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대가다. 대가는 다르구나. 내가 아무 생각없이 라면, 김밥, 짜장을 쳐묵쳐묵하고 있을 때, 대가는 이런 사색을 하는구나.
어젯밤 예약 주문을 했던 책이 도착했다. 사은품으로 너무 앙증맞은 양은냄비와 라면 한개를 품고.
나는 초미니 사이즈의 그 냄비가 귀여워 미칠 뻔 했다. 식구들 모두 거기다 라면을 먹겠다고 예약을 했다. 뚜껑에 `이 궁상맞음을 비웃어서는 안된다. 당신들도 다 마찬가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는 사람이 거리에서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뻔하다.` 이렇게 김훈의 문장이 새겨진 특별한 양은냄비. 이런 냄비를 막 써도 될까? 잠시 생각했다.
라면을 끓이는 대략 오분정도의 시간에 나는 그저 멍~ 하니 있을 뿐인데 김훈은 많은 생각을 했나보다. 그는 우선 라면처럼 간단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김밥을 떠올린다.
— 뚱뚱한 김밥의 옆구리가 터져서, 토막난 내용물이 쏟아져나올 때 나는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낀다. P.15
라면처럼 간단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짜장을 떠올리며 `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의 사고는 1960년대 이후 라면시장의 팽창이 그 무렵부터 구조적으로 전개된 빈부의 양극화, 인구의 대량 소외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이른다. 그렇다. 라면은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의 배를 채워주는 음식이었고 혼자 있을 때 한끼를 때우기 좋은 음식이니까.
된장, 간장, 장아찌같은 우리 고유의 음식들은 맛의 심층구조를 갖는다. 시간이 오래 그 맛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된장찌개의 국물 얘기를 하다가 그는 삶의 심층구조와 서사적 로망을 회복하는 것은 이제 영영 불가능해 보이며, 시간의 작용이나 기다림, 환상, 스밈, 우러남처럼 삶에 깊이를 가져오는 기능은 음식에서조차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쯤에서 나는 부끄러워진다. 물론 내 나름대로는 좋은 음식을 식구들에게 제공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과연 애들이 나중에 얼마나 엄마의 음식을 그리워하게 될 지는 자신이 없다.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라면으로 한 끼를 때웠던 적도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 장아찌나 된장 간장의 깊은 맛의 심층을 그리워하게 될까?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먹는 매운 짬뽕 국물은 `몸에 스며서 몸을 위로하는 기능이 없고 목구멍에 불을 지르듯 날카롭고 사납게 달려든다.`
그렇게 몸을 위로하지 못하고 부박한 음식의 대표주자격인 라면은 생명체를 거치지않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가장 공업적인 식품이다. (아무리 라면 회사가 재료의 천연적 성격을 강조한다해도) 라면이 개발된 이후 먹을 것이 넘쳐나는 지금까지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매출이 성장하고 있지만 이 라면시장의 팽창이 자본주의의 싹쓸이가 몰고 온 인간 소외 사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는 라면을 끓일 때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분말 스프의 맛을 조금이라도 순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의 조리법을 소개한다. 센불에 물을 700미리 정도 넣고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한 것처럼 물이 넉넉하고 화산이 터지듯 펄펄 끓어야 면발이 깊이, 삽시간에 익는단다), 분말스프는 3분의 2만 넣고 대파를 많이 썰어 넣어 파의 달고 청량한 맛이 국물과 면발에 스미게 한다. 그리고 불을 끄고 달걀을 넣어 저어준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만하고 견딜만한 음식이 된다는게 김선생님 레시피이자 지론이다.
그런데... 응?.... 이렇게 끓이려면 출판사의 선물인 고 앙증맞은 작은 양은냄비로는 택도 없다. 라면 한개는 끓일 수 있을까 싶은 작은 사이즈이길래 물을 넣어봤더니 500미리 간신히 넣고 라면을 끓이면 넘칠까봐 조마조마해야 하는 사이즈다. 김선생님 레시피처럼 파를 듬뿍 썰어넣었다간 젓지도 못하고 끓어 넘치게 생긴 이 작은 냄비.... 이걸론 레시피 재현이 힘들다구ㅠㅠ
뭐 어차피 쎈 화력이 필요하고 가정용 가스렌지는 어림없다 하셨으니 레시피의 재현은 이 냄비가 아니라도 힘들겠지만 나는 아쉬운대로 그 앙증맞은 양은냄비에 (좁은 욕조에서 답답하게 퐁당거리듯)라면을 끓여 보았다.
끓이는 동안 넘칠까봐 온갖 신경을 쓰느라 사색은 역시나 내 몫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냄비 뚜껑에 면발을 올려 후~ 후~ 불어 먹는 라면의 맛은 부박하지만 내 안에 깊이 인이 박인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