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에릭 포토리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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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1일 날이 저물 무렵, 라 로셸 북쪽 어느 구역에서 아버지는 엽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p.7

 

이 책의 첫문장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저자 에릭 포토리노의 체험이다.  평생 남을 돕는 일에서 보람을 찾던 물리치료사 일마저 뇌경색 휴유증에 의하여 그만둬야 했던, 그리고 마침내 개인파산까지 했던 늙은 아버지는 아들 셋에게 나란히 유서를 남긴다. 그 유서를 전해주는 책임은 자신의 성을 주었던 큰 아들 에릭에게 남긴다.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왜 '은밀하게'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러한 표현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상용되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세상에 가장 드러내 놓고 천명할 수 있는 애정이 아니었던가. 비교적 성공한 언론인이자 작가의 아버지였음에도 끝내 스스로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사내에 대한 복기는 왜 작가가 그러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는 지를 고백한다. 그의 아버지는 생부가 아니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에릭은 아홉 살이 넘어서야 수줍게 들어서는 새아버지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끊임없이 언론에서 회자되는 가혹하거나 파렴치한 계부와 계모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오연하게 서서 생명을 준 아버지보다 더 아들의 인생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보호하다 때 맞추어 망설이지 않고 독립시켜 보낸 훌륭한 아버지가, 심지어 배 안으로 열 달을 품어 낳은 나의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작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모가 서 있다. 자전거로 인생을 가르쳐 준 아버지. 운동을 마친 아들의 근육을 손수 다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풀어주는 아버지. 생부를 찾아 만나겠다는 아들을 운전해서 데려다 주는 아버지.

 

당신은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했다. 마치 사물들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게 속삭이는 것처럼, 애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 사랑은 너무 강해서-명명백백한 사실의 힘-당신은 그걸 동네방네 떠들어대지 않았을 것이다.

-p.123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뒤에 든든하게 지켜서서 그를 응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서서히 홀로 죽음을 준비했던 것같다. 아들은 점점 약해져 가는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는 죽는다. 그와 쌓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 애정, 신뢰는 시간에 허물어져 간다. 견딜 수 없는 망각에서 작가의 언어로 구원 받은 젊고 정력적이고 가장 아버지다웠던 모습들은 주춤 주춤 눈물겹게 아련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때로 짓이기고 묻어버린다. 거기에 대항하려는 글쓰는 이들의 언어들이 뭉클하면서도 때로 무력하게 느껴지며 가슴에 스민다. 대체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빛나게 생동하던 젊은 아빠의 눈망울은 움푹 패이고 아들의 자전거를 밀던 든든한 뒷배는 정작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렸다. 어쩌면 작가가 미처 하지 못한 그 수많은 눈물 스민 감정의 편린들은 아버지를 둔 그래서 언제나 불효를 했고 불효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식들 모두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도저히 눈물 없이는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다.

 

아버지를 '그'라 칭하며 객관화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다. 이미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려고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 둘의 삶은 혼재되고 우리 둘의 이야기는 섞인다. 아무리 자식이 성인이 되어 독립하여 우뚝 선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그들과의 연결은 숨을 다하는 날까지 우리의 삶 속에 스민다. 그러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시간, 노화, 병마, 죽음, 앞에서 점점 종말로 다가가는 그 삶의 경로에 동행하며 내 자신의 이야기를 미리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 들어도 자꾸 가슴이 먹먹해진다. 삶에서 사랑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덧대어질 때 비장해진다. 끝이 있는 이야기에 영원을 꿈꾸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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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0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버렸어요.ㅠㅠ 블랑카님의 명품리뷰ㅠㅠ;; 어제 책을(다이어리를-_-;) 주문하면서 넣었다 뺏거든요. 다시 주문해야겠어요. 눈물없이는 열수도 닫을 수도 없다니. 두렵습니다ㅠㅠ;

blanca 2015-12-05 13:01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저 공교롭게 요새 읽는 책마다 그렇게 눈물 쏙 빼는 내용이라 자꾸 가라앉아 고민입니다. 다이어리. 이미 새 다이어리 증정 받은 거 사용중인데 알라딘 거 보고 흑심이 들어 그것 또한 고민이에요.

2015-12-06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
찰스 부카우스키 지음, 설준규 옮김, 로버트 크럼 그림 / 모멘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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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은 일어나고 예측했던 일은 때로 어그러진다. 걱정하는 일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지만 그게 나는 항상 위험하거나 슬프거나 분노할 일에서 안전하다,는 뜻과 통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누구나 늙고 변하고 죽는다. 이건 자명하고 대단히 단순한 논리 같은데 살면서 이 명제를 경험한다,는 일은 대수롭잖은 것이 아니다. 거울 앞에서 여드름을 짜던 나는 이제 눈가의 주름을 본다.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말로 쏟아내며 네 시간도 너끈하던 친구와의 통화는 겉돈다. 무엇보다 가족, 친구가 때로 거짓말처럼 존재하기를 멈춘다. 죽.는.다. 그렇다면 이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 언젠가 나도 없을 그 날이 분명 온다는 얘기다. 그래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웃어대고 행복해하고 슬퍼하고 그렇게 잘 살아나갈 것이다. '나'에게 '나'는 존재의 축이었지만 세상의 축 그 자체는 아니다. 깊이 생각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방도가 없다. 화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는 그렇게 애써서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견디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 나아가고 꿈꾸었을까? 모든 의미가 넌센스 같다.

 

도박에 중독되고 대인 관계 기피증에 욕쟁이에 이미 이른을 넘겨 버리고 병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염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간기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이다. -p.17

 

찰스 부카우스키. 그는 쉰이 넘어서야 기가 쓴 글로 집세를 낼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가난했고 너무 오래 노동자로서 일해온 시간들은 그가 '정의'나 '신의'를 불신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스스로를 지옥 학교의 학생으로 명명한다. 노년에서 뒤돌아 보아도 '삶' 그 자체는 그에게 지옥이었다. 글을 쓰며 죽음을 잊고 마치 지난 시절 우체국에 출근하듯 경마장에 가서 돈을 걸고 때로는 따고 잃고 아홉 마리의 고양이와 그에 비해 지극히 상식적인 아내에게 돌아와 매킨토시 앞에 않는 그가 써갈긴 노년의 일기는 독설과 저주와 비아냥으로 가득하지만 그 자신이 이야기하듯 도박하듯 토해 낸 글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차마 꺼내지 못한 삶의 실재를 깨닫게 한다. 모두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아무렇지도 않게 익살스럽게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기대하기 힘들 것같다.

 

마냥 계속하는 건 옳지 않다. 우리에겐 죽음이 필요하다. 내게도 필요하고, 네게도 필요하다.

-p.42

알고는 있다. 보르헤스가 그렇게나 죽음을 기다렸듯 노년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렇게 죽음을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 주지 않던 괴팍한 우체국 직원이었던 (또는 스스로를 그렇게 묘사했던) 작가가 동거하던 여인의 산고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던 것처럼 그가 어쩌다 내뱉는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나 로맨틱하다.

 "모두 죽게  돼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린 서로 사랑해야 하건만 그러지 않는다."  모두 끝나니까 그것만 기억한다면 좀 더 사는 게 쉬워질 것이다. 여하튼 나는 또 항상 잊어버리겠지만, 그럴 때마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를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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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죽는다에서 빠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죠 다른 말 누구나에는 제가 들어가지 않을 때가 많지만, 죽는 것만큼은 들어갑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늘 효과가 있는 건 아니군요 언젠가 죽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기도 한데...


희선

blanca 2015-09-26 08:27   좋아요 0 | URL
`죽음`은 두렵고 알 수 없으면서도 한편 때로는 어떤 안도감을 주기도 하는 그런 거겠지요. 살면서 겪는 수많은 고통들, 과제들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아직 어려워요. 그것이 닥쳐오는 그 순간까지도 그럴 것 같아요. 인간의 숙명이니까요.
 
이윽고 슬픈 외국어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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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좋다. 그 자신의 고백처럼 그의 에세이는 그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하고 느끼고 깨달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면 나는 무언가 조금 더 진지해지고 사려깊어지고 달라진 느낌이 좋다. 이미 가져버리고 느껴버리고 고착화되어버린 것들이 아닌 형성되어가고 유연하고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글을 읽는 느낌.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는 이미 늙어버린 하루키가 아니라 중년기에 접어든, 그래서 자기 앞에 남은 유효한 시간을 헤아리게 되고 자기의 이상과 가치관에 그리고 주어지는 것들에 회의하고 반문하는 그가 있다. 스무 살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아직 사십 대가 되지 않은 이 시점에 이미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저만치 걸어가 있는 하루키의 미국 체류기를 읽는 경험이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피츠제럴드의 모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키는 프린스턴에 가게 된다. 이 인연은 여차저차하여 지적 스노비즘을 벗어버리지 못한 그래서 버드 드라이를 마시는 하루키를 이해하지 못하는 조금은 고리타분하고 점잖은 그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게 되고 거기에서 오는 어떤 편안함(일단 그 개념, 그 틀만 유지하면 그들은 반문하지 않는다.)도 깨닫게 되는 과정. 리무진의 흑인 운전 기사와 재즈의 역사에 대하여 흥겹게 토론하고 피츠제럴드의 손녀의 깔끔한 길 안내에 경탄하기도 하고 폴 오스터의 문체에 대하여 진지한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는 에피소드들이 단편 소설들처럼 생생하고 깔끔하게 펼쳐진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무심히 흘려 보내기 쉬운 느낌, 깨달음 들이 역시 쿨한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포착되니 적확하고 유머러스한 언어 안에서 유쾌하게 춤을 춘다. 미국에 무조건 경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만도 아닌, 이방인 작가의 관찰기가 흥미롭다. 기회가 된다면 하루키의 감상, 느낌이 나의 그것과는 어떻게 만나고 반목할 지 직접 체험해 보고도 싶다.

 

여러 영어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한 그가 사실 영어 회화에 있어서는 큰 자신감도 확신도 없다는 고백이 의외였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노력을 경주할 만큼 시간도 정열도 없다는 덧붙임.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외국에 이방인으로 체류하며 느끼는 어떤 '자명함에 대한 회의'가 주는 근원적 애조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다 어느 곳, 어느 때에도 다 얼마간은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분명한 것도 확실한 것들도 삶의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어떤 불확실함, 회의, 모호함 속에 발을 딛고 때로 슬퍼하는 것이 나날들이다. 하루키의 시선은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는 것이다. 꼭 외국에 잠시 체류하지 않더라도 삶의 유한함이 존재의 소멸을 아우를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확실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슬프다. 하루키의 회의와 하루키의 반문들이 설득력을 띠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그는 그러한 모호한 아련한 것들을 기가 막히게 자기화해서 표현하는 재주가 있다. 언어가 모호함을 아우르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지만 언제나 무언가를 남긴다는 사실. 그것을 항상 의식하는 게 하루키다운 하루키스러운 글들의 색채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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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5-08-1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도 좋아하는데, 그게 먼 북소리와 슬픈 외국어를 읽고 나서였던 것 같아요. 거기서도 하루키가 회화는 자신 없다고 했던 것 같아요.. 전 이상하게 여름만 되면 하루키 소설이 댕기더라구요. 작가가 저렇게 본인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건 대단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전 대학입시에 하루키 소설이나 에세이 지문이 나오면, 아 이건 하루키다라고 알 것 같아요.

blanca 2015-08-15 11:52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하루키 소설 추천해 주세요. 진짜 여름이 끝나가니 하루키 소설 좀 읽어야겠다, 싶어지네요. 단편이 훨씬 낫다,는 평도 있더라고요. 저는 하루키가 왜 이리 부러운지 ㅋㅋ 사는 모습도 부러운 부분이 많아요. 거칠 것도 거리낄 것도 없으면서 규칙적이고 건강한...

기억의집 2015-08-1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사는 모습이 부러워요.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고 세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방인으로 살기도 하며 자기 세계가 있는 하루키가, 저런 인생이 진정한 로또 당첨 인생인 것 같아요. 저는 한달 돈도 없어 쩔쩔 매며 박복한 일상을 꾸리는데!!!

소설은 호불호가 갈려서.., 전 이 사람 소설은 장편을 좋아해요. 장편은 다 좋았어요. 단지 성적인 게 좀 걸리긴 했지만요!!!

blanca 2015-08-16 15:22   좋아요 0 | URL
본인도 혜택 받은 인생이라는 걸 의식하고 감사한다,고 표현하더라고요. 장편이라고는 <노르웨이의 숲>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본 게 다예요. 시작해 볼까 싶다가도 저도 그가 묘사하는 성적인 대목의 어조가 별로 유쾌하지 않더라고요. 반면에 에세이글이나 언더그라운드 같은 진지한 탐사 이야기들을 읽으면 너무 진지하고 사려 깊고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아주 팔색조예요.

숲노래 2015-08-1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읽기하고 말하기는 아주 달라요.
말을 할 적에는
말소리마다 느낌을 다 다르게 실으니
글 한 줄 적을 때하고는 언제나 다르지요.

말로 배우고 이웃을 사귀려면 말도 저절로 잘 하게 되고
글로 배우고 이웃을 보려면 글도 저절로 잘 쓰게 될 테지요..

blanca 2015-08-16 15:20   좋아요 0 | URL
네, 숲노래님.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고 동일시하기 힘든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순오기 2015-08-1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블랑카님~~^^
분홍공주랑 둘째도 많이 컸지요?
육아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님에게 감탄해요~ ♥♥

blanca 2015-08-16 15:21   좋아요 0 | URL
둘째도 크고 저도 늙고 있어요,순오기님^^ 내년 정도면 저도 이제 육아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을런지... 터울이 많이 지니 애로가 많네요. 건강하시죠?

희선 2015-08-22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그때그때 글을 써서 좋겠습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나서부터 글이 있지만, 더 예전을 떠올리는 글을 쓸 때도 있으니... 보통 사람은 그런 순간을 잡아두기 어렵기도 하잖아요 일기를 꾸준히 쓰는 사람도 있지만, 쓴다고 해도 그렇게 잘 쓰지 못해서... 하루키는 자신이 쓴 글을 보고 그때를 떠올리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blanca 2015-08-22 08:41   좋아요 0 | URL
어렸을 때 썼던 일기를 간직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고 어쩌면 그렇게 흘려 보내는 게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도 같고 그래요. 작가들 같은 경우는 그게 삶의 족적이 되어 돌아볼 거리들이 생겨 행복하기도 할 테고 부끄러운 부분도 있을 듯도 해요. 잊고 싶은 일들이나 한때의 문체도 있을 테니까요.
 
빅 퀘스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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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어떤 선입견도 없이, 특정한 관심이나 지나친 기대 없이 이 자전적 에세이를 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더불어 작가로서의 그의 색채, 그가 만들어 낸 인물이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하니 그가 토로하는 작가로서의 애환과 보람, 작가적 정체성으로의 더글라스 케네디에 대한 이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려내는 그의 삶은 그의 이야기의 진폭을 상상하게 한다. 마흔다섯의 사내가 자폐증 진단을 받은 어린 아들, 출간 거절을 당한 자신의 소설, 아내와의 불화를 뒤로 하고 폭설을 뚫고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며 느낀 희열과 거기에서 받은 위무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대담하고 솔직하고 절절하다. 그리고 그는 글을 읽고 쓰는 작가라는 본분을 잊지 않으려는 듯 군데 군데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위로를 주었던 문학작품들과의 만남, 재해석을 덧붙인다. 그것은 그가 통과하는 그의 삶의 정경들에 너무 잘 녹아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 절망에 빠져 조르주 심농의 소설을 읽고 아내와의 불화를 겪으며 예이츠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이해하고 오지 여행을 갔다 우연히 손에 잡히는 죽음을 목도하게 된 충격을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완화하는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혹은 울고 싶을 때 잡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들의 예증 같았다.

 

특히 그가 끝내 화해할 수 없었던 완고한 아버지와 냉정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들은 언어들 사이를 건너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부정도 모정과도 무관한 성장과정을 거쳤다. 기본적인 애착 관계는 물론, 부모로부터 기대되는 지지나 격려도 전혀 받지 못했다. 대신 아들 앞에서 끊임없이 불화하고 요구하고 아들을 거부하는 부모를 용서하는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자신도 아내와의 관계가 끝나고 가족이 해체되는 것 같은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유달리 굴곡이 많은 인생과 중요한 위기 대목마다 그를 응원해 주기는 커녕 돈을 요구하고 아들의 행동들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부모, 장애를 가진 아들은 그가 인간의 삶 자체를 다분히 비극적인 것으로, 절망과 위기를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거나 해체되기 직전에 다시 일어선다. 그것은 조물주에 대한 믿음도 삶 자체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반문하고 거창한 것을 덧대기 이전에 그는 그저 현존 자체의 경이로움에 설득되는 것같다. 다시금 일어나고 부활하는 생의 의지는 그의 두 아이가 그에게 가지는 의미 덕분이기도 하다.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기울이는 그의 노력은 탄복할 만한 수준이다. 자신은 받지 못했던 아버지로부터의 사랑과 헌신이 그에게서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고갈되지 않는다. 최악의 순간마다 그는 그 상황에 매몰되기 보다는 그 상황에서부터 물러나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진다. 내일을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더글라스 케네디가 "어디, 다시 한번 때려 봐!"라는 듯 다시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은 그의 정체성 그 자체다.

 

모리스 센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그가 아들에게 자주 읽어 주었던 책이다. 간질 발작으로 언어를 잃어버린 아들에게 그는 마지막에 이야기 속의 괴물들이 맥스라는 아이를 붙잡는 장면에서 실제 이름이 똑같이 맥스인 아들이 "싫어!"라고 외치던 기억을 포기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읽어 준다. 맥스는 반응이 없다. 그러다가 마침내 "싫어!"라고 외치는 장면은...

 

절대 정상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라던 맥스는 이제 미대를 다니는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는 결말을 마침내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결혼생활과 부부관계를 회의했던 그는 다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가 인용했던 새뮤얼 버틀러의 말 "인생은 사람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과 같다."는 말로 다시 돌아오는 결론, 그는 내일을 결코 낙관하지 않지만 삶의 그 미묘한 행로를 여전히 배우며 걸어갈 것을 이야기한다. 초로의 사내가 작가로서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까지 전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그가 살아내며 깨달은 것들이다. 때로는 편견이나 아집을 드러내기도 하는 그 솔직함 아래 쌓아올린 그 성실한 삶의 편린들이 빛나는 이유다. 힘들 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 섣불리 조언을 남발하지 않는 책, 그래서 곁에 두고 싶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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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5-21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아이 가슴에는 늘 사랑이 있기에
아이가 어른이 되어 새롭게 아이를 낳으면
얼마든지 새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으로만 보아도
사랑을 받아서 태어났구나 하고 느껴요.

저 스스로 어버이로 지내면서 느끼는 대목입니다..

blanca 2015-05-21 09:10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이 자녀분들한테 주시는 사랑도 참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저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요.

2015-05-2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1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타크사카 2018-03-3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빙 더 월드‘라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 그의 현신이 아닐까 합니다. 무척 실존적인 삶을 사는 작가인 것 같아요. 멋진 리뷰 잘 봤습니다!

blanca 2018-04-02 06:01   좋아요 0 | URL
예전 글에 달린 댓글을 보는 기분이 참 묘하면서도 좋네요.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타그사카님이 얘기해 주신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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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는다.

열네 살, 스무 살, 때로는 나이조차 기억나지 않는 태초의 것만 같은 기억들.

다시 나는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았던 마흔의 철책 앞에 선다.

스무 살은 꿈꾸었지만 서른은 실감나지 않았고 마흔은 차마 상상해 내지도 못한 나이.

이제 나는 쉰도 되고 환갑도 되고 고희연도 치를 수 있기를 서글프지만 현실적으로 소망한다.

나도 늙고 늙어가고 있고 더 늙어가다가 마침내 죽을 것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이제는 실감한다.

삶은 스무 살이 세계 전체를 포박하고 내가 딛는 발자욱이 그려내는 지도로만 완성되지 않음을 배워가는 과정과

다름아니다.

 

<늙어감에 대하여>라는 이 추연한 제목 아래 처절하게 인간의 늙어감과 그것의 종말을 기술한 저자의 도저한 탐구, 모색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영화의 클라이맥스 못지 않은 울림을 자아냈다. 순간 아연해졌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그 어떤 위로도 위장도 에두름도 없는 그 직설적인 산재한 진실들에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모순과 덧없음과 역설에 지는 것인지를 동의해야 하는 과정임에도 저자 장 아메리의 그 담백하고 처연한 문장들에 절로 목울대가 울렸다.

 

그 앞에서 '늙어감'은 그저 세계와 환상을 잃어가고 죽음이라는 도저히 풀길없는 하지만 자명한 역설의 진리로 한 걸음씩 내딛는 초라하고 처절한 행보다. 성숙, 세계를 보는 시선의 확장, 관용, 성숙의 휘장은 그의 예리한 언어의 칼날로 난자 당한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늙어가며 죽음으로 행진하는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A의 시선이 관통하는 그를 둘러싼 세계들, 그리고 그것에서 밀려나며 자신이 쌓아온 시간들로 향햐는 시선들의 흐름은 마치 한편의 소설 같다. 실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선들이 군데군데 녹아들어가 있다. 장 아메리는 자신이 실제로 만지고 느낀 것들을 충실히 자신만의 언어로 쓰다듬고 훓어내어 흩뿌린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천착했던 속물성이 횡행하는 사회의 실체는 장 아메리 앞에서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우리의 고향은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소유의 세계이며 소유가 있어야 사회적 연령을 부여받는다는 그의 지적은 우리의 늙음의 결이 사회가 부여하는 소유의 위계를 따라 스며듦을 간파한 것이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그마저도 우리는 사회적 연령의 심판 하에 쌓아놓은 재물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이렇게도 희망을 깨부수는 이야기들. 한마디로 '늙음'과 '나이듦'은 인간이 직면한 '죽음'이라는 그 불합리하고 역설적인 모순의 마침표로 규정된 '존재'와 얽혀 하나의 '무의미'로 회귀해 버린다. 실제 장 아메리는 오십 대 중반에 이 저술을 하고 십년 뒤가 지나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텍스트를 위해 산화해 버린다.

 

A는 균형을 깨뜨리며,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화를 짓밟으며, 싸구려 위로를 깨끗이 쓸어버리는  그 어떤 일을 해냈을까? 그는 그랬기를 희망한다. 남은 날들은 쪼그라들며 메말라 비틀어진다. 그럼에도 그는 진리만큼은 간절히 말하고 싶었다.

-p.211

 

A는 다름아닌 장 아메리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냈다. 하지만 그의 인간의 삶에 대한 그 가차없는 메마르고 명징한 통찰은 또 다른 역설과 만난다. 찰나의 경건함. 그것이 꼭 대단한 의미와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은 날들이 쪼그라들며 비틀어지고 지나간 나날들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으므로 '지금', '여기'가 가지는 무게는 한층 더 한량없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보는 거울에서 나의 얼굴은 빛을 잃었지만 벚꽃비를 맞으며 향그러운 그 덧없음을 향유하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그가 오십 대에 마침내 육십 대에 얻은 깨달음과 사유가 삶에 대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의 한계까지 밀고 나간 것이라 할지라도 남는 것들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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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4-1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는다`고 생각하면 늙으니,
`새롭게 새 하루를 산다`고 생각하면
나이가 드는 아름다움으로 가리라 느껴요

blanca 2015-04-10 13:56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말씀처럼 그렇게 나이들어 가야겠어요.

yureka01 2015-04-1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고맙게 읽었습니다.....

blanca 2015-04-10 13:56   좋아요 0 | URL
시간 내서 읽어주신 게 감사하죠^^

라로 2015-04-1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홀릭 리뷰 얼렁 써주세요~~~~ 안그럼 데모 할래요~~~~~ㅎㅎㅎㅎ

blanca 2015-04-10 13:58   좋아요 0 | URL
아, 나비님, 솔직히 제가 그 책은 리뷰를 못 쓸 것 같아요.
피아노에 대한 소양이 부족해서 저자 설명 따라가기도 바빴어요.
저도 어렸을 때 레슨 받고는 최근에 다시 학원을 다니다 그만 둔 상태인데
아무래도 성실하게 배우지 못해서 그런지 다 새롭더라고요.

프레이야 2015-04-1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살한 작가군요. 죽음으로 귀결하는 우리삶의 끝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 존엄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blanca 2015-04-20 13:33   좋아요 0 | URL
아... 언제나 `죽음`은 참 어려운 문제예요. 장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