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짓돈 된 '벤처기금' 운용 실태 - 10億받아 24일만에 고의부도
[경향신문]2005-06-22 45판 04면 1460자 종합
감사원이 21일 발표한 '벤처 전용 P-CBO(프라이머리 회사채담보부 증권)' 발행 및 운용실태는 이른바 '무늬만 벤처인'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부 보증을 배경으로 평균 27억원을 조달한 벤처인 가운데 일부는 이 돈으로 개인 부동산이나 골프장 회원권을 샀으며, 해외로 빼돌리기도 했다. 보증금액 목표 달성에만 급급했던 기술신용보증기금의 준비부족과 사후관리 부실이 그 빌미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정부는 조만간 기술신보를 통해 3년간 10조원을 보증한다는 내용의 '벤처기업 중소기업 육성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보증을 받은 지 1년 이내에 보증사고가 발생, 기술신보가 30억원 이상 갚아준 기업 97개 가운데 48개 기업은 지원받은 1천9백11억원 가운데 7백56억원을 주식투자 등에 유용했다.
나머지 31개 기업의 대표는 9백16억원을 지원받았지만 부도가 나자 부동산 등을 매각하고 해외로 도피하거나 이민을 가버렸다.
2000년 매출실적이 전혀 없었던 ㄱ사는 2001년 기술신보의 P-CBO 보증으로 1백74억원을 조달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대표이사는 이 돈으로 10억3천8백만원짜리 부동산과 1억8천만원짜리 골프장 회원권을 사는 등 쌈짓돈처럼 사용했다. 그는 지난 2월 부동산과 골프장 회원권을 매각, 싱가포르로 잠적해 버렸다. 이 때문에 기술신보는 1백47억원을 대신 갚아줘야 했다.
전해 매출 2억7천만원에 불과하지만 차입금이 2백64억원에 달했던 ㄴ사도 기술평가 없이 36억원을 지원받았다. 이 회사의 대표이사는 자신 소유의 다른 회사 3곳 명의로도 33억원을 지원받았다.
그는 7개월 만에 주택 등 부동산 3건(6억6천4백만원)과 골프장 회원권 등 재산을 팔아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다.
그가 빌렸던 69억원의 변제 책임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남았다. 감사원 관계자는 "10억원의 보증지원을 받은 지 24일 만에 회사를 부도내고 해외로 달아난 사례도 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기술신보는 눈뜬 장님을 자처했다. 신용평가에서 투자부적격 등급을 받은 807개 업체 가운데 717개(88.7%)는 아예 기술평가조차 실시하지 않은 것이다. 기술신보는 지난해 도래한 P-CBO 만기에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한 369개 기업의 7천5백50억원을 일반보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기술평가를 실시하지 않았다.
사후관리도 문제투성이였다. 기술신보는 P-CBO 보증 기업들에 대한 사후관리업무를 6개 자산운용회사에 맡기고 수수료 1백63억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자산운용회사들은 10억원 이상 보증사고가 발생한 기업 268개 가운데 48개(17.9%)에 대해 부도발생 시점까지 정상업체라고 보고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한때 일부 벤처인들이 테헤란로 주변 유흥가의 밤을 밝히며 뿌린 돈이 사실은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왔던 것"이라며 "허탈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해먹을 위치에서 해먹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악의 유형이다.
이들에게 세계나 세계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해먹고 자기 배를 불리는 순간 그것은 세계의 완성이자, 인생의 마지막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해먹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해먹지 못하는 사람만 바보되는 관리 시스템과 분위기이다.
해먹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된다는 사고는 이 세계에서는 굉장히 낯설다.
벤처가 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하리라는 단순무식한 논리의 파이프로 혈세가 고스란히 빠져나간 셈이다.
악과 악은 겹쳐 있고, 항상 커넥션이 있다. 다만 그 커넥션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하나의 악이 다른 악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악의 목적'은 달성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중간중간에 섬세하게 놓여진 '악'의 일부만 단속할 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악의 작품'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악'에 전염돼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