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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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1. 일본 관동 지방 남부에 대지진이 엄습했다. 사람들은 미처 불도 끄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고 도시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들리는 땅, 타오르는 화염보다 유언비어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일본 정부는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그 결과 무고한 재일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스스로 사실로 단정하고 군경을 동원해 직접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조선인들을 나는 조선인입니다라는 팻말 옆에 묶어놓기도 했다. 그들의 학살 방법은 잔인함과 광기의 극치였다.

 

 

 

 

 

 

관동 대학살은 극한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막연한 두려움과 좌절을 힘이 약한 상대에 대한 분노로 전이시켜 배설하도록 만든 전형적 정치 선동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듯 역사는 반복된다. 불행히도 잘못된 역사 또한 그렇다. 일본에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란 극우 단체가 있다. 이들은 반한(反韓) 나아가 혐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데 거침이 없다. 한국인에 대해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조선인은 기생충’ ‘바퀴벌레 구더기 조선인들등 부당하게 한국인을 모욕하는 피켓과 구호가 난무한다. 재특회의 구성원은 젊은 층으로 이뤄져 있다. 저임금의 시간제 근로자 또는 최근 갑자기 늘어난 계약직 근로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자신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좌절감을 분출하는 것이 이들 단체의 목적이다.

 

인간은 늘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선택의 부재, 대안 없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심하면 죽음의 공포와 맞먹는다. 우리는 그것을 아예 모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든가, 아니면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거부해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려움에 유도되어 행동한다. 그럴수록 찐득한 혐오의 그림자가 우리 몸에 달라붙는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오염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미 동성애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비합리적인 혐오와 공포를 호모포비아(Homophobia)라고 명명했다. 동성애란 말만 들어도 왠지 소름이 끼치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성애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 감정이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세균이 분열하면서 번식하는 것처럼 호모포비아 분위기가 확산하면 혐오범죄로 이어진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괴롭히고 때리거나 심지어 죽인다. 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과 외국인, 특정인을 비하할 때 등장하는 냄새나 분비물에 관한 표현은 대표적인 혐오 발언 사례다.

 

 

 

이 책의 두 번째 글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임옥희 편) 27~28쪽에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핵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소개되었다. 혐오와 수치심의 두꺼운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27~28쪽을 읽으면 된다.

 

 

 

인터넷에 서식하는 수많은 남성이 여성이라는 단어만 보면 부모님의 원수를 만난 듯이 발광한다. 여성의 성기와 벼슬아치를 합친 보슬아치란 비하 표현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보지 달린 게 무슨 벼슬이냐라는 의미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인 김치녀는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폄하해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한정시키는 단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지역감정에 휘둘렸다. 특정 지역이나 출신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며 편을 가르고 감정싸움을 벌여왔다.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감정은 전쟁 양상이다. 호남 사람들을 홍어로 비하한다. 이런 지역적인 특성을 이용해 삭힌 홍어가 풍기는 냄새를 호남 사람들의 인격과 동일시해서 비하하는 데 쓴다. 광주 민주항쟁 당시 시민군 전사자의 시신 썩는 냄새를 진압군이 홍어 삭힌 냄새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희생자들을 빗댄 통구이등도 경상도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된다.

 

 

 

 

 

 

혐오는 수치심을 유발한다. 부정적 수치심은 자기 파괴적 힘을 가진다. 오랫동안 혐오 발언에 시달렸던 재일 조선인들은 극우 세력의 무차별 폭력 및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현재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낙인은 재일 조선인들의 활동을 제약한다. 차별과 강압의 부당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려면 일본인들의 보복을 감당해야 한다. 재일 조선인들은 언제 또 다시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무차별 폭력이나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부정적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상실된다. 반면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오토코구미의 행동대장 다카하시는 혐한 시위를 보고 있으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다카하시는 한때 반한 감정을 가진 우익이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고집하면서 재일 조선인을 차별하는 재특회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껴 오코토구미에 들어가게 됐다. 이처럼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은 혐오의 감정이 사회적 약자에게만 광적으로 표출하는 잘못된 일본 사회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는 수치심도 긍정적으로, 건설적 방향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독특한 사례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자신들 기준대로 종북타령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고, 테러방지법 시행을 찬성한다. 이미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이와 유사한 테러방지법을 도입하자고? 그들은 국가보안법으로 대통령을 음해하는 종북 세력을 처벌하고, 테러방지법으로 간첩 활동을 하는 종북 세력의 군사적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무고한 진보 세력을 간첩으로 만들어버린 사례가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실체 없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에 사람들 머릿속에 공산당은 빨갱이 괴물로 자리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우파 세력은 좌파 세력을 극도로 혐오해서 법적으로 통제하려 든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마저 침해한다. 일베의 혐오 발언의 심각성을 지적하면 표현의 자유운운하면서 일베를 옹호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우파의 이중성. 우파인 나도 그들 보기가 부끄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벽하고 이성적인 자유주의자라고 착각한다. 자신들의 단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정신승리'에 가까운 변명만 늘어놓는다.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은 수치심을 주는 처벌이 있어야 공동체의 도덕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하위 집단에 대한 지배 집단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반대한다. 집단적 혐오는 파괴적이다. 역사적으로 지배 집단은 혐오라는 감정을 이용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 관동 대학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혐오 감정을 위악적으로 배설해서 생긴 비극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심각하다. 사회는 다양성과 자유의 목을 졸라 여기저기에 족쇄를 채운다. 그리고 차이차별로 키우고 모든 걸 정상비정상으로 나누어 힘의 서열을 매긴다. 부당한 차별은 사회 내의 정의와 평등에 어긋난다. 편견에서 비롯된 혐오가 전염된 사회는 자유주의를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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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6-0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련 소개 글 보면
혐오, 증오에 관심 많으신 거 같습니다. ^^

cyrus 2016-06-10 13:12   좋아요 0 | URL
내용, 주제가 겹치는 책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진짜 독서의 목적은 이벤트 응모입니다. ㅎㅎㅎ

2016-06-09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0 13:14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도 비겁한 사람들이 많아요. 자신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갑질하거나 분노를 표출합니다.

북깨비 2016-06-10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다 라는 대목을 읽으니 문득 미미여사의 외딴집이 생각납니다. 기나긴 인류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희생양들이 있었을까요. 끔찍합니다.

cyrus 2016-06-10 13:18   좋아요 1 | URL
유언비어와 편견을 맹목적으로 믿는 대중심리가 정말 무섭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합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침묵합니다. 악성 루머를 만들고 퍼뜨리는 자는 따끔하게 법으로 잡아 족쳐야합니다.

페크pek0501 2016-06-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27~28쪽을 읽으면 된다.˝
- 그래서 책을 들춰 봤어요. ㅋ

집단 망상이라는 것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살겠습니다.

cyrus 2016-06-11 11:05   좋아요 0 | URL
27~28쪽에 마사 너스바움이 정의한 혐오와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글쓴이가 700쪽 넘는 책 한 권의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집단 망상의 힘이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는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잘못한 게 없다고’라고 착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