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이영훈 외 지음 / 미래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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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왜 논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완독한 지금 시점에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의 과거 저작들에 비해 과히 대담하고 도전적인 서술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의 무역보복이 개시되고 한일군사정보협정(지소미아)이 종료되는 등 최악의 한일 관계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점에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이 주장하는 모든 내용을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론이 적지 않은 입장이다. 특히 마지막 위안부 관련 장은 상당히 대담하고 거칠어서 평소 비이성적 반일 정서를 비판해온 나조차도 굉장한 긴장감과 반발심으로 읽어내려갔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종족주의(種族主義)'라는 용어는 처음 접한다. 이영훈 교수는 종족주의를 명확히 정의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집단, 즉 집단에 몰아(沒我)로 포섭되며 집단의 이익과 목표와 지도자를 몰개성으로 수용하는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러한 집단을 기초 단위로 한 정치가 곧 '종족주의'라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동력은 한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 내재된 '샤머니즘'이며 '거짓말', '물질주의', '육체주의'가 그 현실을 이루는 축이라고 비판한다. 즉 종족주의란 한국적 민족주의의 독특성을 부정적으로 비꼰 개념인데 한민족 그 자체가 하나의 집단이고 권위이고 신분으로 발흥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종족주의적 민족성이 비이성적인 반일감정과 뒤섞여 '반일 종족주의(反日 種族主義)'를 만들어왔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를 위시하여 총 6인의 공저자가 집필했다. 각 공저자들은 각기 다른 주제로 일제 시대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다. 엄밀히 말해서 뒤집는다기보다 역사를 사실 있는 그대로 추적하자는 취지에서 여러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며 객관적 인식을 촉구한다. 책에 나온 대부분의 내용들은 과거 수차례 학계에서 토론된 것들이다. 예컨대 '쌀 수탈론'과 '쇠말뚝 신화' 등은 이미 학문적으로 사실관계가 정리된 것들이다. 잘못된 팩트를 바로잡기 위해 이 교수를 위시하여 소위 뉴라이트로 불리는 공저자들이 그간 얼마나 땀 흘리고 노력해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 너무 많은 주제를 다루려 한 것 같다. 평소 주장해온 일제 시대의 여러 담론들을 다루고 있지만 기존 범위를 더 넓게 확대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민감한 이슈라 할 수 있는 '독도'와 '위안부'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평소 나는 이영훈 교수의 책을 즐겁게 탐독해왔다. 그가 다른 공저자와 함께 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기존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후 쓴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어느 학자도 엄두 내지 못할 실증적 연구를 꾀하였고, 두 권으로 출간된 『한국 경제사』는 기존의 서양식 도식을 벗어던지고 사실의 귀납적 결과로서의 한국사의 전 흐름을 추적했다. 또한 『대한민국 이야기』와 『대한민국역사』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는데 훌륭한 저작들이다. 특히 『대한민국역사』는 내가 읽어본 근현대사 책 중 가장 정확하고 대중적이라 할 정도로 탁월하다. 그래서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오해와 편견 없이 탐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책이라고 소개하며 추천하고 있다.

 

이런 내 평가와는 별도로 이영훈 교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입체적이다. 이 교수는 그간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 왔다. 그의 책과 논문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무조건 '친일파'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가 욕먹는 이유는 간명하다. 통계와 사료를 통해 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한다는 그의 실증사관이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민족 정서와 괴리가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사실 이 교수가 실증사학자로서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여러 고문서와 통계자료를 통해 추적한 학자적 연구활동은 과히 찬연하기 그지없다. 그 유명한 허수열 교수와의 '벽골제 논쟁', 박현모 교수와의 '세종 토론'을 흥미롭게 바라본 내 입장에서 최소한 객관적인 자료와 실증적 연구에 있어 국내에 이 교수와 맞설 자가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조차도 이 교수가 수년에 걸쳐 발굴하고 연구한 '조선총독부 1차 자료'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인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점에서 나는 이 교수의 학자적 실력과 양심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이번 책은 굉장히 멀리 나갔다. 기존 논조에 비해 훨씬 더 과격하고 공격적이고 도전적이다. 물론 이 교수 혼자 집필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논설의 맥락과 구심력이 책 전체의 통일성 면에서 흐트러진 측면이 있다. 각 공저자들이 제시한 통계와 자료에 대해 내가 반박할 입장(수준)은 아니다. 중요한 건 서술의 관점과 논리의 전개 방식이다. 책의 일부 대목에서는 사실 확인과 논리 전개가 상당히 거친 부분이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는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의 상징」라는 제13장이다. 이 교수가 직접 쓴 이 글은 사실상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1905년 일본이 먼저 영토로 편입했고, 한국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인 1952년 1월 평화선 발표로 독도를 영토에 편입했다고 기술한다. 이 교수는 '우산도(于山島)' 사료나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爭界)'와 관련된 사항은 모두 기각하는데 그 논리의 수준이 평소 이 교수답지 않다. 무엇보다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가장 명징한 증거로 꼽히는 1877년 '태정관문서(太政官文書)'와 같은 일본 측 사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실증과 사료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자로서 가장 핵심적인 반대 증거를 누락한다는 건 불성실 혹은 고의적이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가장 큰 문제는 위안부에 관한 서술이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3부 전체를, 전체 책 분량의 1/3을 할애하는데 전개하는 논지와 서술의 방식, 제시된 논거와 결론 도출이 상당히 부적절하고 매끄럽지 않다. 이 교수는 일제의 위안소 운영은 조선의 기생제와 1870년대 일본이 시행한 공창제를 토대로 생겨난 것이라 주장한다. 이어지는 주익종 교수의 글과 함께 정리해보면 위안부는 자율형 혹은 기업형 매춘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일제의 강제 만행으로써 '성노예(sex slave)'로 끌려간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미군 위안부가 존재했고 6·25 전쟁 시 한국군 위안부도 존재했던 것인데 1937~1945년 역사만 달랑 떼어내 일본군의 전쟁범죄라고 몰아붙이는 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다. 또한 20세기 말의 기준을 20세기 전반에 투사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뒤 점령국 소련군에 의해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의 독일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일본군 위안소 문제를 등가시키는 주 교수의 논지에는 기가 찰 정도다.

 

이 교수와 주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군(軍)에 의해서 운영된 공창제의 부분집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통계와 자료를 인용한다. 그러나 자료 인용의 폭이 좁고 근거가 일면적이다. 관련 장을 두세 번 정독해봐도 김학순 할머니를 위시하여 기존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전복할 만한 귀납적 설득력이 포착되지 않는다. 이 교수가 제시한 사료를 부정한다는 게 아니다. 연구자가 필요한 사료만 선택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 중에서도 여러 층위가 있다는 가능성은 왜 단언적으로 배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즉 자발적으로 갔던 분도 있고, 혹은 속아서, 돈 벌게 해주겠다, 공부 시켜주겠다, 그래서 속아서 가신 분도 있고, 강제로 끌려간 분도 있을 텐데, 이 여러 층위의 양립 가능성을 재단한 채 "위안부는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다"라고 무 자르듯이 단언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대담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다수가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 만큼의 보편성을 띤 논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자료가 부족하고 논증이 불성실하다. 일부의 부분 오류가 있는 것을 끌어와 전체 오류로 연결 짓는 논리 전개 방식이 평소 이 교수답지 않아 아쉽다.

 

위안부와 관련해 몇 마디 더 하겠다. 평소 이영훈 교수는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를 중요시했다. 그는 역사를 이끄는 동력을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으로 분석했다. 응당 맞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230년 전 애덤 스미스가 발견한 공(功)이자 공산주의를 누르고 자본주의(자유시장체제)가 승리한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교수에게 묻겠다. 일제 시대에 자유를 말살당한 채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다며 '내가 증거'라고 외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에 대해서는 왜 높은 실증적 가치를 두지 않는가. "기억이 희미해졌거나 새로운 기억이 가공됐다"라고 말하는 건 상처에 대한 인간의 기억력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존재다. 일본군으로부터 자신의 성(性)을 유린당했다고 일관되고 애절하게 고백해온 수많은 원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이 교수가 평소 강조해온 '자유로운 개인'이 지금 이제서야 쏟아내는 절규의 목소리다. 그 숭고한 증언이 책 속에 소개된 몇몇 사료에 비해 무가치한 것인지 정말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다.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 책을 통해 이영훈 교수가 인간과 역사 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실존이 결여되고 무시된 채 일정량의 실증만으로 역사를 천착해서는 곤란하다. 숫자와 기록의 양이 반드시 사실을 확정하는 건 아니다. 더욱이 연구자의 연역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취사선택된 사료라면 더욱 위험하다. 역사학자라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겸허한 이해와 성찰을 전제로 사실관계를 연구해야지 경제와 경제관계라는 수리적 공식만으로 한 시대를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이 같은 시도는 그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은 칼 마르크스와 같은 사회과학자나 하는 행위이다. 역사에서 실증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실증만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그것이 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목적에 따라 일부만 남은 사료를 사용한 오류, 잔존하는 사료의 무리한 일반화, 사료의 잘못된 해석, 다른 사료의 이해 부족 등의 역사 실증주의가 갖는 오류 가능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역사가들의 고민이었다.

 

총평하자면 나는 이 책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책을 쓴 취지와 일부 주제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긍정할 수 있다. 작금의 한국인은 극단적 형태의 분노심으로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을 지나치게 우습게 보고 깔보는 경향이 한국인의 태도에 마치 전염병처럼 옮아 있다. '반일'이 마치 민족적 도덕성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징표가 될 정도다. 영원한 아·적군이 없는 국제사회의 복잡한 힘의 전장에서 무엇이 국익과 민족을 위하는 길인지 냉정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나친 반일주의에 함몰된 작금의 '관제(官製) 민족주의'의 낙후성을 신랄히 고발하는 이영훈 교수의 경고를 나는 오롯이 주목한다. 또한 일제 식민시대를 민족적, 정서적, 감정적 덩어리로 애매하게 보지 말고 통계와 자료를 통해 그 이면을 탐색해보자는 것에도 동의한다.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평생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하게 쌓아올린 그의 투혼과 신념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이 책의 일부분을 긍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지나치게 많이 나갔다. '사료의 편파 선택'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자주 눈에 띈다. 평소의 이 교수라면 하지 않았을 논리의 과잉과 반증 가능성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는 이 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너무 많은 내용을 대중적인 관점에서 쉽게 쓰려다 보니 애매하고 산만한 책이 되었다. 또한 지극히 예민한 주제를 공저자 여럿이 다루다 보니 논리와 표현의 통일성이 결락되어 편집과 구조 면에서 지저분한 책이 되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은 비과학적이고 비역사적이다"라는 주장이 불과 10장 남짓한 분량으로 도출될 수 있는 주제인가. 주장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합리적이고 성실하게 제시해야 독자에게 설득력을 얻는 법인데 제한된 지면에 논거 몇 개 툭 던지고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바람에 힘을 잃었다. 또한 외부 곳곳에 존재하는 여러 반론들을 일체 외면(무시)했다는 점에서 비겁한 면도 있다. 충정은 이해하나 내용은 역부족이다. 학자로서 확신이 있다면 전술한 바 있는 몇몇 예민한 주제와 관련하여 별도의 개정증보판을 출간해주기를 제안 드린다.

 

서평 말미의 이러한 혹평은 나의 순수한 애정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영훈 교수가 한국에서 가장 연구를 많이 한 최고의 경제사학자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조선시대와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 그가 쌓아올린 실증사학의 성과는 너무나 찬란한 것이어서 일정 부분의 경외심까지 있을 정도다. 다만 책 리뷰어로서 책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권의 책으로서 『반일 종족주의』는 많이 부족하다. 총론은 일부분 성공했을지 몰라도 각론에서는 상당히 실패했다. 다른 공저자는 차치하더라도 이영훈 교수만큼은 많이 아쉽다. 그의 내공과 지력을 평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크다 하겠다. 차후 공개석상의 토론회나 후속 저작을 통해 이 책의 빈약한 논증을 보완·수정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책의 평가와는 별도로 서평의 첫 문단에 기술한 바와 같이 『반일 종족주의』는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유야 어떻든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모든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의 관심과 정서를 반영한다. 동시대적 고민은 설사 그것이 오류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아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한국사에 관한 기본적인 맥락만 잡고 있다면 여기저기에 경도되지 않은 채 자기 주관대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비판도 읽고 나서 하기 바란다. 유독 힘든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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