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예전에는 카프카가 넘사벽이었다. 어렵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카프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성>, <실종>, <소송> 등 장편들을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했다. 대학원 조교를 2년 했는데 카프카 덕분에 버텼다. 교수 연구실과 대학 본부를 누비면서 <성>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물과 건물, 인물과 인물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고, 그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더더욱 논리적이지 않았기에 카프카 주인공의 당혹스러움이 훅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카프카를 신으로 섬길 뻔했다. 조르주 아감벤, 발터 벤야민 등 전공서적을 읽을 때도 카프카는 계속 소환되었다. 특히 단편과 손바닥소설이 많이 소환되었는데 큰맘 먹고 단편 전집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읽지 않았다. 1일1카프카는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작품이 <국도의 아이들>이다. 

카프카 장편(손바닥소설) <국도의 아이들>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카프카의 텍스트는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짓눌린 자를 주인공 또는 화자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두운 세계의 소년 백석"을 떠올린다.백석 시인의 유년 세계는 빛으로 짜인 옷이라면, 카프카의 유년 세계는 어둠으로 짜인 옷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항상 무언가의 통제 안에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의 확장에 불과하다.


국도의 아이들은 어떻게 놀까? 나는 그림책 <지름길>이 생각났다. 지름길의 아이들은 집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기차길을 지름길로 택한 아이들이 굉음을 내고 달려오는 기차의 실체를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이야기다. 


국도의 아이들을 보면서 지름길의 아이들이 생각났던 까닭은 철저히 타자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다. <국도의 아이들>은 국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논다.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다. 완벽하게 위계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곤충이나 애완동물과 비슷한 위치의 피라미드 층에 사는 존재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삶은 어쨌거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환경 안에서 둘레를 치지만, 지금까지 어린이를 보는 시선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린이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서로 긴밀히 공유한다는 점이다. 어느새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은 대부분 파악이 되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든 우리는 그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표정이다. 화가 난 표정으로 모든 것을 부서버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만날 확률은 최소 90%는 된다고 생각한다. 이 확률을 49%로 줄이는 것이 나의 "불가능한 목표"다.


바보들은 피곤해지지도 않는다고?

- 바보들이 어떻게 피곤해질 수 있겠니?

카프카, <국도의 아이들> 서로간의 대화


'아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카프카의 공간'이다. '국도'라는 공간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소설적 공간은 '무대'와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에게 공간이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카프카에게는 공간이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개념으로 <국도의 아이들>을 해석한 논문도 있던데, '다른, 낯선, 다양한, 혼종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hetero와 장소라는 의미의 topos/topia의 합성어인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가지고 푸코는 시간과는 달리 여전히 신성화에 묶여 있는 근대적 장소의 폐쇄성을 비판한다. 공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카프카 소설을 읽는다면 하나의 재미를 추가할 수 있다. 예컨대 <성>의 경우 '성'이라는 공간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성과 주인공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공간은 권력이 반영된 장소이므로 위계질서가 완성된 카프카의 소설 사회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은 끊임없이 공간을 넘보고, 거기서 수많은 좌절과 몰락이 만들어진다. 위에 언급한 마지막 대화는 두 아이가 국도를 타면 갈 수 있는 남쪽의 도시에 대한 소문을 비평한 것이다. "생각 좀 해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를 '잠을 자지 않는다'고 상징한 것이다. 국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다. 


<국도의 아이들>이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길'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왜 지방도가 아니라 국도인가? 먼저 국가권력을 생각할 수 있다. 공간과 공간은 길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길은 공간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길은 명령권자가 아니다.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갑'이 최종 명령권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명령을 받은 공간에서 그 내용물을 길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통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에서 종국에는 공간의 지배자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길은 문고리 권력이지만, 문고리 권력이야말로 절대 권력이다. 카프카 소설의 절대 권력자는 '문고리 권력'이자 '문지기'인데, 감춰진 권력은 주인공들과 인물들이 볼 수 없고 그들의 '하인'만이 권력을 대표한다. <성>에서 하인은 목수에게 딸과 잠자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목수는 하인의 명령을 어긴 죄로 그 사회에서 매도당해 생계의 극한에 내몰린다. 농부의 딸은 스스로 하인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허락하는데, 하인들은 비로소 농부에게 내려진 사회적 형벌을 취하한다. 내가 1일1카프카를 하고 싶은 까닭은 카프카가 권력과 위계질서를 거의 공기처럼 잘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회차 논어 강의 목록을 만들었다.

소인론, 반역의 시대, 필생의 라이벌(양호 또는 양화. 논어 17편이 양화편이다)이라는 내용은 이번에 새롭게 업데이트가 되었다. "반체제적 복고주의자"라는 형용 모순의 특성이 "반체제적 권모술수가"인 양호(양화)와 평생 긴장하면서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드라마틱하다. 요즘 공자 연구서들은 양호에 주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공자는 복고주의자이자 혁명가이다. 《공자전》(펄북스)을 집필한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은 "혁명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나도 혁명가보다는 혁명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혁명으로 일가를 나눈 것이 아니라, 모든 혁명가들의 혁명 태도를 기초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교육이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역할을 하지만, 예외적으로 병든 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을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좋은 스승이 태어난 경우다. 뒤르켐은 선생의 사회학적 기원을 "비주류 평민"이라고 설명했다. 공자는 사 계급으로 평민과 귀족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비주류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반역의 시대에 태어나 활약한 공자에게 반역자의 특성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양호와 당대 권모술수가들의 반역은 권력투쟁에 머물렀지만, 공자의 반역은 변혁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공자 강의 요청이 계속 있으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으니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자에 대한 강의 의뢰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10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찬찬히 읽어본 책들과 논어에 관한 자료를 분석하며 강의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최근 공자 연구서를 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군자에 반대되는 의미의 "소인"에 대해서 다시 보였다. 공자와 논어가 줄곧 비판하던 소인은 현대인에 무척 가깝기 때문이다.


내가 소인을 진지하게 분석 대상으로 삼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소인은 현대인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는데, 이를테면 아래 구절은 현대인의 모습과 참 흡사하다.


(소인, 또는 비열한 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얻을 때까지 근심하고, 설령 원하는 것을 얻더라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근심한다. 근심이 커지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논어 양화 편

영원히 근심의 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르네 지라르 식으로 표현하지면 "형이상학적 욕망"에 영원히 갇힌 현대인의 모습이다. 근심을 해결하기 위해 취직을 했더니 형이상학적 욕망이 해결되지 않았고, 퇴사를 하고 이직을 했더니 새로운 근심걱정, 새로운 형이상학적 욕망이라는 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씁쓸히 확인한다. 그래서 구조주의자가 되나 보다.


공자는 "소인 지식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소시민이 소인으로 욕망하고 살고 행동하는 것은 위허할 것까지는 없지만, 지식인이 소인으로 욕망하고 살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너(자하)는 군자다운 유가 될 것이지, 소인 같은 유가 되지는 말아라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논어 옹야 편


공자의 소인론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보려 한다. 군자에 가려진 조연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소인에 대한 이야기를. 동양철학의 근본 원리 중에서 '달이 차면 기운다'는 것이 있다. 군자는 그 동안 조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빛이 이제 시들해졌지만, 소인은 천대받다가 반대로 조명이 되고 있다. 마치 원의 운동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되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듯, 군자는 소인의 위치로, 소인은 군자의 위치로 되돌아간다는 게 참 신비롭고도 신기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 유럽 근대의 뿌리가 된 공자와 동양사상
황태연.김종록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막스 베버의 《유교와 도교》,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와 곁들여 읽으며 그 합을 추출해내야 정당한 동양과 정당한 서양이 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어로 중용을 풀다 이한우의 사서삼경 2
이한우 지음 / 해냄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번째 해방 - 주자학의 세계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주자(朱子, 주희(朱熹 ; 1130~1200)의 존칭)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주희(朱熹)는 중국 남송 시절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는데 성리학을 확립시켜 유학사와 동아시아 사상사의 불후의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희가 맹자를 거의 천 년 만에 복권시킨 사실은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준다. 맹자는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등 권력자가 불편할 만한 말을 많이 남긴 죄로 왕들에게 금서로 낙인 찍힌 이래 주희에게 복권되기 전까지 1000년 가깐운 세월 동안 묻혀 있었다. 주희가 완성한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주석서 사서집주는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사서는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이기도 했다.

나는 운 좋게 한학자 선생님을 만나 3년간 사서를 교육받았다. 교재는 주자집주였다. 동양철학 초년에 공자와 맹자를 직접 원문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주희의 집주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주자학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10년 정도 주자의 정신세계에 머물러 있다 보니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 빠져들수록 주자에 대한 내적 저항심이 커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자를 건너 뛰거나 무시하는 전략밖에 없었다. 주자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주자를 넘어서야 한다. 즉, 주자가 펼친 철학 세계를 스스로 깨부수고 그 자리에 나의 철학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러던 차에 이한우 기자의 <논어로 중용을 풀다>(해냄)을 접하게 되었다. 이한우 기자는 학부 때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 석사와 박사를 철학으로 전공했다. 현재는 <조선일보>의 문화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양철학에 조예가 깊은 저자는 최근 조선사를 되돌아보며 왕들의 고뇌와 정신을 서술한 '군주열전'과 사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야심차게 실천하며 <논어로 논어를 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의 사서(四書 :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저자가 사서 중에서도 '논어'를 축으로 삼은 까닭은 사서 전체가 공자에 대한 접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서에는 공자가 들어 있지 않다. 

다만 공자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를 열거하면 논어, 중용, 대학, 맹자 순서이다. 공교롭게도 저자의 집필 순서도 <논어로 논어를 풀다>(2012.5), <논어로 중용을 풀다>(2013.2) 순이다. 나머지 두 책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주자는 네 권의 책 다음으로 공자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네 권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서술했으므로 공자와 가장 근접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공자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인물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피비린내 나는 학문과 철학의 전쟁 이야기다. 내가 무려 10년 동안이나 주자의 통치하에 살았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애로사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동양철학에 대한 정신적 자유가 묶여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학문은 권력이며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치르는 전쟁이다. 11세기 중국의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주자는 성리학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강력한 '루키'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용어는 '관학(官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생 동안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하고 말년에 고위직에서 파문되고 중상모략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학문체계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정책의 도덕원칙으로 삼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저자는 "주희는 철학자가 아니라 언어학자다"라고 주장한다. 나를 일깨운 한마디다. 한 대목을 소개한다.

<논어>에 등장하는 지(知/智)는 대부분 사람을 아는 것[知人]으로 풀이해야만 문장의 생생한 의미와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곤 했다. 그런데 주희의 집주는 오히려 지를 지인(知人)으로 해석하는 데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그의 집주에 의존해 <논어>를 읽어갈 경우 <논어>는 한 덩어리의 책이 아니라 듬성듬성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잠언집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 <논어로 중용을 풀다>, 259쪽

저자는 주희에 대한 비판의 결론에 "주희의 도움을 받되 끊임없이 그의 집주를 의심해 가며 공자의 텍스트를 읽어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말을 듣기 전에 나는 막연하게 주희의 주석을 경계하기 시작해 아예 사서의 원문만 반복해서 보곤 했다. 저자의 말을 통해 비로소 주희에 대한 내 입장이 맑아졌고 나는 해방감을 맛봤다.

두 번째 해방 - 현재성에 대한 치열한 접근

동양철학이나 동양 고전의 번역문을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말이 '당대성'이다. 현재의 입장에서 당대의 일을 재단하지 말라는 내용이 골자다. 사서뿐 아니라 삼국지 같은 고전문학의 번역문에도 이런 사고방식이 보이는데, 특히 이문열의 삼국지에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따지고 보면 주자 역시 남송의 사고방식으로 공자를 재단하지 않았는가? 

<논어로 중용을 풀다>를 읽기 시작할 때는 저자가 서양철학을 근거로 동양학을 지나치게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 역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저수지 가운데 이상한 둑을 설치해 서로 흐르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동양과 서양의 모든 학문과 철학, 지적 결실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쳐질 제물이자 영양분이다. 이런 관점으로 동양철학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자를 피해 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자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신성시했던 것 같다.

주자가 철학자가 아니라 언어학자라는 주장은 그 동안 품었던 모든 심증들을 정리해 주는 명쾌한 말이다. 주자뿐만 아니라 공자와 장자를 제외한 중국의 모든 철학자들은 필연적으로 주석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는 스승에 대해서 이의제기를 금기하는 문화가 있다. 이의제기를 하면 이단으로 치부하여 파문하는데, 파문이란 생계의 끊김, 즉 사실상 '지적이면서 동시에 물리적 처형'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강경한 압력 속에서 동양의 지성인들 사이에 자동적으로 '아류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현대의 지성인들도 '비판정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서양철학을 주무기로 동양철학을 다시 바라보는 저자의 태도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주자는 <대학>의 서문에서 불교 등을 비판하며 '허무적멸지교'(異端虛無寂滅之敎)라는 용어를 썼다. 하지만 주자가 사용하는 개념은 불교에서 차용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상 불교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타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스승들에게도 적용했어야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주석가이거나 언어학자로 봄이 적당하다.

저자의 책을 읽고 저자를 직접 찻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저자가 한 말 중에서 기억에 남는 말은 "동양철학이야말로 심리학 중에서 심리학이다"는 말이다. 동양철학을 대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무척 현대적이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공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저자는 자신이 닦은 모든 학문과 경험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서양철학은 아주 중요한 자원이었다.

나는 저자로 인해서 주자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결국 저자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있게 성찰해야겠다는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사이에 있는 임시 둑이 무너졌다는 것은 앞으로 읽고 공부해야 할 철학의 영역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로부터 받은 두 가지 도움은 어쩌면 거대한 정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