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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J. 토마스 쿡 지음, 김익현 옮김 / 서광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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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읽기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한 것은 신의 한 수! 질문을 제시하고 글을 이끌어가는 방식은 신의 두 수! 에티카가 더 선명하게 이해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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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17-02-27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좋은 책에 아무도 댓글을 안 달아서요~~ 종종 출몰할게요^^

여울 2017-03-09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좋아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ㅎㅎ 자주 뵜으면 싶어요
 

그리스신화를 보면 사람은 원래 남녀가 자웅동체였다고 한다. 사람이 강력한 힘으로 신에게 도전하자 제우스가 진노해 벼락으로 내리치니 사람은 둘로 갈라져 버렸다. 남과 여로 나눠져서 반쪽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이날 이후로 사람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헤매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미완성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동양의 고대에도 태극(太極)에서 음양이 나뉘었다고 말한다. 동양 고대인이 생각한 사람의 운명은 서양 사람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나머지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반쪽이 만나는 식이다. "0은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노자의 <도덕경>의 말처럼 음과 양이 결합해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방식이다. 이 두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짝이 없을 때는 짝을 찾고(서양), 짝을 찾고 나면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동양) 


나는 이 두 이야기가 결합된 방식이 인생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자신의 나머지를 찾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의 연속이다. 오랜 방황을 통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두 아이를 낳은 평범한 이야기에서도 동서양 고대의 사고가 녹아 있다. 문제는 이야기가 무한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의 세계 속에서 부모의 반쪽을 찾고, 아이 역시 자신의 반쪽을 부모에게서 찾는 작업을 계속 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와 아이는 자기 속에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낳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자로 표현해 보자. 아이는 '人'이고 부모는 '亻'이다 '亻'은 사람인 변(邊)이다. 부모는 아이 옆에서 아이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부모가 도우미 역할을 온전히 하고,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자기를 발견하는 일을 잘 해내면 드디어 '化'(화)라는 글자가 된다. 化는 왼쪽과 오른쪽에 사람이 대칭이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사람의 죽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바뀌다'는 뜻을 나타낸다. 부모와 아이가 온전히 결합되고 나면 부모는 이전의 부모가 아니고, 아이 역시 이전의 아이가 아니다. 


化가 되기 위해서 부모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좋은 변화만 열거해 본다. 부모(亻)는 아이에게 애정과 '타인'과의 관계를 가르쳐 인(仁)을 만들 수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놓이려면 자신의 반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상대방을 초대해야 한다. 자기중시으로 꽉 차 있는 아이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공감할 능력을 가르쳐주려면 亻의 역할이 필요하다. 亻는 아이의 부모이지만, 아이에게는 최초의 '타인'이다. '他'(타)를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부모다. 


동양사람이 생각하기에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래서 고해(苦海)라고 부르기도 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움직이는 순간 길흉화복과 삶의 번거로움이 생긴다. 아이는 부모에 비해서 훨씬 활동적이고 많이 움직이며, 감정 역시 역동적이기에 부모보다 훨씬 많이 지치고 상처를 받는다. 부모는 아이가 기대 쉴 수 있는 나무가 되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休'(쉴 휴)를 준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집착하면 '쉼'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어쩌면 '쉼'일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품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태어나서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사회활동을 하고, 심지어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 사회가 시작된다. 부모는 아이의 반(半) 사회이다. 아이가 자신의 '짝'을 찾을 수 있도록 부모는 '伴'(짝 반)이 되어 주어야 한다. 반(半)은 단순한 절반을 의미하지만, '伴'은 '좋은 반쪽'을 의미한다. 부모라고 당장 아이의 좋은 반쪽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의 좋은 반쪽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일 뿐이다.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서 몸을 구부려 있다가 태어나는 순간 몸을 펼친다. 하지만 감정은 계속 구부린 상태가 된다. 부모와 대화하거나 놀거나 생활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伸'(펼 신)의 상태로 된다. 자벌레는 멀리 가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구부린다. 몸을 펼친다는 것은 고통이 따를 뿐만 아니라 두려운 일이다. 조금씩 연습하다가 펼쳐낼 때까지는 수만번의 연습과 시행착오를 한다. 부모는 아이가 틀리거나 실수하는 순간을 함께 하며 온전히 펼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도와줘야 한다. 


부모의 품에 있던 아이가 품 밖으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된다. 꾀꼬리가 꾀꼴 꾀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까닭은 자신이 머물 자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자신의 둥지를 찾기 위해 꾀꼬리는 수만번의 날갯짓과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한다. 부모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으려면 또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모(亻)가 아이를 서게(立) 만들면 아이는 자신의 '位'(자리 위)에 머물 수 있다. 자신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한자의 세계는 너무 많고 쓸 자리는 부족하니 이쯤에서 줄일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부모가  '亻'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지만  '亻'이란 사실 '人'을 옆으로 밀고 모양을 구부린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제 자리를 잡은 것이 '亻'이다. 이렇게 제 자리를 찾는 부모는 극히 드물다. '亻'을 고집하다가 '人'을 잊어버린 부모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人'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부모도 있다. 내가 아이와 책 놀이를 하다가 부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이기도 하다. 나도 아이 두 명을 키우고 있는 부모이기에 매일 헷갈리는 일이다. 헷갈리고 실수하고 그르치면서 후회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것 역시 부모가 아이를 완성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은 며칠 전에야 깨달았다. 한자에는 왼쪽을 나타내는 左도 '돕다'는 의미이며, 오른쪽을 나타내는 右도 돕다는 의미이다. 부모는 아이의 왼쪽에서 도와주기에 佐(좌)하는 사람이고, 오른쪽에서 도와주기에 佑(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잠시 물러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기에 '何'(어찌 하)하는 사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소개한 글자 중에서 '何'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자의 말을 덧붙인다. 


"어쩌면 좋지(如之何) 어쩌면 좋지(如之何) 하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이 사람을 도저히 어찌 해야 할지 끝내 알지 못하겠다."(논어 위령공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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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퓨징 - 분노 해소의 기술
조셉 슈랜드 & 리 디바인 지음, 서영조 옮김 / 더퀘스트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읽은 사람들은 호평 일색인 책


근래에 읽었던 과학 교양 서적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책을 꼽으라면 <디퓨징>을 선택하겠다. 독특하게도 이 책은 '아포리즘' 수준의 명언을 엄청나게 많이 구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단어를 말하는 방식은 단어 자체만큼 힘이 있다. (259쪽)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늘 이긴다. (269쪽)


이 책을 함께 읽은  "의학적인 이론 지식을 나름 쉽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마음에 들어요."라는 평가처럼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호평 일색이었다. 나 스스로도 <디퓨징>에 대해서는 마치 편애하는 것처럼 칭찬만을 해서 민망했지만 독서 반응들을 보면서 그렇게 민망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 까닭은 비판할 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중들과 친해지고 싶은 과학자의 진정성을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독자로 하여금 무척 호감을 원인 중의 하나로는 '성숙함'일 것이다. '분노'나 '감정'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책들, 특히 심리학 책들은 마치 외과치료처럼 '제거'만 생각했지 중요한 부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분노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존중받지 못하고 배반당한 에너지다. 따라서 분노라는 에너지를 회피하거나 제거하면 나의 에너지를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나와 함께 이 책을 읽었던 친구들 역시 '존중'이라는 키워드를 무척 중시했다. 마태호 씨는 책에 나온 "인간에 대한 존중이 답이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영헌 씨도 "존중은 바로 이 책의 저자의 결론"이라고 말했다. 



특히 가족관계에 도움이 되는 책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이 책은 무척 유용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별 것 아닌 것에 아이가 통곡하거나 분노하고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다. 심하다 싶으면 아이를 잡기도 한다. '심하다'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될 사안에 대해서 오버할 때 쓸 수 있지만, 아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도 될 경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별것 아닌 잠난감 때문에 짜증 부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다른 눈에는 아이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에 왜 그토록 화를 내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 장난감이 대단히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66쪽)


<디퓨징>의 조언에 따르면 어른의 눈으로 보면 별 것 아닌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어른의 눈을 버리고 아이의 눈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려고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공감을 얻고 아이의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일을 잊어버리듯, 어른들도 어릴 적의 감정이나 상황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어른도 역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아이의 처지를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주의를 벗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되는 일을 어려워하고, 애를 써야만 조금이나마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이 어려운 것 같다. 어른들이야 변연계와 전전두엽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아이들에게 변연계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는 사실만 알아도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전전두엽은 어른에 비해 덜 발달되었고, 변연계의 지배를 받는 감정적 뇌가 더 우세하다. 신생아는 뇌간과 변연계를 모두 갖추고 태어나므로. 태어나서 몇 시간이면 화를 느낄 수 있다. 배고픈 아기는 배고픔과 불편함을 해소해 주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화가 난다. 그러면 아기는 운다. (67쪽)


"내가 화를 내지 않으면 상대방이 화를 낼 가능성도 낮아진다."(168쪽)의 구절을 읽고 아내와의 싸움을 줄일 수 있었던 것도 고마운 점이다. 포커 게임에 비유하자면 아내가 바가지를 긁거나 화를 내는 것은 베팅을 한 것이다. 그 다음 나의 선택에 따라서 판돈과 싸움의 규모가 커질 수 있다. 하루는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나는 점퍼를 챙기고 바람 좀 쐬고 온다고 말하고선 집을 나섰다. 빠른 속도로 돌던 감정이 조금씩 천천히 가면서 객관적으로 나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화낼 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미치자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내도 아까의 상황이 미안했는지 좋게 넘어갔다. 첫째 민준이(6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다. 결국 화를 키우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싸움이 커지는 상황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떤 지식이든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나의 의지도 있지만, <디퓨징>의 저자가 논리적이고 접근성 좋게 글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의 행동을 바꾸었고, 그 덕분에 불행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준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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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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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열등감 고백

시를 읽고 리뷰를 시처럼 쓰고 싶었다. 오랜 독서 여정 끝에 시를 읽고 싶은 욕구가 유독 강한 시기를 만났다. 대학 시절 한 선배가 "너는 운문 스타일이 아니라 산문 스타일인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뜻을 알아챘다. '산문 정신'이라는 말처럼 산문은 현실에 대해서 필요한 말은 반드시 한다는 정신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드는 자유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수영 시인이, 외국에서는 조지 오웰이 산문 정신을 대표한다. 이에 대비한 '운문 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자유에 대한 자유'가 아닐까? 객관성, 자유 정신이라는 틀조차도 파괴하고 문법체계도 넘어서는 자유정신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사물을 틀 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견디지 못해 나는 시에서 멀어졌다. 시를 쓸 생각도, 시를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를 '파괴의 학교' 삼아 듣고 배우지 않으면 내 주변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가 쓰는 언어들이 현실에 우뚝 서 있을 수 있을까? 함민복 시인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시선 357)을 보면서 내가 시에 접근하지 못했던 또 한 가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어려움'(명함)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달) 같은 추상어와 관념의 언어를 시어에 포함시키지 않는 고정관념을 들켜 버렸다. 마음속에 시에 어울리는 단어를 솎아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 동양의 오래된 시 <대학>(大學)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조상들이 학교를 만들고 운영한 취지는 지도자 된 자가 몸소 행하고 성찰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그 나머지를 학교 과목으로 여기며, 대중들이 저잣거리에서 쓰는 용어를 벗어나지 않는 것에 있다."(<대학> 서문)

한마디로 시에 쓰지 않을 말은 없으며, 중요한 것은 그 모습과 현상에 대한 집중력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함민복의 시는 '참여시'인가

대학 시절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참여시 논쟁'이라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논쟁은 시인 김수영이 '사상계'에 발표한 '난해의 장막'이라는 제목의 1964년 시 연평에서 '시인의 양심을 저버린 채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하는 것은 사기'라 질타하면서 촉발됐지만, 박노해·백무산·김남주 등의 시인들이 작품의 세계를 '직접적인 현실'로 설정하면서 대학생이던 나는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에 순수시에 많이 길들여졌다. 그렇게 잠자던 '참여시'의 영혼이 함민복 시인을 통해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물이 법(法)이었는데
법이 물이라 하네


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
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


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
물을 가둬 실용화하는 것은 사뭇 다르네


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
괴물강산 만든다 하니


물소리가 어찌 들을 건가
새봄의 피 흐려지겠네(<대운하 망상> 전문)


나는 최근의 한국문학이 격변기이면서 침체기이면서 동시에 전성기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주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세 가지 흐름이 보이는데, 함민복 시인의 '참여시'가 한 줄기,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과 <의자놀이>를 쓴 공지영의 '참여'가 한 줄기, 이도 저도 되지 않는 흐름이 또 한 줄기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2008년 촛불이 터졌을 때 작가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져 버렸다. 시대정신을 이끌고 존경을 받는 작가보다는 '글 쓰는 샐러리맨'이라는 실망감이 커졌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함민복이라는 시인과 한국 작가들이 어떤 문학으로 현실과 대결하고 있는지 깊고 넓게 보지 않은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그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로서 가지게 된 오해일 수도 있다. 함민복 시인을 만나서 특히 반가운 까닭은 '시와 현실을 둘 다 잃지 않은 시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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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창비아동문고 대표동화 1
권정생 지음, 서진선 그림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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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는 판타지가 놀이이지만 아이들에게 판타지는 생명과 같습니다. 사회가 삭막해지면서 아이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깍쟁이가 되어 버립니다. 권정생 선생의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창비아동대표동화1 <별똥별>에 수록)를 읽으며 ‘아이다운 눈’을 잃은 아이를 회복시켜줄 수 있고, 그 눈을 잃지 않은 아이에게는 더 맑게 해줄 거에요.

 

 

 

 

 

추천연령(초등학교 3학년)

초등3학년부터 좋습니다. 어려운 단어가 없어서 저학년 아이도 부모와 함께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본 목록은 18년간 독서연구를 한 <책 놀이 책> 글쓴이 오승주 책요정이 작성했습니다. 

아래 이미지를 클릭해서 가족에 맞는 책을 추천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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