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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권력', 어디에서나 작동하는 '권력'" 

<권력란 무엇인가>의 강사 이수영 선생님의 인터뷰입니다. 본 인터뷰는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제공합니다.  

어떤 활동,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원래는 국문학 전공이다. 자기 삶의 '구원'이라는 문제와 늘 맞닥뜨리는 것 같다. 나도 그것과 맞닥뜨렸다. 그런 중에 국문학을 평생 한다는 것이 내 삶의 구원과 관계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박사논문을 끝으로 문학연구를 접었다. 그런 점에서 철학 공부는 내 삶을 바꾸는, 내 삶의 구원이 된다고 느끼는 철학자들을 공부하고 있다. 그 중에서 니체는 엄청나게 여파가 컸다. 내 삶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게 해줬고, 힘도 생기게 했다. 니체는 나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강의를 해봐도 다른 철학자들보다도 감응이 큰 것 같더라.


'권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으셨나요

기존의 권력은 실체화되는 것이다. 사물처럼 소유할 수 있는 것. '저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 ― 이게 기본적인 권력에 대한 상상력이고 개념 정의인데, 그렇게 되면 저 권력을 탈취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저 국가를 접수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거다. 그런데 실제로 국가를 접수해도 왜 삶은 이 모양이냐, 이런 깨달음이 있다.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을 접수했는데 왜 인민들의 삶은 파쇼적으로 흘렀는가, 그렇다면 권력이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작동하고 있는 '동사'적인 것이다. 권력을 표상시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기존에 쇼펜하우어나 헤겔, 홉스는 '표상으로서의 권력'을 말했다. 그러니까 떠올릴 수 있고, 누군가와 나를 비교해 내가 더 우월하거나 저 사람이 더 우월하거나 하는 식으로 표상할 수 있는 거라고 권력을 생각하게 된다. 저 사람은 나보다 권력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고 이렇게 되면 '저 권력을 탈취해야겠다'는 식으로 흐르게 된다. 혹은 저렇게 권력을 갖고 싸우다 보면 삶의 고통이 끊임이 없다. 그래서 인생무상에 빠지게 된다. 권력에 대한 무상감에 빠져서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 돼, 하는 사고방식에 젖는 거다. 둘 다 권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거다. 모든 사람들은 고립에 대한 공포, 가난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는데 내 개인의 공포를 덜어주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런데 그걸 작은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바꿔서 사유하는 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 굉장히 유용하고 근본적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동하는 권력'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을 통해 어떤 대안을 만들 수 있을까요

다른 대안, 어려운 문제다. 푸코가 찾아갔던 길이 그런 길 같다. 작동하는 근대의 권력이 있을 때, 근대 권력이 도대체 어떤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를 한마디로 말하면 푸코는 '자기포기'라고 한다.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거다. 기독교적 자기포기와도 비슷하죠. 극단적으로 자기를 포기해야만 신의 구원을 받는 거니까. 자기포기 형태인데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채, 자기를 계속해서 확충해 가는 방법이 있다는 거다. 권력을 접수해야 하는 문제라면 접수하면 끝이겠지만, 권력이 접수 대상이 아니고 작동하는 대상이라면 권력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권력과 함께 있는 것이니까. 그러면 권력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게 우리의 대안이다. 푸코가 그런 길을 걸어왔던 것 같고, 니체도 그렇고 들뢰즈도 그렇다. 그 작동방식을 바꾸려면 근대적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근대적 작동의 궁극적인 메커니즘은 자기포기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끊임없이 알아 가고 취조하고 하는 이 모든 과정이 자기를 포기하는 형태다. 국가에 자기를 의탁하는 형태들. 푸코는 자기를 확충해 가는, 그래서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존재로 가는 과정, 끊임없이 자기를 확충해 가는 과정, 그런 것을 꿈꿨던 것 같다. 그것의 모델을 헬레니즘 시대에서 본 것 같고. 당장 만들어 갈 수 없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런 질문은 늘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부터 끊임없이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게 미래에는 무엇을 낳을지는 알 수 없는데 끊임없이 만들어 갈 필요는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학이나 인문학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공부하는 게 좋을까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책들이 있을 텐데, 예컨대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은 해설서가 필요 없는 책이다. 쉽게 잘 써서 그냥 읽으면 된다. 그런데 어떤 책은 해설서가 없으면 안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해설서가 없으면 못 읽는다. 정말 잘된 해설서를 모두가 찾지 않나. 그런 측면에서 <개념어 총서> 같은 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철학공부를 하고 있는데, 정말 모르겠는 책이나 철학이 있다. 그런 경우는 잘된 해설서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개념어 총서>가 유익한 거다. 정말 잘 정리돼 있는 것 몇 권 읽고 그 철학자에게 접근하면 훨씬 쉽다. 푸코를 직접 읽으려면 얼마나 어렵나. 들뢰즈를 직접 읽으려고 해도 그렇고. 시중에는 정말 좋은 해설서가 잘 안 나온다. 서양에 있는 것을 대충 해놓은 것들도 많고. 그런데 우리가 우리 방식으로 소화를 해서 정리를 잘 해놓은 게 있으면 그것처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철학자가 할 몫이 있는 것 같고. 그것을 해설을 잘 할 사람의 몫이 따로 있는 거고. 


* 이수영 선생님 소개 


1970년 전남 여수에서 출생했고 서울대에서 국문학 박사까지 마쳤다. 출생부터 박사까지 짧은 한 문장인 까닭은 그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고, 유쾌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오래 공부했다. 거기서 운명적인 친구들을 만났으며, 삶의 비전도 함께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나만의 걸음을 조금씩 뗄 수 있게 되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수유너머 길>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생각할 때마다 떨리면서도 두근거린다. 그래도 더욱 삶에 밀착된 공부를 해야겠다는 느낌만은 확실하다. 푸코의 이론으로 한국근대문학을 분석한 『섹슈얼리티와 광기』(2008), 니체의 철학을 내 입장에서 정리한 『미래를 창조하는 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09)는 일종의 준비운동이었던 셈이다. 준비운동도 마쳤으니 이제 다른 걸음걸이로 길을 나서야 하리라.
 
저자의 글

연구자로서 평생 살아가야 하는 만큼 글쓰기가 중요한 업이겠지만, 글을 쓴다는 핑계로 다른 모든 일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글쓰기는 늘 현실과 만나는 장소에서, 그리고 그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지혜를 잉태하는 장소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광기』머리말 중에서)


권력에 대한 찬탈이 아니라 권력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그리고 이 과제를 위해서라도 권력의 작동양상을 알아야 한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의 권력을 안다는 것, 그것은 권력없는 삶이 아니라 권력의 배치와 작동방식을 바꾸는 삶에 대한 꿈이다. 그럴 때 우리는 너무 이르게 절망하지 않아도 되며 냉소의 비웃음을 간직하지 않아도 된다.
(권력이란 무엇인가』,「맺음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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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은 없다. ~이 공空할 뿐… 

<공空이란 무엇인가>의 강사 김영진 선생님의 인터뷰입니다. 본 인터뷰는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제공합니다. 




<공空이란 무엇인가> 저자 김영진

1970년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중국 근대사상가인 장타이옌(章太炎)의 불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근무하고 있고, 『불교평론』 편집 위원이며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이다. 당나라 때 나온 경전 목록인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을 함께 번역했고,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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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의 한 장면
『서유기』의 등장 인물들의 이름엔 다 뜻이 있다. 가령 오공은 ‘공空을 깨닫다’는 말이다. 그럼 '공'은 또 무엇인가? 세상에 '공'은 없다. 단지 '~이 공 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어떤 공부를 해오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1970 년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은 꽤 유명한 곳이다. 호수 같은 바다가 좋다. 1990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면서 불교 공부를 시작했고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다. 중국의 4,5세기 불교에 대해 석사 논문을 썼다. 이 시기 중국 불교인들은 공(空)이나 반야(般若) 같은 개념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박사과정 입학하면서 중국근대불교로 연구 방향을 잡았다. 고대불교에 비해 근대불교가 훨씬 박진감 있고, 더구나 현실과 만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근대사상가인 장타이옌(章太炎)의 불교사상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다. 그에게는 전통학술이 있었고, 혁명이 있었다. 더구나 그 중심에 불교가 있었다.
여태껏 주로 중국 근대불교에 대해 공부하다가 작년부터 한국 근대불교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했다. 어디 가서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조금씩 전진해 볼 작정이다.


불교에 다양한 개념들이 있을 텐데 그중에서 특별히 ‘공’ 개념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일반들에게 가장 익숙한 불교 개념은 아마 연기(緣起), 인연(因緣), 인과응보(因果應報), 윤회(輪廻), 무상(無常), 열반(涅槃),(空) 등일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난해한 개념은 단연 공이다. 다른 개념들은 대충 넘겨짚겠지만 공은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런 개념 때문에 불교가 철학적이고 꽤 멋있어 보이지만 턱없이 난해하여 다가서지 못한다. 책을 좀 읽은 사람은 공 개념에 대해 자신의 영역이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주희의 말을 빌려 공을 쉽게 절대적 허무 정도로 취급한다. 또 어떤 사람은 도(道)나 기(氣), 아니면 과학의 무엇으로 취급한다. 조금은 안타깝다. 이 책은 일반인들에게 공 개념을 좀더 친근하게 소개하고, 공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고자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하게 만드는 불교의 매력이 있다면요?

불 교는 엄청난 지역을 다녔고, 많은 사람과 문화를 만나면서 새로운 사유와 문화를 창조했다. 그것을 위해서 누군가 하념 없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어쩌면 불교는 길 위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불교의 이런 점이 좋다. 그렇다고 불교환자는 아니다.  
앞으 로도 계속 불교 공부를 하겠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절반은 여전한 호기심 때문이고, 절반은 어느 정도 관성 때문일 것이다. 요즘 책임감 같은 것도 조금 생겼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불교 연구자로서 불교학 발전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학부 다닐 때 ‘우리나라 불교학은 왜 이 모양이냐’ 투덜거렸는데 근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이제 학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한다. 아무튼 나이 좀 들어 공부가 흐지부지되는 사람은 아니고 싶다. 불교 공부 열심히 하고 책도 쓰고 번역도 계속 해볼 작정이다. 아는 형이 어지간하면 여든 까지 산다고 말하더라. 그때까지 뭐하겠나. 천천히 그렇지만 놓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  


불교는 종교적인 느낌보다는 철학이라는 느낌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나도 불교 공부를 하기 전에 불교는 철학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철학과 간다는 마음으로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종교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물론 불교는 충분히 철학적이다. 다른 종교에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고통 극복’이라는 기치로 불교가 출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철학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못하겠다. 나머지 불교의 이론 전개는 이 점을 둘러싸고 진행된 것 같다. 이 책에서 다루는 불교 개념인 공(空)의 경우도 얼른 보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 개념이다. 그런데 그 개념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불교의 최초 깃발을 볼 수 있다.  

‘공’ 이외에 소개하고 싶은 다른 개념이 있나요?

공 이외에 소개하고 싶은 개념은 ‘열반’이다. 이 개념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이야기된다. ‘고통의 완벽한 소멸.’ 어떤 경지인지 나도 궁금하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가 결국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방법을 동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제기하는 삶이나 가치를 좀더 밀착해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하지만 나더러 하라면 난 못한다. 초기 경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과 어떤 연구를 하고 싶으신지 말씀해 주세요.

첫 째, 중국 근대사상사나 근대학술사 관련한 연구를 좀더 구체적으로 하고 싶다. 앞으로 한 10년은 이 분야에 대해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학위논문 쓴 이후 묻어 두었던 장타이옌 공부도 다시 해볼까 한다. 둘째, 중국근대불교에 관련한 개인 연구 성과를 작게나마 정리하고 싶다. 『근대중국의 고승』이나 『중국근대불교연구』 같은 책을 집필해 볼 요량이다. 셋째, 『승조평전』을 쓰고 싶다. 석사과정 때부터 간직한 나의 꿈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나. “꿈은 이루어진다.” 시간을 가지고 준비해서 꿈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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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벗어남'을 넘어, '바꾸어-나감'으로!!"

<주체란 무엇인가>의 강사 이정우 선생님의 인터뷰입니다. 본 인터뷰는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제공합니다.     

학부에서 전공은 '공학'이셨고, 대학원에서부터 '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방향 전환의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공학에서 철학으로 옮긴 것에는 대체로 두 가지 맥락이 있다. 하나는 이론적인 맥락에서인데…… 공학을 하다 보니까 물리학, 화학, 수학 그리고 양자역학 같은 순수과학에 흥미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따라오는 과학철학적인 것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는 ‘과학철학’이라는 말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 런 존재론적인 요소들을 접하게 되고, 그러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 한 가지 맥락은 그 당시에, 내가 대학교 2학년 때가 1980년대인데, 그때 여러 가지 사회현실을 보면서 공학에 안주해 있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현실을 나 나름대로 학문적으로 돌파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미학강좌, 예술철학 강좌를 재미있게 들었었는데, 그래서 처음에 사실 미학과를 가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랬었는데, 당시 선생님이셨던 오병남 교수님께서 미학을 하려면 어차피 철학을 해야 하니까 철학과로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나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주제를 '주체'로 잡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주체라는 개념을 쓰게 된 이유는 『사건의 철학』에서 ‘무위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고, 『가로지르기』에서는 ‘가로지르기’를 살릴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런 말들을 던져 놓았는데, 당시에는 그런 말들이 명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주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런 것들을 명료화 해보고 싶었다. ‘주체’는 사실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늘 만나게 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말하면서 ‘무위인’이라는 개념을 명료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철학 공부는 막연히 어렵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 그런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공부하면 좋은지 말씀해 주세요.

철학적 담론에 접근하는 개인의 주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철학이 전개된 순서, 철학의 분야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서 익숙해지기보다는 관심사에 직접 뛰어들다 보니까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과목들, 수학이나 영어와 같이 학교에서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 철학이 어려워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우리가 어떤 말을 쓸 땐 늘 부딪히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의미의 폭이 넓은 그런 개념들을 각자의 맥락과 주제, 문제의식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하면서 사유를 전개한다. 그런 개념-뿌리들에 익숙해지는 것, 예컨대 시간이라고 하면 이 개념이 철학사에서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익혀야만 하이데거의 시간론이나, 들뢰즈의 시간론, 마르크스의 시간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공부를 무시하고 중간에 뛰어들어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어려워지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철학담론을 읽을 때 언어의 복잡한 결과 두께를 파악하면서 읽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념어총서 WHAT>을 통해 철학, 인문학 공부를 할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어떤 개념을 봤을 때, 그것을 그 말에 들어있는 두께를 생략한 채 그것이 자기에게 주는 인상을 가지고 쉽게 그것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가령 ‘소수자’라고 했을 때 이것을 단지 ‘수적으로 적은 사람’을 가리키는구나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식으로 즉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상당히 많더라. 어떤 언어가 자기에게 주는 인상을 가지고 곧장 해석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데서 정말 많은 오해가 생겨나기 때문에 이 부분을 특히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 이정우 선생님 소개 



서울대학교에서 공학과 미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철학아카데미 원장으로 시민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서울과학종합대학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개념—뿌리들 1, 2』(2008, 2009),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2008), 『천하나의 고원』(2008), 『세계의 모든 얼굴』(2007), 『탐독』(2006), 『담론의 공간』(2000), 『들뢰즈 사상의 분화』(공저, 2007) 등을 썼고, 『지식의 고고학』(2000), 『의미의 논리』(1999),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공역, 2009), 『들뢰즈, 유동의 철학』(공역, 2008) 등을 번역했다. 

 

 

저자의 글


조선시대로부터 일제시대, 해방 이후,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이후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배치들은 계속 변화해 왔다. 배치-사건들의 이러한 변화, 그 변화를 둘러싼 국가-자본주의의 지배와 민중의 저항, 오늘날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삶의 각종 배치들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수놓을/수놓아야 할 각종 배치들을 사유하는 것이 우리의 절실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들뢰즈 사상의 분화』머리말 중에서)


인간은 단순한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생명체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주체로서 존재한다. 인간은 개체이자 생명체이자 주체이지만, 전자의 두 층위가 필수적인 것이라면 마지막 층위만이 고유하고 충분한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를 돌아다보면서 사유할 때 주체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으며, 어떤 논의를 하든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 문제라 하겠다.
(『주체란 무엇인가』, 「맺음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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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사랑? 이상적 삶? 망상을 깨고 새롭게 사랑하며 살기"

<재현이란 무엇인가>의 강사 채운 선생님의 인터뷰입니다. 본 인터뷰는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제공합니다.   

들뢰즈, 플라톤, 불교 선사들, 여러 화가 등 동·서양 사상에 능통하신 느낌입니다. 어떤 공부를 해오셨나요?

미술사를 전공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걸 생각해 보면 직선으로 온 적이 없는 것 같다. 돌아서 오고, 와 보면 내가 와야 될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공부란 게 선으로 치면 직선이 아니고 나선을 그리면서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미술사) 공부를 했을 때, 답답했던 게… 순전히 양식사였다는 거다. 난 미술을 통해서 세계를 보고 싶었는데, 미술만 보게 하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대학원 1년 다니다가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철학을 공부하러, 그 당시에 ‘서사연’(서울 사회과학 연구소)이 란 곳에 갔다. 거기서 처음 만난 게 들뢰즈였다. 꾸역꾸역 그 세미나를 따라가면서 들뢰즈가 언급한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D. H. 로렌스, 헨리 밀러, 카프카……, 아무튼 들뢰즈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을 소개받은 거다. 그러다가 고미숙 선생님이 계신 수유 연구실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근대’와 접속하게 되었다. 재미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들뢰즈나 푸코나 근대적인 사유를 비판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미술과 조금씩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 미술사 공부를 이제 조금씩 해야겠다고 돌아와서 보니까, 내가 미술로부터 굉장히 멀어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와 있더라. 그렇게 공부 시작하고 한 7~8년쯤 됐을 때, 근대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힘을 못 갖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하고 난 다음에 뭔가 새로운 비전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가 그런 비전을 찾지 못하니까 답답했던 때였다. 그때 연구실에서 ‘고전’ 공부와 접속하게 되었다. 옛날에 내게 안 보이던 사유들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아, 내가 근대 공부(비판)하다가 탈근대적인 사유만으로 설명이 안 되던 것이, 고전하고 접속이 되면 얘기가 많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재현’ 개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재현’이라는 말 자체는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권력 같은 말은 개념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많이 쓰는데, ‘재현’은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굉장히 개념적이고, 어려워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삶 속에 뿌리깊이 이 사유가 있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들뢰즈와 푸코를 공부하면서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네들이 선언하기를, 플라톤주의를 뒤집는 게 현대철학이다. 근데 플라톤주의가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살고 있는 현실 너머에 뭐가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아주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유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아주 좋기도 하고, 사랑의 결이 갖는 여러 가지 스펙트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는데) 더 완전한 사랑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다. 이게 우리가 갖는 재현적인 사유 방식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것 말고 더 완전한 무엇. 지금 여기서 사는 삶 말고, 진짜 완전한 삶. 이런 나 말고 정말 완벽하고 이상적인 나. 이게 현실의 지평으로부터 계속 떠나가는 거다. 이게 다 재현이다.

이게 미술과 연결이 되면… 우리가 보통 예술을 접할 때, 뭘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동원해서 그 그림을 본다는 거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몰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 휘청거릴 정도로 매력을 느낄 때가 있고, 아무것도 몰라도 싫을 때가 있다. 그게 현장에서 느껴지는 어펙션(affection)이고, 기운의 장(場)이 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을 볼 때는 우리가 뭘 알고 있는 대로 보려고 하거나, 알고 있어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에서는 재현이라는 게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를 아주 떨어뜨려 놓고 생각을 하는 거다. 창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예술 작품을 창작할 때 예술가가 표현하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진짜로 현장 속에서 미술, 음악이 나하고 만났을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유하는 게 아니라, ‘저게 뭔가’를 사유하게 된다. 그래서 계속 멀어진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런 재현적 사고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이 대답에서 “이건 아니야, 이런 세상이 있어.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재현적 사고와 결국 똑같다. (웃음^^) 나는 어떤 유토피아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들뢰즈에 휘청거렸던 이유는 ‘그래서 어떻게 해라’라는 말이 없다는 거다. ‘그래 알겠어, 근대가 이러저러해,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해. 그래서 어떻게…?’라고 하는 것을 들뢰즈가 얘기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걸 얘기하는 순간 또 그게 모델이 되니까. 찾고 발굴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우리에게 준 거다. 뭔가를 공부했으면 ‘이게 아니다’라는 걸 알았으면 ‘아니다’라는 걸 안 자리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물어봐라, 나는 이게 들뢰즈의 사유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그게 뭔지 너무 답답했을 때, 그때 고전을 만난 거다. 고전의 사유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것들이 있었다. 깨달은 사람의 세계도 따로 없는데, 그래도 깨닫기 전과 후의 삶은 전혀 다르다는 거다. 그런데 깨달은 후의 삶이 어떤가는 아무도 얘기해 줄 수 없다, 깨달은 사람도 얘기할 수 없다. 비재현적인 사유라는 건 뭐냐, 재현적인 사유를 넘어선다는 게 뭐냐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을 새롭게 구성하는 모든 것이다.

비재현적인 사유를 하고, 비재현적인 삶을 산다는 게 생뚱맞은 것 같은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온갖 모델과 망상들을 깨는 거다. ‘아,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걸 문득문득 깨달아 가면서 배우는 것. 그게 비재현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 채운 선생님 소개   

 

1970년생. 공식 ‘전공’은 근현대미술사. 하지만 수유너머에서 멋진 스승과 벗들을 만난 이후로는, 전공과 그닥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공부와 강의와 글쓰기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공부가 구원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거다. 올해 가장 큰 사건은, 든든한 사우(師友)들과 함께 춘천에 <수유너머 강원>을 연 것.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건강해진 것!  앞으로 더욱 건강하고 활기차게 공부하면서 내 공부로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는 게 내 꿈이다. 지은 책으로는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2007),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2007),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공저, 2008)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에드바르 뭉크—세기말 영혼의 초상』(2008)이 있다.

 


저자의 글

'예술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예술은 나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 그게 이 책 전체의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일상 속에서 예술을 실천할 수 있을까, 예술은 어떻게 우리의 삶과 조우할 수 있을까?

과거의 예술 속에서 현재적인 실험을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예술을 생각하기, 예술이라는 이름은 버려도 좋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만드는 대신, 그 경계를 허물고 예술을 일상의 삶이 되게 하자.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프롤로그 중에서)
 
 

재현은 고체 상태의 세계를 꿈꾼다. 각이 딱 들어맞는 단단한 육면체들의 세계. 걸으면서, 걸음과 함께 펼쳐지는 여러 길들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어딜 가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세계. 재현은 주어진 구조에서 출발한다. 표준, 평균치, 원점에서. 그 구조 밖으로 이탈하는 것, 기원 없이 시작하는 것, 정처 없는 산책을 용납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만남과 사건을, 포뇨의 대책 없고 목적 없는 사랑을, 거위의 물 위의 비행을.

주어진 것 안에서 평균적인 욕망을 갖고 다수적 개념을 재현하기를 강요하는 재현의 세계에는 길이 별로 없다. 많은 이들이 걷는 몇 개의 뻔한 길 말고는. 하지만 사유와 삶, 그리고 예술은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노 디렉션, 홈. 집으로 가는 길 없음. 막다른 골목, 혹은 여러 갈래 길. 이 길 위에서, 알몸인 채로, 재현과의 전투를 시작해 보자.

(『재현이란 무엇인가』,「머리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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