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인훈의 <광장>.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접한 것은 만 26년 - 나도 이제 나이 먹는다. 만으로 계산할걱다 - 내 인생의 처음이었다는 것이 부끄럽다. 사실 이 책은 중학교 국어시간에도 우리나라의 근대소설사를 배우면서 얼핏 흘려 지나가는 책이고, 아마도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광장>의 내용을 공식적으로 처음 접하는 것은 고등학교 시기일 것이다. 수능지문에도 자주 나오는 그 부분. 이 소설의 말미에 있다. 어디를 택할 것인가 질문을 받는 이명준은 끝끝내 '중립국'이라고 단호하게 읊는다.

 왜 이런 소설을 이제서야 봤단 말인가.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부끄럽게도 이제서야 이 소설을 접했구나. 나의 관심사는 내내 바다 건너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에게 가 있었고 -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 대해 아냐? 그건 아니다. 쥐뿔 모른다 - 우리네 그들에게는 시선이 머물지 못했다. 최인훈의 <광장>을 읽으면서 나는 황석영을 떠올렸고, 김훈을 떠올렸고, 탁석산을 떠올렸다.

 먼저 황석영과 김훈을 떠올린 것에 대해 말해보자면, 사실 황석영을 읽으면서 최인훈을 떠올리는 것이 순서상 옳을 것이나 나의 경험에 의존하면, 황석영을 접한 뒤에 최인훈을 접했기 때문에 시간순으로 최인훈이 먼저라고 할지라도, 내가 최인훈을 통해 황석영을 떠올린 것은 정당하다. 최인훈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길다. 문장은 짧되, 내용은 길다. 그러나 그 내용의 긺이 장황하지 않고 문장과 같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도는 매우 자연스럽다. 애써 수식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흔적은 전혀 없고, 그야말로 붓 가는대로 쓴 것 같다는 인상이다. 이전에 나는 이런 느낌을 황석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다. 그리고 김훈을 통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다음으로 내가 소장 철학자 탁석산을 떠올린 것은, 그가 처음 내놓은 책 <한국의 정체성>에서 그가 각 장에서 최인훈의 <회색인>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최인훈은 그저 내게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있는 시험을 위한 소설가 정도로만 인식되어있었고, 나는 탁석산을 통해 최인훈에 한발 다가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탁석산으로 인해 최인훈에 관심을 갖었고, <회색인>을 읽었으며, 지금에 와서 <광장>을 접한 것이다.

 황석영과 김훈을 떠올린 점이나, 탁석산을 떠올린 점이나, <광장>을 읽은 다른 독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나만의 특수한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을 떠올리건, 누구를 떠올리건 간에 그것은 독자마다 다 다르고, 그 다름에는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정답은 모두 다 이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이 책 <광장/구운몽>은 최인훈의 '광장' 과 '구운몽' 두 가지 소설을 한 책에서 다루고 있고, 나는 먼저 광장을 읽었다. 하지만 감상문을 쓰는데 있어서 <광장>과 <구운몽>을 붙여놓을 수는 없는지라 일단 <광장>에 대한 나의 독서후기를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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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커타로 향하는 배안에 이명준이란 사내가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포로석방으로 풀려놨고, 중립국을 택했고, 이 배를 타고 중립국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의 원대로.

  북으로 도망간 아버지 때문에 경찰서에서 취조받고 고문당하고 매맞던 시절이 있었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의 고문관으로 남한에 내려와 은인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태식이를 똑같이 대했던 적이 있었다.  남한에서 윤애란 여자를 사랑했고, 북한에서 은혜란 여자를 사랑했다. 윤애는 태식이의 아내가 되었고, 은혜는 소련에 발레리나로 행사참여했다가 전쟁 이후 낙동강 유역에 간호사로 자원근무왔다 전사했다. 이명준은 포로가 되었고, 풀려놨으며, 북한과 남한의 설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국"을 외쳤다. 중립국.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 어느 것이 시대순으로 먼저인지는 난 모른다. 하지만 <광장>과 <회색인>은 분명 같은 선상에 있다. 어느 한쪽으로 나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하는 회색인과 역시 어느 한쪽을 택하지 못하고 중간지대에 위치한 중립국을 주장하는 이명준의 그것은 서로 맞닿아있다. 그것은 또한 최인훈의 그것이기도 하다.

 최인훈의 <광장>에는 여러 광장이 나온다. 경제적 광장, 정치적 광장, 문화적 광장. 그는 자기 자신이 나팔수가 되어 '밀실'에 갇혀있는 군중들을 광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나팔수가 될 수 없다. 희망을 꿈꾸고, 이상을 꿈꾸지만, 그 자신이 밀실에 갇혀 광장으로 나오지 못하는 위인이기 때문이다. 행동의 부재?

이명준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그가 원하는 광장을 찾지 못한다. 광장을 찾지 못했으니 자신이 도달할 광장이 없으며, 군중들을 밀실에서 끌어낼 광장 또한 없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만의 광장으로 찾아 들어갔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윤애와 은혜를 만났다. 이명준은 잃어버린 광장 대신에 나만의 광장, 즉 밀실 속에서 자신의 여자와 함께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도피처를 찾았다. 밖에서 지고 안으로 들어와 쉴 곳을 찾았다. 밀실 속으로, 끝없이 안으로 안으로 들어와 그는 숨어버렸다. 그런 그가 어떻게 군중을 광장으로 이끄는 나팔수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남한과 북한 양쪽 모두를 비판한다. 자유가 있지만, 열정이 없는 남한. 열정이 있지만 자유가 없는 북한. 그 어느 쪽도 내가 몸 담을 곳은 아니다.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그는 끊임없이 중립국을 희망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원했던 것 또한 중립국은 아니었나보다.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마지막 도피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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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임이 분명하지만 내게는 생소한 한국어 낱말들이 몇몇 등장하고, 그 생소함에 쾌락을 맛보기도 하며, 섬세하고 기가막힌 비유와 묘사에 감탄하기도 하며, 단걸음에 이 책을 다 읽어버렸다. 이 같은 소설이 또 있을까 싶게 정말이지 대단한 작품을 만났다. 두고두고 음미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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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7-09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이 책을 사볼 생각이 팍팍 드는군요! 사게되면 땡스투 누를께요. ^^

마늘빵 2005-07-09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옙!