 이르러 금융위기까지 발생하면서 세계정세는 한층 더 불안해졌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다시금 민족주의자인 푸틴이 정권을 잡으며 세계평화는 아직도 멀게만 느껴지는 상황이다. 저자는 은연 중에 고르바초프의 양보가 서방, 특히 미국의 경제적인 보상을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가 다시금 옛소련의 향수 속으로 들어갔음을 이야기한다.


프랑스와 독일은 고르바초프를 도울 준비가 돼 있었다. 두 나라는 고르바초프를 동서 대립의 종말을 가져온 결정적 인물로 인정했고, 파트너로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평가받는 보리스 옐친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두 인물의 판단에 있어 정반대의 정서를 갖고 있었다. 미국은 전략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상상 가능한 모든 이익을 챙겼다. 고르바초프이건 소련이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런데 굳이 공산주의 체제 유지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무엇을 더 억을 게 있다는 말인가? 미국은 대립이 끝났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경쟁관계는 여전하다고 봤다.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이건 아니건 영토의 규모나 그들의 소유하고 있는 부수적인 것들을 봤을 때 경쟁자로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 소련에 왜 선택의 여지를 남긴다는 말인가? - P 247-8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정까지는 아직 다루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세계질서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 과정에서 전개되어 갈 가능성이 크며, 우리나라는 또 다시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봐야 되는 상횡이 될 수 있고 생각한다. 남중국해 문제나 사드 문제가 이런 새로운 세계 질서의 중요한 방향을 가르는 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 책은 1945년에서부터 현대까지 지정학적 관점에서의 냉전체제의 형성과 붕괴 과정을 매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세계정치의 흐름을 지도와 저자의 명쾌한 설명으로 흥미롭게 이어가고 있다. 현대 세계사를 알고 싶은 사람들이 읽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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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읽은 철학 서적은 플라톤의 [국가]였다. 그리고 그 [국가]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이론'이었다. 플라톤은 보통 인간은 동굴에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혀서 동굴의 벽 쪽만 보도록 되어 있는 죄수와 같은 상태와 같다고 말한다. 죄수는 동굴 입구에서 비춰오는 태양에 의해서 만들어진 실제 물체의 허상을 동굴 벽을 통해 볼 뿐이다. 그러던 중에 한 죄수가 우연히 결박을 풀고 동굴 입구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태양을 보고, 실제 물체들을 본다. 그는 순간 밝은 빛에 정신을 잃지만, 곧 자신이 그동안 실제라고 믿었던 것은 허상이며, 자신이 지금 보는 것이 참다운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그 후 근대철학을 접하면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도 플라톤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지식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이란 것이 확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체계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의심의 극단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한 가지 가정을 한다.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모든 허상을 우리의 감각과 마주하게 한다. 결국 우리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상들을 접하지만, 악마의 속임에 의해서 그들이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지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결국 실제로 존재한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여기서 데카르트는 악마가 모든 것을 속이더라도 속는 나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리고 근대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도출해 낸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비록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서양 철학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와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며, 자신의 주체적인 자각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 낸다. 특히 데카르트의 '코키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에서 근대철학, 근대성이 시작된다. 결국 근대철학이란 사회의 대다수가 인정하는 권위나 가치, 사상들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던 개인이, 그것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하며,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구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연대가 가능해진다. [근대성과 자아의식]의 저자인 차인석 교수는 이것을 '자아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아의식이야 말로 근대성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자아의식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자각이자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주체라는 믿음이며, 이 의식의 부재나 미숙은 상하 예속 질서의 사회관과 타율에 맡기는 생활태도를 개인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한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모든 제도가 형식적으로는 합리화되더라도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개인들의 주체의식 없이는 제도의 합리화가 순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P 69-70

"근대성으로의 이행은 사회 구성원들이 주체라는 것을 자각하고 각자가 다른 주체들과의 연대에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P90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근대화가 되었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자아의식은 형성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존의 권위주위적인 유교사상이나 물질적 숭배만을 강조하는 기복사상이 사회의 상층부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근대화가 되었지만, 내부적인 사상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자아의식의 개발 없는 경제 발전의 기도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생산수단의 합리화에 의해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적 정치의 발전은 이룩되지 못하고 종국에 가서는 경제 발전도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놓이게 된 상황이다." P 69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사회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주체성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행동과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 채,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물질적인 부의 축적과 쾌락 추구만을 쫓아가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저급해지는 이유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지 한국의 문제뿐만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병폐이지만, 한국에서만 유독 그 병폐가 심하다고 말하고 있다.



 

"상품 숭배 사회에서는 오관에 주어지지 않는 것들은 인식 대상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현세적이며, 초월적 존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초월적 윤리 또한 상정되지 않으며 오로지 쾌와 불쾌가 선악의 기준일 다름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삶을 복과 재앙으로 그리고 도덕을 쾌와 불쾌로 규정하는 무속문화와 친화성을 강하게 갖기 마련이었으며,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면서 외래의 상품 숭배와 토속의 물신 숭배가 결합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두 축이 되어 버린 셈이다." - P 84-5



 

근래에 언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김영란법'이다. 이 법의 시행을 앞두고 말들이 많다. 대부분 언론들이 하는 말은 일반적인 음식점이나, 농수산업자들, 생산자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 법이 득보다는 실이 많다며, 헌법재판소까지 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많은 대중이 그 언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과연 이런 논쟁이 근대사회라고 말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뇌물을 금지하면, 경제가 죽기에 뇌물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어떻게 21세기 근대화 사회에서 가능할까? 아직도 한국 사회에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아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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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 : 권력의 기록 2 랑야방
하이옌 지음, 전정은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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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장 비정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 아닐까? 크게는 국가권력에서부터 작게는 회사나 집안에서의 권력까지, 권력은 사람을 한없이 비정한 존재로 만든다. 믿었던 친구도, 피로 맺어진 형제나 부모자식간에도 권력을 두고 싸울 때는 너무나 비정해진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라는 임금이 있고, 재벌가에서 경영권을 놓고 싸울 때는 상대를 매장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봐도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지를 알게 된다.  


이런 권력의 속성을 역사소설과 무협소설의 중간정도의 틀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있다. 얼마 전 케이블 방송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중국드라마 량아방의 원작 [량아방]이란 소설이다. 이 소설은 원래 작가 아이옌이 인터넷에 연재했던 인터넷 소설인데, 인기를 얻어 책으로 출간했고, 다시 인기를 얻어 드라마로 완성이 되었다.


랑야방은 중국대륙을 다스리는 가상의 국가 '대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소철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매장소라는 인물이다. 매장소는 강좌맹이라는 중국 제일의 방파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소철과 매장소로 불리기 전에 원래 이름은 '임수'였다. 임수의 어머니는 황제의 누나이고, 아버지 임섭은 대량의 최정예군인 7만의 적염군을 이끌고 있었다. 임수 자신도 13세부터 전장에 나가서 타고나 지략과 용맹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적염군과 황자 기왕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황제와 간신들의 밀고로 이들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임수라는 인물은 죽고, 매장소로 다시 태어나 12년이 흐른 후 복수를 위해 돌아온 것이다.


매장소가 금릉에 도착하던 시기에 황제 밑에는 공식적인 황위계승자인 태자와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예왕이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황제, 태자, 예왕, 이들은 모두 12년전 적염군의 몰살의 과정에 관여한 사람들이었다. 매장소는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끝까지 적염군을 변호한 이유로 황제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옛 친구 정왕을 왕으로 세우려한다. 1권에서 매장소는 예왕의 모사로 들어가지만, 예왕을 돕는척 하면서 예왕와 태자를 싸움을 붙인다. 그리고 몰래 정왕에게 조언을 하며 정왕의 세력을 키운다.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예왕과 태자의 싸움이 벌어지고, 매장소의 계략으로 태자의 세력이 몰락한다. 2권의 압권은 태자의 가장 큰 세력이자, 예전에 적염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가장 앞장을 섰던 사옥을 제거하는 장면이다. 사옥은 황제의 여동생인 리양공주의 남편이다. 1품군후로서 대량에서 막강한 군사적 세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천천산장의 탁정풍이라는 고수와 사둔을 맺고 그를 이용하여 정적을 암살한다. 매장소는 사옥의 아들인 소경예의 생일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옥의 범죄사실을 밝힌다. 특히 탁정풍의 아들을 죽인 사람도 사옥임을 알게 한다. 이 사실을 안 탁정풍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범죄사실을 밝히려 하자, 사옥은 자신의 집을 봉쇄하고 자신의 집에 주둔하고 있던 6백여명의 군인으로 참석자들을 몰살시키려 한다.  매장소에게는 비류라는 고수의 호위무사와 친구인 대량의 제일무사인 몽지가 있지만, 몇 백명의 공격을 몇 명이 막기는 중과부적이다. (이 소설을 무협소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김용의 무협소설처럼 산을 흔들고 땅을 진동시키는 과정된 무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매장소는 미리 예왕의 세력을 끌어들여 사옥을 체포하게 한다. 이로서 태자의 세력은 모두 붕괴되고, 태자는 지위를 잃게 된다.


태자만 제거하면 자신이 제일인자가 될 줄 알았던 예왕은 황제가 정왕을 자신과 동등한 친왕으로 봉하자, 그제서야 매장소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예왕와 정왕의 대결이 시작된다. 예왕은 정왕을 제거하기 위해 옛 적염군의 사건을 들춰낸다. 적염군의 생존자 위쟁을 사로잡고, 정왕이 위쟁을 구출하러 오면 역모로 그를 옭아매려 하는 것이다. (예왕은 아직 매장소가 적염군의 장군이었던 임수인지를 모르기에, 정왕만을 옭아매려 한다.) 아쉽게도 2권은 정왕과 매장소가 위쟁을 구출하려는 장면에서 끝난다. 과연 매장소가 위쟁을 구출할 수 있을지, 정왕은 예왕을 누르고 황제가 될 수 있을지, 적염군의 몰살에 숨겨져 있던 비밀들이 모두 밝혀질지에 대한 궁금증은 결국 3권에서 모두 해결될 수밖에 없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몰입감과 빠른 속도감의 책이지만,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만이 최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 밑에서 누구든지 백성의 지지와 신하들의 신망을 받으면 가차없이 제거하는 황제의 권력욕이 매우 잘 묘사되어 있다. 결국 황제는 후계자인 아들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지 못하기 위해 큰 아들 기왕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새로 세운 태자와 예왕을 경쟁시켜 누구도 자신 외에는 절대권력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태자를 폐하자, 그 자리에 정왕을 앉혀 다시금 서로를 경쟁하게 한다.


이런 권력의 비정함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얼마 전 시사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 역대 통치자들의 통치 스타일을 비교하면서, 공통점으로 후계자에게 권력을 나누어 서로 충성경쟁을 하게 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을 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과 김재규를 경쟁시킨 것도,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후와 장세동을 경쟁시킨 것도,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과 박철언을 경쟁시킨 것도 다 이런 이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후계자로 세운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침법하려고 할 때는 가차없이 제거했다는 것이다. 권력의 비정함은 꼭 국가권력에서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은 모임이나 회사에서도 그 권력 때문에 서로를 시기하고 모략하는 행동들을 보게 된다. 결국 권력 앞에선 모두들 그렇게 변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 다시금 권력의 비정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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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터넷을 보던 중에 충격적인 동영상을 보았다. 우리나라 1위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집으로 보이는 고급빌라에서 세 명의 여성들을 불러들이는 장면이다.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수고했다면 한 명씩 5백만 원이 들어있는 돈봉투를 건네 주었다. 이 영상도 충격적이었지만,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다. 최근 연예인들이 성폭행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이때마다 언론들은 매일같이 이 문제를 보도했고, 아나운서와 유명 패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토론을 했었다. 심지어는 검찰총장까지 나서서 신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인터뷰까지 하는 야단을 보였었다. 그런데 재벌 기업 회장의 성매수 혐의가 분명한 이 영상에 대해서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매체들이 잠잠했다. 그리고 그 영상이 보도된 지 하루가 지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인터넷과 신문에서 이 영상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전근대적인 힘과 문화가 지배되고 있다는 단면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아카넷 출판사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저자가 1990년대에 근대성에 관해서 발표한 6편의 글을 묶어서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의 글들의 논지의 핵심은 우리 서양사회의 경제적인 성장 모델을 따라가고 있지만, 근대성의 부분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낯선 학자와 그의 저서 한 권을 소개하려 한다. 현대 중국인 사상가인 이택후의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이라는 책이다.(지식산업사) 중국식 이름으로는 '리쩌허후'라고 불리는 이택후는 우리나라에 중국 미학을 소개하는 [미의 역정]이라는 책으로 그나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현대사상을 관통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이란 책에서 중국에서 단 시간 내에 사회주의가 급격히 지도층과 서민층의 지배한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나라도 사회주의가 이처럼 순식간에 넓은 지역을 점령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를 통하여 사실은 중국 사회주의는 유교의 또 다른 변형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 몇 천년 동안 뿌리 깊게 중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유교가 사회주의라는 탈을 쓰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그 증거로 유교의 무신론이나 음양의 대립 등이, 사회주의의 유물론이나 변증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낸다.


 


 

차인석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는 맥락도 중국 학자 이택후와 비슷하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기복사상(祈福思想)이라는 것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비록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근대화되었지만 국민들의 마음 저변에는 이 전근대적인 기복사상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다. 이것이 근대적인 합리성과 시민들의 자아의식 성장을 방해하고 오직 부에 대한 집착과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절망적이다.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에서 기대될 수 있는 자아의식은 성숙되지 않았고, 오히려 쾌락주의에 젖은 이기심이 경제행위의 동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쾌락 추구의 자기중심주의는 다름이 아니라 수천 년 묵은 기복제화(祈福除禍)의 무속신앙으로 더욱더 증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아니라 무속신앙이 이념적 동인이 되어 움직여왔다. 이 기복제화 의식은 모든 종교에 스며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유교 등은 이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토착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에 대한 귀의라기보다는 물신 숭배가 신앙의 양식이 되어버렸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 지향성과 강력한 친화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 나라를 상품 사회로 만드는 데 그다지 아려움이 없었다. P 42-3



 

결국 이런 부에 대한 탐욕과 쾌락적인 자본주의가 권력과 만나 우리 사회의 온갖 부패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단 부를 이루면 그것이 최고이고, 그 부를 이루려는 목적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이고, 그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에게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 바로 기복사상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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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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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영화이고, 인디영화적 성향이 강해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성장영화 중에서 [18: 우리들의 성장 느와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열여덟의 고교생들의 성장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 동도(이재응)는 작은 키와 찌질한? 외모로 인해 항상 소외감을 느끼고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은 반에서 잘 나가는 현승(차엽)과 친구가 된다. 커다란 덩치와 시원시원한 성격의 현승은 동도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에게 잘 대해주며, 현승의 친구 무리에 들게 한다. 그러나 모두들 동도를 친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현승의 친구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동철(이익준)은 현승을 여전히 자신들보다 아래 단계로 보고, 그에게 빵 심부름을 시킨다. 이 일로 현승과 동철 사이가 갈라지고, 결국은 주먹다짐까지 하게 한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줄거리가 모두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영화를 본 후 오랜동안 어린 시절의 추억과 친구에 대한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인상 깊은 영화였다.


 

 

 

미나코 가나에의 [리버스]를 읽고 이 영화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미나코 가나에라는 작가의 명성과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한 추리소설 정도로 생각하고 읽은 이 소설은 읽은 후에도 계속해서 여운이 감도는 영화이다.


주인공 후카세는 평범하다 못해,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학창시절에도 거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가끔씩은 반에서 따돌림까지 당했다. 그나마 공부를 잘 해서 도쿄에 있는 일류대학에 와서 동아리에서 4명의 친구를 사귄다. 그들 역시 모두 잘 나가는 친구들이다. 야구부 주장이며 리더격인 다니하라, 의원인 아버지를 두고 돈을 물쓰듯이 쓰는 무라이,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에 열중하는 아사미, 그나마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히로사와뿐이다. 후카세는 동아리 중에 3명은 잘 나가는 친구들이고, 히로사와와 자신은 소외된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졸업을 앞 둔 어느 날 무라리의 별장으로 여행을 가고, 저녁에 술을 마신다. 술을 못 먹는다는 후카세가 비난을 당하자 히로사와는 후카세를 보호하기 위해 못 먹는 술을 마신다. 그리고 늦게 온 무라리를 마중나가기 위해 등떠밀리듯이 혼자 운전을 하게 된다. 결국 히로사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운전 중에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 후 3년이 흘러 나머지 세 친구들은 모두 좋은 직장에 취직했지만 후카세만이 변변치 않은 복사기 업체에 취직을 했다. 그나마 찾아 온 행운은 미호코라는 미모의 아가씨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미호코 앞으로 의문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미호코는 이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고, 결국 후카세는 3년 전 사건을 모두 털어놓는다. 자신을 이해할 줄 알았던 미호코는 차가운 표정이 되어 후카세를 떠난다. 그리고 다른 세 친구들에게서 같은 편지가 도착한다. 심지어 아사미는 지하철에서 떠밀려 죽을 위기까지 겪는다. 후카세는 과연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기 위해 히로사와의 고향집과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친구의 본 모습을 알아간다.


후카세는 히로사와를 알아갈 수록 그가 대단한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종 운동에 소질을 보이고, 야구는 거의 선수급이었다. 커다란 덩치와 공부실력으로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좋아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보면 그를 보호하며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낮은 단계로 내려가 친구가 되기에 상대는 히로사와가 자신과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알게 된다.


후카세는 히로사와가 동정심 때문에 자신과 친구가 되어 주었고 생각하고, 자신과 같은 급이었다고 생각하던 히로사와가 사실은 주변에서 인정을 받는 잘 나가는 친구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히로사와의 동정심으로 친구가 된 또 다른 자신과 닮은 친구를 만나게 된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같은 무리끼리 어울려 다니고, 약한자를 따돌리는 경향이 매우 강한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비열한 습성을 우리가 일본에게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 점점 더 사회나 학교가 각자 등급을 나누고 약한자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이 소설은 이런 일본의 학교 분위기와 사회 분위기를 예리하게 잘 담고 있는 소설이다. 과연 히로사와는 후카세의 진정한 친구였을까? 아니면 단지 동정심으로 만난 친구였을까?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예리한 시각에 놀라움을 느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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