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 난 교사들이 지식인이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대부분의 교사들은 '교사'란 직업인에 머물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애기는 아니다. 하지만 교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무엇을로 규정하냐에 따라 개인의 현재와 미래가 달라진다고 난 생각한다. 최소한 '나의 정체성'은 지식인이자 전문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교과목과 관련없는 이 사회의 역사적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려 한다. 사르트르적인 지식인은 못되러라도 최소한 '쓸데없는 참견과 관심'을 가지려한다.

사르트르, 김예슬, 지식인 

20 세기 지식인들의 지식인이었던 장폴 사르트르(1905~1980)는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를 사유의 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아 고민했다. 1965년 가을 도쿄를 방문한 사르트르는 이 고민의 결과를 세 차례의 강연으로 발표했다. 그 강연문을 묶어 뒷날 펴낸 것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인데, 거기에서 그는 기괴한 지식인관을 제시했다. “지식인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문장은 지식인에 대한 세상 사람들, 특히 지배자·권력자들의 비난을 그대로 옮긴 문장이다. 조용히 학생이나 가르치면 될 선생들이, 조용히 글이나 쓰면 될 작가들이 왜 시국에 관여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가.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끼어들고 간섭하는 이 지식인이란 자들이 문제다. 사르트르는 그런 낙인을 훈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맞다. 지식인은 자기와 무관한 일에 참견하는 자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탄생 순간부터 벌써 그런 존재였다고 말한다.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한복판에서 에밀 졸라가 소설 쓰기를 제쳐두고 “자퀴즈!”(J’accuse!) 곧 “나는 고발한다”고 외치고 나섰을 때, 반드레퓌스 우익세력이 한목소리로 작가가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드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쏘는 순간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탄생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런 지식인을 ‘명성을 남용하는 자’라고도 일컫는다. 전문영역에서 쌓아올린 명성, 말하자면 상징자본을 세상을 바꾸는 데 사용하는 자가 지식인이라는 말이다.

이 사르트르적 지식인을 중심에 두고 지식인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그 앞과 옆에 ‘계몽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이 있다. 사르트르적 지식인의 직계 선조라 할 존재가 계몽적 지식인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스스로 철학자라고 불렀던 지식인들, 곧 볼테르·루소·디드로·달랑베르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로 만들었다. 이들은 중세적 교회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런가 하면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은 사회 계급의 신경 노릇을 하는 지식인이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야말로 그람시적 지식인의 본령이다. 이 세 부류의 지식인은 당대 피억압자를 대신해 그들의 대표자·대변자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바로 이런 의미의 지식인, 대중 위에서 대중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지식인이 죽었다는 풍문이 나돌던 적이 있었다. 대중이 이제 스스로 지식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그런 지식인은 역사의 전면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장해도 좋다는 진단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김예슬씨의 ‘자발적 퇴학’ 사건은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 흔쾌하게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 짓눌려 익사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김예슬씨는 대자보에 이렇게 썼다.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지식인의 고향, 지식인의 태반이었던 대학이 김예슬씨의 말대로 대기업과 대자본의 하청업체가 돼 버린 것인가. 시대는 여전히 지식인을 요청한다. 계몽적 지식인이든 유기적 지식인이든 침묵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사르트르적 지식인의 불온한 기운이 넘쳐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수많은 김예슬들과 함께 ‘불의에 대한 저항’의 꿈을 꾸어야 한다. 대학이 죽은 지식인들의 묘지여서는 안 된다.

한겨레신문 2010.3.23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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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요즘 한창 천암함 사건으로 시끄럽다. 북한이 했네, 선체 결함이네 이유야 어떠하든 그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다 하늘나라로 간 젊은 영혼들은 다시 돌아 올 수 없을 것이다. 그네들 정치인들이야 이 사건을 또다시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이다.   

이상하게 우리 사회는 꼭 큰 사건이 터져서 사람들이 몇십명이 죽어야 '영웅'이되고 성금모금 특집 방송을 하고 그런다. 정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든다. 우선 명확하게 원인 규명이 된 다음 국가가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와 성의 표현을 한 다음 국민들의 뜻을 모을 일이지 벌써부터 성금 모금 방송으로 주말 kbs 방송 분량을 채울 일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든다. 

어쩌면 우리가 정말 관심가져야 할 일은 열심히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자살 문제일 것이다. 우리네가 OECD 가입 국가 최고의 자살률이라는 건 여러 매체를 통해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한 문제는 노년층의 자살률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젊은 층의 자살과 달리 노년층의 자살은 더욱 더 비참하다. 몸이 너무 아파, 먹기 살기 힘들어 정말로...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최소한의 기본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황에서의 자살이 대부분이다.  

사실 우리가 '영웅'이라 불러야 할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공론화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죽음의 욕망 키우는 고령사회 정책

한국 사회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증표가 여럿 있지만, 가파르게 늘어나는 자살만큼이나 뚜렷하게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도 없을 거다. 흔히들 자살률은 십만명당 자살자 수로 따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은 지난 20년간 평균적으로 15명에서 12명으로 자살률이 떨어졌지만, 우리는 유독 10명을 밑도는 수준에서 26명으로 치솟았다. 노인의 자살 증가가 특히 두드러져 같은 기간 15명에서 80명 수준으로 5배가 넘게 늘었다. 75살 이상의 고령 노인만을 보면 자살률이 150명을 넘게 되었으니, 20명대 수준에 몰려 있는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가히 경악할 수준이다. 프로이트는 자살은 삶의 욕망보다 죽음의 욕망이 커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그의 말에 따르자면 한국은 죽음의 욕망을 키우는 데에서 일등 사회가 되었다.

철학자 중에는 자살을 인간의 권리로 옹호한 이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회는 자살에 반대하였고 범죄행위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자살에 대해 우리 사회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자살의 이유에 대한 진단도 엇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생명 경시 태도를 꾸짖는 공개적인 탄식이 있는가 하면, 우울증 등 개인의 심리적 취약성을 들어 수군거리는 뒷말도 들린다. 이렇게 우리는 자살을 개인의 태도나 정신질환 등 타고난 기질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세상의 이런 통념이 가진 허점을 드러내고 자살의 원인을 사회적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젊은 사회에서는 자살이 드물었고, 사회가 해체 위기를 겪는 곳에서 자살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스와 로마, 오스만제국이 모두 쇠퇴기에 자살의 증가를 겪었고, 프랑스 또한 전체주의 체제가 붕괴되던 혁명 전야에 자살이 갑자기 늘었다.

노인 자살 문제로 범위를 좁히면,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강조하는 뒤르켐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치솟는 노인 자살의 이면에는 그들의 아프고 외롭고 가난한 삶이 놓여 있다. 조사 결과를 보면, 노인 자살의 가장 큰 이유로 질병·장애 등 건강상의 문제가 꼽힌다. 거의 모든 노인이 적어도 하나씩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고, 절반 이상이 독립적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노인들은 은퇴와 함께 많은 사회적 관계가 끊기는 경험을 하는데, 그중 3분의 2는 가족과도 떨어져 살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노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단연 1위를 할 정도로 심각한 빈곤을 겪는데, 노인의 절반 가까이가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적 고립의 위험에 놓인 노인들이 겪는 극심한 경제적 궁핍은 가느다란 희망의 끈마저 놓게 하는 치명타가 된다. 빈곤은 생존과 건강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자긍심까지 갉아먹어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리는 몰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앗아가는 노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감증은 대단하다. 모든 선진 산업국가가 연금제도를 통해 노인 빈곤을 해소하였지만, 우리의 국민연금은 그 많은 논란을 거친 뒤에도 3분의 1도 되지 않는 노인에게만 혜택을 주는 제도로 머물러 있다. 빈곤 노인에 대한 생계보장에 대해서는, 별반 형편이 다를 리 없는 자녀들의 부양의무를 내세우며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이제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함께 노인이 인구의 20%를 차지할 때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지만, 노후에 대한 국민의 불안은 정부의 안중에 없는 듯하다. 노인을 외면하는 사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에게 남은 선택이 무엇일지 진지하게 물어볼 때이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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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위, 세운상가 고층 재개발 부결 

» ‘세운녹지축 사업’이란 공식 이름이 붙은 서울시 쪽의 종묘 앞 세운상가 터 재개발 구상도(아래 사진). 공식 이름과 달리 종묘(위 사진·아래 사진의 점선 부분) 위쪽 종로 맞은편 녹지축의 양쪽에 20~30층 높이의 고층건물 단지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어서 세계유산 종묘의 경관을 파괴할 것이란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10대10! 아슬아슬했다. 똑같은 찬성, 반대 표.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 경관 보존에 파란 불이 켜졌다. 지난 14일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사적 분과 합동 회의는 서울시 산하 에스에이치(SH) 공사의 종묘 앞 대형건물 신축 사업 수정안을 과반 미달로 부결시켰다. 종묘 경관 파괴 논란을 불렀던 20층 이상의 고층 건물 신축 계획은 사실상 백지화쪽으로 굳어졌다.

‘수정안’ 곡절 끝 10:10 부결…건물높이 ‘55m 이하’ 견지
낙관하던 서울시·SH공사 당혹 “다시 대안 마련 추진”

공사쪽 수정안은 종묘 맞은편 세운상가터에 신축할 건물 높이를 종묘에 가장 가까운 종로변은 가장 낮은 13층(55m), 더 뒤로 갈수록 18층(77.9m), 25층(87.4m) 등으로 높여 모두 7동의 주상복합건물 단지를 짓는다는 계획이다. 건물 높이가 이전에 냈던 안의 122m~99m보다 대폭 줄었다. 이 문제를 검토해온 문화재위 합동 소위가 옛 세운 상가 건물 높이인 55m(16층) 이상 짓지말라고 권고한 것을 일부분 수용한 것이다.

애초 시쪽은 소위와 나름대로 조율한 수정안이어서 통과를 낙관했다. 그런데 정작 합동회의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사적분과 위원 상당수가 문제를 제기했다. 종묘 정전쪽에서 보면 3층 정도 위쪽으로 돌출되는 신축 건물들의 스카이라인이 여전히 경관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반면 세계문화유산 분과쪽 위원들은 “근처에 다른 고층 건물들이 이미 정면 조망권에 들어오는 현실에서 형평성을 고려해 통과시키자”고 주장했다. 심각한 입씨름 끝에 보기드문 표결이 진행됐고 가부동수로 부결이 선언됐다. 이인규 위원장은 “논란이 치열했으나, 표결 결과에 숙연해졌다”고 전했다.

곡절 끝에 나온 부결 결정은 서울 도심 4대문안 문화재 경관 보존에 새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논란 속에서도 문화재위가 세계유산 경관 보존에 엄격한 잣대를 관철시킨 셈이다. 2000년대 중반 종묘 맞은편 세운상가 철거가 확정되자 서울시쪽은 종묘쪽 건물 층고를 낮추고 그와 먼 쪽을 높인 얼개의 건물 단지 신축안을 짜서 문화재위와 건물 높이를 계속 절충해왔다. 지난해 시와 공사쪽은 9월 36층, 122m 높이의 초고층 건물 계획안을 처음 내어 문화재위쪽의 보완 요구를 받았고, 그 뒤 높이를 110, 106, 99m로 낮춘 수정안을 연말부터 지난달까지 제출했으나 모두 보류된 바 있다. 높이를 조금씩 낮추고 수평적인 건축 면적은 넓히는 방식으로 계속 조율해왔으나, 이번 부결을 통해 이런 협의 과정 자체의 효용성도 빛이 바래졌다는 평가다.

서울시와 공사쪽은 당혹감 속에서도 “사업 중단은 없다. 다시 대안을 골라 추진할 것”이라는 뜻을 밝히고 있다. 어떤 대안일지는 미지수지만, 높이를 소위 권고안의 55m선 안팎으로 더욱 낮추고 수평 건축 면적은 더욱 확대시킨 변형안을 낼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시쪽이 더욱 조건을 완화한 수정안을 내놓을 경우 문화재의 심의 방향이 어떤 양상으로 흐를지도 주목된다.

문화재동네 일각에서는 서울시가 산하 공사쪽에 수익자 부담을 들어 개발 비용을 떠넘기면서 고층화 개발을 사실상 부추킨다고 비판해왔다. 이번 부결 사태를 계기로 사대문 역사도시 복원을 추진해온 서울시가 좀더 과감하게 예산을 투입해 종묘 주변 역사 복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일고있다. 이인규 문화재위원장은 “서울 사대문 안은 건물 신축을 자제하고 옛 유적을 외형상 보존하면서 내부 리노베이션을 하는 유럽식 모델을 썼으면 좋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불안해요. 시장 선거가 바로 코 앞이니…정책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고…”

한겨레신문 2010.4.15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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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 GPS 측량으로 확인  

서울의 중심은 광화문 네거리가 아니라 남산 정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는 15일 “2008년부터 최첨단 위성항법장치(GPS)를 이용해 측량한 결과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남산 정상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 다음달 이곳에 상징물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광화문 네거리 조흥은행 금융박물관 앞 광장에 도로원표가 위치한 점을 감안해 서울의 중심점으로 알려졌지만, 도로원표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지방 18개 도시와의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설치했을 뿐 정확하게는 서울의 중심점이 아니라고 서울시는 설명했다. 또 1896년엔 현재 종로구 인사동 194의4번지 하나로빌딩 지점을 서울의 중심점으로 지정했지만, 이것도 조선시대의 기준점일 뿐 급격한 변화를 겪은 서울의 행정구역 역사를 반영하지는 못했다.
시는 중심으로 확인된 남산 정상부 녹지대 자연경관이 훼손되지 않도록 200m가량 떨어진 남산타워 인근의 측량기준점 표시물을 철거하고, 측량기준점으로 계속 활용하기 위해 GPS를 넣은 상징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서울신문 2010.4.16 송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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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은 왜 북극보다 추울까? 

북극곰은 있지만 남극곰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대로 펭귄은 왜 남극에서만 살고, 북극에서는 살지 않을까? 남극과 북극은 다 추운 곳일텐데 북극곰과 남극펭귄만이 알고 있는 북극과 남극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지상의 남극과 북극은 추위와 눈, 얼음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서로 다르다. 남극의 영어 명칭인 Antarctica는 북극을 뜻하는 Arctic과 반대를 뜻하는 접두어 anti(ant)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서로 반대쪽에 있는 지역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의 차이가 있다. 남극은 대륙이고 북극은 바다다. 따라서 남극과 북극은 지구에서 서로 다른 유일한 환경을 보여준다.  

남극은 지구의 최남단에 있는, 남극점 주위에 있는 대륙이다. 남극조약에서 남위 60도 남쪽으로 정의되어 있다. 남극대륙은 지구 육지면적의 9.2%를 차지하는 거대 대륙으로, 남극권 이남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극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약 1,440만 km²로서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대륙이다. 남극대륙의 약 98%가 얼음으로 덮여 있는데, 평균두께가 2,160m나 되는 거의 빙산과 같은 두꺼운 얼음이 덮고 있는 거대한 빙원이다. 물론 높이가 무려 4,000m를 넘는 얼음도 있다.

반면, 북극은 지구 북극점 근처의 지역이다. 북극권은 보통 북위 66도 33분보다 북쪽 지역을 가리키며, 총 면적 약 3,000만㎢ 중 북극해가 약 1,400만㎢를 차지한다. 흔히 북극을 의미하는 ‘북극권’에는 캐나다와 러시아, 미국 알래스카의 북쪽 지역, 노르웨이 북쪽 해안,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스발바르 같은 북쪽 섬들이 포함되는데, 이곳에서도 빙하를 볼 수 있다. 북극권을 ‘가장 따뜻한 달의 평균 기온이 10℃를 넘지 않는 지역’으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알래스카 남단까지가 북극권이 된다. 

북극은 남극보다 조금 따뜻하다. 북극 지방의 평균 기온은 영하 35~40도 정도인 반면, 남극 지방의 평균 기온은 영하 55도에 달한다. 남극에 비해 북극이 따뜻한 이유는 대륙이 아니라 바다이기 때문이다. 남극대륙을 덮고 있는 얼음은 햇빛을 반사하지만, 북극의 바다는 열을 흡수하고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북극은 유라시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얼음 바다다. 지중해보다 약 4배가 큰 바다를 덮은 빙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북극의 얼음은 눈이 쌓인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얼어서 생긴 해빙이다. 따라서 얼음의 두께가 10미터를 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북극의 얼음은 주변의 대륙에서 날아온 토양과 먼지 때문인지 옅은 황갈색을 띠는 반면, 남극의 얼음은 수정같이 맑고 깨끗하다.

남극의 얼음은 단순한 얼음이 아니다. 땅 위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오랫동안 쌓여 얼음이 된 것이라 이처럼 두껍고 높다. 눈이 쌓여 눈덩이가 된 뒤 무게에 눌려 갇혀 있던 기포가 빠져나가면서 맑고 투명한 얼음이 된다.

남극에는 원주민이 없다. 선사 시대에 원주민이 살았던 흔적도 없다. 현재 남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문명세계에서 들어가 남극의 연구 활동을 수행하는 비상주 방문객들이다. 그곳은 오로지 추위에 적응한 동식물들만이 살아갈 뿐인데, 나무는 전혀 없고 지의류가 남극에 있는 식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비록 날씨가 춥고 육지도 없는 곳이지만, 그린란드와 알래스카 등 북극권에 속하는 여러 지역에는 흔히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이누이트족이라는 원주민이 살아간다. 문명세계의 방문객이 지내고 있는 남극과 달리,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와 역사가 있는 북극의 원주민으로 주로 동물을 사냥하며 살아간다. 북극에서는 남극에서 볼 수 없는 털이 하얀 북극곰과 바다를 헤쳐나가는 거대한 순록 같은 포유류를 만날 수 있다.

남극 하면 펭귄이다. 옥색 빙산 위에 서 있는 하얀색과 검은색이 조화를 이룬 펭귄이야말로 남극을 대표하는 새다. 황제펭귄, 아델리펭귄, 마카로니펭귄 등은 남극 고유의 생물인데, 아델리펭귄은 남극 펭귄의 3분의 2를 차지할 만큼 많다. 처음에는 광활한 바다로 둘러싸인 대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얼음 덩어리에 가까운 남극에 물새들이 먹이를 찾아 날아왔는데, 거추장스러운 날개는 잠수하기 좋게 지느러미 모양으로 진화하여 지금의 펭귄이 남극에 살게 된 이유라고 한다.

그렇다면 북극의 제왕, 북극곰은 원래 북극에 살던 동물일까? 북극곰의 족보를 조금만 더 파고들어가면 북극곰이 사실은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그린란드에 살던 흑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먹이를 찾아 북쪽으로 이동한 흑곰은 얼음환경에 적응하며 털 색깔이 흰색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북극곰의 털 밑을 자세히 보면 검은색의 피부가 보인다. 남극에 북극곰이 없는 이유는 바로 남극이 남극해라는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북극곰은 얼음 위를 이동하며 사냥을 하고 빙산 사이를 헤엄치기도 하는데 그 거리는 25㎞를 넘지 못한다.

북극에서 해는 춘분 때(3월 21일경) 지평선 상에 있다가 고도가 매일 조금씩 높아져 하지 때(6월 21일경)는 23.5°에 이른다. 하지 이후로는 고도가 매일 조금씩 낮아져 추분(9월 23일경)이 되면 다시 지평선에 걸치게 된다. 따라서 춘분부터 추분까지 해는 지평선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어 6개월간 낮이 계속 이어지고, 마찬가지로 추분부터 이듬해 춘분까지는 6개월간 밤이 계속되는 된다. 따라서 어느 날 정오 해가 지평선 위에 있었으면 6개월 뒤 정오에는 반드시 땅 밑에 있게 된다. 남극점은 이와 반대이다.

대체로 남극은 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건조하며 바람 또한 많이 부는 대륙이다. 또한 모든 대륙 가운데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다. 남극도 대륙이기 때문에 다른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똑같이 일어난다. 때때로 화산이 폭발하고 뜨거운 김이 솟는 온천과 지하자원 있으며, 드물지만 지진도 발생한다. 한 마디로 얼음으로 덮여 있을 뿐이지 다른 대륙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남극의 대기운동, 지리, 지형, 지리위치, 그리고 생물이 복합돼 생기는 자연환경은 지구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남극대륙을 감싸는 남빙양 또한 독특한 생태계를 이룬다.

남극의 대기순환은 세계의 기후에 영향을 미쳐 농업과 산림 변화를 일으킨다. 남빙양의 표층과 저층의 해수순환은 바닷물의 온도와 수산업에 영향을 미친다. 남극의 고층대기에 기상 이변이 일어나면 그 여파가 한반도가 있는 중위도 지방에까지 미치기도 한다. 특히 얼음으로 덮인 남극은 지구 온난화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곳이라 날씨가 더워져 남극의 얼음이 모두 녹을 경우 전 세계 해수면이 지금보다 65m나 높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남극은 지구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한 중요한 연구기지다. 과학자들은 변덕스러운 태양 활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극을 태양 활동과 우주 날씨 변화를 관측하는 최적지로 꼽는다.

남극과 북극은 지구상에서 아직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 그곳의 생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극과 북극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극지의 풍경과 함께 오랜 세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그들의 몫이다. 인간의 몫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혹독한 얼음의 세계에서 극지의 생물들이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물에 뜬 얼음 위에서는 북극곰이 안심하고 먹이를 잡아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지구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지구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할 것이다.

한겨레신문 2008.11.5 글 :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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