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컸다


휴가 다녀와서 밀린 일을 하다보니 잠이 모자랐나보다. 컨디션이 나쁠때마다 재발하는 비염이 유난히 심했다. 게다가 에어컨으로 인한 냉방병이 겹쳤다. 작년 봄 알레르기성 비염이라는 판정을 받은 이후 한번에 약 1달치 약을 받아서 증상이 나타날때마다 약을 먹었다. 대략 3~4달 정도 동안 먹으면 약이 다 떨어지곤 했으니, 3~4일에 한번씩 비염 증상이 나타난 셈이다. 암튼 올해는 초봄에 1달치 약을 받아 지난 달 말에 다 먹었으니 약 5달 걸렸다.


비염 증상이 심한데, 약이 없어 병원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 할일을 점검하고,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면서 기다렸다. 마침내 차례가 다 와서 진료실 앞 대기의자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자리를 옮겼는데, 대기의자 옆에 놓인 체중계에 눈길이 갔다. 최근 운동을 다시 시작했는데, 체중이 얼마인지 궁금했다. 이건 체중 뿐 아니라 키도 잴 수 있는 것이었다. 신발을 벗고 발 모양에 올라서서 허리를 쭉 펴고 머리를 뒤쪽 막대에 갖다 댔다. 위에서 바가 내려오더니 내 머리를 탁 치고는 멈췄다. 내려서서 숫자를 봤다. 체중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늘었다. 음 휴가때 하도 잘 먹었던 게 아직 영향을 미치는 듯. 그리고 키를 보니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키를 쟀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으로는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때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높이에 살짝 못 미치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내가 늘 생각하는 높이를 살짝 넘겼다. 당시와 비교해보니 약 0.7 센티미터 컸다.


그러고보니 약 1달 반 전에 몇몇 사람들과 담배를 피우다 키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날은 두레생협 이사를 도와주고 손을 다친 날이었다. 이사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두레 이사장님이 식사와 술을 대접했고, 같이 짐을 옮겼던 사람들과 함께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이 나보고 키가 커서 부럽다 했고, 나는 평소 그 형이 나와 비슷하거나 더 크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이 이상하다 여겼다. 그런데 그날 처음 만난 친구가 쓱 보더니 내가 더 크다고 말해줬다. 서로 숫자를 말했는데, 그 형이 내 키를 의심하면서 내가 그 정도 밖에 안되면 자기는 더 작다는 소린데, 아닐거라고 했다. 처음 만난 친구도 "에이 형님이 잘못 알고 계시겠죠. 더 커보이시는데요." 라고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20년 넘게 키를 재본 적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 확인해보니 당시 그들의 말이 맞았다. 비록 얼마 차이나지는 않지만, 그 기준이 되는 숫자는 간신히 넘겼다. 이게 20대에 큰 것인지, 30대에 큰 것인지 모르겠지만(설마 40대가 넘어서 키가 큰 것은 아니겠지?) 조금 더 키가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스내치에 미치다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액션영화를 보거나, 공포영화를 보곤 했다. 요즘은 운동하는 영상을 찾아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데, 특히 스내치 영상을 찾아 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스내치에 빠진 건 재작년부터다. 크로스핏에 관심을 두고, 우리동네 크로스핏 전용 체육관을 알아봤다가 가격 때문에 낙심하고, 비교적 저렴한 핏니스센터에 등록해 동영상으로 배워가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결혼 전에는 나름 이것저것 운동을 했었는데, 결혼 후에는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했다. 해마다 근육은 탄력을 잃어갔고, 배는 늘어졌다. 새로 배우는 크로스핏은 무척 재밌었다. 어렸을 때 약수터에서 돌로 된 역기로 인상과 용상을 배워 들어올리곤 했었는데, 다시 역기를 제대로 공부하게 된 셈이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얼마나 기초가 안 되어 있는지, 내가 얼마나 체력이 약한지를 깨달았다. 당시 수많은 동영상을 검색해가면서 자세를 익혔는데, 인상적인 영상이 하나 있었다. 어려보이는 날씬한 여성이 무거운 바벨로 스내치를 하는데, 크게 힘들어하지 않으면서 연속으로 30개를 해내는 영상이었다. 그걸 보고 좀 충격을 받았다. 어렸을 때 역기를 처음 배웠을 때도 나는 용상(clean & jerk) 보다 역기를 한번에 들어올리는 인상(snatch) 를 더 좋아했다.


그 영상을 본 이후로 목표를 정했다. 그 여성이 들었던 무게로 30번 연속 들어올리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아저씨가 되어버린 내 몸은 어려운 스내치 동작을 쉽게 익히지 못했다. 오랜 시간동안 운동과 담쌓고 지낸 탓에 몸이 다 굳어 버렸고, 체력도 젊은 시절 같지 않았다. 그래도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 스내치를 잘 하기 위해 스퀏(squat), 오버헤드 스퀏, 데드리프트(deadlift) 등도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제대로 성과를 내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다쳤고, 이후 몇 달간 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 다음해, 그러니까 작년 늦봄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급하게 스내치에 집착하지 않고, 스퀏과 데드리프트로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나갔다. 이 전략은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다. 어느날 스내치를 해봤는데, 죽어라 연습하던 때보다 훨씬 부드럽게 자세가 나왔다. 다시 몇 주간 힘을 키워서 마침내 그 여성과 같은 무게에 도전해봤다.


결과는 연속 10회에서 멈췄다. 더 할 수는 있었지만, 힘이 모자라서 자꾸 자세가 흐트러졌다. 억지로 나쁜 자세로 횟수를 늘리는 건 나 같은 초급자에게는 썩 좋지 않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마 억지로 했다면 15회에서 20회 사이 정도까지는 들어올렸겠지만, 무리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 여성처럼 제대로 된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30개를 들어올릴 수 있을 체력을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운동에 재미를 붙일 즈음 이번에는 일이 바빠져서 운동을 할 여유가 없어졌다. 한동안 정신없이 바빠 운동은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다. 


그리고 올해 운동을 다시 시작한 지 3년 차가 되었다. 계속 꾸준히 운동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을 만들어놓은 체력과 몸매는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바벨은 없었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가벼운 맨몸운동과 덤벨운동은 가끔씩 해왔다. 그리고 작년에는 케틀벨도 구입했다. 작년에 다니던 핏니스센터에는 케틀벨이 없었고, 수차례 구매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벨도 낡은데다 수량이 부족했고, 정리운동에 필요한 케틀벨과 로잉머신도 없었지만, 빈 공간이 전혀 없이 머신만 잔뜩 차지하고 있는 다른 곳과는 달리 비교적 넓은 프리웨이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거길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직장인을 그만두고 다시 활동가의 삶을 선택하면서 몸은 더 바빠졌지만, 수입은 반토막이 났다. 고정수입이 줄어드니 경제사정이 확 나빠졌다.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과 먹고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이 이렇게 많이 드는지 몰랐다. 올해 계속 핏니스센터를 등록하려고 맘 먹었다가도 그냥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최대한 버티다보니 어느새 8월이 되었다.


올해에는 과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스내치 연습을 안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대신 요즘은 다양한 스내치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 낙이다. 올림픽 경기 장면, 크로스핏 체육관의 연습 장면, 크로스핏 대회 장면 등 찾아보면 수많은 영상이 있다.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첫날인 월요일 아침부터 회의가 있었다. 일요일 밤, 휴가가 끝난 것이 아쉬워 술이라도 한잔하고 자고 싶었지만, 내일 아침 회의 준비 때문에 두세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세상일이 다 싫고 귀찮고 막 짜증이 났다. 그래서 스내치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보다가 한 영상을 발견했다. 여러명의 여성 크로스핏터들이 스내치와 클린 앤 저크와 데드리프트를 성공하는 장면을 모은 것이다. 출연하는 여성은 대략 10여명, 체육관도 다양한 것 같았다. 분량이 상당했다. 날씬하거나, 몸집이 좋거나, 어리거나, 나이가 든 여성들이 가볍거나 무거운 바벨을 힘겹게 들어올려 간신히 성공하는 장면들이었다. 그 성공의 기쁨이 묻어 있는 표정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주위에서 박수를 쳐주거나 축하해주는 모습들도 담겨있었다. 마치 내가 목표를 이룬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잠자기 직전 또 발견한 영상은 러시아의 케틀벨 스내치 대회 영상이었다. 10분동안 케틀벨로 스내치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을 가리는 대회였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성들이 참가했는데, 케틀벨을 들어올리는 속도가 장난아니게 빨랐다. 우승한 여성은 10분이 채 되기 전에 200개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크기만 보고 무게가 얼마 안되겠지 생각했다. (러시아 케틀벨은 무게가 달라도 크기는 똑같고, 미국 케틀벨은 무게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그런데 영상을 다시 돌려보니 아니었다. 상당한 무게였다. 이 영상을 보면서 바벨 스내치 뿐 아니라 케틀벨 스내치도 무척 매력적인 운동으로 느껴졌다.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두번째 목표는 케틀벨 스내치를 같은 무게로 10분 안에 200개를 채우기. 아마 이 목표는 더 시간이 오래걸리지 싶다. 일단 케틀벨 스내치를 배워서 익혀야 하고, 그 무게를 들 수 있을만큼 힘을 키워야하고, 10분에 200개를 들 수 있을만큼의 힘과 기술을 익혀야 한다.


아, 갈길이 멀다. 하루라도 빨리 바벨 스내치와 케틀벨 스내치를 마스터하고 싶다. 내일이라도 당장 일터 가까이 있는 핏니스센터에 등록해야겠다.


도움이 될만한 책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두 책의 표지에 케틀벨이 나온다. 역시 요즘 대세는 케틀벨 운동인가? [강한 것이 아름답다] 를 다시 읽으면서 케틀벨 데드리프트를 새로 배워 익혔다. 예전에는 데드리프트를 하고 싶어도 바벨이 없는 집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는데, 이 책 덕분에 요즘 케틀벨로 데드리프트를 하고 있다. 다만 케틀벨이 하나 밖에 없어서 점점 무게를 올려가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다시 핏니스센터에 등록하면 [남자는 힘이다] 에서 강조하는 운동들로 차근차근 기초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스퀏, 데드리프트, 오버헤드 스퀏, 푸쉬 프레스 등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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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8-06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도전하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는 건 부러울 만큼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저는 걷는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십 년쯤 된 것 같아요.) 이것으로 부족한 것 같아
인터넷으로 철봉을 사서 집에 설치를 했어요. 실내에서 오다가다 한 번씩 철봉에 매달리려고요.
화장실에 갔다가 한 번 하고 밥 먹고 나서 한 번 하고 청소하기 전에 한 번 하고... 이런 식으로 하려 했어요. 그러면 팔 힘도 기르고 건강에도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테니스 엘보 라는 병에 걸리고 말아서
스톱 했어요. ㅋ 병원에 다니면서 얼마나 속상하던지... 그러나 팔이 나으면 저도 철봉에
도전하고 싶어요.

님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하겠습니다. 목표 달성 하시면 글 올려 주시는 것, 잊지 마세요. ^^

감은빛 2015-08-06 23:39   좋아요 0 | URL
네 문틀에 철봉을 달아 턱걸이(pull up)을 하는 건 정말 멋진 방법이예요.
다만 철봉의 안전성 문제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죠.
저는 한 5년쯤 전에 견고하게 고정해놓은 철봉에서 턱걸이를 하다가
철봉이 떨어지면서 발을 다친 적이 있거든요.

제가 pek0501님의 상태를 잘 모르지만,
턱걸이 운동이 힘드시다면,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push up)을 하셔서
먼저 기초 체력을 키우시길 권합니다.

턱걸이는 제법 어려운 운동이죠.
기초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더욱 힘든 운동입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5-08-0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합니다!

저도 한달전쯤 케틀벨 샀어요. 전신 운동에 짱이라고 해서요. 저는 [다이어트 진화론]을 읽고 구매를 결심했었죠. 지금은 손놓고 있지만, 조만간 다시 시작할 거에요.
우리 함께 열심히 해봅시다, 감은빛님!!

감은빛 2015-08-06 23:4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벤치에 케틀벨까지~
이제 곧 몸짱 되시는 거 아닌가요? ^^

응원 고맙습니다!
우리 함께 열심히 해봐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5-08-07 08:19   좋아요 0 | URL
벤치는 제 방에서 치운 지 오래에요. -_-
케틀벨도 먼지가 쌓이고 있...Orz

제가 다음주에 휴가인데, 휴가 끝나고부터 다시 시작할까 해요. -0-

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8-0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움직이기 싫어하고 운동을 싫어하는 저로서는 놀라울 따름입니다~ㅎㅎ
전 초등학생 때부터 체육 시간이 제일 싫었으니...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노년의 건강이 걱정되긴 하면서도, 어디서부터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솔직히 케틀벨이라는 것도 처음 들었네요.
쉽진 않겠지만, 뭔가 맞는 운동을 찾아서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은빛님의 운동 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응원합니다 ^^

감은빛 2015-08-06 23:43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케틀벨은 아주 오래된 효과적인 운동기구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서야 주목받고 있지만요.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라도 해서 몸을 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래 건강을 유지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맘님도 이제부터라도 가벼운 운동부터 시도해보세요. ^^

종이달 2022-08-19 0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건망증


#1

아이들 튜브를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고향집 부모님께 혹시 창고에 있는지 여쭤봤다. 없다고 답이 왔다. 해마다 휴가를 고향에서 보내기 때문에 늘 두고 왔었는데, 작년에는 갖고 왔었던가? 그렇다면 집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건데, 대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곳들을 다 뒤졌는데 없다.


포기할 때 즈음 책장 위에 놓인 비닐봉투가 뭔지 살펴봤다. 이런! 튜브 두 개가 그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왜 나는 작년에 튜브를 가져온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분명 잘 놓아둔다고 책장 위에 뒀을텐데,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2

스마트폰을 2년 반 넘게 썼더니, 속도가 엄청 느려지고, 발열이 심하다. 뭐 별걸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메일 확인하고, 페이스북 조금 들여다봤는데, 열이 47도를 넘어선다. 뜨거워서 쥐고 있기도 힘들다. 아무것도 안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닐때도 갑자기 뜨거워지곤 한다. 게다가 배터리도 엄청 빨리 닳는다.


중요한 문자나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면 꼭 엄청 느려지고, 가끔 키패드가 아예 눌러지지 않는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중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빠르게 카톡을 주고 받고 있는데, 갑자기 느려지더니, 아무리 눌러도 글자가 써지지 않는다.


그래도 약정한 2년이 지난 후로는 전화요금이 1만원 가량 내려가서, 웬만하면 좀 더 버텨보려고 했는데, 키패드가 먹지 않는 스마트폰은 무용지물이란 생각에 결국 새 폰으로 바꿨다. 다시 전화요금이 1만원 이상 비싸졌다.


공인인증서를 새 폰으로 옮기려는데, 자꾸 인증서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나온다. 이상하다! 분명 이 번호가 맞는데, 왜 안되지? 몇 번이고 계속 비번을 눌렀는데, 끈질기게 비번은 자꾸 틀렸다고 나온다. 젠장! 그러다 결국 인증서가 폐기되었다. ㅠㅠ


인증서를 새로 받으려면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있어야 한다. 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젠 어떻게 해야하나?


#3

어느날부터 나는 더이상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꼼꼼하게 메모를 하고, 휴대폰에 알람을 걸어둔다. 그러고도 바쁜 일정에 쫓기다보면 뭔가 놓치는 일이 꼭 생긴다. 왜 꼭 그런 일은 퇴근하려고 컴퓨터를 끄고나면 생각나는걸까? 왜 꼭 사무실을 나와 몇 발 걷다가 생각나는 걸까? 왜 꼭 버스를 타고나면 생각이 나는 걸까? 다시 돌아가서 컴퓨터를 켜고 처리하고 나와야할까 아니면 내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들고, 오늘 하루도 참 바쁘게 열심히 일했구나 생각하며 나름 성취감을 느끼다가 곧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우리나라 대표과일의 미래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기후변화 강의를 했다. 아이들 대상으로는 몇 번 해봤는데, 어르신들은 처음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재밌고 적절한 예를 잘 찾으면 반응이 무척 좋았다. 올해 초 동네 작은도서관에서 연속 강의를 들었던 아이들의 경우, 첫 강의 이후 집에가서 나름대로 많은 실천들을 했다. 한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자발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위해 변기위 물통에 1.8리터 물병에 물을 채워 집어넣고, 대기전력 차단을 위해 안 쓰는 콘센트를 빼는 걸 보고, 훌륭한 강의를 만들어준 도서관 후원회비를 대폭 늘려 내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이번에 어르신들께는 어떻게 흥미를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평범한 강의자료를 만들었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강의 당일까지 자료를 완성하지 못했다. 강의 시간은 다가오고, 머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검색하다가 농촌진흥촌에서 발표한 기후변화 예상 시나리오를 접했다. 우리나라 6가지 대표과일의 재배가능 지역이 기후변화가 진행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예측한 것이었다.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놀라웠다.


모두 다 넣기에는 방대하기 때문에 가장 대표적인 과일이라 할 수 있는 사과와 배의 시나리오만 자료에 집어넣었다. 간신히 강의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르신들의 반응이 좋았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질문도 던지고, 여유있게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나중에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있다고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내가 정말 깜짝 놀랐기 때문에 어르신들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강의 막바지에 사과와 배 재배가능지역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기후변화가 계속 진행한다면, 불과 30년 후인 2030년이 되었을 때 사과 재배가능 지역은 크게 줄어들 것이며 대표적인 사과 재배지역인 대구 경북에서는 재배는 가능하겠지만, 지금처럼 맛있는 사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30년이 지나 2060년이 되면 우리나라에서 사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거의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르신들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상에 사과와 배를 기대하시면 안된다고 했다. 손주 손녀가 사과, 배를 구하지 못해 제사상에 올리지 못해도 이해해주셔야 한다고 설명했다.


어르신들도 제법 충격을 받으셨는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셨고, 마침 그때 소장님도 들어와서 강의를 듣다가 매우 집중하는 모습을 봤다. 강의를 마치고, 소장님께서 신분증과 통장을 복사하면서 보통 어르신들이 집중력이 떨어져서 강의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데, 참 재밌게 잘 하셔서 어르신들도 집중하시더라고 고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두어달 후에 또 강의를 잡을 예정인데, 다시 와달라고 했다.


비록 강의료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어려운 상황에 보탬이 되고, 또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 절박한 문제를 설명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난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 오래전 학원 강사 시절이 생각났다. 그땐 사교육 시스템에 복무하며, 재미도 없는 학교 교과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늘 아이들과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아이들이 최대한 재밌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도 어르신들이 관심 가질만한 포인트를 잘 잡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책 이야기











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이 두 책은 일단 귀엽다. 작은 판형에 책의 디자인과 일러스트가 정말 귀엽다. 하지만 내용은 다소 무겁다. 세계적인 환경잡지 [더 에콜로지스트]에 연재했던 내용 중에 음식과 패션에 대한 내용을 각각 책으로 엮었다. 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열심히 읽고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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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2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마트폰 사용 2년 반이라면 상당히 오래 쓰신 겁니다. 폰의 성능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새 걸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제가 지금 쓰는 폰도 30분 이상 잡으면 열이 생겨서 요즘같이 더운 날에는 오랫동안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감은빛 2015-08-03 15:20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안녕하세요. 휴가 다녀오느라 답이 좀 늦었네요.
저도 지난 폰은 제법 오래 썼다고 생각해요.
그 전에 쓰던 폰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액정이 깨져버렸거든요.
여름이 되니 이상하게 발열이 심하더라구요.
한 5분 이상 쓰면 뜨거워지고, 경고 메시지가 떠요.
근데 메신저 한번 켜면 10분 이상은 들여다보게 되니 말이죠.
 


월요일은 피곤


월요일 아침 회의는 힘들다. 지난 금요일에 회의자료를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채 퇴근했더니, 주말 내내 회의자료를 걱정했다.  토요일 낮에 잠시 시간내서 정리를 할까 싶었지만, 곧 다른 일을 하다가 잊어버렸고, 일요일 아침에도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노느라 잊어버렸다.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회의자료를 만들어야지 하고 컴퓨터를 켰지만, 진짜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기가 너무 싫었다. 결국 잠시 웹서핑을 하다 컴퓨터를 끄고 누웠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해야지 생각했지만, 알람이 울렸을 때, 또 너무 일어나기가 싫었다. 자료를 준비하지 않으면 회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억지로 일어났다.


컴퓨터를 켰는데, 자다 깨서 멍한 상태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일단 먼저 씻고 준비한 후에 다시 책상 앞에 앉으니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빠듯했다. 다 만들어서 메일로 보내놓고 나니 바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간신히 회의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새벽부터 그 난리를 치고 나니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았는데, 정말 피곤하다. 이번주도 할일이 태산이건만 난 벌써 일주일을 다 산 느낌이다. 아~ 진짜 월요일이 싫다! 



박래군을 석방하라!


[석방탄원서] 박래군을 풀어주십시오!


재판장님, 법이 정의를 구하기 위해,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박래군은 석방되어야 합니다. 

7월 16일 법원은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자 인권중심 사람 소장인 박래군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우리는 법원의 판단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인신의 구속은 어떤 한 사람의 근원적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그만큼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를 가두지 않고서는 중대범죄의 발생을 막을 수 없을 만큼의 사정말입니다.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집회가 중대범죄인 것입니까? 참사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모두 박래군의 뜻에 따라 집회에 참여했다는 말입니까? 박래군의 구속은 추모와 애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이 여기는 인간의 본원적 심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누구도 박래군의 구속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인권이 석방되어야 합니다. 

박래군은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만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민주주의가 억눌린 시대의 어둠 때문에 동생을 떠나보내야 했던 형이었으며, 같은 아픔을 겪어야 했던 수많은 유가족들의 동료이자 장의사였으며, 모두가 존엄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권침해의 현장을 뛰어다니는 활동가이자 수많은 피해자들의 든든한 벗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인권이 침몰하는 현장에서 인권을 구해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는 다른 현장에서 구속되어야 했습니다. 평택 대추리에서, 용산 재개발구역에서, 그리고 이제 세월호에서. 미군기지와 개발의 문제에 대한 성찰로부터 평화적 생존권과 주거권이 모두에게 소중한 인권의 목록으로 확인된 현장입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역시 이렇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4.16은 석방되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미수습자, 희생자의 가족, 피해생존자들만 겪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겪고 있는 참사이며, 세계 시민들이 여전히 주목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사람이 이다지도 무참하게 죽어갈 수 있음을 목격해버린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미안함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울 때에만 우리도 사람답게 살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됐습니다. 수많은 생명을 물속에 가두고, 울부짖는 가족들에게 보상이 더 필요하냐며 모욕하고, 이젠 잊으라며 내몰아대는 사회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흩어질수록 우리의 생명과 안전이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우리는 여전히 모이고 말하고 행동하기를 약속합니다. 그것이 범죄라면 우리 모두를 잡아가십시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우리를 가둔 감옥을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재판장님, 박래군을 풀어주세요. 진실과 안전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한 발도 물러설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4.16연대) -


서명해주세요!

아래 주소로 가셔서 필수항목을 적어주시면 됩니다!

(몇 초 걸리지 않습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105zXpV89TdY_XgYT07btxrS3YRGW9DtyFXzBrzjNH1Y/viewform?c=0&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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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7-2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명하고 왔습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동참하셔서 힘이 되어주시길 빌어 봅니다.

감은빛 2015-07-20 13: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단발머리 2015-07-20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명하고 왔습니다. 한숨나오는 이 세상...

감은빛 2015-07-22 21: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정말 어쩌려고 이러는지 원! ㅠㅠ

chika 2015-07-2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했습니다. 작은힘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은빛 2015-07-22 21:18   좋아요 0 | URL
치카님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5-07-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명도 하고 카페 2곳에도 올렸어요~
감은빛님 너무 피곤하실 것 같아요 ㅠㅠ 힘내세요!

감은빛 2015-07-22 21:19   좋아요 0 | URL
아른님, 널리 알려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제도 새벽까지 잠 못자고, 오늘 또 야근 중인데,
아른님의 말씀에 힘이 납니다!

2015-07-21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2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5-07-2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무겁습니다... 늦은밤 이 소식을 듣고.... 법관은 무슨... 개*********

감은빛 2015-07-22 21: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법관은 무슨! xxxxx 같으니라구!

나와같다면 2015-07-25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아침.. 경향신문 커버스토리 박래군님 기사보고 있습니다..

감은빛 2015-08-03 15: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휴가 다녀오느라 답이 늦었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기사 나중에 찾아봐야겠어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평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군기지확장반대 투쟁 현장에서였다. 뭔가 행사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먼 발치에서 아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몇몇 활동가들과 담배를 피면서 대화하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가 크게 웃었는데 그 선한 웃음이 참 좋았다. 나중에 점점 알게되었지만, 그는 인권운동, 평화운동 등에서 많은 활동을 하며, 이미 존재감이 큰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박기범의 [문제아]를 읽고, 그가 박래전 열사의 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동생을 가슴에 묻고, 동생이 가고자 했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형이라는 느낌. 그의 등에서는 불의에 굽히지 않는 강한 의지와, 긴 세월 쌓여온 여러 슬픔들이 느껴졌다. 평택, 용산, 강정, 광화문 등 힘없고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곳에 늘 그가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늘 함께 볼 수 있었던 송경동 선배도 얼마전 구속될 뻔 했으나, 다행히 풀려나왔다. 당시에도 설마 송경동을 구속시키기야 하겠어? 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 정권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불안 또한 컸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한번 비슷한 일을 겪으면 그만큼 기대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 박래군 선배와 김혜진 님의 영장실질심사 소식을 듣고 온라인으로 의견서를 제출할 때에도, 송경동 선배처럼 풀려나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구속 소식을 듣고 좀 충격을 먹었다.


죄가 있다면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세력에게 있겠지, 어떻게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죄가 있단 말인가? 이게 법인가? 이따위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이 나라의 법 질서를 책임지는 기관인가? 


하필 오늘이 제헌절이다. 헌법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이따위 결정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박래군은 무죄다! 당장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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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8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0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0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2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3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목요일은 탈핵 캠페인으로 시작해서 탈핵 캠페인으로 일과를 마무리 한 날이다. (늘 그렇듯 하루의 마무리는 술로 했다.)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나와서 지하철 역에서 캠페인을 하고 출근했다. 한 명은 방독면 모양 탈을 쓰고 피켓을 들고 서 있었고, 나는 전단지를 나눠줬다. 탈이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눈에 확 띄었다. 짐작은 했지만 바쁜 출근길이라 사람들은 전단지를 잘 받지 않았다. 그래도 1시간 동안 가져온 전단지는 다 나눠줬다. 저녁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는 녹색당 목요 탈핵 캠페인에 참가했다. 영덕 신규 원전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퇴근길 시민들에게 영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하나 골라 스티커를 붙여 달라는 주문을 했다. 셋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는데, 1번은 영덕대게이고, 2번은 아름답고 깨끗한 바다, 3번은 원자력발전소였다. 투표해달라는 요청에 여성들과 청소년들은 많이 응해주셨지만, 성인 남성들은 거의 무시하고 지나갔다. 세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분들이 투표해주셨고, 단 두 표를 빼면 모두 원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두 표는 영덕대게에게 갔다. 아무래도 영덕에 어울리지 않는 것에 투표한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을 고른 건 아닐까?


그날은 매우 더운 날이었다. 아침부터 더웠는데, 탈을 쓰고 있었던 친구는 진짜 엄청 땀을 흘렸을 것이다. 저녁에도 어마어마하게 더웠다. 활동가들은 눈에 띄기 위해 동물 옷을 입고 있었는데,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그 더위에 벗지는 못할 망정 두꺼운 동물옷을 더 껴입어야 한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원전에 관대할까? 왜 핵발전소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날 아침과 저녁 모두 원전을 옹호하는 입장에 있는 어르신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이유는 없다. 그냥 무조건 필요하단다. 지금 전기가 남아 돌고 있고, 1년에 30% 가량 가동하지 못하고 놀고 있는 발전소도 많은데, 왜 핵 발전소를 더 지어야 하는지 이유도 대지 못하면서 무조건 더 지어야 한단다. 아마도 세뇌를 많이 당해서 그렇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뇌당해서 진실을 모르는 그들이 더 불쌍할까? 진실을 알고 답답하고 무력한 상황에 놓인 내가 더 불쌍할까?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한 네오가 더 불쌍할까?


지난 6월 초 정부가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산업통상자원부와 전력거래소가 2년마다 만드는 것으로 신규 발전소 건설과 송배전 선로 건설 등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획이다. 이번 7차 계획의 핵심은 신규 핵발전소 2기를 건설하는 것이다. 현재 이 나라에는 24기의 원전이 가동중이고, 건설중이거나, 계획중인 것이 11기이다. 그리고 이번에 2기가 추가되었다. 만약 7차 계획대로 간다면 이 나라의 핵발전소는 37기가 된다. 아, 고리1호기를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니, 36기가 되는구나.


문제는 신규 원전 2기를 추가하기 위해 정부가 전력 수요를 뻥튀기해서 예측했다는 점이다. 7차 계획에서 정부는 해마다 전력사용량이 2.2%씩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과도한 수치다. 지난 2011년 이후로 전력사용량 증가률이 해마다 줄어들었으며, 작년에는 0.6% 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앞으로 전력사용량은 거의 증가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정부는 해마다 2.2%씩 층가한단다. 게다가 전력예비율도 과도하게 책정했다. 정부 입장에선 원전을 더 짓기위해 일부러 수요를 과도하게 예측하고, 전력예비율도 과도하게 설정할 것이겠지. 


우리는 전기 없이 살 수 없을만큼 수많은 가전제품을 쓰고 있지만, 정작 그 전기를 어떻게 생산해서, 어떻게 우리 집으로 오는지는 잘 모른다. 특히 국가차원에서 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전력수급기본계획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 그 말을 들어본 사람 자쳬가 숫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지역에서 7차 계획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홍보가 늦어져 많이 못 올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오셨다. 그리고 더 많은 분들과 그날의 논의 내용을 나누기 위해 지역시민신문에 토론회 기사를 쓰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바쁜 일상을 살다 보니, 며칠을 그냥 지나갔다. 오늘 낮 편집장님께 원고 예기가 나왔다. 늦어도 일요일 오후에는 보냈어야 할 원고였다. 최대한 빨리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좀처럼 글 쓸 짬이 나지 않았다. 


결국 아이들을 재워놓고 12시가 넘어서서 쓰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나니 시간이 3시가 넘었다. 책 소개 원고 하나를 마저 쓰고 맥주 한 잔 마신다. 내 허접한 글이 단 한명에게라도 더 전달되어 관심 갖는 사람이 더 생기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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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7-14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도 탈핵 캠페인 하신다니 반가워요~
저희지역에서도 매주 수요일마다 풀꽃세상. 녹색연합분들과 함께 캠페인하고있고 탈핵모임에서도 한달에 한번씩 피켓들고 있자 계획세우는 중이거든요
연극하셨던 활동가님과 같이 의상 마련해 퍼포먼스도 할 계획이라 앞으로 더 재밌어질 것 같아요^^
약자들의 눈물로 만들어지는 전기...후손에게 처치불가 핵쓰레기만 남기고 핵마피아들만 배불리는 핵발전소 빨리 없어지길! 감은빛님도 늘 힘내세요~

감은빛 2015-07-17 16:57   좋아요 0 | URL
아른님, 안녕하세요.
지난 번 탈핵시민행동 포스터 때에도 무척 반가웠는데,
이번 글에 대한 댓글도 정말 반갑습니다!

어제 목요일에도 저는 사정상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시간을 내어 출근길, 퇴근길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우리 서로 각자의 지역에서 힘냅시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