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대학 나남신서 668
이동환 역해 / 나남출판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동양사상 시리즈를 시작한 지 3개월이 넘었는데, 여태껏 사서를 정리하지 못했네요. 애초에는 한 달에 하나씩 다루려고 했는데, 무리했나 봅니다. 이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의 저항이 만만치 않네요. 이번 회부터는 '사회화'를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이번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총기난사 사건'입니다. 만약 고전이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면 현재적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전에는 항상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혹시 시리즈를 기다리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 있네요. 아래는 지난 시리즈의 목록입니다. 링크를 걸었으니 혹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양사상1]<논어> 정제된 인생의 철학적 시, 혹은 시적 철학

[동양사상2]<맹자>난세에 지성인으로 산다는 것

 

 

모든 學은 大學이라야 한다

- 총기난사사건과 관련하여

 

1. 사설

 

나는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을 문화가 저지른 살인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총기 허용에 대해서 대학은 '불행하지만 미국에서 총기 금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건이 學에 대한 심각한 왜곡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미국에서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은 한국으로 파견된 미군과 비교될 때가 종종 있다. 미군들은 잊어버릴 만하면 엽기적인 성폭행(60대 할머니를 성폭행하는 등)이나 폭력으로 매스컴에 이름을 알리며, 한국인 유학생들은 방황하는 문화상이나 그 안에서 배태된 '마약 문제', '각종 폭력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미국인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그에 대한 결정판이 이번 총기 난사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사실 이 사건은 한국에 더 책임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교육 문화가 이번 사건의 진범이라고 생각한다. 범인은 으레 볼 수 있는 유학생 부적응자로 지금까지 나타난 정황으로 보아 미국 유학길로 내몰렸으리라 생각된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10만에 가까운 유학생이다. 이들 중에 더러는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잠재적 부적응자가 자꾸 늘어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런 대목이다. 

 


미 이민세관국(ICE)이 최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4분기를 기준으로 미국 유학생 감시시스템(SEVIS)에 등록된 한국인은 9만3728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에 있는 전체 외국인 유학생 63만998명 가운데 14.9%를 차지, 출신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 다음으로 인도(7만6708명), 중국(6만850명), 일본(4만5820명), 대만(3만3651명) 등의 순이었다.

- 美 한국유학생 10만시대···송금도 44억弗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번 사건에서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부분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미국에 유학보내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부모/학생의 경우는 미국 유학이 바람직한 진로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명문사학이라고 일컫는 이름 있는 대학과 교육 당국은 빠져나가는 유학생들을 붙잡아두기 위한 대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내 글의 전매특허인 '사설'은 부담 없고 잘 읽히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하지만 총기 난사사건과 같은 침통한 사건을 당하여 사설의 방향이 쏠린 듯한 인상을 받는다. 논어와 맹자에 대한 서평을 힘들게 쓰고 나서 대학과 중용은 빨리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 과목의 분량을 합쳐야 논어만큼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두 달이라는 공백기를 보내고 말았다. 그보다 나를 더 괴롭힌 것은 내가 정한 룰 때문이다. 대학을 쓰기에 앞서 나는 두 달간 '대학'만을 청취했다. 그래서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특히 관료주의처럼 체계가 딱 잡혀 있어서 극적 분위기도 나지 않기 때문에 대학을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때문에 이 글을 쓰고 나서 얼른 대학에서 빠져 나와야지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2. 왜곡된 學과 大學에 대한 오해

 

學에 대한 왜곡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체성이 완전히 절단된 제국주의 시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 전에도 우리는 제대로 된 學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진정한 독립국이 되지 못했으며, 광복은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최근 새삼 깨달았다. 굴욕적인 FTA 협상과정과 교육의 사회적 기능이 처참히 농락당한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 난사 사건을 목격하면서부터 나는 주권 없는 국가의 국민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일본에게 지배당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것을 철저히 버리고, 서구의 문물에 경도된다. 전통문화는 마녀사냥을 당하고 일제 시대를 중심으로 일제 이전 문화와 일제 이후 문화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가 되고 말았다. 學이라는 말 자체에는 '두 사람'이 전제되어 있다. 즉 혼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전수를 통해 연명하는 것이다. 교육과 학습은 매우 근원적인 문제이다.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끈이 놓아진다는 것은 아틀라스가 지구를 들다 말고 도망쳐 버린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상호적인 學이 개인적인 學으로 분리와 변질을 거듭하였고, 성찰이자 목적으로의 學이 도구의 學으로 전락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앎의 學이 헤게모니의 시녀로 전락한 것이 매우 결정적 타격을 안겼으며 이것이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사건은 물론 미국 유학 1위와 함께 문제아 한인 유학생들을 낳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學뿐만 아니라 부모의 자식들 또한 헤게모니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선택에 의한 미국행이었다면 최소한의 책임이 있었을진대, 자의와는 무관하게 내몰렸다면 그 책임은 내몬 자 즉 한국사회가 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대학으로 돌아오자. 대학은 예기의 편명으로서의 위치와 사서로서의 위치를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사서로서의 위치는 소학과 대학이라는 교육의 두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삼대(하은주)가 융성할 때는 그 법도가 사뭇 잘 갖춰져 있었다. 때문에 왕궁이 있는 서울에서부터 일개 향촌에 이르기까지 교육기관이 없는 곳이 없었다. 여덟 살이 되면 왕의 공자로부터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으로 들어가서 청소하고 어른을 모시고 집안에서와 밖에서 해야 하는 행동지침과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점괘 보기 등 기본적인 교양을 가르쳤다. 그리고 열다섯이 되면 역시 천자의 자제나 대신의 자제, 그리고 서민의 자제 중 뛰어난 자를 가려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는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도를 심층적으로 익혔으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크고 작은 과목들이 적절히 분류되고 완성되었다.

- 대학 서문(주자)

 

그러니까 소학은 플라톤이 주창한 지,덕,체 중에 체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고 소학을 '초중등 과정'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천지자연의 형이상학적 이치를 초중등이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풀어놓았고, 성찰의 근원이 되는 '행동의 표본'들을 축적하는 시기가 소학의 시기인 것이다.

이것은 송대(宋代) 이후의 관점이므로 대학의 본래 취지와 다를 수 있다. 대학은 원래 예기(禮記)라는 경서의 한 편명이었다. 여기서의 대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예기를 확인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學'에 관한 이야기로 갈음하려 한다. 한중일은 '배움'이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할까. 우리나라는 '공부(工夫)'라고 하고, 일본은 '면강(勉强)', 중국은 그냥 '學'이라고 한다. 공부는 불교 용어인 듯하다.  ‘공부(工夫)’는 수행에 전념하는 것, 또는 수행에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하며, 본분에 힘을 다하는 것이란 뜻이다. 공부(功夫)라고도 하며, 주로 선종에서 많이 쓰며, 선수행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면강(勉强)'은 원래 중용에 나온 구절로서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 고된 노력 끝에 실천할 수 있다)'의 의미이지만, 일본에서는 '산고와 같이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는 노력'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비해 중국은 學이라는 일반명사를 쓰고 있다. 13억 중국인의 교과서인 논어의 가장 첫머리의 제목이 '학이(學而)'라는 말에서도 보듯 중국인들은 배움에 대해 별다른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환경일 수도 있지만, 공부에 대해서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 미화하는 부분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수명사가 될 때, 그것은 자칫 특권의식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에 들끓고 있는 향학렬이나 식자층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 등을 종합해 볼 때 學은 보편성을 갖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분극복을 위한 주무기로 완전히 전락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양극화를 가장 고착화시키는 것이 바로 '학력 세습'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근한 예로 어른들이 말하는 '공부해라, 공부해라' 역시 일반명사로서의 學이 아니라 신분상승이나 신분유지, 헤게모니 쟁취를 위한 도구적 특수명사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大'의 쓰임이다. 이 글자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大人과 巨人이다. 거인은 외양이 큰 사람을 의미하며 대인은 내면이 큰 사람을 의미한다. 즉 대인은 외양과 무관한 그 사람의 본질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大國과 强國은 어떤가. 강국은 미국처럼 깡패같이 힘만 센 나라를 지칭한다.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를 감화할 수 있는 나라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오해하는 말 중에 고학력자와 대학자가 있다. 고학력자는 가방끈이 긴 자를 말하는데, 이것 역시 대학자와 구분이 된다.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그가 비록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꺼이 그에게 '學'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겠다'(논어)라는 공자의 말과 같이 대학자는 가방끈과 상관 없이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대학은 '대인의 학문'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된다. 결국 대학이라는 말 속에는 人이 감추어져 있으며 강력한 휴머니즘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大學의 체계와 특징

 

대학은 한 마디로 삼강령 팔조목으로 규정된다. 즉 천성적으로 품부받은 선한 덕망을 확충시키는 데 있으며(在明明德), 이를 통해 만백성에게 혜택이 골고루 나눠지도록 하여 나날이 거듭나도록 만들며(在新民 또는 在親民이며 함께 해석함),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지극한 선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 데 있다(在止於至善)

이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배움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데 그것을 팔조목이라고 한다. 즉 온세계의 지도자가되기 위해서는 우선 국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국정에 앞서 가정을 잘 다독여야 하며, 온가족이 신뢰하고 존경할 만한 교양을 이뤄야만 한다. 이것이 행위의 준칙이다. 이어서 인식의 준칙이 나온다. 교양이 온몸에 충일하려면 마음공부를 바르게 해야 하는데(正心), 마음공부는 한치의 태만함도 없이 지극하고 전일한 성실함에서 나온다(誠意) 마음을 집중시켜 전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지의 안개가 걷혀야 한다.(致知) 지식의 최고 경지는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과 동화되는 데 있다.(格物)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이 역순으로 반복되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순환의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상향식도 아니고 하양식도 아니며 상호 쌍방향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음양이론의 발현을 대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장구들은 삼강령 팔조목의 주석에 해당한다.

 

대학에서 재미있는 것은 지식의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한계란 지식의 유한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인식의 한계가 결정되는 순간 행동과 실천의 기반이 생긴다. 유학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행위를 위한 지식이기 때문에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양하고 있다. 서양과 달리 동양은 문자에 대한 독점현상이 강하지 않았다. 주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대학의 가르침은 몸소 행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고 있으며, 그것 역시 일반시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상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유학이 보편성을 갖게 된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있다.

앞서는 '차등애'에 대해서 다뤘지만, '차등' 역시 유학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것은 대학에서도 드러난다. 사람마다 기질의 차이가 있고 저마다 잘하는 것이 있듯이 氣는 단일하지 않다.이는 중용에서 더욱 명확하게 그려지는 데, 학과과정을 통해 학문수준이 높아지는 단계라는 것이 동양에서는 의미가 없다. 결국 스스로 깨달은 바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수학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일종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개념이 여기서 등장하는 데 이른바 '활연관통론(豁然貫通論)'이 그것이다. 남보다 몇 배나 더 노력했지만, 깨달은 바는 남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나 그 반대의 상황을 동양은 매우 일반적인 과정이라고 인식한다. 일반적인 기준보다 자기 스스로의 기준에 더 신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한계를 단정짓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만의 굴레에 갇힌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굴레'로 단정짓기보다는 '잠재성'으로 인정한다. 만약 그가 굴레를 벗고 일어선다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번번이 소개되는데, 자발적 학습이 뿌리를 이룬 동양의 내면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4.  大學의 이상적 모델과 몇 가지 경고

 

앞서 대학이 휴머니즘을 함의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유학의 지향점이기도 한데, 한 사람의 인간으로 완성되는 정신이 바로 '심광체반(心廣體반, 반은 살질 반)'이다. 즉 덕이 온몸에 충일해 그 반반한 빛이 외양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인간형을 말한다. 일관된 인식과 실천을 보이는 지행합일의 인간은 매우 드물다는 것이 유학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몸소 완성한 자는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있다.

중용으로 치자면 중용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군자라 할 수 있지만, 공자조차도 그런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고백한 바 있다. 때문에 대학은 군자가 진정한 군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피해야 할 점을 설파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대학에서 백미로 치는 문장이다.

 

1. 마음에 노여움이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마음에 한줄기 두려움이 있어도 바름을 얻지 못하고, 따로이 즐기거나 좋아하는 바에 집착하면 역시 바름을 얻지 못하며, 따로 근심하거나 찔리는 바가 있어도 역시 바름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면 살펴도 보이지 않고,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2. 사람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따로 아끼고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편파적이기 마련이며, 미워하거나 천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역시 그에게는 편파적이기 마련이며, 두려워하거나 그 이름에 압도당하는 자가 있어도 역시 편파적이게 되며, 오만하거나 소홀히 다루는 자에 대해서도 편파적이게 된다.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는 경우와 미워하지만 그의 장점을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몹시 드물다.

- 대학 전문 7,8장

 

1은 '바름'을 방해하는 내적 요소이며, 2는 관계를 방해하는 외적 요소이다. 이것은 팔조목의 유기적인 순환을 몸소 갖추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다. 내가 바르게 살고자 하여도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이유는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당위만 있지 방법론이 없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참여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결국 '불참정부'가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성찰에는 끝이 없으며 '다가감'과 '햇볕과 같은 성의'가 있어야 도달할 수 있다.

 

5. '대학' 텍스트

 

교수신문이 펴낸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에서는 김학주씨의 텍스트(서울대학교출판부)와 함께 박완식씨의 대학(여강출판사)을 소개하고 있다. 두 텍스트를 읽어보지 않아 코멘트할 것은 없으나 교수신문의 평에 의하면 김학주씨의 텍스트는 정확하고 매끄러운 원문 번역과 상세한 해석으로 일반인에게 매우 접근도가 높다고 평하고 있다. 김학주씨는 온갖 동양고전을 다 역주한 분이지만, 나 같이 '천착형'에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역주가라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소견이다. 노자와 장자를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박완식씨의 텍스트는 대학의 선구적 주석가인 주자의 주장을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거기다 주자 이외의 설을 첨가해 주자를 보완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고 있다.

내가 접한 텍스트는 전통문화연구회의 성백효본이지만, 원문 텍스트 이외의 가치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이동환 씨의 『중용,대학』과 남회근 할아버지의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대학 강의』를 언급하고 싶다. 이동환 씨의 텍스트는 자구 해석과 용어는 고지식하고 어렵지만 '천착형'에게는 다소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이것도 남명서당에서 교수님의 추천을 받은 텍스트라는 점을 밝힌다. 남회근 할아버지의 텍스트는 주자의 주석에 반해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책값이 비싸고 두꺼운 만큼 일상의 예시와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곁들이고 있으므로, '다양한 담론'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어울리는 텍스트라 생각한다.

 

 

 

 

 

6.  大學의 사회학

 

이번 총기난사사건에 대한 대학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이번 살인은 방황하는 청년이 아니라 문화가 저지른 살인이다.

2. 이것은 學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참극이다.

3. 미국의 수정헌법이 아니더라도 총기사용에 대한 금지는 불가능하다.

4. 협력사회, 협력문화의 힘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

 

조선시대만 해도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국무회의에 상정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도 국무회의를 하고 있지만 '한낱 택시운전사의 자살'이라는 오늘날의 국무회의는 대체 어느 나라의 국무회의인지 부끄러울 지경이다. 조선이 살인사건에 대한 국무회의를 한 것은 사건의 희소성도 희소성이지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에 대한 당국의 유기적인 협력이 주 의제라 할 수 있다.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엽기적인 살인이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테러는 일어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 엽기적인 사건도 일어날 수 있는 사회분위기이며, 그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사회분위기 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무방비하다는 데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학력신장을 위주로 한 교육 병폐는 그대로라고 진단했다.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어요. 대학을 가기 위해 전부를 걸었고 나머지는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죠. ‘학력신장’ 앞에 ‘인성교육’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
그는 학교교육에서 인성도, 학력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겉보기에는 두 마리 토끼 같지만 사실은 ‘한 마리’라고 했다. 학생들의 인간관계를 우선적으로 회복시켜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집중력이 생겨야 학력이 높아진다는 주장이다.

- 강석준 교장 “인성과 학력은 한마리 토끼”

 

 

"집안을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바로잡지 못하므로 군자는 집을 나서지 않고서도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라는 말처럼 대학은 한 가정과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절대적이다. "일가가 仁을 이루면 국가에 인덕이 넘쳐나지만 한 사람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먹으면 국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난다"는 말 역시 유의할 대목이다. 가수 김흥국은 4년째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고 있는데, 평소 보이던 이미지와는 달리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매우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심경을 토로했다. (김흥국 관련기사)이것이 우리 가정의 현주소다. 살인자 조승희 역시 방황하는 1.5세대 이민가족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두 가족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가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증거이다.

미국이 총기소유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대학에서 이치로 증명하고 있다.

 

순임금이 천하의 사람들을 仁으로 이끌자 백성들이 이에 화답하였고, 폭군 걸주가 천하 사람들을 포악함으로 이끌자 백성들 역시 이에 화답하였다. 걸주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순임금의 인덕으로 이끌려 한다면 백성들은 극심하게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군자는 자신이 갖춘 것만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이 완전무결한 후에야 남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다.

- 대학, 9장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컬럼바인'이라는 다큐에는 '폭력의 미국 역사'가 잘 그려져 있다. NRA(전민총기협회)로 대표되는 대규모 로비 그룹은 헌법에 총기 소유를 명문화하는 데 일조했으며, 총기에 대한 여론을 압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대 행정부는 물론 언론까지 가세하여 전미에 공포분위기를 심어놓음으로써 무기 소비와 무기 개발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디트로이트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캐나다 도시 윈저에는 3년간 총기 살인이 1건 발생했는데, 그것 역시 디트로이트에서 건너온 미국인의 소행이라 한다.

미국의 이야기는 그만 하자. 지면을 거기에 쓸 이유는 없다. 대학을 포함한 유학은 일상적인 수준의 언어 활용에도 불구하고 거론하는 사상의 외연이 광범위하다. 하늘과 땅은 물론 한 국가, 한 가정, 한 사람, 그리고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마음의 움직임 등에 대해서 속속들이 헤아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용에서 아주 거침없이 펼쳐진다.

대학이 총기 난사 사건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1인으로 시작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왜곡된 學을 바로 세우는 것도 포함된다. 동양의 성어에 호리지차천리지말(毫釐之差千里之末)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우 터럭만큼 조그마한 차이가 천리가 넘는 차이를 만든다는 말이다.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 대학의 지론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에 표현된 협력문화와 국가의 운명에 관한 문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한 사람의 신하가 있는데 이는 매우 단정하면서 별다른 기술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맑고 깨끗해서 온몸에 관용이 넘쳐난다. 만약 자기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그는 마치 자신이 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뻐하며, 지혜로운 뜻을 가진 사람이 보이면 마음 속으로 그를 신뢰하여 단지 입으로만 찬사를 늘어놓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더욱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이것이 바로 자손과 국민을 보존하는 사고방식이니 매우 커다란 이익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재능을 질시하고 큰 뜻을 가진 사람의 메시지를 끝내 무시하여 그를 좌절시키고 만다. 이것은 자손과 국민을 재앙에 빠뜨리는 일이니 그 자체가 커다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 대학, 10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자로 산다는 것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 23명 지음 / 호미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슴으로 쓰는 리뷰

- 1. 서문

 

사실 이 글의 제목은 ‘가슴으로 쓰고 싶은 리뷰’이다.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시사모’)의 행사가 있던 날, 지각한 나는 빈자리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몇몇 사람들이 참여하는 조촐한 모임이라 생각하였는데, 대부분의 시사저널 기자들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시사모 회원 즉 독자들도 모여 있었다.

공식 행사 중 복학을 앞둔 독자의 편지 낭독이 진행 중이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순수한 걸까. 저마다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인사를 건네 달라고 권했다. 준비된 멘트가 없이 나는 ‘내가 안일했다’는 말만 반복하며 우리들의 만남을 근사하게 만들어 가자고 제안했다. 뒤이은 술자리에서 문정우 기자님이 나에게 ‘가슴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잘 들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가슴이 콱콱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번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나의 분노와 우리 언론의 처지에 대한 슬픔이 교차되어 숨을 고르며 이야기했던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일독했지만, 시사모 모임 이후 자세를 곧추어 잡고 다시 읽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가슴으로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가슴으로 쓰는 리뷰’의 ‘서문’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리뷰 형태로 만들어진 ‘긴 서문’이다.

이 글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리뷰’의 첫 장이다. 나는 이 글을 완성하기 위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만나볼 요량이다. 만나서 그들의 심사와 그간의 사정을 묻고 이를 생생히 기록하고 싶다.

그 전에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1. 반성의 기록

 

반성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명백한 잘못에 대한 회한’이며, 다른 하나는 ‘냉철한 성찰로 인한 자아의 발견’이다. ‘반성’이라는 것은 ‘용기’와 ‘성찰’의 절정이다. 보라. ‘명백한 잘못’에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으냐. ‘기자로 사는 법’은 ‘반성의 기록’이다. 이것은 ‘반성문’과는 구별된다. 차라리 시사저널의 역사와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한 ‘묵시록’이다. 이 책의 한 기자는 ‘시인 김수영’을 반성의 거울로 삼았다.

 

그의 산문은 원고지 네댓 장짜리 조각 글 하나도 허투루 쓴 것이 없는데 스스로에게는 ‘글을 팔아먹지 말자’고 채찍질하고 있다. 치열한 시인의 문학 정신과 오죽한 기사 문장 따위를 비교하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냐마는 어쨌든 그 날로 당장 나는 원고 장사를 마감했다.

- 김상익 전 편집장, 21~22쪽

 

이들은 왜 반성의 글을 남겼을까. 이들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아니면 냉정히 성찰할 것이 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시사저널의 한 기자가 복잡한 심사를 기탁한 칼럼의 조각으로나마 반추해볼 뿐이다.

 

“내몰려 본 자는 안다. 그 황량한 무력감과 들끓는 분노와 어이없음과 수시로 떠오르는 회한들을.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적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역시 한 세상이 돌고 또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의 실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거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패배주의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처세담화의 절정을.”

- 문학평론가 이명원, 한겨레 칼럼(기자가 시사모 사이트에 인용함)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업의 현재 상황에서 그들이 두려운 것은 바로 스스로의 마음이다. 가슴의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뛰어다니고 정신없이 마감을 해야 하는 터전에서 내몰려 고독하고 피로한 싸움을 하다가 혹시나 현실에 굴복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파고들 때 이들이 부여잡을 수 있는 ‘부적’이란 바로 열정과 정신이 보존되어 있는 이 기록일 것이다.

사람은 목마를 땐 목을 축이고, 눈앞이 막막할 때는 영감을 주는 ‘뿌리’가 필요하다. 시사저널 기자들에게 이 책은 온전한 ‘뿌리’의 역할을 할 것이다.

 

 

2. 대간(臺諫)이라는 자의 사명과 언론의 매너리즘

 

사간원(司諫院) : 조선 시대에, 삼사 가운데 임금에게 간(諫)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태종 원년(1401)에 설치하여 연산군 때 없앴다가 중종 때 다시 설치하였다.

대사간(大司諫) : 조선 시대에 둔, 사간원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삼품으로, 임금에게 정사의 잘못을 간(諫)하는 일을 맡았다. <표준국어대사전>

 

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임금이나 웃어른에게 잘못된 일에 대하여 직접 말하는 일, 즉 직간(直諫)이었다. 때문에 신변의 위협은 물론 멸문지화를 당할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관직이 사라졌지만, 이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론직필(直論直筆)을 일삼는 사람들, 바로 기자들이다.

진실은 때로 매우 큰 위험을 동반한다. 소송이 빈번하고 살해 위협이 상존하고, 실제로 살해되기도 하는 이들이 바로 기자이다. 유럽에서 코소보 사태가 발발했을 때 공항이 폐쇄되었는데, 수십 시간 대기해야 하는 탑승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단 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바로 작가와 기자이다. 그만큼 유럽인들이 이들에게 가지는 존경심은 대단하다.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 즉 기자가 모시고 받드는 왕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이들에게 대사간이라는 관직을 허락한다. 다만 나 같은 왕이 수천만은 된다는 것. 이 관직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왕들의 관심과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나는 실은 경향신문의 애독자이자 열독자이다. 직론직필(直論直筆)은 다름 아닌 경향신문의 사시(社是)이기도 한데, 2~3년 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사를 서캐훑이하고 스크랩을 해놓은 것이 1만개가 넘는다. 신자유주의와 천민자본주의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 척박한 환경에서 비판적이고 균형적인 논조를 유지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매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들만큼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직업이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시사모 뒤풀이에서 만난 한 기자에게 ‘매너리즘에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바로 기자’라고 서슴지 않고 얘기했던 것이다.

기자님들이여, 신문의 독자와 함께 옛일을 돌이켜보자. 마감에 쫓겨 설익은 기사를 송고하다 못해 그런 일에 무감한 적이 없었는가. ‘~라고 밝혔다’, ‘~한 대목이다’, ‘~라고 회고했다’와 같은 상투적인 표현 안에 무책임을 감춘 적이 없었는가. 독자들은 안다. 이 기사가 발로 뛰면서 만들어낸 기사인지, 기자의 타성에서 배설된 것인지. 대다수의 언중은 속일지언정, 한 사람의 독자는 속일 수 없다. ‘정부 당국자에 의하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과 같이 익명의 취재원을 남용한 적이 없었나. 혹은 스스로 그 익명의 취재원이 된 적은 없었나. 금창태 사장이 말한 ‘익명 취재원 불가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익명의 취재원에 대한 남용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매너리즘은 기자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이에 대한 한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자.

 

돌이켜보면 언론의 무관심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CBS 사태 혹은 ‘경인일보’ 사태 때 나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사태에 대해서 알아보았나? 아니면 시사저널 사태와 비슷한 시기에 발발한 ‘시민의 신문’ 사태와 ‘인천일보’ 사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나?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시사저널 사태에 무관심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 고재열 기자, 237쪽

 

기자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이유는 또 있다. ‘새로움’을 보여주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관료적 특성’을 다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이나 작가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시장에서 또는 독서계에서 도태된다. 하지만 기자들은 무심한 시청자, 관객, 독자들의 새로운 취향을 좇으면 그만이다. 구조적으로 기자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 대해서 면역성이 취약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시사저널의 기자들이 대한민국 언론의 ‘매너리즘’에 대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진실은 자수하는 법이 없다.

 

김훈, 아니 김국은 시사저널 기자들의 ‘비빌 언덕’이다. 김국은 고백한다.

 

오늘 시사저널의 사태는 저 개인의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30년 전 내가 젊은 기자였던 시절에 우리나라 언론들이 바로 이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그 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 시절이었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 자리에서 무너졌던 것입니다. 저도 그 때 무너진 기자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할 말이 없어야 마땅한 사람이죠.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내 후배들이 다시 같은 자리에서 무너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30년의 세월을 무효화하는 것이고 인간의 진화와 발전을 부정하는 사태이기 때문에, 나는 내 후배들이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끝없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김훈의 인터뷰, 223쪽

 

김훈은 1995년 후배 기자에게 하나의 지시를 내린다. 때는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명하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던 시기였다.

“5.18 당시 언론이 얼마나 웃기는 보도 행태를 보였는지 되짚을 때가 됐으니 관련 내용을 취재하라”는 그 요지였다.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경향신문), ‘역사의 혼이 키워 낸 신념과 의지의 30년’(중앙일보), ‘우국충정 30년-군 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생관’(동아일보),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한국일보) 같은 기사들을 보며 나는 실소했고 또 분노했다. 기사를 일람한 뒤 당시 언론 상황에 밝은 전현직 언론인들을 취재하고 돌아와 단숨에 기사를 써 내렸다. 나는 의분에 차 기사를 썼고, 실제로 기사가 나간 뒤 반응도 뜨거웠다. 1980년의 언론 행태를 비판적으로 보도한 매체는 당시 시사저널이 거의 유일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가고 난 뒤 김국이 폭탄선언을 했다. 한국일보의 신군부 찬양 기사를 자신이 썼다는 것이었다. 한국일보 기사의 바이라인(기사에 필자 이름을 넣는 일)이 ‘특별취재팀’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김국이 그 일에 연루돼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노하기보다는 허탈했다. 그 뒤로 나는 김국이 세상에 대해 보이는 ‘위악(僞惡)’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80년 당시 그는 5년차 기자였다고 했다. 편집국 위계에서 5년차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막 날개를 펴려던 청년 기자에게 너무도 가혹한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 김은남 기자, 111~112쪽

 

정의와 진실은 항상 뒤늦게 발동한다. 또는 영원히 파묻힐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양에 따라 사회적 성숙도가 결정된다. 진실을 숨기려는 자들은 알아야 한다. 진실을 숨기는 것은 소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거대다수에게는 좌절을 안겨준다. 때문에 ‘진실’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을 ‘감히’ 숨기지 않는다. 진실을 숨기는 사람들은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한 진실과 정의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다. 진실과 정의가 늦게 발동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를 헷갈려 하기 때문이다. 진실 판단에는 시간과 성찰이 필요하다. 만약 당신이 생각보다 일찍 진실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거나, 아주 오래 전부터 진실이 몸에 밴 경우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너무 늦게 진실을 알았거나 정의와 너무 멀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고유 특성이므로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최악의 경우는 지금과 같은 경우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정의가 사라지고, 매체도 기자도 진실과 정의에 불감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상식’으로 통할 때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것으로 밥을 먹는 언론과 이들의 비즈니스에 존경을 표하는 사회에서 ‘언론정신’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이때의 진실과 정의는 ‘뒤늦은 것’인지 ‘없는 것’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는 스스로 자수하는 법이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잡으려는 사람에 의해 끌려나올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목숨을 걸고 진실을 잡으려다가 진실에 채여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시사모 행사에서 보았던 기자들은 상처받았고, 오랜 시간 시달렸기 때문에 맑은 정신이 눈에 보였다. 나는 이 아름다움이 어떤 아름다움인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이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싶다. 왜냐하면 진실과 정의는 뒷발로 채이면 몹시 아프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aduck 2007-04-2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승주나무 2007-04-2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duck 님// 쑥스럽습니다. 조금 애정이 있을 뿐이죠. 아무튼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PD수첩을 좋아하고, 신뢰한다.
온 국민이 불매운동을 벌일 때부터 잠시 잊었던 채널을 다시 돌렸다.
광고 없이 바로 만난 최승호 씨의 상기된 표정은 지금도 선하게 기억에 남는다.

한 편의 책은 아니었다.

다만 책의 형식으로 그려진 다큐멘터리이다.

발가벗겨진 사건의 기록이며, 거친 악몽의 기억이다.
만약 이 사건에서 사회구조적 문제를 성찰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소재로 스스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다양한 묵객들의 성찰에 의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독 하고 나서 이런 실망감이 들 수는 있다.

책의 대부분이 취재노트와 취재뒷이야기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술의 취지 역시 이러한 데에 있었지만,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좀더 진지하고 무심할 정도로 거리를 두고 냉정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내어야 하겠지만, 이 책에서 그런 모습은 찾기 어렵다.

소재는 우리 사회의 폐부를 깊게 찌르고 있으나,

소재를 풀어내는 서사는 편린에 머물렀으므로 안타까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우리 사회의 학문과 언론, 권력의 관계에 대해서 따져보기로 했다.


1. 작은 권력이 큰 권력에게 고전하는 모습을 본 개인으로서의 소회

 mbc는 공신력 있는 매체이며 그에 비례해서 권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mbc가 통째로 날아갈 뻔한 일이 있었다.
나는 단지 pd수첩이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mbc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조잡하게 작은 권력, 큰 권력, 개인으로 권력의 원천들을 삼분화하였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언론매체가 항상 작은 권력이 되는 것도,
황우석이나 정부가 항상 큰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의 응원에 따라 권력균형이 깨질 수 있다. 황우석 씨가 엄청난 지지를 얻으며 언론사를 선별할 정도가 되었다면 큰 권력이다.
기득권을 고수하고 있으면 큰 권력이다. 밤의 대통령인 조선일보가 큰 권력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기득권이 있고, 그것을 고수하려고 바둥바둥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권력은 스스로 큰 권력임을 포기할 때 생긴다. 작은 권력은 방향이 분명하다. '대항'하는 권력이다. 황제 리쿠르고스가 왕권을 내려놓고 국민의 편에 설 때 작은 권력이 생기며, 우리은행의 행장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선언할 때 작은 권력이 생긴다.

만약 황우석 씨가 정말로 세계의 불치병 환자들을 위해 연구에 전념했다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작은 권력'의 영광을 선사할 수 있다. 이 때의 큰 권력은 물론 '난치병'이다. 대항의 대상은 큰 권력이며, 대항하는 자는 작은 권력이다.

개인은 캐스팅보드이다. 하지만 개인은 저변과 문화의 힘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mbc라는 작은 권력이 날아갈 뻔한 것은 개인의 힘이 컸다.
즉 개인들은 mbc를 큰 권력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본 PD수첩은 항상 작은 권력의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권력이 큰 권력이 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 나날이 새롭고 또 새롭게 되는 것)하지 않을 때, 히딩크 감독의 말과 같이 항상 배가 고프지 않을 때, 제 자리에서 한몫 잡고 안주할 때 큰 권력이 생긴다.
개인은 위치를 분명히 할 수 있지만, '나'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기여할 수 없었다. '나'와 '개인'이 괴리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찌 보면 선문답 같은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실존하는 '나'와 '동시대인으로서의 개인'은 무관하지는 않으나 같다고 하기도 어렵다.

K는 작은 권력과 개인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주인공인 저자는 작은 권력과 큰 권력, 개인을 모두 넘나들었고, 황우석 씨는 큰 권력에만 있었으나, 가상의 작은 권력과 큰 권력을 만들어냈다.

2. 절대악은 절대악이 아니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절대악'에 대해 생각했다. 악의 이데아를 '절대악'이라고 한다면, '절대악'은 '절대악'이 아니다. '절대악'은 가공의 악에 불과하다.

만약 하느님과 사탄이 자신의 마을을 가지고 있다면, 사탄의 마을에 절대악은 없다. 절대악은 '하느님'의 마을에 있다. 물론 하느님이 악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사탄이 키운 것이다. 사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키우는 악에 우리가 악의 이데아라고 부르는 '절대악'이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

왜 황우석 씨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절대악'을 끄집어냈을까?
이 책에는 두 개의 '절대악'이 존재한다. 하나는 가공의 절대악이며 하나는 '이데아의 절대악'이다. 가공의 절대악은 mbc이며 PD수첩이다. 황우석 씨가 만들어낸 가상의 절대악이며, 개인들은 이것을 이데아의 절대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황우석씨가 이데아의 절대악인가? 이데아의 절대악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황우석 씨는 스스로를 논리의 결계에 가두고 가상의 절대선이 되었다. 누구나 자신이 옳지 않다고 할 때 가장 분노가 치미는 법이다. 때문에 악행을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스스로에게는 악행이 아닌 것이다. 이때 그 그 사람은 악행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악인이 되어야 한다면, 자신이 지목되지 않도록 가상의 악인을 만들게 된다.

나는 황우석씨가 악한 마음을 품고 이런 사기극을 벌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사기를 치려고 생각했더라면 이와 같이 거대한 사기극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논리의 결계에 갇혔거나 이데아의 절대악에 놀아난 것이라 생각한다.


3. 가혹한 추위가 찾아와야 푸르름이 드러난다.

歲漢然後知松柏之後凋 <논어>
(세한연후송백지후조 : 찬 겨울이 지나고 나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오래도록 푸르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나는 책을 읽고 책 어딘가에 흔적 남기기를 좋아한다. 특히 앞 껍데기나 뒤 껍데기에다가 메모를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위와 같은 메모가 생각나 남겼다.

대한민국은 벌거벗겨졌고, 아직도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다.
고난이 친구를 불러모은다고, 이와 같은 시련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을 알 수 있었다.
시련이 고마운 것은 사실은 친구가 아니었던 사람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책의 가장 고마운 점이라면
가혹한 시련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변모해가는 사람들과
가혹한 시련에 변모하지 않으려고 바둥거린 사람들을 분명히 보여줬다는 데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맹자 - 대학고전총서 8
홍인표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2년 7월
평점 :
품절


동양사상 시리즈 논어에 이어서 맹자를 정리합니다. 아래는 동양사상 시리즈 전편의 목록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기에는 첨부파일을 붙일 수 없으므로 클릭하시면 첨부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맹자의 원전을 따로 정리한 한글파일입니다. 이 글과 별개로 보아도 좋고 연관지어서 함께 보아도 좋을 듯싶습니다.

[동양사상1]<논어> 정제된 인생의 철학적 시, 혹은 시적 철학 

[동양사상2]<맹자> 난세에 지성인으로 산다는 것

 

 

난세에 지성인으로 산다는 것

 

1. 호사가들의 맹자 뒷담화

 

맹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행작업을 하는 것이 좋다. 사서와의 관계 속에서 맹자의 철학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논어, 대학, 중용, 맹자 중에서 논어는 입구이자 출구라고 할 수 있지만, 독법의 순서도 순서이거니와 본령의 마무리 역시 맹자를 추천한다. 사서라는 것은 마치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과 같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는데 오나라의 부차가 아버지의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땔나무에서 잠을 잤다는 말[와신]과 월나라 왕이 오나라에게 패하고 나서 쓸개를 빨아먹으며 결의를 다졌다는 말[상담]의 운명과 같이 본의 아니게 정해졌다. 송나라 시대에 주희 등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사서로 정해졌는데, 맹자는 그 유명한 역성혁명(易姓革命) 의혹 때문에 사서에 끼기에 난관이 많았지만 결국 말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호사가들의 뒷담화이고 맹자는 사서의 실전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때문에 재벌의 순환지배구조처럼 대학이 논어의 지분을 얼마 취득하고, 중용이 대학의 지분을 차지하고, 맹자가 또 이런 식이다.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맹자만 읽는 것도 상관없지만, 빚지고 있는 게 그만큼 많기 때문에 맹자의 지분을 취득하고 있는, 맹자를 형성한 책들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동양고전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는 것은 두 번 이상 읽어야 뜻이 녹아든다는 점이다. 맹자는 명쾌히 논리를 끝내므로 다른 고전보다 심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최소한 20살에 한 번 30살에 한 번씩 해서 십년에 한 번씩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두 번째는 시대 상황이다. 맹자는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사상가다. 전국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합종과 연횡의 무리들이 암투와 권모를 총동원하여 빠른 시간 내에 상대의 목을 쳐야 살 수 있었던 시대이다. 전국시대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전국책의 구절을 옮겨본다.

 

감무는 진나라 상국이 되었다. 이때 진무왕은 공손연(公孫衍 ; 서수)을 총애한 나머지 하루는 그와 사담을 나누면서 이같이 말했다.

“과인은 장차 그대를 상국으로 삼고자 하오.”

진무왕이 은밀히 공손연에게 말하는 것을 감무의 부하가 땅에 구멍을 파 몸을 숨기고 있다가 몰래 엿들은 뒤 이를 감무에게 일러바쳤다. 감무가 곧바로 예궐해 진무왕을 알현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대왕이 어진 상국을 얻었다 하니 신은 감히 재배하여 축하드리고자 합니다.”

“과인은 나라를 그대에게 맡기고 있는데 어찌하여 또 현상(賢相)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오.”

“대왕이 장차 서수를 상국으로 맞이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대는 어디서 그같은 얘기를 들었소.”

“서수가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지무왕은 공손연이 누설한 것으로 알고 대노하여 이내 그를 쫓아내고 말았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중에서

 

위왕이 초회왕에게 미인을 보냈다. 이에 초회왕이 크게 기뻐했다. 초회왕의 총희 정수(鄭袖)는 초회왕이 새 여인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새 여인을 몹시 예뻐했다. 이에 의복과 완구물 등은 물론 기거하는 거실과 침구에 이르기까지 새 여인의 취미에 맞춰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골라주었다. 정수는 초회왕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새 여인을 예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초회왕이 크게 감격해하며 이같이 말했다.

“부인이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미색 때문이고 질투하는 것은 정 때문이오. 그런데도 지금 정수는 과인이 새 여인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과인 이상으로 새 여인을 아끼고 있으니, 이는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고 충신이 군주를 섬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정수는 초회왕이 자신을 질투심이 없는 여인으로 믿게 된 사실을 알고는 이내 새 여인에게 이같이 말했다.

“대왕이 그대의 미색을 사랑하고 있으나 그대의 코만은 싫어하고 있소. 그러니 대왕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코를 손으로 가리도록 하시오.”

이에 새 여인은 초회왕을 볼 때마다 손으로 코를 가렸다. 초회왕이 의아하게 생각해 정수에게 이같이 물었다.

“새 여인이 과인을 만날 때마다 코를 가리니 이는 무슨 까닭이오.”

“소첩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비록 듣기 거북한 말일지라도 서슴지 말고 말하시오.”

“그녀는 대왕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자 초왕이 격노하여 이같이 하명했다.

“참으로 무례하기 그지없구나.”

그리고는 당장 하령하여 새 여인을 코 베는 의형(?刑)에 처하는 한편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치 못하게 했다.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 중에서

 

전국시대는 대의를 말하기에는 참으로 가혹한 환경에 있었으므로 맹자나 그밖의 제자백가의 정의가 틀렸다기보다 전국시대 자체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맹자를 만나본 임금들은 하나같이 ‘우활(迂闊)하다’고 평했는데,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유학은 농경 학문이다. 하지만 전국시대는 유목민의 시대이다. 농경 학문이라고 하는 이유는 토양에 햇빛이 들고 쟁기질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비가 제때 내리는 조건이 성립해야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자의 말처럼 배가 따뜻해야 부끄러움을 아는 법인데, 살을 뜯어먹는 아비귀환 속에서 정의를 챙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이야 하겠는가. 공자와 맹자가 평생을 주유하면서도 뜻을 얻지 못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인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2. 모든 법률은 헌법을 모체로 한다.

 

모든 유학은 공자를 모체로 한다. 공자 이전에 유학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자가 집대성했기 때문에 공자를 유학의 비조로 보는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소원이 ‘공자를 배우는 것[學孔子]’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후세 학자들에게 공자의 철학을 ‘확이충지(擴而充之)’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때문에 맹자의 학설은 공자의 학설의 주석과 같이 작용하고 있으며, 동시에 공자의 학설에 배치될 수 없다.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을 일컬어 ‘플라톤의 주석서’라고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맹자의 서술체계는 논어와 같이 앞 글자를 따서 제목을 붙였으며, 당시 동서양의 보편적인 추세인 대화를 기본 골격으로 구성하였다. 때로는 맹자가 단독으로 학설을 주장한 부분도 있었으나 포괄적으로 ‘자왈(子曰)’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글을 익히기 위해 주로 논어를 전범으로 하거나 맹자를 전범으로 했다고 한다.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전범으로 글을 익혔는지는 그 사람의 한문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처럼 문학과 예술 등 감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논어를 좋아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맹자를 좋아할 것이다. 논어는 마치 한편의 시와 같이 압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반복적인 독서와 체험을 통해 행간을 채워야 하는 반면, 맹자는 논리의 엄격한 체계를 유지하려 하므로 학술서 분위기가 많이 풍긴다. 사람들이 대개 맹자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체계 때문이다. 예컨대 논어가 인생 전체의 관점에서 사유를 전개한다면, 맹자는 개념이나 관념 중심으로 분석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특히 인간 본성의 영역에 대한 고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철학을 확충함과 동시에 유학을 기본 모델을 완성하였다는 공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장이 제기하는 유학의 비판적인 특성은 대개 맹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공자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신격화(神格化)시킨 장본인으로서 유학을 계보와 대통의 관점으로 왜곡하고 순수한 학문의 정신보다 정파성을 갖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영웅주의는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배타주의를 함의한다. 노장이 비판하는 유학의 특징들은 대개 맹자에서 나타난 특징들과 유사하다. 공자 시절만 하더라도 유학이 학문으로 정리되지 않았고 진득한 경험을 통한 처세의 도를 전수하였다면, 맹자는 체계를 확립함과 동시에 이단에 대해서 보다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여기서 공자가 도(道)와 성(性)을 말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궁극의 가치는 유연한 정신에서 비롯되지만 어느 한 관점에 주력한다면 그만큼 궁극의 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단을 공격하는 동양철학의 학풍은 대개 맹자로부터 연유한다.

 

 

3. 유학의 관점에서 본 맹자의 기본 철학

 

맹자는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유학의 궁극적 목표를 담고 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유학의 궁극 목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자기 몸을 바르게 닦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까지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즉 안으로는 성인의 도를 체화하고 밖으로는 왕업을 이루는 것이다. 다만 유의할 점은 수기와 치인, 내성과 외왕이 이분화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대학의 경문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유학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준다. 경문에 이어 나오는 내용은 그 역순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신(修身)으로부터 시작되는 순서와 평천하(平天下)로부터 시작하는 역순이 긴밀히 결합함으로써 유학의 본령이 달성되는 것이다.

맹자는 대개 성선설(性善說)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오해를 하게 된다. 맹자 또한 선한 본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비율은 매우 적으며 현실에 금방 함몰될 만큼 위태로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

 

“우산의 나무는 처음에는 무성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이 큰 나라의 교외에 있었기 때문에 도끼를 가진 사람들이 이를 찍어대니, 무성하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밤낮으로 잘라는 바요, 비 이슬이 적셔 주는 바라, 싹과 가지가 돋아남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소와 양이 또 들어와서 그것을 뜯어먹었다. 그래서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되었다. 사람이 그 민둥산을 보고서는 처음부터 재목이 없었다고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라 하겠는가?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도,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으랴? 그 양심(良心)을 방치해 버리는 것은 역시 나무에다가 도끼를 대는 것과 같다. 하루 하루 이를 찍어내면, 무성하게 자랄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길러지는 양심과 새벽의 기운은 그 좋아하고 싫어함이 사람과 서로 근접하다는 것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대낮에 하는 행위가 또 이것(양심과 새벽기운)을 어지럽히고 없애버린다. 이것을 어지럽히는 일을 반복하면, 밤에 길러지는 기운은 존재할 수 없다. 밤에 길러지는 기운이 존재할 수 없다면, 그는 금수와 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가 금수와 같은 것을 보고서는 일찍이 재질이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성정(性情)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에 배양함을 얻으면, 어떤 사물이나 자라지 않음이 없고, 만약 그 배양함을 잃으면, 어떤 사물이나 소멸하지 않음이 없다. 공자는 ‘잡아주면 살아 남고, 버려 두면 없어진다. 출입에 일정한 시기가 없으니, 그 고향을 알지 못한다.’하셨으니, 바로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

『맹자(孟子)』, 「고자 상 11절」

 

우산의 비유로서 성선의 실상을 인정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사실 맹자와 순자는 성선과 성악으로 구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크게 다르지 않다. 순자가 후천적 교육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본질이 악(惡)이라면 교육의 가능성 또한 운운할 여지가 없다.

민심(民心)을 천심(天心)에 비유하여 최고의 가치로 평가한 것은 맹자의 업적이라 할 만하다.

 

“백성이 귀중하고, 사직(社稷)이 그 다음이고, 군국(君國)은 경미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 대부가 된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바꾸어 세운다. 제사에 쓸 희생동물이 살찌고, 제물로 고여 놓을 곡식이 깨끗하게 마련되어 제사를 때에 따라 지내는데, 그런데도, 한발(旱魃)과 수재(水災)가 난다면, 사직을 갈아치운다.

『맹자(孟子)』, 「진심 하 14절」

 

유학에 뜻을 둔 선비들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생각하지만, 이것이 유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후세의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정치적이고 처세적인 의미를 부연해서 거품이 생긴 것일 뿐이다. 공맹의 유학을 선진유학(先秦儒學)(진나라 이전의 유학) 또는 원시유학(原始儒學)이라고 부르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맹자는 다섯 가지 고유한 관계, 즉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그 중에서도 효(孝)를 가장 강조했다. 효경(孝經)이 따로 있을 정도로 유학은 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물며 군대의 신병교육대에서도 효를 군기의 상징으로 두고 있지 않은가. 맹자는 순임금을 효의 상징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맹자가 말하는 효는 현실의 법규를 뛰어넘을 만큼 절대적인 가치이다.

 

도응이 물었다. “순이 천자가 되고, 고요가 법관이 되었을 때, 만약 고수가 살인을 했다면,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맹자 : “그를 체포할 뿐이리라.”

“그렇다면, 순이 막지 않겠습니까?”

“대저 순이 어찌 막을 수 있겠나? 이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있다.”

“그렇다면 순은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순은 천하를 버리기를 마치 헌신짝처럼 한다. 몰래 아버지를 등에 업고 달아나서, 해변을 따라가다 머물러 살면서, 평생토록 기뻐하며, 즐겁게 천하를 잊을 것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 35절」

 

맹자는 부귀와 여색 등 현실에서 최고라고 여기는 가치를 효의 가치와 비교하는 것을 불허한다. 군자삼락(君子三樂)은 맹자의 구절 중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유학의 본질이 어김없이 펼쳐진다.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같이 있지 않다.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고, 형제가 사고가 없으면, 첫째의 즐거움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음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맹자(孟子)』, 「진심 상 35절」

 

대개 영재교육이나 학습지, 논술학원 광고지 같은 데 보면 세 번째 즐거움이 유독 강조되는데, 맹자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성선설 외에 맹자 하면 떠올리는 이야기이지만 방점을 잘못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볼 때 이 구절의 방점은 ‘왕천하는 즐거움에 포함되지 않는다’에 있다. 두 번이나 강조했기 때문에 알아보기 쉬울 것 같지만 대체로 이 방점은 무시되기 쉽다. 이는 입신양명이라는 유학의 전매특허와 배치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즐거움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관점으로 분석했을 때 수기와 치인이 2:1의 비율을 보이지만 유학의 열정은 대부분 수기에 바쳐진다. “제자는 안으로는 효도에 정성을 다하고 밖으로는 공손하며, 언행을 삼가고 미덥게 하며, 널리 많은 사람을 사랑하되 인(仁)한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울 것이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논어(論語)』, 학이(李)>)라는 말을 수기치인에 적용하면 ‘생활의 모든 공력을 수기에 쏟고 여력이 있거든 치인을 해라’는 결론이 된다. 불교에서도 소승(小乘)은 수기(修己)와 어울리고 대승(大乘)은 치인(治人)과 어울리는데, 자신의 몸을 닦는데 한정되었다고 ‘소(小)’를 입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치인이 수기를 감싸면 유학에서는 크나큰 배신이 된다.

맹자가 함의하는 기본적인 정신을 유학의 기본 관점에서 살펴보았는데, 성선설(性善說)은 유학의 관점이라기보다는 맹자의 관점이므로 기본 철학에 들어가기보다는 맹자의 캐릭터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4. 맹자의 『맹자』라는 책

 

맹자의 맹자, 장자의 장자, 순자의 순자 등 철학자의 이름이 책의 편명과 동일한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맹자는 제자백가의 철학서 중에서 저자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책이다. 주희가 엮은 사서의 맹자 서문과 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맹자는 직접 편수작업을 했다고 한다. 때문에 비교적 철학의 개요와 저술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각 장절이 가지고 있는 논의의 요지를 살펴보면 맹자 철학의 대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각 장은 ‘상,하’로 구분되며 첫편부터 양혜왕, 공손추, 등문공, 이루, 만장, 고자, 진심 이렇게 7편으로 구분된다. 각 장은 맹자의 철학을 요소별로 포함하고 있으며 장과 장의 관계는 자못 유기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양혜왕부터 진심까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요지이므로 짧게 정리한다. 각 장의 상,하는 개별적인 의미가 있어 세분화하는 게 좋지만 여기서는 상하를 모두 묶어서 정리한다.)

 

 

1) 양혜왕편

 

맹자 양혜왕은 장 중의 첫 장이자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로 소개되는 것은 따분한 정치 이야기이다. 정치 이야기로 가득한데 어찌 맹자의 으뜸이라 할 수 있을까. 정치는 인간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인간 관계의 본질이다. 생물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치를 한다. 새 새끼는 자기가 먹이를 더 많이 받아먹기 위해 목청을 높여 형제들의 목청을 묻어버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맹자 학문의 출발점이 ‘맹자’의 첫 편에 고스란히 실린다. 그것은 다름아닌 현실이다. 모순과 허위로 가득찬 왕과 그를 둘러싼 정계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고, 백성들이 겪는 구조적 모순이 벌거벗겨진다. 전국시대의 소용돌이 안에서 이보다 더 근사한 묘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맹자의 전매특허인 ‘민중’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양혜왕 편의 특징이다. 이를 설명하는 구절과 근거는 지면상 다루기 어렵다. (첨부파일을 참조하기 바란다)

 

2) 공손추편

 

공손추는 만장과 함께 맹자의 수제자이다. 기록에 보면 맹자는 제자 만장 등과 함께 ‘맹자’를 정리했다고 한다. 거기에 공손추가 참여했으리라 판단된다. 공손추 편에서는 성선설을 포함한 맹자의 핵심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자와 깊은 토론이 이어지므로 다소 난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맹자의 핵심 사상이 ‘몸가짐’이라는 커다란 주제 안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사실 공손추 전편은 수기(修己)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장으로서 여러 시점과 장소를 넘나들며 제자와 군자의 몸가짐에 대해서 속깊은 토론을 펼친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사에서 흔히 보이는 편견이 있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과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이다.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육체에 대한 무지와 감정에 대한 무지의 노출일 따름이다. 서양에서 스피노자와 니체가 ‘몸’을 발견했다면, 맹자는 이(理)에 대하여 기(氣) 또는 감정이라고 번역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이러한 개념에 대해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理)가 탑재된 건강한 기를 호연지기(浩然之氣)라 하는데, 어린이들 캠프가서 길러지는 것이 호연지기가 아니라 넓은 소통 가운데서 뜻과 사유가 충일하게 온몸에 녹아드는 것이 호연지기이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사단(四端)의 요지도 공손추 장에 나온다. 그것이 곧 성선설의 근거이기도 하다. 비록 유영철 같은 살인자라 하더라도 어린이가 달려오는 차 앞에서 무방비하게 서 있으면 구하려는 충동이 든다는 털끝만한 선(善)의 단서가 사단의 요의인데 이를 확충하여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물을 받거나 어떤 장소에 처하거나 벼슬을 하는 일상에서의 몸가짐이 사단 못지 않게 중요하며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3) 등문공편

 

등문공편은 세 가지 점에서 맹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이다.

① 등문공편만 따로 보면 마치 플라톤의 ‘국가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등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라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조선’과도 같은 신세의 소국이다. 하지만 등문공이 세자일 때 맹자와 교유하면서 국가정책에 대한 큰그림을 전수받고, 즉위하였을 때 맹자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제2의 건국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주요 개념과 가치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② 업계에서 농담으로 삼는 속칭 ‘맹자의 이빨’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신농씨를 비조로 여기는 허행의 무리와 이에 귀의한 정통 유학자 출신의 진량(陣良)과의 대화와 묵자(墨子)인 이지(夷之)와의 대화를 보면 통쾌하리만치 조리가 있고 주장이 명확하다. 이를 통해 당시 맹자가 전국시대의 한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종횡가에 대한 비판도 자못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가쟁명하던 시대에는, 수많은 설 만큼이나 수많은 시행착오와 황당한 정책이 가득하여 맹자로 하여금 부득이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부득이(不得已)’도 맹자의 전매특허다)

 

③ 맹자의 또 하나의 서문이자 맹자가 학문을 하는 목적이 담겨 있다. 맹자의 마지막 장에는 자서(自序)의 형식으로 마무리가 있지만, 나는 이 장이 맹자의 본의를 가장 충실히 전하는 서문이라 생각한다. 역사 과정 속에서 도의 진보와 퇴행의 반복적 과정을 이야기하며 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맹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외에 유명한 항산(恒産)과 항심(抗心)에 관한 이야기, 즉 일정한 생업이 있어야 일정한 윤리가 성립할 수 있다는 철학과 백성들에게 생업의 길을 열어주지 않고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게 하면서 법에 따라 이들을 처벌하는 망민(罔民)의 철학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등문공편에서부터는 유학의 대표적인 철학인 ‘차등(差等)’이 등장한다. 차등애와 차등에 관해 기본적인 정보를 알 수 있다. 예컨대 천하 사람마다 위치와 임무가 다르고, 천하의 물건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일관되게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4) 이루편

 

이루편은 공손추편과 안과 밖으로 짝을 이룬다. 공손추 편이 세상을 주유하며 펼쳐지는 야외수업이라면 이루편은 맹자의 학당에서 강연을 하거나 토론을 벌이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주제 역시 공손추편에서는 몸가짐에 대한 원칙적인 내용이었다면, 이루편에서는 ‘군자론’으로 설명되는 지성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한다.

그 중에서도 지성인과 일반인을 가르는 기준이 주목할 만하다. 지성인은 일반인을 이끌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거나 채워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성인이랍시고 지식을 뽐내며 일반인들과 거리를 두거나 그들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지성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없다. 지성인이라면 유의할 대목이다.

아주 짧게 설명되어 지나치기 쉽지만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는 구절도 있다. ‘예상치 못했던 영예가 돌아올 수도 있고[불우지예(不虞之譽)], 정성을 다해 완벽함을 추구했지만 오히려 해가 되고 질타가 되어 돌아오는 일[구전지훼(求全之毁)]도 있다’는 부분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열정을 다해 뜻을 펼쳤으나 돌아온 것은 비방과 좌절밖에 없었던 맹자 스스로의 위안이기도 하지만,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루편은 세미나와 같이 ‘자왈(子曰)’ 체를 유지하다가 학생들이 손들고 질문하는 형식이 끝까지 이어지므로 자칫 지루할 수도 있겠으나 학문에 몸을 담거나 세상의 변화를 도모하는 젊은 지성인들은 느끼는 바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5) 만장편

 

만장 장구에서는 주로 세 가지의 핵심 내용이 다뤄진다.

① 만장은 맹자의 대표적인 수제자로 맹자와 ‘맹자’를 함께 편수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만장편의 주된 이야기는 당연히 만장과의 토론인데, 만장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온갖 모순에 대해 의분(義憤)에 가득하고 모순을 타파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제자이다.

 

② 만장에서는 유가의 성인인 순(舜)임금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소개된다. 순임금은 효(孝)의 상징으로 대효(大孝)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유가의 핵심 덕목인 효의 철학에 대해서 다각도로 풀이된다. 그 이후에 천자(天子)의 양위를 이야기할 때는 ‘민심(民心)=천심(天心)’이라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③ 교제방법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관계’와 ‘공유’로 구분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벗은 두 육체에 깃들 하나의 영혼이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도(道)’를 공유하는 것이 교제의 궁극적인 목적인데, 임금은 선비와 교제할 수 없다는 논리가 매우 특이하다. 곧 임금이 선비를 등용했다면 군신 관계이므로 교제가 불가능하며, 임금이 선비를 스승으로 모신다면 사제지간이 되므로 교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이 처한 위치에 따라서 관계의 여러 가지 차등이 있다.

그리고 교제는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교유를 말한다. 맹자가 만장에서 교제를 유독 강조한 이유는 세상의 바른 길은 한 사람만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을 통해 펼쳐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공을 초월한 네트워크가 필요한 것이다.

 

맹자가 만장에게 일러 말했다. “한 고을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한 고을의 우수한 선비와 사귀고, 한 나라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한 나라의 우수한 선비와 사귀고, 천하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천하의 우수한 선비와 사귄다. 천하의 우수한 선비를 사귐으로써도 부족하다면, 또 나아가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詩)를 외고, 그의 책을 읽고도,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그래서 그 세대를 논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나아가 옛사람과 친구로 사귀는 것이다.”

『맹자(孟子)』, 「만장 하 8절」

6) 고자편

고자편에는 인간 본성은 성선라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우연적일 뿐이라는 고자와 논쟁하는 대목이 주를 이루지만, 학문이 실현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맹자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전국시대라는 시대상황에서 자신의 학문이 펼쳐지지 못하리라는 구조적 문제를 감지하며, 왜 성선(性善)이 쉽게 물들고 지켜지기 어려운가 그 원인을 세밀히 분석한다. 그것은 지키기는 어렵고 없애버리기는 매우 쉽기 때문이며,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시대적 상황이 덧붙여졌다.

맹자는 분석 작업 끝에 전국시대에는 종횡가들이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착한 철학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 착한 사람이 고난에 쉽게 빠지는 이유를 ‘천(天)’의 목소리에 비유하여 초연히 밝힌다. 이 구절은 맹자의 전 구절 중에서도 백미로 꼽는 문장이며, 개인적으로는 고난에 처할 때마다 들여다보며 힘을 얻는 문장이다. 하지만 이것을 체념적이거나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자신의 실패에 대한 정당성으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

“순(舜)은 밭고랑 가운데서 발탁되었고, 부열(傅說)은 성벽을 쌓는 사이에서 천거되었고, 교격(膠?)은 생선과 소금을 파는 중에 등용되었고, 관이오(管夷吾)는 옥관(獄官)에 의하여 천거되었고, 손숙오(孫叔敖)는 바닷가에서 등용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시장에서 천거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이 사람에게 장차 큰 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수고로이 하고, 그 신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어 보고, 나아가 그가 하는 일마다 어그러뜨리고 어지럽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고, 그가 할 수 없는 바(능력)을 북돋운다. 사람은 항상 잘못이 있은 뒤에 고칠 수 있고, 마음에 곤란을 받고, 생각이 막힌 뒤에 분발하여 일을 하고, 얼굴색에 나타나고, 말소리로 나타난 뒤에 이해를 한다.

안으로는 법도와 전통이 있는 세습 신하나 진중한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나 우환이 없는 임금의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는 생존하고, 안락 속에서 비로소 사멸한다는 것을 안다.

『맹자(孟子)』, 「고자 하 12절」

 

7) 진심편

진심은 마음을 다한다는 말이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본성을 안다는 것이고 본성을 아는 것은 ‘천(天)’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천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이치를 몸소 체득하고 일상화하는 학자의 이상향을 그려낸 것이 진심편의 요의이다.

군자는 도를 낙으로 삼아 여유를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우주와 같이 기품이 넓고 유연하다. 세상 만물 모든 것은 다 그 사람에게 귀의하고 있으며 우주를 품은 기상으로 현실 세계를 끌어안는다.

 

광대한 토지와 많은 백성은 군자가 바라는 것이지만, 즐거움은 여기 있지 않다. 천하의 중앙에 나라를 세우고, 사해의 백성을 안정시킴은 군자가 즐거워하는 것이나, 천성은 이것을 향해 있지 않다. 군자가 본성으로 지니는 것은 비록 (그의 도가 천하에) 크게 행해진다 하더라도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없고, 비록 곤궁하게 지낸다 하더라도 여기서 더 뺄 것이 없으니, 본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군자가 본성으로 지니는 것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마음에 뿌리로 하고, 그것이 발생하는 빛깔은 윤택하게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드러나며, 사지에 널리 펼쳐져서 비록 말이 없어도 명확히 드러난다.

『맹자(孟子)』, 「진심 상 21절」

 

비록 군자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배우지 않고도 알게 되는 양지(良知, 선험적 지식)와 배우지 않고도 알게 되는 양능(良能, 선험적 능력)이 있으므로 도에 도달하는 것은 마음 먹기 나름이며 도의 성취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비록 현실은 괴롭고 좌절이 더 많은 일상이지만, 군자의 풍모를 배우고 도가 펼쳐지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학자의 모습이 진심편에 그려져 있다.

 

 

5. 맹자의 비하인드스토리

 

맹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당시의 군주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했음은 물론 대대로 금서의 처지에 놓였다. 심지어 한나라의 무제는 맹자의 초상화를 오늘날의 다트처럼 사용했다. 종종 맹자의 얼굴에다 대고 화살을 쏘며 불경한 학자라고 욕했다.

송나라 주희에 이르러서야 사서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맹자는 우여곡절이 많은 책의 하나였다. 그런 까닭에 사서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가판대에서 파는 잡지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처지의 원인이 되는 두 구절을 소개한다.

 

제선왕이 재상에 관하여 물으니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무슨 재상을 물으십니까?”

“재상이 다른가요?”

“같지 않습니다. (같은 성의) 귀족과 친척의 재상도 있고, 다른 성의 재상도 있습니다.”

“청컨대, 동성 귀족 친척의 재상에 대하여 묻겠습니다.”

“임금이 큰 잘못이 있으면 간(諫)하고, 이를 반복하여도 듣지 아니하면 (임금의) 자리를 바꿉니다.”

왕은 갑자기 얼굴색이 변했다.

“왕께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왕이 신에게 물어서, 신이 감히 올바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의 얼굴색이 안정된 뒤에, 다른 성의 재상에 관하여 물었다.

“임금이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이를 반복하여도 듣지 아니하면, 떠나갑니다.”

『맹자(孟子)』, 「만장 하 9절」

 

맹자의 사상 면면에 위와 같은 사고가 펼쳐지지만 이처럼 파격적인 설은 다시 보기 힘들다. 때문에 교양 수준이 미흡했던 한무제같은 임금들이 즐비한 중국 왕조에서 진면모를 인정받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금서에서 놓여남은 물론 사서의 반열에 오르는 데 공헌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공손추 : “이윤은 ‘내가 의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수 없어, 태갑(太甲)을 동읍으로 추방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고, 태갑이 어질게 되어, 또 그를 데려오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하였습니다. 어진 사람이 신하가 되어, 그 임금이 어질지 못하면, 정녕 추방하여도 됩니까?”

맹자 : “이윤의 뜻을 가졌다면 되지만, 이윤의 뜻이 없다면 찬탈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 31절」

 

주희는 군주에게 맹자의 요지를 간곡히 설득한 후에야 사서의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문화혁명때는 공자가 화를 입었고, 맹자는 오히려 재발견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야말로 맹자의 말처럼 ‘불우지예(不虞之譽)와 구전지훼(求全之毁)’에 다름 아니다.

 

 

6. 맹자 텍스트

 

내가 접한 맹자 텍스트는 성백효 선생의 맹자집주(전통문화연구회)와 김종무 선생의 맹자신해(민음사), 홍인표 교수의 맹자(서울대학교출판부)이다. 특히 이 중에서 홍인표 교수의 텍스트를 신뢰하는 편이지만, 문맥과 친근하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최근에는 이기동 교수의 맹자강설(성균관대학교출판부)의 이야기를 접했지만 아직 읽어보지는 못해 코멘트할 게 없다. 시간이 나면 이기동 교수의 사서삼경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7. 하고 싶은 말

 

논어의 두 배가 넘는 분량일 뿐만 아니라 학문의 체계도 더욱 세밀한 맹자를 정리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리뷰를 쓰기 위해 사전작업에만 일주일이 소비되었고, 집필을 시작한 것이 어제 오후 세시 경이니까 14시간의 고된 싸움이었다. 특히 각 편을 새로 읽고 요지를 정리하는 작업이 괴로웠다. 예전부터 각 편이 가지고 있는 기능과 의미, 그리고 편과 편 사이의 의미 관계망에 주목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맹자를 나름대로 정리했고 맹자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맹자의 요의를 더욱 상세히 전달하기 위해 원전의 중요한 부분을 초록한 50쪽짜리 한글파일을 첨부한다. 각 편의 요지와 함께 읽거나 따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과연 이만한 글을 모두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스스로 추궁하기도 하지만 동양철학에 대해서, 전통문화에 대해서 갈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생각할 때 헛된 14시간은 아니라고 장담한다. 개인적으로도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14시간이었다.

드디어 나는 맹자의 결계에서 풀려났고,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의 선생은 미워하되, 철학은 미워하지 마라."

소크라테스의 금언이다. 세상에 피어오른 새로운 교육(논술)이 꽃피기가 무섭게 시장에서 찢기고 짓밟힌 논술을 되돌리기 위해, 최근 몇 달 동안 논술만 생각하고 내달렸다. 이제까지 읽었던 책과 신문기사들을 모두 뒤적여 스무 개 넘는 문제들을 만들거나, 이것저것 기획했다. 정작 나는 탈진해서 독서도 변변치 않고, 독서 소출이 없으니 리뷰나 시시껄껄한 게시판에 찌질이글도 남길 수 없었다. 이미 좋은 논술선생이 되리라는 기대는 버렸다.

하지만 신문은 그래도 꾸준히 읽고 있었으니, 반가운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다. 정민 선생이 다시 책을 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다산의 이야기이다. 나는 과학자로서의 다산보다 경학자로서의 다산을 더욱 존경한다. 그리고 틀림없이 다산도 경학자로 불리기를 더 바랄 거라 생각한다. 이것이 책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바탕공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산의 내공이 들어간 '논어고금주'나 '맹자요의'와 같은 책들은 절판이거나 번역이 되지 않았다)

머리말에서 밝힌 정민 선생의 '다산치학 10강 50목 200결'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선언이다. 즉 다산의 학습법을 다산의 방법론으로 설명한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10강만 일별해보면 다 '~해라, ~해라' 하는 메시지로 들린다. 하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몇 개의 커다란 그릇 안에 다산의 정신과 학문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모든 지식을 하나로 관통하라는 금언을 '슬슬주'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전파하기도 했던 것과 같이 하나의 일관된 자세는 다산 학문의 가장 커다란 밑바탕이 된다. 그 안에 스스로를 연마하는 위기지학,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사구시, 항상 사랑으로 가득 넘치는 애민의 정신이 정족처럼 버티고 있다. 다산학문의 본령을 꿰지 못하면 다산은 '미신'이 되고 만다.

다산의 학문적 위대성만 말하자면 이는 백권을 써도 모자랄 것이다. 이 책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사람이 가지는 두 가지 커다란 장애물을 극복한 다산의 모습과 함께 이를 생생히 전한 저자의 필치이다. 저자는 다산의 병통을 그대로 드러내고 이것이 다산의 역량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첫째, 다산은 성정이 급했다. 그래서 답답한 것을 참지 못하고, 궁금한 것 역시 알 때까지 잠을 이루지 않았다. 현대사회에 살았으면 매우 피곤한 스타일일 수 있다. 하지만 학문의 길에서는 매우 훌륭한 무기이다. 끊임없는 탐구열이 다산의 초인적인 저작을 가능하게 했다.
둘째, 다산은 대쪽처럼 타협할 줄 몰랐다. 자신을 미워하는 정적에게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전통과 관습이라도 짓궂은 장난에 장단을 맞추지 않아 미움도 많이 받았다. 정조의 곁에서 개혁작업을 잘 이뤄냈지만, 그만큼 적도 많았다. 18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피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으며, 그 중에서 마지막 4년은 형 집행이 정지되었지만, 정적의 상소 때문에 추가로 귀양했다. 이런 특성은 본인에게는 매우 불행하고 피곤한 성정이 되지만, 후손들에게는 매우 득이 된다. 당시의 실상은 낱낱이 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사회문제가 되었던 열녀와 충신의 제도에 대해서 극언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효자를 부모의 죽음을 빌미로 명예를 구하고 세상을 속이는 사기꾼 도둑놈이라고 말했다. 분명하게 살펴서 거짓이 드러날 경우 용서 없이 베어야 한다고까지 극언했다.  - 395쪽


셋째, 다산은 고집쟁이였다. 자신이 정의로 믿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공부 욕심을 끝내 버리지 못해 병을 많이 얻었다. 하지만 이것은 존경받는 학자의 숙명이 아닐까. 나는 솔직히 이렇게 할 자신이 없다.

이것이 다산의 내적인 장벽이다. 외적인 장벽은 역시 유배 생활을 빼놓을 수 없다. 18년이라면 지금으로 따지면 군대를 9번 다녀와야 하며, 18개월로 줄어든 것으로 계산하면 15번 가까운 햇수다. 명예도 명예일 뿐더러,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의 생활이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다산의 형 현산(정약전)은 유배지에서 끝내 눈을 감았다. 이 구절을 보고 있자면, 사마천의 궁형이 생각난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을 열정으로 승화시켰으나, 다산은 차분히 하늘이 18년간의 학문 기간을 주어서 매우 행복했노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커다란 장애를 극복한 단계와 열정의 모습이 학문의 여러 면모에 드러나 있다.

특히 독자를 즐겁게 하는 것은 '결(訣)'마다 마무리되는 저자의 요약이다. 5~6줄로 짤막한 저자의 정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제목 역시 상큼한 게 많다. 예컨대 동시에 몇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는 것을 '어망득홍법(魚網得鴻法 : 어망을 걷어올려 기러기를 취한다)'고 묘사하였고, "'지금 여기'의 가치를 다른 것에 우선하라'는 조선중화법(朝鮮中華法 : 조선이 곧 중화임)이다. 읽을수록 새기는 맛이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학문방법에 너무 치우쳐 대작을 탄생시킨 학문과정을 소홀히 했다는 점이며, 초입에 인용문을 넣을 때 한문을 병기하지 않은 점도 다소 아쉽다. 그리고 '10강 50목 200결'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그림으로 모아져 있기보다는 나열한 듯한 인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지식의 경영과정을 폭넓고 체계적으로 배열하여, 두고두고 배울 점이 많다. 이 외에 구체적인 학문 방법은 본문 안에서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마다 마치 교열자처럼 축자식으로 오탈자를 검증하는 데 이번 책은 완벽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끄럽기까지 했다. 몇 쪽인지 모르지만 "불경보다는 잿밥을 탐낸다"는 구절이 있다. 당연히 "젯밥(祭 -"라고 생각해 따지려고 하였다가, 의심스러워 사전을 찾아본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49재' 할 때의 '잿밥(齋-)'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참으로 다양한 다산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어떤 것은 나와 비슷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내가 차마 따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산의 위대함과 다방면의 족적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내게는 따뜻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다산은 정치인이다. 항상 국민을 생각하고, 나라를 사랑한 정치인이다. 이런 사람이 정치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현재 우리나라 정치인 중 지식인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덧 : 제목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은 논술공부에 당장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다. 차라리 논문 쓰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다. 그리고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학습과 교육 과정 등을 세부적으로 면면히 살펴봄 직하다. 나도 몇 번이고 훑어볼 요량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6-12-27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쓰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제가 봐야겠군요! 오랫만여요.

승주나무 2006-12-2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논문 쓰시게요. 요즘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주몽을 볼 때마다 아프 님이 생각났어요~ 아프님도 오랫만이에요.

stella.K 2006-12-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네. 잘 지내지?
이 책 살까말까 생각중이다.
이달까지 3천원 더 싸게 해준다고 하던데...
너의 리뷰를 보니 더 사고싶네.^^

승주나무 2006-12-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누님 잘 지내시죠. 메리크리스마스 인사도 못 드렸네요.
요즘 셤 때문에 정신을 놓고 살아요. 그래도 짬을 내서 이 책을 볼 수 있었던 것은..뭐랄까~ 술술 읽혀서요^^ 재밌어요 ㅋㅋ

woosunhye 2021-05-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실수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감동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