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1

아이들 튜브를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고향집 부모님께 혹시 창고에 있는지 여쭤봤다. 없다고 답이 왔다. 해마다 휴가를 고향에서 보내기 때문에 늘 두고 왔었는데, 작년에는 갖고 왔었던가? 그렇다면 집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건데, 대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곳들을 다 뒤졌는데 없다.


포기할 때 즈음 책장 위에 놓인 비닐봉투가 뭔지 살펴봤다. 이런! 튜브 두 개가 그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왜 나는 작년에 튜브를 가져온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분명 잘 놓아둔다고 책장 위에 뒀을텐데,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2

스마트폰을 2년 반 넘게 썼더니, 속도가 엄청 느려지고, 발열이 심하다. 뭐 별걸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메일 확인하고, 페이스북 조금 들여다봤는데, 열이 47도를 넘어선다. 뜨거워서 쥐고 있기도 힘들다. 아무것도 안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닐때도 갑자기 뜨거워지곤 한다. 게다가 배터리도 엄청 빨리 닳는다.


중요한 문자나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면 꼭 엄청 느려지고, 가끔 키패드가 아예 눌러지지 않는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중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빠르게 카톡을 주고 받고 있는데, 갑자기 느려지더니, 아무리 눌러도 글자가 써지지 않는다.


그래도 약정한 2년이 지난 후로는 전화요금이 1만원 가량 내려가서, 웬만하면 좀 더 버텨보려고 했는데, 키패드가 먹지 않는 스마트폰은 무용지물이란 생각에 결국 새 폰으로 바꿨다. 다시 전화요금이 1만원 이상 비싸졌다.


공인인증서를 새 폰으로 옮기려는데, 자꾸 인증서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나온다. 이상하다! 분명 이 번호가 맞는데, 왜 안되지? 몇 번이고 계속 비번을 눌렀는데, 끈질기게 비번은 자꾸 틀렸다고 나온다. 젠장! 그러다 결국 인증서가 폐기되었다. ㅠㅠ


인증서를 새로 받으려면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있어야 한다. 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젠 어떻게 해야하나?


#3

어느날부터 나는 더이상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꼼꼼하게 메모를 하고, 휴대폰에 알람을 걸어둔다. 그러고도 바쁜 일정에 쫓기다보면 뭔가 놓치는 일이 꼭 생긴다. 왜 꼭 그런 일은 퇴근하려고 컴퓨터를 끄고나면 생각나는걸까? 왜 꼭 사무실을 나와 몇 발 걷다가 생각나는 걸까? 왜 꼭 버스를 타고나면 생각이 나는 걸까? 다시 돌아가서 컴퓨터를 켜고 처리하고 나와야할까 아니면 내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들고, 오늘 하루도 참 바쁘게 열심히 일했구나 생각하며 나름 성취감을 느끼다가 곧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우리나라 대표과일의 미래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기후변화 강의를 했다. 아이들 대상으로는 몇 번 해봤는데, 어르신들은 처음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재밌고 적절한 예를 잘 찾으면 반응이 무척 좋았다. 올해 초 동네 작은도서관에서 연속 강의를 들었던 아이들의 경우, 첫 강의 이후 집에가서 나름대로 많은 실천들을 했다. 한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자발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위해 변기위 물통에 1.8리터 물병에 물을 채워 집어넣고, 대기전력 차단을 위해 안 쓰는 콘센트를 빼는 걸 보고, 훌륭한 강의를 만들어준 도서관 후원회비를 대폭 늘려 내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이번에 어르신들께는 어떻게 흥미를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평범한 강의자료를 만들었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강의 당일까지 자료를 완성하지 못했다. 강의 시간은 다가오고, 머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검색하다가 농촌진흥촌에서 발표한 기후변화 예상 시나리오를 접했다. 우리나라 6가지 대표과일의 재배가능 지역이 기후변화가 진행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예측한 것이었다.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놀라웠다.


모두 다 넣기에는 방대하기 때문에 가장 대표적인 과일이라 할 수 있는 사과와 배의 시나리오만 자료에 집어넣었다. 간신히 강의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르신들의 반응이 좋았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질문도 던지고, 여유있게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나중에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있다고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내가 정말 깜짝 놀랐기 때문에 어르신들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강의 막바지에 사과와 배 재배가능지역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기후변화가 계속 진행한다면, 불과 30년 후인 2030년이 되었을 때 사과 재배가능 지역은 크게 줄어들 것이며 대표적인 사과 재배지역인 대구 경북에서는 재배는 가능하겠지만, 지금처럼 맛있는 사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30년이 지나 2060년이 되면 우리나라에서 사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거의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어르신들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상에 사과와 배를 기대하시면 안된다고 했다. 손주 손녀가 사과, 배를 구하지 못해 제사상에 올리지 못해도 이해해주셔야 한다고 설명했다.


어르신들도 제법 충격을 받으셨는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셨고, 마침 그때 소장님도 들어와서 강의를 듣다가 매우 집중하는 모습을 봤다. 강의를 마치고, 소장님께서 신분증과 통장을 복사하면서 보통 어르신들이 집중력이 떨어져서 강의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데, 참 재밌게 잘 하셔서 어르신들도 집중하시더라고 고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두어달 후에 또 강의를 잡을 예정인데, 다시 와달라고 했다.


비록 강의료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어려운 상황에 보탬이 되고, 또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 절박한 문제를 설명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난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 오래전 학원 강사 시절이 생각났다. 그땐 사교육 시스템에 복무하며, 재미도 없는 학교 교과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늘 아이들과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아이들이 최대한 재밌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도 어르신들이 관심 가질만한 포인트를 잘 잡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책 이야기











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이 두 책은 일단 귀엽다. 작은 판형에 책의 디자인과 일러스트가 정말 귀엽다. 하지만 내용은 다소 무겁다. 세계적인 환경잡지 [더 에콜로지스트]에 연재했던 내용 중에 음식과 패션에 대한 내용을 각각 책으로 엮었다. 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열심히 읽고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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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2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마트폰 사용 2년 반이라면 상당히 오래 쓰신 겁니다. 폰의 성능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새 걸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제가 지금 쓰는 폰도 30분 이상 잡으면 열이 생겨서 요즘같이 더운 날에는 오랫동안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감은빛 2015-08-03 15:20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안녕하세요. 휴가 다녀오느라 답이 좀 늦었네요.
저도 지난 폰은 제법 오래 썼다고 생각해요.
그 전에 쓰던 폰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액정이 깨져버렸거든요.
여름이 되니 이상하게 발열이 심하더라구요.
한 5분 이상 쓰면 뜨거워지고, 경고 메시지가 떠요.
근데 메신저 한번 켜면 10분 이상은 들여다보게 되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