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오래전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의 일이다. 이륙하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비행기는 순식간에 구름 위에 닿았다. 지면은 한참 멀어졌고 건물은 조그맣게 보였다.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지상 모든 것이 작게 변한 것 같았다. 아니 세상 자체가 소인국이 된 듯했다. 문득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저렇게 작은 존재들인데 뭐 그리 급하다고 발버둥 치며 살고 왜 그리 서로 미워하며 살아가는지를.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갖고 하는 것에 우쭐대며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비행기 창밖을 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중국 장가계나 미국 그랜드캐니언을 거론하며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었음을 회자하는 경우가 있다. 해외 관광명소는 정말 크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을 감상하고 있으면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소소한지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세계와 비교하면 장가계나 그랜드캐니언도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기준을 우주로 확대해보는 것이다. 지구적 관점에서는 클지 몰라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작다. 규모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지구 밖으로 나가면 압도적으로 큰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작은 행성이다. 태양계의 한 식구인 목성은 지구보다 1,300배가 크다.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알파센타우리'는 지구에서 4.4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지구에 있는 모래알보다 5~10배가 넘는 별들이 우주에 있다. 우주의 지름은 대략 950억 광년 거리로 추정된다. 그것도 관찰 가능한 우주에 한해서 그렇다. 지구가 속한 은하와 가장 가깝다는 안드로메다은하만 해도 250만 광년 떨어져 있다.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우주 공간 전역에 수백억에서 수조 개의 태양을 거느린 은하계가 2조 개가량이나 있다. 어디 감히 스케일을 말하는가. 지구와 인간은 작아도 너무 작다.
20세기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딸 사샤 세이건이 처음으로 쓴 책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는 삶과 사랑과 우주를 다룬 에세이다. 유명한 과학자를 아버지로 둔 딸의 이야기이면서도 인간 세계를 면밀히 탐구한 인문학 산문집이다. 칼 세이건과 작가 앤 드루얀의 딸인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우주적 시각과 과학적 통찰로 삶과 인간을 들여다보는 법을 체득했다. 과학자의 딸답게 증명되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의심하는 회의론자가 되었다. 저자에게 사실이란 과학적으로 발견되고 입증된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대인이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이다. 책 곳곳에 회의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인 저자의 입장과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 많은 주제를 다룬다. 딸을 출산했을 때를 회고하며 '태어남'에 관한 폭넓은 천착을 시도한다. 신을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적 의식이 주는 유용함을 긍정한다. 우주의 탄생과 외계인의 존재 등의 흥미로운 과학적 담론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종교적 시각을 벗어난 과학자의 입장에서 죄와 오류의 문제를 다룬다. 성장과 어른의 철학적 의미를 탐색하고 결혼 제도와 섹스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한다. 역사와 신화의 흥미로운 토막들을 소개하고 이를 과학적 접근으로 재해석한다. 인간의 가장 큰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통찰하기도 한다. 저자는 해박한 지식으로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깊이 있는 탐색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과학적 사고와 국문학 전공의 유려한 글발이 돋보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저자의 자기 주관이 굉장히 강력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가령 결혼 제도, 여성 인권, 성소수자, 섹스 관념 등 여러 민감한 이슈에 관한 개인적 소신과 철학이 뚜렷하게 서 있다. 글의 논조가 흔들림 없이 일관적이다. 평소 자기만의 기준과 가치관을 명확히 세워놓은 듯하다. 이는 오롯한 자존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인지 오랜 공부의 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작가로서는 훌륭한 장점이라는 점이다. 가끔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저자(작가)가 자신감 없이 마치 독자의 눈치를 살피며 써 내려가는 듯한 글귀를 만날 때면 적지 않은 짜증이 밀려온다. 명확하고 단정적으로 자신의 견해와 철학을 전달하는 작가적 자신감이 멋지다.
저자는 책 서두에 부모님으로부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인간과 세계를 과학적·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되 삶 자체만은 따뜻한 시선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을 부모로부터 배우며 자란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시선은 의외로 우주가 아닌 자기 주변에 머물러 있다. 저자의 부모들이 지구의 바깥 우주를 바라보며 깊이 있는 사고를 펼쳤다면 저자는 그 시선을 가족과 삶으로 돌린다. 일상 속 작은 의식들이 얼마나 삶의 순수한 기쁨을 일깨우는지를 담담하고 미려한 문체로 들려준다.
책 전체에 흐르는 고요한 기저가 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거의 모든 장마다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저자가 얼마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에게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리운 대상이다. 아버지의 언어, 지성, 가르침, 인격, 태도 등 그 모든 것이 저자에게 흘러내렸다. 저자는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다. 주변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욱이 저자의 아버지는 위대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었다. 『코스모스』를 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란 존재에 구속되지 않았다. 짓눌리지 않았다. 완전히 독립된 자아로 만개했다. 그것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낸다.
책을 읽으며 두 가지 도전이 생겼다. 하나는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를 제대로 읽고 싶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딸에게 '코스모스'와 같은 거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전자는 쉽다. 이미 두꺼운 개정판을 질렀다. 올여름에 천천히 탐독할 계획이다. 후자가 문제다. 아버지로서 거대한 영혼의 자산을 딸에게 물려준다는 건 과히 기적 같은 일이다. 쉽지 않다. 노력하겠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겠다.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훗날 이 블로그도 딸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의 목록 중 하나일 것이다. 말과 행동, 성실과 정직, 도덕과 신앙 등 딸아이에게 흘러내릴 모든 것들을 살피고 가다듬겠다. 그래서 칼 세이건처럼 딸이 그리워하는 아빠의 표본이 되겠다. 이 비전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서평을 정리하자. 책 제목은 진실이다.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들이다. 위대하면서도 한낱 작은 존재다. 이 책은 이 명제에 관한 과학적·개인적·인문학적 통찰이다. 칼 세이건의 유일한 소설 『콘택트』의 명언을 소개로 서평을 끝맺음 한다. "우리와 같이 자그마한 생명체는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http://blog.naver.com/gilsa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