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된 영화들 중 못본 영화도 많고, 그중 보고픈 것들도 몇 개 있었지만 같이 보게 된 밴드 보컬이 "난 배트맨 아니면 안봐~" 라고 떼쓰는 통에 결국 우리네 영화는 <배트맨 비긴스>로 결정됐다.





 수많은 배트맨 영화가 나왔고, 내가 그중 몇개나 봤는지도 잘 기억도 안나는 이 영화 참 시리즈 많이 나온다. <에일리언>보다도 더 많은거 같다. 기본적으로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1> <배트맨 2>가 있고, 조엘 슈마허 감독의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 앤 로빈>도 뒤를 잇고 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아마도 나는 팀 버튼 감독의 두 작품만 보고, 뒤의 두개는 보지 않은 듯 하다. 왜냐면 뒤의 것들은 일단 포스터도 너무 구리다.

 포스터를 보라.

 

  얘들이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 앤 로빈인데, 유치찬란한 포스터가 마치 개봉예정인 <환타스틱>이나 <엑스맨>을 연상시킨다. <엑스맨>의 팬들에게는 죄송. 하지만 일단 내 취향은 아니오. 마치 파워레인저를 떠올리는 이 정의의 사도들.

 두 포스터가 비슷하다. 둘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작품.

 

 

영화를 보지도 않고 영화를 비방하기는 그렇지만, 배트맨을 보고 난 뒤 두 작품까지도 모두 섭렵한 팬들에 의하면 뒤의 두 작품이 영 아니올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포에버 작품은 발 킬머가 배트맨으로, 로빈 작품은 조지 클루니가 배트맨으로 등장하는데, 조지 클루니는 아무리 봐도 배트맨 이미지가 아닌데 왜 캐스팅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연기는 안봤으니 모른다 치고 외모가 배트맨 이미지가 아니다.


 <배트맨1 >에서는 조커가 악당으로, <배트맨2>에서는 펭귄맨이 악당으로 나온다. 팀 버튼 감독은 배트맨에게 대단한 사명감을 주었고, 위대한 일을 해내는 영웅의 이미지를 잘 그려냈다. 뭔가 있어보이고 실제로 또 뭔가 있는 우리의 영웅 배트맨~

 펭귄맨과 조커도 참 매력적인 악당이었다. 더불어 나왔던 캣우먼도 귀엽고 깜찍한 맛이. ^^

  

네 편의 배트맨 시리즈에 이어서 뭐가 더 나올게 있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꽤 흐른 뒤 우리의 배트맨이 다시돌아왔다. 무슨 우뢰매냐? 시리즈를 자꾸 욹어먹게 되면 재미가 떨어진다. 무엇이든 첫 작품이 제일이다. <여고괴담>은 제외. 개봉예정작인 <여고괴담 4> 맞나? 그것두 기대된다.

5탄이라고 할 수 있는 <배트맨 비긴스>는 사실 5탄은 아니다. 시간순으로 따지자면 이게 제일 먼저. <스타워즈>가 그랬던거 처럼.

 이번 배트맨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 이라는 감독이 지휘를 맡았다.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렇게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말해보면 누구나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것.



 요 사람. 크리스토퍼 놀란. 잘생겼다. 그놈. 나이도 많지 않다. 1970년 생이라구 하는데, 쩝 왜 내가 더 들어보이냐. 이 사람 옛날 사진인가? 머리스타일도 멋있고, 눈코입 다 잘 생겼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인썸니아> 와 <메멘토>를 만든 사람이다. <메멘토>를 보면서 어찌나 지루하고 머리 아팠던지. 하지만 잘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번만 보고는 어지러워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영화라고 했다.

아니 이런 어렵고 어두운 영화만 만든 감독이 왜 갑자기 배트맨과 같은 영웅영화, 블록버스터에 손을 댄걸까.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이 사람 영화 잘 만들었다. <배트맨 비긴스> 한 마디로 말하면 재밌었다. 대만족. 원래 기대하지 않았는데 영화를 보고선 맛있는 밥 잘 먹은 것처럼 배가 불렀다.

<배트맨1>의 줄거리가 시작되기전, 그리니까 배트맨이 조커를 만나기전까지의 배트맨으로 성장한 이야기를 그려냈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재밌고, 배트맨이 귀엽다. 이전까지 배트맨의 이미지는 완벽한 절대자였지만, 여기서 배트맨은 절대자, 영웅 이라는 단어와는 동떨어져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다. 다만 좀 돈 많고, 싸움 좀 하는.

 거대한 성(?)과 같은 저택을 지닌 고담시의 최고부자의 아들인 배트맨. 그는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중간에 부모님과 나왔다가 부모님의 피살장면을 두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마음씨좋고 항상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돈을 투자했던 부모님. 그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분노에 사로잡혀 다 커서까지도 10여년간 감방에서 지낸 범인을 죽이려고 권총을 들고 청문회에 참석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피살당했다. 
 

 그는 고담시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지만 그곳에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몇 놈 더 패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회의감에 들어있던 찰나. 웬놈이 등장해 히말라야로 오란다. 푸른 꽃을 들고. 그는 석방 뒤 이 엉뚱한 작자의 말마따나 눈으로 가득 덮힌 빙산을 올라간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웬 중국식 성이 하나있다. 그곳에서 만난 작자들. 이들을 누구라고 칭하던 대단한 이들임에는 틀림없다. 테러리스트? 세상을 구할 영웅? 어쨌든 이들에게 수련을 받게 되고, 가르침을 받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이들을 배신한다. 그걸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라스 알굴이라는 노인네가 짱으로 있는 이들 집단의 정의의 원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죄를 진 한 농부를 앞에 무릎 꿇려놓고 이자의 목을 베는 것으로 우리네 집단에 소속된 것임을 증명하라는 라스 알굴의 명령을 거부한 브루스 웨인. 그가 생각하는 정의는 이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농부의 목을 베지 않는 대신 죽인 자들은 라스 알굴의 제자들이다. 폭약에 불을 붙임으로써 브루스 웨인은 그들을 모두 제거했다. 단 한명만 빼고는. 그가 바로 나중에 다시 나타나 배트맨을 방해하는 듀커드.

 그렇다면 웨인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죄를 지은 농부의 목을 베지 않으면서 자신을 구해준 이들 집단을 집단살상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난 웨인이 이들을 배신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의 정의관도 아니지만 당신의 정의관도 아닌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피했던 것일까? 그들을 죽이거나 농부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했는가? 그렇다면 나는 농부를 살리고 그들을 죽이려 했던 것인가? 그러나 농부가 살아났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폭약이 터져 모두 죽었으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죄를 진 농부를 죽이는 것은 무엇이 잘못이길래 그는 모두를 죽이면서까지 거부해야했던걸까?

 그렇다고 내가 죄진 농부를 죽였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농부는 잘못을 했고,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에게 '죽음'이라는 벌은 가당치 않은 죄였고, 웨인은 아마도 이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따라서 나의 정의관과 맞지 않는 정의관을 가진 그들에게 동조할 수 없었고, 일원이 될 수 없었던 것.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길은 오직 이들을 죽이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고담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과 웨인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악으로부터 고담시를 구해야한다는.

 역시 영화는 예상대로 배트맨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그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듀커드도 그에 의해 철로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갱두목 팔코니도 잡혔다. 그리고 환각제를 사용하며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크레인에게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 강력하진 않지만 다양한 악당들이 등장했고, 우리의 배트맨은 깔끔하게 이들을 헤치웠다. 배트맨의 모습을 찾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 인간적이고 실수투성이이고 된통 당하는 배트맨. 그는 너무도 귀여웠다. ^^ 배트맨 역으로 새로 기용된 크리스찬 베일은 이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도 이름은 생소하지만 출연한 영화를 말하면 꽤나 두드러진 인물이다. <이퀼리브리엄> <코렐리의 만돌린><벨벳 골드마인>등등.

* 더불어 초반의 브루스 웨인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두려움을 제거하도록 만들어준 사실상의 배트맨의 스승, 듀커드를 연기한 리암니슨도 볼만했다. <킹덤 오브 헤븐>의 고프리, <킨제이 보고서>의 알프레드 킨지, <러브 액츄얼리>의 대니얼,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 <더 헌팅> <스타워즈><쉰들러 리스트>라는 작품 리스트가 그를 증명해주고 있다. 특히나 이번 <배트맨 비긴스>에서는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풍겼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 범접할 수 없는 무겁고 중후한 분위기.

 * 여배우의 이름은 모르겠다. 브루스 웨인의 어릴적 친구로 나오는 여 검사보.  이 배우 참 이쁘다. 얼굴이 꼭 안젤리나 졸리 닮았다. 이뽀이뽀. 근데 이름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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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7-12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트 홈즈. 톰크루즈 피앙세로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근데, 너무 띨빵하게 나오지 않나요? 대충 제 주변의 평인데. -_-a 근데, 리뷰를 너무 잘쓰셨네요. 전 그 알프레드 집사가 좋아요 >.< 메멘토도 디따 재밌게 봐서, 놀란감독의 영화 잔뜩 기대했었는데 말이죠. 역시 고담시티는 팀버튼이 만든 것이 가장 으실으실해요. 흐흐


마늘빵 2005-07-12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네 팀 버튼게 가장 으실으실하죠. 요번거는 그냥 귀여운 배트맨 보는 재미로. ^^
저도 알프레드 집사 좋아요. 묵묵히 도와주는... 케이트 홈즈였군요. 톰크루즈 좋겠다. 전 케이티 홈즈도 좋던데요. ^^; 귀여워요.
 

 최근 개봉 영화 중 예매율 80%를 넘기며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영화 <우주전쟁>. 도대체 무엇이 이 영화를 보기도 전에 관객들을 이끌어 내는가? 글쎄다. 딱히 내세울 거라고는 예고편의 화려함, 감독이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믿을 만한 감독이라는 점, 그리고 출연하는 영화마다 곧잘 흥행했고 괜찮은 영화라는 평을 받았던 배우 탐 크루즈. 이 정도? 이 영화가 상영전에 이처럼 많은 관객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굳이 찾자면 이 정도 밖에 더 무엇을 찾기가 어려울 성 싶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래 화려하다. 인정한다. 지금껏 다른 재난영화(?), SF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수기술들이 꽤 등장하긴 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간혹 놀래키는 장면들도 좋았다. 하지만 허무한 결말을 어찌할 것인가. 아 이게 머냐. 실컷 기분 업 시켜놓고는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우주전쟁. 에이 시시해. 별다른 공격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죽어버렸다.

 스토리는 철저히 원작 소설에 기반하고 있다니 아무리 이름 높은 감독이라 할지라도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를 만드는데 스토리까지 고쳐낼 수는 없었겠지만 삐까뻔쩍한 영화 광고에 비해 너무 허무하다는 느낌. SF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영화의 원작소설이 대단한 작품으로 인정되는 모양인데 나야 뭐 알 수 있나. 어떤 이들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봐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난 사실 많이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다. 함께 본 중학교 아이들과 선생님들도 모두 "에이 이게 머야?"라는 야유를 보냈으니.



얘가 원작 소설의 표지라고 합니다.

 사실 우주 전쟁이라고 해서 꽤나 치열한 전투를 치를 줄 알았는데 - 그렇다고 내가 전쟁광이란 야기는 아니다. 난 피튀기는거 별로 안좋아한다 - 전쟁이라고 할 만한 거시기도 없이 걍 끝나버렸다. 일방적으로 당하다가 일방적으로 알아서 죽어버렸으니. 지들이 알아서 다운되어 버린 그 이유는 여기서 밝혀버리면 아직 보지 않은 분들에게 실례가 될 듯 하고.

 사족
 탐크루즈는 키가 매우 작다. 우리나라에 와도 그는 작은 키다. 미국에서는 어떠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의 유명배우로 거듭났다. 나이가 40을 넘긴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먹힌다. 그는 잘생겼다. 그러나 잘생긴것 이외에도 그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겉으로 심히 풍기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은은하게 밑에서 올라오는 방구냄새마냥 그의 분위기는 살금살금 느낌으로 전해온다. 난 탐 크루즈라는 배우가 좋다. <우주전쟁>에서는 오히려 그만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그의 향기를 느꼈던 최근의 영화는 바로 <콜레트럴>이다. 별로 흥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풍겨내는 냉정한 살인청부업자의 내음은 그가 아니면 안될 만큼 차갑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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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7-09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어느분은 재미없다고 하시던데요...

마늘빵 2005-07-0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저도 실망이라고 위에 썼는데... ㅡㅡa

라주미힌 2005-07-1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보니 원작이 기억이 나네요. 어렸을 때 무지 재미있었던 소설로 기억하는데... 맞나...

부리 2005-07-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여울효주님 리뷰 읽고 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님 리뷰를 보니까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마늘빵 2005-07-1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봐도 괜찮을 거에요. 그냥 여러가지 영화적 효과 같은것은. 시나리오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
 
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구판절판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가던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에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그는 그 몫으로 정조를 사고,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칼을 품고 광장으로 나옵니다.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으니깐요. 그렇게 해서 빼앗기고 피 흘린 스산한 광장에 검은 해가 떴다가는 핏빛으로 물들어 빌딩 너머로 떨어져갑니다.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55쪽

"속에서 탈 대로 타고 난 무서움의 잿더미에 미움의 찬비가 소리없이 내리면서,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시며, 명준의 온몸에 스며간다."-67쪽

"철학은 한가에서 온다고, 무엇에서 비롯했건 교육받은 숱한 사람들에게, 생각한다는 버릇이 붙어버렸다는 일은 물리지 못한다. 아가미처럼 이루어진, 이 '생각'이라는 가닥을 떼어버리면, 그들은 죽는다. 아가미를 떼지 않고 매듭을 푸는 길만이, 사실에 맞는 처방이다."-78쪽

"어떤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생각은, 이긴 사람의 느낌이다. 과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만큼이나 해칠 수 있을까. 남의 앞길을 끝판으로 망쳐놓았다는 생각이 죄악감이라면, 그는 하느님의 자리를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사람은 사람의 팔자를 망치지 못한다. 다만 자기의 앞길을 망칠 뿐이다."-91쪽

"제가 뭔데요? 분명히 그녀와 나란히 서 있다고 생각한 광장에서, 어느덧 그는 외톨박이였다. 발끝에 닿은 그림자는 더욱 초라했다. 그녀의 저항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이면 그녀의 허벅다리는 그의 허리를 죄며 떨었으니깐. 그의 말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골짜기에 그녀는 뿌리를 가진 듯 했다. 한번 명준의 밝은 말의 햇빛 밑에서 빛나는 웃음을 지었는가 하면 벌써 손댈 수 없는 그녀의 밀실롤 도망치고 마는 것이었다."-110쪽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 북조선 사회에 무겁게 덮힌 공기는 바로 이 터부의 구름이 시키는 노릇이었다. 인민이 주인이라고 멍에를 씌우고, 주인이 제 일하는 데 몸을 아끼느냐고 채찍질하면, 팔자가 기박하다 못해 주인까지 돼버린 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걸음을 떼어놓는다."-123쪽

"빌자, 덮어놓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의 생각은 옳았다. 모임은 거기서 10분 안에 끝났다. 명준은 사무친 낯빛을 하고, 장황한 인용을 해가며, 허물을 씻고 당과 정부가 바라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지친 안도감과 승리의 빛으로 바뀌어가는 네 사람 선배 당원의 낯빛이 나타내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명준은, 어떤 그럴 수 없이 값진 '요령'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127쪽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사람 중의 이름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체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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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인훈의 <광장>.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접한 것은 만 26년 - 나도 이제 나이 먹는다. 만으로 계산할걱다 - 내 인생의 처음이었다는 것이 부끄럽다. 사실 이 책은 중학교 국어시간에도 우리나라의 근대소설사를 배우면서 얼핏 흘려 지나가는 책이고, 아마도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광장>의 내용을 공식적으로 처음 접하는 것은 고등학교 시기일 것이다. 수능지문에도 자주 나오는 그 부분. 이 소설의 말미에 있다. 어디를 택할 것인가 질문을 받는 이명준은 끝끝내 '중립국'이라고 단호하게 읊는다.

 왜 이런 소설을 이제서야 봤단 말인가.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부끄럽게도 이제서야 이 소설을 접했구나. 나의 관심사는 내내 바다 건너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에게 가 있었고 -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 대해 아냐? 그건 아니다. 쥐뿔 모른다 - 우리네 그들에게는 시선이 머물지 못했다. 최인훈의 <광장>을 읽으면서 나는 황석영을 떠올렸고, 김훈을 떠올렸고, 탁석산을 떠올렸다.

 먼저 황석영과 김훈을 떠올린 것에 대해 말해보자면, 사실 황석영을 읽으면서 최인훈을 떠올리는 것이 순서상 옳을 것이나 나의 경험에 의존하면, 황석영을 접한 뒤에 최인훈을 접했기 때문에 시간순으로 최인훈이 먼저라고 할지라도, 내가 최인훈을 통해 황석영을 떠올린 것은 정당하다. 최인훈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길다. 문장은 짧되, 내용은 길다. 그러나 그 내용의 긺이 장황하지 않고 문장과 같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도는 매우 자연스럽다. 애써 수식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흔적은 전혀 없고, 그야말로 붓 가는대로 쓴 것 같다는 인상이다. 이전에 나는 이런 느낌을 황석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다. 그리고 김훈을 통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다음으로 내가 소장 철학자 탁석산을 떠올린 것은, 그가 처음 내놓은 책 <한국의 정체성>에서 그가 각 장에서 최인훈의 <회색인>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최인훈은 그저 내게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있는 시험을 위한 소설가 정도로만 인식되어있었고, 나는 탁석산을 통해 최인훈에 한발 다가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탁석산으로 인해 최인훈에 관심을 갖었고, <회색인>을 읽었으며, 지금에 와서 <광장>을 접한 것이다.

 황석영과 김훈을 떠올린 점이나, 탁석산을 떠올린 점이나, <광장>을 읽은 다른 독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나만의 특수한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을 떠올리건, 누구를 떠올리건 간에 그것은 독자마다 다 다르고, 그 다름에는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정답은 모두 다 이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이 책 <광장/구운몽>은 최인훈의 '광장' 과 '구운몽' 두 가지 소설을 한 책에서 다루고 있고, 나는 먼저 광장을 읽었다. 하지만 감상문을 쓰는데 있어서 <광장>과 <구운몽>을 붙여놓을 수는 없는지라 일단 <광장>에 대한 나의 독서후기를 작성한다.

**

  캘커타로 향하는 배안에 이명준이란 사내가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포로석방으로 풀려놨고, 중립국을 택했고, 이 배를 타고 중립국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의 원대로.

  북으로 도망간 아버지 때문에 경찰서에서 취조받고 고문당하고 매맞던 시절이 있었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의 고문관으로 남한에 내려와 은인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태식이를 똑같이 대했던 적이 있었다.  남한에서 윤애란 여자를 사랑했고, 북한에서 은혜란 여자를 사랑했다. 윤애는 태식이의 아내가 되었고, 은혜는 소련에 발레리나로 행사참여했다가 전쟁 이후 낙동강 유역에 간호사로 자원근무왔다 전사했다. 이명준은 포로가 되었고, 풀려놨으며, 북한과 남한의 설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국"을 외쳤다. 중립국.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 어느 것이 시대순으로 먼저인지는 난 모른다. 하지만 <광장>과 <회색인>은 분명 같은 선상에 있다. 어느 한쪽으로 나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하는 회색인과 역시 어느 한쪽을 택하지 못하고 중간지대에 위치한 중립국을 주장하는 이명준의 그것은 서로 맞닿아있다. 그것은 또한 최인훈의 그것이기도 하다.

 최인훈의 <광장>에는 여러 광장이 나온다. 경제적 광장, 정치적 광장, 문화적 광장. 그는 자기 자신이 나팔수가 되어 '밀실'에 갇혀있는 군중들을 광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나팔수가 될 수 없다. 희망을 꿈꾸고, 이상을 꿈꾸지만, 그 자신이 밀실에 갇혀 광장으로 나오지 못하는 위인이기 때문이다. 행동의 부재?

이명준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그가 원하는 광장을 찾지 못한다. 광장을 찾지 못했으니 자신이 도달할 광장이 없으며, 군중들을 밀실에서 끌어낼 광장 또한 없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만의 광장으로 찾아 들어갔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윤애와 은혜를 만났다. 이명준은 잃어버린 광장 대신에 나만의 광장, 즉 밀실 속에서 자신의 여자와 함께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도피처를 찾았다. 밖에서 지고 안으로 들어와 쉴 곳을 찾았다. 밀실 속으로, 끝없이 안으로 안으로 들어와 그는 숨어버렸다. 그런 그가 어떻게 군중을 광장으로 이끄는 나팔수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남한과 북한 양쪽 모두를 비판한다. 자유가 있지만, 열정이 없는 남한. 열정이 있지만 자유가 없는 북한. 그 어느 쪽도 내가 몸 담을 곳은 아니다.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그는 끊임없이 중립국을 희망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원했던 것 또한 중립국은 아니었나보다.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마지막 도피를 시도한다.

 **

 한글임이 분명하지만 내게는 생소한 한국어 낱말들이 몇몇 등장하고, 그 생소함에 쾌락을 맛보기도 하며, 섬세하고 기가막힌 비유와 묘사에 감탄하기도 하며, 단걸음에 이 책을 다 읽어버렸다. 이 같은 소설이 또 있을까 싶게 정말이지 대단한 작품을 만났다. 두고두고 음미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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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7-09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이 책을 사볼 생각이 팍팍 드는군요! 사게되면 땡스투 누를께요. ^^

마늘빵 2005-07-09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옙!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 최근 나의 독서습관을 사로잡고 있는 이 사람.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하는 말들> 에 이어 접하게 된 보통씨의 세번째 이야기. 본래 이 책은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2002년에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별로 팔리지 않았나보다. 왜일까. 일단 제목이 좀 거시기 하네. 누군지 모르는 드 보통의 이름이 걸려있고 이것이 수식하는 단어가 '삶의 철학산책' 이 딱딱한 제목에 누가 현혹되겠으며 어느 누구의 눈길을 끌 수 있겠는가? 좋은 책이다만 일단 독자의 눈길을 끌어야 팔리고 읽힐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번에 새로 편집되어 출간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야 좀 팔리지 않는가. 좀 팔리는 정도가 아니지. 이 정도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이 책을 학교를 오가는 길에 들고 다니며 간간히 읽었는데, 학교에 도착해 책상위에 올려놓으면 옆에 있던 선생님이 그러신다.

"선생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슬픔이죠. 이건 다른 책이에요."

이 선생님과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진 사람이 몇 있다. 모두들 한결같이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 - 젊은 베르테르는 슬프다라는 - 과는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기에 놀란 눈을 하고 자신의 기억과 지식을 의심하며 내게 확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한 의문은 누구에게나 신선하다.

 나는 사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지 않았다. 이 책의 제목때문에 관심이 가기는 하다만 언제쯤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올지는 모르겠다. 단지 괴테와 그의 친구의 경험담이 묻어있는 슬픈 사랑이야기라는 정도 밖에는 모른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라는 몽테뉴의 문구로 시작하는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라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6가지 위안을 주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를 통해서는 그가 아테네에서 외톨이- 심하게 말하면 왕따 - 였음을 일러주며 인기 없어도 괜찮다 라고 위안을 주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런 놈도 있었다 라고 위안을 주고, 세네카의 좌절의 철학, 체념의 철학을 전파해주며 좌절의 위안을, 세네카와 비슷한 의미에서 몽테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또다른 위안을, 쇼펜하우어의 사랑이야기과 삶의 이야기를 통해 상심한 마음에 위안을, 니체의 삶을 통해 곤경에 대한 위안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정말 이 책을 다 보고 나면 그런 위안을 받을 수 있는거야? 라고 순진한 질문을 누군가 던진다면 꼭 그렇진 않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꼭 그런진 않아 라는 말 속에 담긴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사실 이 책을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장담은 절대로 절대로 못한다. 여기에 담긴 각종 위안들이 모두 독자에게 먹힌다면 독자는 어쩜 비극적 현실에 처해있는 자신의 상황을 자기합리화 시키며 현실에 안주하려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여기에 나온 위안들이 독자에게 먹히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각각의 철학자들의 삶의 이야기와 그들이 한 말들 하나하나 되새기며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반추해보는 정도의 효과를 얻었다면 보통씨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한 것은 아닌가 싶다. 철학에세이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을 대상으로 사유하게 하는데 있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에세이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 철학입문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철학에 이제 막 들어선 이들, 관심갖기 시작한 이들이, 딱딱하고 재미없고 지루하고 어려운 철학책을 접하기에 앞서 철학자들의 삶을 먼저 접하게 된다면 흥미를 유발 할 수 있지 않을까.  보통씨가 안내해주는대로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각각의 철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와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족이지만, 나는 이 책에 담겨있는 몇몇 철학자들의 말 중에서 이 대목이 참 마음에 와닿았고 뜨끔했다.

 "몽테뉴는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학자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적욕구를 갈구하는 이들 중 한 사람인데, 특히나 남들이 잘 읽지 않는 인문사회과학 서적 혹은 고전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흔히 어렵다고 알려져 있는 분야. 솔직히 나는 타인에게 내가 지적인 존재로 비춰졌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름대로 지적으로 보이려고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갖고 독서를 하는 것이다. 몽테뉴의 위와 같은 문구는 나를 뜨.끔. 하게 만들었다. 전혀 지적이지 않은 내가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지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나의 허영심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의 그러한 허영심이 어느 정도 타인에게 먹혀 들어갔단 말씀. 지금 고백하지만 난 전혀 지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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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5-07-07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명성이 자자해 서점에서 첫장만 들춰 읽어봤는데, 꽤 괜찮더라구요...보관함에 넣기는 했는데 언제쯤이나 ^^;;

하이드 2005-07-0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요. 사세요 사세요~ ^^
키스 앤 텔은 그나마 읽어본 중 별로였던 것 같아요.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의 연장선이긴 한데, 그나물에 그 밥이란 느낌이더라구요.

마늘빵 2005-07-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드리머님 / 알라딘에 보통씨 팬들이 꽤 많더라구요. 저도 알라딘 마을에서 소개받고 합류했습니다. ^^

하이드님 / 저 님 추천으로 보통씨 책 전부 다 샀어요. 지금 집에 모셔두고 있답니다. ^^ 이제 또 다른 작품을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