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소설 《The Catcher in the Rye》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콜필드 가문 3남 1녀 중 둘째이다. 소설에서 친형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고, ‘D. B.’라는 이름의 머리글자로만 나온다. D. B.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다. 남동생 앨리(Allie)는 1946년 7월 18일에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홀든의 친구 스트라드레이터(Stradlater)는 자신의 작문 숙제를 퇴학이 확정된 홀든에게 맡기는데, 죽은 앨리를 잊지 못한 홀든은 작문 숙제에 동생과 관련된 추억에 대한 글을 쓴다. 막내 피비(Phoebe)는 홀든이 앨리 못지않게 좋아하는 여동생으로,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소설의 중반부에 홀든은 과거에 형과 앨리가 주고받은 대화 한 장면을 회상한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앨리가 형에게 형은 작가니까 전쟁에 참가하면 작품 쓸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형은 앨리에게 야구 미트를 가져오게 하고는, 루퍼트 부루크와 에밀리 디킨슨 중에서 누가 훌륭한 전쟁 시인인가를 물었다. 앨리는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대답했다.

 

(이덕형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210쪽)

 

 

I remember Allie once asked him wasn’t it sort of good that he was in the war because he was a writer and it gave him a lot to write about and all. He made Allie go get his baseball mitt and then he asked him who was the best war poet, Rupert Brooke or Emily Dickinson. Allie said Emily Dickinson.

 

 

 

루퍼트 브룩(Rupert Brooke, 1887~1915)은 영국의 시인이다. 1911년에 첫 시집을 발표했으나 그의 창작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1915년에 그리스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스만제국(터키)의 지배에 저항하는 그리스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열병이 악화되어 그리스에서 세상을 떠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최후와 조금 비슷하다.

 

루퍼트 브룩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독자들 역시 앨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평생 독신으로 은둔의 삶을 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 1,775편의 시를 썼다. 그렇지만 그녀가 생전에 발표한 시는 10편에 불과했다. 그녀는 늘 흰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뉴잉글랜드 수녀’ 혹은 ‘백의의 처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디킨슨은 죽기 직전 여동생 라비니아 디킨슨(Lavinia Norcross Dickinson)에게 자신이 남긴 기록물 전부 불태우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언니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펴내는 데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D. B.가 디킨슨을 ‘전쟁 시인’으로 보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디킨슨은 남북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살았다.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를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디킨슨은 남북전쟁을 직접 언급한 시를 쓴 적이 없다. 다만, 어떤 대상이나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전쟁으로 비유해서 쓴 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를 썼다고 해서 그녀를 ‘전쟁 시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D. B.의 엉터리 말은 얕은 문학 지식을 가진 D. B.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D. B.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황금 금붕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는 무명작가였다. 당연히 D. B.도 콜필드가 비꼬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디킨슨의 시는 대체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쉽게 읽혀지는 시는 아니다. 디킨슨의 시에 많이 나오는 주제는 사랑, 자연, 죽음과 불멸,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 자기 성찰 등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 대다수는 진중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띤다. 그녀의 시는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디킨슨은 절제된 구성으로 시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거나 시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시의 음률을 살리려고 ‘줄표(—, dash)를 많이 썼다. 게다가 특정 시구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문법을 무시하는 작법을 구사했다. 그 때문에 디킨슨의 시는 들어가기는 쉬워도(읽기 쉬워도), 나가기 어려운(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미로’이다.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2016)

* [구판 절판] 에밀리 디킨슨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민음사, 1976)

 

 

 

디킨슨이 남긴 1,775편의 시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디킨슨은 시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집 출간에 참여한 편집자와 문학 연구가들은 엄청난 양의 시를 구분하기 위해 각각의 시에 숫자 번호를 붙였다. 그녀의 시를 가리킬 땐 숫자 번호와 시의 첫 번째 문장을 함께 언급한다. 시의 첫 번째 문장은 임시로 붙여진 가제(假題)가 된다.

 

만약 우리나라에 해설을 곁들인 디킨슨 시 ‘전집’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적어도 두 권으로 나올 수 있겠다. 가장 많이 알려진 디킨슨 시 ‘선집’은 1976년에 강은교 시인이 번역한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이다. 알라딘에는 이 시집의 출판연도가 ‘1997년’으로 되어 있는데, 초판 발행연도는 아니다. 1997년에 나온 건 개정 2판이다. 2016년에 나온 《고독을 잴 수 없는 것》은 개정 3판이다. 두 권의 책에 수록된 시와 강은교 시인이 쓴 해설 내용은 모두 같지만, 개정 3판을 잘 살펴보면 구판에서 드러난 어색한 번역문과 오역을 고치고 새로 다듬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판과 개정 3판에 ‘하늘나라에 갔었네’라는 가제가 붙여진 시(No. 374: I went to Heaven)가 수록되어 있다. 구판 번역문과 개정 3판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Stiller — than the fields

At the full Dew —

Beautiful — as Pictures —

No Man drew.

People — like the Moth

Of Mechlin — frames —

Duties — of Gossamer —

And Eider — names —

Almost — contented —

I — could be —

’Mong such unique

Society —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좀벌레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한 줄기 빛이 되어》, 민음사, 48쪽)

 

 

 

이슬 가득한 — 들

보다도 고요한 —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메클린의 — 레이스나방 같은 —

사람들 — 평화롭고 —

의무는

거미줄과 솜털처럼 가벼워 —

난 한껏

만족할 수 있었네 —

 

(‘하늘나라에 갔었네’ 중에서,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47쪽)

 

 

 

 

‘moth’는 나방을 뜻한다. 그런데 구판에는 ‘moth’를 ‘좀벌레(silverfish)’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 있다. 번역문 옆에 원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구판의 오역을 발견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윤명옥 옮김, 《디킨슨 시선》 (지만지, 2011)

* [절판] 에밀리 디킨슨, 김천봉 옮김, 《19세기 미국 명시 6: 에밀리 디킨슨》 (이담북스, 2012)

 

 

 

민음사의 디킨슨 시 선집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의 《디킨슨 시선》이담북스의 《에밀리 디킨슨》을 읽으면 된다. 다만 이담북스 번역본은 절판되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번역본은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이다. 오역으로 추정되는 시구가 몇 개 있긴 하지만,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이 번역본이 기존의 디킨슨 시 선집과 차별화된 특징이 있는데, 시마다 붙여진 숫자 번호까지 적혀 있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은 숫자 번호가 붙여진 유일한 디킨슨 시 선집 번역본이다.

 

 

 

 

 

 

 

 

 

 

 

 

 

 

 

 

* 데이먼 영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 (L.I.E., 2009)

* 박재열 《미국 여성시 연구》 (L.I.E., 2009)

 

 

 

잘 알려지지 않은 디킨슨의 생애를 상세하게 다룬 책으로는 데이먼 영(Damon Young)《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박재열《미국 여성시 연구》가 있다. 《정원에서 철학을 만나다》는 정원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자연을 관찰하면서 시를 쓴 디킨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녀에게 정원은 ‘안식처’이자 ‘천국’과 같은 곳이다. 《미국 여성시 연구》는 디킨슨을 포함한 6명의 여성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다른 시 선집 해설에서 볼 수 없는 디킨슨의 가족 관계—친오빠의 아내인 올케 수전(Susan)과의 관계이 언급되어 있고, 그녀가 친하게 지내던 남성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특히 올케에 향한 레즈비언(lesbian)을 암시하는 듯한 디킨슨의 편지글은 그동안 ‘무성애적(asexuality) 처녀’로만 알려진 세간의 평가를 뒤집는 자료이다. 저자는 디킨슨이 쓴 편지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끝내 숨기려고 했던 그녀의 내면을 살피고, 그것이 어떻게 시로 구현되었는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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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9-03-2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만지의 디킨슨 시선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cyrus 2019-03-22 17:48   좋아요 1 | URL
지만지 번역본에 원문은 없지만, 민음사 번역본에 수록된 시의 수보다 많습니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시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syo 2019-03-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받아야 된다니까 정말......

cyrus 2019-03-22 17:51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네요... ㅎㅎㅎㅎ

oren 2019-03-22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디킨슨의 시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을 읽었는데, 정말 하나같이 독특한 시들만 있어서 놀랐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그녀만의 세계‘를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녀가 유부남이었던 목사를 사랑했고, 자신의 사랑 고백이 거절당한 이후로 평생 집에만 틀어박혀 오로지 시를 짓는데만 열정을 쏟았다니,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절망에 차 있었을까 싶어서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도 짠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겠더군요.

cyrus 2019-03-22 17:56   좋아요 1 | URL
디킨슨의 생애를 알고 난 뒤에 시를 읽으니까 그녀가 왜 ‘죽음’과 ‘불멸’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시에서 죽음에 대한 그녀의 트라우마가 느껴졌습니다.

2019-05-31 0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1 10:21   좋아요 0 | URL
처음에 디킨슨의 시를 읽었을 땐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생각날 때마다 시를 읽으니까 그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디킨슨의 진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디킨슨이 좋아했던 장소가 정원입니다. 그래서 정원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아요. 세밀한 관찰력이 없으면 쓸 수 없는 시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