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김수영, 정지용, 기형도 등의 시집을 많이 읽었는데

죄다 한자로 쓰여 있어서 기본한자 1,800자를 공부하면서 시집을 읽었다.
한자 공부한느 게 너무 어려웠다.

2001년 우연히 선배의 손을 잡고 서당에 갔다.
동양철학의 세계를 처음 봤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자가 두 개 이상 연결되었을 때는 엄청난 화학 반응이 나오는데,

때로는 핵물리학적인 반응이 나온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훈장님에게는 대학, 중용, 맹자, 논어를 배웠는데 따로 사기열전, 삼국유사 등 동양고전을 찾아 읽었다.

그때는 왜 읽는다는 생각도 없이 읽었다.

 

동양고전을 13년 동안 읽으면서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번역본을 찾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철학을 읽는 10년은 좋은 번역본과의 전쟁이었다. 좋은 책으로 처음부터 시작했더라면 논어만 10여권을 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0년만에 묵점 기세춘이라는 선생의 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양철학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심리학, 구조주의 등 거의 모든 철학을 평생 동안 공부하신 내공이 번역 곳곳에 담겨 있다. 그 분의 번역 작업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거의 다 구매를 하고 읽고 있다. 출판의 기회를 찾기가 참 어려우셨다고 쓰셨는데 이해가 간다. 일반 독자들이 조금만 눈이 밝다면 최소한 지금 도올의 자리에 그 분이 있을 것이다. 노자, 장자, 논어, 묵자까지 나왔는데 나머지 책도 번역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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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손쉬운 구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수중에 돈 백만원을 쥐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어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척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손쉽게 물건을 손에 쥐는 순간 논리가 사라집니다. 논리 감각이 약하면 모든 인과관계가 무너집니다. 노자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빛'에 갇히게 되는 거죠.


노자를 읽어보면 상당히 역설적인 말이 많고, 우리 상식과 배치되는 것도 많습니다. 그것은 노자가 엉뚱해서가 아니라 우리 현실의 모순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금까지 쌓였던 모순이 한꺼번에 터진 것처럼. 어느 세상에서나 이런 모순은 널려 있었습니다. 초나라의 충신 굴원도 <어부사>에서 굴원은“세상 사람들 모두 취해 있어도 나 혼자만 깨어 있노라”라고 말하죠. 


역설의 시대는 반성의 시대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 특히 아이에 대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는 자세가 특히 필요합니다. 아이 역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노자와 장자를 읽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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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중등, 고등, 일반인 등을 위한 인성 교육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동양고전을 다시 읽고 있는데, 이번에는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생겨서 논어 지도를 맨 먼저 만들었다. 동양철학은 공자 이후와 이전으로 나뉠 정도로 공자가 핵심인데, 그것은 동양의 지적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서양의 소크라테스가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정신적 혁명가라면, 공자는 흩어진 지적 편린들을 모아낸 정신적 집대성자다. 더욱이 동양의 훈고학적 전통은 공자를 비판하는 것을 일대 모험으로 만들어버렸다. (동양에서 스승의 학설을 비판하면 파문을 당했는데, 파문이란 생계가 완전히 끊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논어가 동양 정신의 표본이 될 수밖에 없다. 논어와 함께 사서(四書)로 분류되는 맹자, 대학, 중용은 사실상 논어의 참고서 격이기 때문에 논어지도의 틀 안에 종속된다. 그리고 사마천 사기와 전국책, 국어, 오월춘추 등의 역사서는 상황논리와 연결되고 전국 통일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정리하면 된다. 노자와 장자, 그 밖의 제자백가는 일종의 대안교과서로서 참조할 수 있다. 어쨌든 뼈대는 논어인 셈이다. (큰 이미지를 보실 분은 아래 링크를 열어보세요)


논어를 지도로 만든 까닭은 동양의 정세가 가장 안정적이고 기록이 객관적이며, 공자에 대해서 가장 근거리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도가 있다면 내가 이렇게 개고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공자의 한탄이 논어에 담겨 있지만, 어려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절에도 있었다. 옛 제자였던 알렉산더 황제의 대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연구활동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사후에 정치적 격변에 휩싸이면서 쓸쓸히 말년을 보냈지만 역사적으로는 가장 행복한 철학자였다. 공자 역시 이후에 펼쳐진 무지막지한 전쟁상황을 보면 그나마 행복한 철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공자 이후는 상황논리가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철학이 현실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어쩌면 동양 정신이 진공상태로 보존된 텍스트는 논어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개인의 성찰과 가족관계, 사회관계, 국가관계, 정치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을 펼쳐놓은 논어의 폭넓은 이야기의 세계는 동양사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논어를 지도로 만들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 번역문은 현음사의 김도련 역주본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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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는 나의 정신적 체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 때는 3권짜리 혜원출판사의 <레 미제라블>을 읽고 있었다. 






<레 미제라블>을 읽거나 빅토르 위고의 소설 작품을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역사와 철학과 드라마의 종합 예술이므로 산책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쟝 발쟝이 어떻게 되었는지 속도감 있게 전개되기보다는 쟝 발쟝이 시가전을 피해 하구수 속으로 숨었다면 파리의 하수구 역사에 대해서 설명이 이어진다. 나는 워털루 전쟁에서 낙오했다. 마리우스의 아버지 뽕메르시 대령이 떼나르디에에게 구출되는 장면을 보지 못한 채로. 






다시 이 책을 잡기까지는 16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야권의 대선 패배라는 분위기 속에서 집어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 8개월이 걸렸다. 2천 페이지의 대작을 읽으면서 나도 적지 않은 시간을 희생했다. 이제 읽기를 끝낸다. 내게 가장 감명을 주었던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었는데, <레 미제라블>은 그것을 넘어서는 작품이었다. 2008년 소설을 쓰는 펜을 꺾은 이후로 다시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작품이다. 문학이 어떻게 시대와 호흡하고 소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깊이 배웠다. 아울러 파우스트나 신곡,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 등 고전 소설을 놓지 말고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참 축복된 시간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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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8-29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언젠가는 도전해야지 생각중인데,
8개월이 걸리는 군요.
안식년이라도 받아야 도전이 가능하겠는걸요.

승주나무 2013-08-30 15:23   좋아요 0 | URL
감은빛 님//한번 도전해보세요. 저도 일하면서 읽어서 8개월 걸렸는데, 집중해서 읽으면 그보다 적게 걸리겠죠~ 다른 책도 읽으면서 읽었으니. 안식년 받으시길 기원합니다!ㅎㅎ
 

[성선설과 성악설..은 없다]




사람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구성하는 첫 번째 화두입니다. 맹자부터 그리스 철학자, 프랑스 등 대륙 철학자는 성선설을 대표하고 영국철학자 그 중에서 홉스는 성악설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저는 본성에 관해서 논의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가지고 본성에 접근하는 자세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한다."(정치학(숲), 20쪽)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은 본성에서 시작해 본성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공자는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 의해 서로 멀어지게 된다."(논어, 양화2)고 했습니다. 두 할아버지의 의견을 종합하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존재의 기반을 죄다 잃어버립니다. 성에는 '선'도 붙일 수 없고, '악'도 붙일 수 없게 됩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본성이 아니라 본능이며 그 중에서도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인 '생명욕구'와 '안전욕구'의 차원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즉 본성이란 단지 생겨먹은 대로 묘사할 수 있을 뿐 선하다 악하다를 평가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하느님(또는 신)을 나쁜 하느님 좋은 하느님으로 말하는 것과 같죠. 
생명욕구는 번식욕구를 포함해 생명을 낳고 기르는 모든 적극적인 욕구를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안전욕구는 나 스스로의 안전을 먼저 욕구하는 것이 첫 번째이며, 그 나머지는 나의 가족이나 친구 등 구성원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따라서 생명욕구와 안전욕구는 빈번하게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성선설, 성악설 논의는 본성과 본능을 구분하지 않은 데서 오는 오해에서 근거한 주장이므로 실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본성과 본능의 사전적 의미(국립국어원)

본성(本性)「명사」
「1」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 ≒체성「1」.
「2」사물이나 현상에 본디부터 있는 고유한 특성. ≒성진01(性眞)ㆍ실성03(實性)ㆍ체성「2」.

본능(本能)「명사」
「1」『생물』어떤 생물 조직체가 선천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동작이나 운동. 아기가 젖을 빤다든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행동 따위이다.
「2」『심리』어떤 생물체가 태어난 후에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



성선설과 성악설..은 없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인 면죄부다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어 성선설과 성악설의 허무함을 증명했지만, 여기서는 <중용>의 말을 토대로 성(性)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생각해 봅니다. 중용은 性을 설명하기 위해 '열렬하다' 또는 '성심과 성의를 다하다'는 의미의 誠을 차용하죠. 이미 그런 상태를 誠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誠을 흉내내는 존재(誠之者)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죠. 중용 22장에는 "오직 천하제일의 지극한 열렬함이 있어야지만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오만함도 함께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극적으로 추구해야 본성에 도달할 수 있는데, 팔짱 끼고 서서 성이 선하느니 악하느니 하는 것은 한가한 짓이라는 통렬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토대는 성악설인데, 이것은 면죄부입니다. 인간은 악하다는 면죄부는 원래 악하니까 악해도 된다는 이상한 정당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방해합니다. 


결국 지금의 세계는 진지하지도 않은 유치한 세계, 성찰하지 않는 골 빈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환경 위에서 진보와 보수가 현란한 춤을 춘다. 내가 진보와 보수의 정파에 대해서 웬만하면 언급을 자제하는 까닭. 



"시인은 느낌과 현실 사이의 거리, 원대한 야망과 하찮은 결과 사이의 괴리를 가늠하는 능력 때문에 불행해진다."(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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