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정원
랄프 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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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만들어 낸 작은 천국, 정원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어딜까. 철따라 수많은 빛깔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흐르고, 온갖 종류의 새가 노래하며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풍요와 사랑이 넘치는 낙원의 땅 천국은 인간들에게는 꿈의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꼭 천국으로 가기를 동경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혼이 되어 소원대로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이 천국으로 무사히 안착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천국이라는 낙원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는 참된 신자가 죽은 후 그 영혼이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반드시 사후의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며, 현세에도, 또 인간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천국은 꼭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상상의 공간에 불과한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본다면 '천국'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있다.

우리는 훌륭한 자연 경관을 보게 된다면 '천국에 온 기분이 든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많은 이들이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자연 경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일부 몇 몇 인간들 중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오랫동안 만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원본 그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인간이 발명한 것이 바로 '정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돌, 물, 꽃, 나무 등의 자연재료를 통해 미적인 구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경관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인공적인 공간에 불과하지만 정원 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온갖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만가지 꽃들의 아름다움과 각각의 존재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작은 천국'인 셈이다.  

 
 

 고흐의 정원을 아십니까?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 묻어나 있는 정원은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들에게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아틀리에(atelier)인 동시에 삶의 일부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지상의 천국’이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죽기 전까지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6~1922년경 

 

   
  모네가 그린 정원의 풍경과 우명한 <수련> 연작은 대부분 지베르니 정원에서 탄생된 작품들이다. 모네는 부인과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게 여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다음으로 모네가 좋아했던 것이라면 바로 지베르니 정원일 것이다.  
   

  
그에게는 지베르니의 정원은 단순히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예술적 영감의 장소 그 이상이었다. “내 그림과 꽃 이외에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라고 말할 정도로 모네라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자신만의 개인적인 공간인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모네에게 정원은 아내와 자식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었으리라. 모네가 세상을 떠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는 후세의 예술가와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명소가 되었다. 모네는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상하는 법’을 이 정원에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을 열광적으로 사랑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고자 하였다. 특히 모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파 화가들 같은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정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사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정원의 풍경이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귀가 잘린 자화상>  1888년 

 

인상파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해서 그 곳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반대로 정원을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풍경을 사랑했고, 그것을 표현한 화가도 있었다. 그가 바로 ‘해바라기’ 연작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지금까지도 고흐가 남긴 작품들을 본다면 ‘해바라기’ 연작 이외에도 고달픈 일상을 끝내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감자를 먹는 소시민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이 역동적으로 그려낸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밀밭까지 고흐라는 이름은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을 한 번 보는 순간, 영원히 잊혀버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모네처럼 정원을 무척 사랑했으며 600여 점이 넘는 작품들 중에 정원의 풍경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군다나 외로운 독학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예술적 능력과 지향하고자 하는 미적 가치가 다르면 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외고집이 강했던 그의 인상을 생각한다면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원을 연관시킨다면 대조적인 느낌이 떠오른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에만 정착했던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부터 프랑스 파리, 프로방스, 아를, 뉘에넨, 오베르까지 한 곳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방황이 만들어 낸 방랑 생활 그리고 발작과 정신병으로 인한 병원 생활이 고흐의 인생 중 절반을 차지했다. 당연히 고흐에게는 모네처럼 정원을 딸린 집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흐가 정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고흐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목사가 꿈이었던 그는 성격 부조화로 전도와 설교를 버리고 화랑점원 일을 시작하지만 사랑의 실패와 아버지와의 불화로 젊은 생을 방황하다가 동생 테오의 권유로 그의 나이 30이 되어서야 늦게 그림을 시작한다. 정식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그림도 어려서 일찍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흐는 렘브란트, 야곱 반 로이스달, 장 프랑수아 밀레 등 선대의 화가들의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려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아니 고흐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의 인생은 무척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고흐는 37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몇 명의 여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해보지만 연애로 결실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 방황 속에서 혼란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고흐를 아껴주고 이해해주실 줄만 알았던 부모님조차도 고흐의 괴팍한 성격과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특히 자신처럼 목사의 길로 가길 원했던 아버지로서는 화가로 전향하여 한 곳에 정착된 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있는 가난한 아들의 모습에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가족 중에서 고흐의 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동생 테오 밖에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  1889년 

(<반 고흐의 정원> pp 74)

 

외곬인데다가 조울증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고흐의 성격상 그 누구도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 발작까지 일으키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고흐를 더욱 멀리하기 시작했다. 고흐는 차라리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성격에 조롱하거나 멸시하지 이들이 살지 않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프랑스 아를에서 정신 발작을 일으킨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생레미라는 지방에 위치한 정신병자들이 모인 요양원에 자진 입원한다. 오랫동안 방황으로 인해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생의 의지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요양원에 도착한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요양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방식으로 미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였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정신병원과 요양원 생활은 고흐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가두어 버릴 정도로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더욱이 불시에 그를 습격하는 발작은 고흐에게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고흐는 간간히 정신이 온전히 들 때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특히 병원과 요양소 안에 위치한 정원을 그리는 것이 고흐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오랫동안 병원과 요양소에서 생활한 환자들에게는 병원의 정원마저도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공간에 불과했지만 외출마저도 할 수도 없는 고흐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감옥 같은 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라고 정원의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자신이 소유한 정원은 아니었지만 고흐는 꽃과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거대한 밭과 수풀이 자라고 있는 오베르의 전원적인 풍경에서부터 고흐와 친분을 유지했던 가셰 박사의 집 안 있는 작은 정원까지, 그가 남긴 수많은 데생과 유화 작품들 중에는 꽃과 나무를 그린 것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  <정원에 있는 마르게리트 가셰>  1890년 

 (pp 96~97)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질환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던 고흐의 예술을 인정해준 고흐에게는 몇 안 되는 친분적인 인맥 중의 한 사람이다. 고흐 역시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가셰 박사를 위해서 몇 점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가셰 박사의 집에 있는 정원의 풍경을 그린 적도 있는데, 마르게리트는 가셰 박사의 딸이다.

 
   

 

무엇이 고흐를 정원의 풍경에 매료되도록 했던 것일까.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고흐에게 정원은 지옥 같은 삶에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자신만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 이제 나는 자연 앞에서 예전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1월 중순, pp 33)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거친 인위적인 자연의 공간이지만 고흐는 정원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이 찾지 못했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였다. 그에게는 정원은 자연의 모습을 탐구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정원은 도시처럼 소란스럽지 않으며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다. 그 어느 누구도 고흐의 그림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에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고흐는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에서만큼은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 이 정원이 나를 꿈꾸게 합니다 '

고흐는 정원을 단순히 그림을 편안하게 그릴 수 있는 평온한 공간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자연이라는 조화로운 현상은 오랫동안 잊혀진, 그리고 고흐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따사로운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주게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을 회상하며>  1888년  

(pp 44~45)

   
  정원을 대상으로 그린 고흐의 그림 중 유일하게 상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고흐의 누이와 어머니이며 오른쪽에는 하녀가 정원을 가꾸고 있다. 고흐는 캔버스에 칠해진 보라색과 노란색이 어머니의 성격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단순히 정원에서 노닐던 기억을 회상한 것이 아니라 유년 시절, 포근하고 따뜻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림으로나마 기억하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의 고흐가 지낸 준데르트 지방에 위치한 목사관에는 정원이 있었다. 고흐의 어머니는 고흐와 그 밖의 자녀들이 집 근처의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고흐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테오를 포함한 다섯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고흐에게는 자연은 재미있는 장난감인 동시에 예술적 상상력을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심각한 발작과 정신 질환 속에서도 고흐는 목사관의 정원의 모습 그리고 그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영원히 잊지 않았다.


“ 병을 앓으면서 다시 준데르트에 있는 집의 모든 방을 보았단다. 정원의 오솔길, 화초, 주변 풍경, 들판, 이웃, 묘지, 교회, 집 뒤쪽 텃밭, 묘지의 키 큰 아카시아나무에 튼 까치 둥지까지.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9년 1월, pp 15~16)


 

  

 

빈센트 반 고흐  <도비니의 정원>  1890년 

(pp 104)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외곬 성격인데다가 때때로 찾아오는 정신적 발작으로 괴로워야했던 고흐에게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정(情)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런 허기진 애정 결핍은 정원을 통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까지 회상하기에 이르면서 혼자서 외롭게 고독을 달래보려고 했다. 고흐에게는 정원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집이며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들이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애인이며 그리고 가족이었다. 개인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는 따뜻한 정이 오고가는 대화를 나누는 가족과 같은 삶을 꿈꾸려고 했고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정원의 모습을 망각의 틈바구니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 짧은 인생을 마감함으로써 고흐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정원 속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안락한 지상낙원이었다. 

   

 


 '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가 있는 채마밭> (부분)  1887년 

   (pp 15)

 

동생 테오와 닥터 가셰, 우체부 직원 룰랭이 고흐에게는 그나마 친분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지만 고흐에게는 그들과의 관계만으로도 ‘밑 빠진 항아리’와 같은 애정 결핍을 채울 수가 없었다. 자살하기 전까지 수많은 편지를 교류함으로서 형제애를 돈독히 유지했던 동생 테오의 자화상을 단 한 점 그리지 않는 대신에 정원의 모습을 수십 점이나 그려낸 고흐의 창작 활동을 본다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과 떨어져 지내는 동생보다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정원에서 피어나는 말 못하는 꽃들이야말로 고흐에게는 친숙한 존재였을 것이다. 고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장소에는 그 장소 특유의 환경적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인습적인 기법보다는 ‘자연의 언어’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강조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김춘수 시인이 쓴 시구처럼 고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정원 속의 꽃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꽃처럼 누군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했으며 ‘화가’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의미 있는 존재로 알아준 것은 오히려 고흐가 동경하면서도 행복한 기억들을 꿈꾸고자 했던 정원 속의 꽃들이었다. 해바라기 그리고 정원 속 꽃과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그의 그림들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또한 고독한 예술가의 인생을 기억해주는 음악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고흐가 사랑했던 정원의 모습은 많이 변했고 이제는 고흐의 흔적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고흐’라는 이름의 꽃은 시들지 않았다. 죽은 뒤에서나마 후대 사람들로부터 한 폭의 캔버스로 ‘자연의 언어’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예술적 염원이 인정받게 됨으로써 예술계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위대한 ‘꽃’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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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네의 수련 저 그림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첫 장면으로 나오더라고요. 진짜 아름다웠어요. 그림만큼이나. 저는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정말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림이 그림이고, 나는 나이고. 암스테르담의 우중충한 거리가 생각나서 예전 사진을 들여다봤더니 렘브란트 미술관에도 갔더라고요. 그래서 렘브란트 다큐 찾아보고.. 요즘 그런 식. 뭔가 많이 공허해요.

cyrus 2011-11-30 23:43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사실 고흐는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꽤 많은 꽃과 나무들도 그렸더군요. 특히 아이리스를 그린 그림도 좋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아이리시스님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습니까? ^^;;
어제는 날씨가 좋다가 오늘은 갑자기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옆구리가 많이 춥더군요 ^^;;

꽃도둑 2011-11-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오늘 새삼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넘쳐나요,. 저렇게 따뜻할 수가 있다니...

지금 고흐는 뭘하고 있을까요?
자신이 그리워하던 정원에서 거닐고 있을런지도...^^

cyrus 2011-11-30 23:44   좋아요 0 | URL
요양소나 병원 내부라면 먼저 쓸쓸한 분위기가 나기 마련인데
고흐가 그린 병원은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표현해서 그런지
꽃도둑님에게는 마음이 드셨는가보군요. ^^

맥거핀 2011-11-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과 그림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좋아지면서도,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누군가는 저거 관리한다고 고생좀 했겠네, 이 생각부터 먼저 드니, 이거 문제가 좀 있지요? (때로는 너무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이상한 공포심마저 들 때가 있어요.^^;) 아무튼 그림은 좋네요. 특히 <도비니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아주 좋네요.

cyrus 2011-11-30 23:46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정원 가꾸는 것도 쉬운게 아니죠.
저는 어렸을 때 정원 딸린 집을 가진 것이 꿈이었는데,, 식물 하나
가꾸는 것도 쉽지가 않더군요. 물 잘 줘야되죠, 햇빛 조절도
잘 해야되고,, 하여튼 관리해야될 게 많아서 수많은 식물이 자라는
정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정말 부지런하고 식물을 사랑하느 사람만이
가능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